아파치 요새 Fort Apache 존 포드, 1948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5-05-29조회 17,572
아파치 요새 Fort Apache (1948)

자신의 제작사(Argosy)에서 만든 가장 개인적인 프로젝트 중의 하나였던 <도망자>(1947)의 흥행 실패로 큰 빚을 떠안게 되자(12회 참조), 존 포드는 서부극으로 돌아와 <아파치 요새 Fort Apache>(1948)를 만든다. 포드는 자신의 전후 서부극을 돈벌이용(potboiler)이라고 스스로 폄하했지만, 그중에서 <황색 리본의 여인 She Wore a Yellow Ribbon>(1949)에 대해선 종종 자부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파치 요새>에 대한 자평은 엇갈린다. “돈벌이 목적에는 잘 맞았지. 하지만 날조된 이야기야.”(1950년, 린지 앤더슨과의 인터뷰).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야. 거기엔 액션도 있고 유머도 있고, 내 인디언 형제들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첫 작품이지.”(1965년, 에릭 르게브와의 인터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존 포드의 변덕스럽고 짓궂은 자평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후자의 발언에서 ‘내 인디언 형제들’, 그리고 그들이 ‘영웅으로 등장한다’는 말은 흥미롭게 들린다. 이 말은 <아파치 요새>의 어떤 면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아파치 요새>를 오래전에 보고 개인적으로 받은 첫 충격은 이 영화가 포드 자신의 <수색자>(1956)를 포함한 후대의 소위 수정주의 서부극들보다 더 수정주의적이며, 서부극의 만사(輓詞)로 알려진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보다 더 급진적인 탈신화와 서사를 이미 1948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반복건대, 서부극의 진화론 그리고 수정주의 서부극이라는 개념은 이런 영화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다. 물론 포드의 말이 흥미로운 건 그 때문만은 아니다.

줄거리는 이렇다. 오웬 써스데이 중령(헨리 폰다)은 아파치 요새 신임 부대장에 임명된다. 딸 필라델피아(셜리 템플)와 함께 요새에 도착한 이 성마른 인물은 외딴 서부로 밀려난 것에 대한 불만과 승진 및 동부 귀환에 대한 야심을 감추지 않는다. 요새에는 백전노장 요크 대위(존 웨인), 써스데이의 육사 동기생 콜링우드 대위, 그리고 이들과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특무 상사 오로키(워드 본드)를 비롯한 노련한 하사관들이 있다. 마침 아파치 족이 보호구역을 넘어 멕시코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요크 대위는 평화적으로 그들을 복귀시키려 하지만, 써스데이는 보호구역 탈출을 핑계 삼아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써스데이와 그의 부대는 몰살당한다.

<젊은 날의 링컨>(1939) <분노의 포도>(1940) <황야의 결투>(1946) <도망자>(1946)을 보고 헨리 폰다라는 배우에게 매혹된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당혹스러울 수 있다. 허공을 휘젓는듯한 긴 팔과 다리, 느린 걸음으로 등장해 어느 순간 프레임을 우아하게 장악하던 이 배우의 아름다운 움직임을 여기선 전혀 볼 수 없다. 존 포드는 헨리 폰다의 특별한 자질을 <아파치 요새>에선 정반대의 방식으로 사용했다. 전작들에서 헨리 폰다는 망설이듯 프레임에 진입한다. 그는 어떤 프레임에서도 앤의 묘비 앞에서 중얼거리던 젊은 링컨의 자문, 혹은 폐허가 된 자신의 성당을 다시 찾은 떠돌이 신부의 자문을 멈추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기에 내 의지로 온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이끈 것일까?’ 의지와 운명의 영원한 내적 교전. 그의 낮은 음성과 느린 동작에는 혹독한 교전의 흔적이 새겨져 있어 침묵조차 치열했다.

<아파치 요새>의 써스데이 중령은 전적으로 의지의 인간이다. 자신의 권위와 지위 외엔 어떤 것에도 무관심한 이 과도하게 각 잡힌 군인은 포드 영화에선 보기 드문 범속한 속인이다. 그는 아무래도 포드의 영화 세상에 잘못 찾아온 손님 같다. 누구도(물론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군사령부를 제외하고)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 그는 단호한 걸음으로 진입해 엄격한 말투로 프레임 내부의 모두에게 명령한다. 그의 등장은 프레임을 불편하게 만든다. 대화는 침묵에 빠지고 술자리는 어색해지며 무도회는 중단되고 저녁 식탁은 엉망이 된다. 그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곳에 체념의 몸짓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오던 헨리 폰다는 이제 그를 전혀 원치 않는 곳에 난입해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존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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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중요한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존 포드는 그렇게 보이도록 찍었다. 두 시간여의 러닝타임 중 반 이상은 요새 내부의 일상을 담고 있다. 4년 만에 돌아온 아들을 맞는 가족, 평화로운 저녁 식사, 젊은 남녀의 로맨스, 무도회, 신병훈련... 요약된 줄거리에는 결코 포함되지 않을 사소한 사건과 표정이 곳곳에 흘러넘친다. <아파치 요새>는 미군과 아파치의 충돌을 그린 서부극이라기보다 아파치 요새라는 공동체의 풍속도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헨리 폰다의 경직된 몸짓과 강압적 말투는 이 풍속도의 오점으로 드러난다.

써스데이 중령의 죄는 무엇인가. 협상이 필요한 상황에서 전쟁을 벌여 자신과 자신의 병사들을 몰살시킨 것이다. 그에겐 그만큼 중대한 죄가 또 있다. 공동체를 부인한 것이다. 아파치 요새라는 공동체가 지닌 고유한 규칙과 지혜, 생기와 소란의 활동을 부정하고 억압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군지휘관으로서의 전술적 오류와 공동체 수장으로서의 인간적 결함 사이엔 논리적 연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파치 요새>에서 그 오류와 결함은 한몸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자는 다른 공동체의 능력과 아름다움도 볼 수 없다.

써스데이는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다. 이곳은 존 포드의 세상, 그러니까 소란과 도취, 왈츠와 세레나데의 난장이다. 결국 세속의 질서가 개입해 중단되지만, 어쩌면 중단의 운명으로 인해 덧없는 난장의 순간이 더욱 반짝이는 공동체다. 써스데이가 요새 공동체를 부인했을 때, 아파치 공동체를 오인한 전술가로서의 실패도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이건 너무 작위적인 설정이 아닌가, 라고 묻는다면 역시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포드가 이 영화를 ‘날조된 이야기’라고 말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리틀 빅혼 전투’ 혹은 ‘커스터의 옥쇄(Custer’s Last Stand)’라고 불리는 실제 사건(1876년 6월, 커스터 장군이 이끌던 제7기병대가 인디언 수족에게 패배해 미군 268명이 몰살당한 전투)을 소재로 삼긴 했지만, 존 포드는 인명과 지명을 전부 바꾸면서 실제 사건과는 사실상 절연했다. 이것이 ‘날조’가 뜻하는 바다.

포드의 관심사는 실제 전투라는 사건이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 다수의 비서부극도 포함해 포드 서부극의 숨은 주제는 공동체의 몰락이다. <아파치 요새>는 영웅이 없는 거의 유일한 포드 서부극이며, 따라서 공동체의 문제가 전경화된다. 요크 대위는 영웅의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그의 자질은 공동체의 몰락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써스데이는 요새 공동체의 오점이며 공동체를 몰락시키는 반영웅이다. 그의 뒤에 국가의 명령이 도사리고 있다. 다른 한편에 아파치 공동체가 있고 그곳엔 탐욕스러운 상인인 미첨이라는 반영웅이 있다. 그의 뒤에도 국가의 위탁이 받쳐주고 있으며 아파치에게 저질 위스키를 팔아 그들을 병들게 한다. 아파치 요새가 주 무대라고 해도 여기엔 두 공동체와 각 공동체를 파열시키는 두 반영웅이 있는 셈이다.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다. <아파치 요새>의 주인공은 두 공동체다. 이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아파치와의 협상을 위해 먼 길을 떠나온 요크 대위가 추장 코치스에게 예의를 갖출 때이다.(#4) 코치스는 요크는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한다. 국가의 명령과 위탁이라는 완장을 두른 써스데이와 미첨은 두 공동체의 존중과 신뢰를 파괴한다. <아파치 요새>는 그렇게 몰락해가는 공동체를 위한 만가이다. “내 인디언 형제들이 영웅으로 등장한다”는 존 포드의 말은 아마도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4

에필로그는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뒤 부대장 요크와 기자들의 대화를 담고 있다. 써스데이의 대형 초상화를 보며 기자가 묻는다. “위대한 분이었겠죠? 위대한 군인이었고요. 아이들한테는 영웅이 됐어요.” 요크가 대답한다. “그래요.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죠. 부대를 승리를 이끌었고요.” 이어지는 대화. “그런데 같이 죽은 사람들은 누구죠? 써스데이는 기억하는 데 다른 사람들은 다 잊혀졌군요.” “잊혀지지 않았어요. 저기 그대로 살아있어요... 얼굴과 이름은 달라져도 그들은 지금이나 50년 뒤에나 여전히 이 요새의 훌륭한 대원들로 남을 거요. 써스데이가 해냈죠.”

이 대목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의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 “전설이 사실이 될 때, 그 전설을 보도합니다”를 고스란히 상기시킨다. 하지만 <아파치 요새> 쪽이 훨씬 신랄하고 비관적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는 이미 사건이 해결되었고, 다만 해결의 영웅이 누구인가가 문제였다. 그러나 <아파치 요새>에서는 국가 권력의 대리자들로 인해 사건 해결이 실패했고 공동체는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그럼에도 지금 이곳은 조작을 통해서라도 영웅의 전설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 영웅적 자질을 갖추고 있으며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서글프게도 지금 그 조작의 조력자 노릇을 하고 있다. 존 포드의 ‘날조’는 정확히 그 조작을 겨냥하며, 그리하여 잊혀진 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한 저녁 식사 장면이다. <아파치 요새>의 단란한 시간들은 모두 써스데이에 의해 중단되지만 이 장면만은 예외다. 콜링우드의 집에 요크, 오로키 상사의 아들이자 신참 소위 마이클, 그리고 마이클과 사랑에 빠진 필라델피아가 모였다. 이때 문밖에서 세레나데가 들려온다. “제네비브, 그대에게 세상을 드리죠....” 영창 신세를 지고 있는 그러나 부대에서 가장 노래를 잘하는 퀸캐넌을 닥터 윌킨스가 빼내 노래를 시키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가 끝나자 닥터는 위스키 한 병을 주머니에 꽂아주며 퀸캐넌을 영창으로 돌려보낸다. 노래와 춤이 없는 존 포드의 영화를 이젠 상상하기 힘들지만, 이 장면은 그 예외성과 넘치는 유머로 인해 유독 깊은 정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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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장면 하나를 빼놓을 수 없다. 오로키 상사의 집에 그의 아들이 마이클이 소위 계급장을 달고 4년 만에 돌아오는 장면이다. 성경을 읽고 있던 오로키 상사가 문을 열고 등장한 아들을 쳐다본다. 그리고 잠시 성경으로 눈을 다시 돌린 뒤 일어나서 아들과 포옹한다. 그리고 잠시 돌아서 눈물을 훔친 뒤에 조용한 목소리로 주방에 있는 아내에게 “여보, 아들이 왔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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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이 왜 그토록 감동적인지에 대해선 잘 설명하진 못하겠다. 다만 오로키가 아들을 보고 바로 일어나지 않고 다시 성경을 보는 그 짧고 단순한 행위에 기쁨과 감사의 어떤 표현보다 깊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건 알겠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가질 수 있는 가장 자애로운 마음이 그렇게 짧은 지체와 작은 동작에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장면을 보기 전까진 상상하기 힘들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태그 갤러거도 이 장면을 <조용한 사나이>에서 존 웨인이 모린 오하라에게 들꽃을 건네주는 장면과 함께 포드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꼽았다.

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선사한 오로키도 콜링우드 부부도 그리고 다정했던 주정뱅이 하사관들은 이제 곧 사라질 것이며 그들의 소란스러운 공동체도 몰락할 것이다. <아파치 요새>는 아름답지만 더없이 스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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