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 워 익스펜더블 vs. 아메리칸 스나이퍼 클린트 이스트우드, 2014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5-03-24조회 11,221
데이 워 익스펜더블 vs. 아메리칸 스나이퍼

지난 회에 <데이 워 익스펜더블>을 쓰고 나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보았다. 한동안 두 영화가 뒤섞이며 머릿속을 맴돌았다. 두 편 모두 걸작이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영화는 외적인 공통점이 많다. 특별한 능력을 갖춘 전문가-군인이 주인공이며, 승리한 전투를 그리면서도 서사는 모종의 패배를 다룬 희귀한 주류 전쟁영화라는 점, 보수파 감독이 만든 애국적 영화로 받아들어 졌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더 깊은 수준의 친연성도 있다. 70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는 공히 영화의 체험이라는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주류영화 중에서 언어화된 서사와 체험된 서사가 이렇게 다른 사례도 드물 것이다. 한 편의 영화는 고유한 감각경험의 집합체다. 그 집합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더 많은 것을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두 영화는 그렇게 하도록 고무한다. 그런 영화가 좋은 영화일 것이다. 그 고무에 힘입어 두 영화에 대해 몇 가지를 생각해보고 싶다.
1.
영화는 설득하면서 유혹한다. 설득의 도구는 주로 서사다. 캐릭터, 구성, 이야기의 힘이 서사라는 도구를 구성한다. 유혹의 도구는 한정되지 않는다. 배우의 얼굴, 그의 음성과 몸짓, 풍경, 신체의 손상과 물체의 파괴, 특정 피사체, 소리와 음악, 테크놀로지, 혹은 스크린이나 영사의 물리적 과정 자체... 스크린에 등장하거나 그것을 둘러싼 시청각적 요소들이 유혹의 도구가 된다. 때로는 창작자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도 종종 유혹의 도구가 된다. 한 편의 영화는 유혹의 복합체, 갖가지 페티시의 집합체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에서 가장 강력한 유혹은 초계정과 어뢰다. 두 사내는 2차대전에 참전한 초계어뢰정 함장이며 그들에게 전쟁의 대의는 1차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무공훈장에도 동료들의 수훈에도 무관심하다. 소형 초계정에 탑재된 어뢰라는 작은 물체로 적의 대형 구축함을 파괴하는 것이 그들의 진정한 쾌락이다. 그들은 애국적 전사이기 이전에 어뢰의 물신숭배자다. 어뢰라는 주물(呪物)의 물신적 쾌락은 관객에게 전이된다. 전이의 기술은 간단하다. 극중 인물은 어뢰의 운동을 볼 수 없지만 카메라는 본다. 카메라의 특별한 능력 덕에 물거품을 일으키며 구축함을 향해 맹렬하게 유영하는 어뢰의 관능적인 움직임을 객석에 앉은 우리는 고스란히 볼 수 있다.(#1) 어뢰가 발사되는 순간 그 운동을 보는 우리에게 모든 것은 잊혀진다. 오직 그 주물이 목표물에 정확히 도달해 대상을 산산조각내는 것이 이 운동의 유일하고 정당한 목적이 된다.

#1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 가장 강력한 유혹은 총과 총알이다. 주인공 크리스 카일은 이라크 전쟁에 자원 참전한 전설의 저격병이며, 그에게 총과 총알은 <데이 워 익스펜더블>의 초계정과 어뢰에 상응하는 주물이다. 총알은 어뢰와 달리 그 운동을 사실주의적 카메라조차 볼 수 없다. 쾌락의 완성은 총알의 운동을 21세기의 디지털 기술로 조작한 마지막 저격 장면에서 이뤄진다. 스크린에는 총알의 운동이 초저속 화면으로 전시되며(#2), 그 주물은 2km를 날아가 전설의 이라크 저격수 무스타파를 쓰러뜨린다.

#2

모든 영화에는 잠재적 주물들이 전시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주물의 유혹은 은폐된다. 하지만 두 영화는 페티시즘 자체를 소재화한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의 페티시즘은 하워드 혹스적 전문가주의와 결합되어 있다. 여기엔 의무와 분노에 사로잡힌 포드의 전형적 영웅이 없다.(이 영화와 <에어 메일>(1932) <윙스 오브 이글>(1957) 등은 혹스의 전문가주의를 공유한다.) 이들 전문가에게는 자신의 도구와 그 도구의 능력이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의 제일 슬픈 장면은 두 주인공이 상부의 명령으로 자신들의 마지막 초계정을 육군에게 넘겨줄 때이다. 그들은 자기 육체의 일부와도 같은 초계정이 육상 운송수단에 의해 숲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응시한다.(#3) 가공할 능력의 어뢰를 뱉어내며 바다 위를 뱀처럼 유영하던 더없이 민첩한 육체가 이제 트럭에 실린 고철 덩어리의 형상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은 전쟁영화이지만, 자신의 도구를 빼앗긴 전문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3

2.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물신성은 복잡하고 모호하다. 여기엔 약간 긴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이 영화의 물신성에는 전문가주의 이전에 주인공의 사적인 역사가 작용한다. 이라크 전장의 첫 시퀀스 다음에 어린 시절의 플래시백 장면이 이어진다. 크리스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린 사슴을 쏘게 한 뒤 “넌 사냥꾼의 소질이 있다”고 칭찬한다. 그리고 무서운 표정으로 “총은 절대 내려놔선 안 된다”고 다그친다. 총에 새겨진 역사는 가족이 모인 식탁에서 아버지에 의해 간접적으로 말해진다.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양과 양치기 개와 늑대. 세상에 악마가 없다고 믿고 싶어하는 족속이 양이다. 폭력으로 약자를 먹이 삼는 족속이 늑대다. 공격의 재능으로 무리를 보호하는 귀한 족속이 양치기 개다... 우리 집에선 양 따위는 키우지 않는다. 늑대는 내 손에 끝장난다. 누가 네 형제에게 싸움을 걸어오면 그 자식 끝장내버려라.” 여기서 서부의 정복과 연관된 미국 자경주의 역사와 서부극 전통을 떠올릴 수 있지만, 굳이 텍스트 밖의 지식에 기댈 필요는 없다. 아버지의 말에는 양에 대한 경멸, 늑대에 대한 증오, 그리고 양치기의 폭력적 능력에 대한 무제한의 믿음이 뒤섞여 있다.

식탁 장면 직전에 가족들이 교회에 앉아 목사의 설교를 듣는 장면이 짧게 나온다. 목사는 말한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스런 계획을 모릅니다... 하늘에 이르는 날에 우리는 주님의 뜻을 보고 이해할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 장면 다음에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씀 장면 사이에 놓쳐선 안 될 인서트 숏이 있다. 책상 위 성경의 줌인 숏(#4)이다. 교회 장면에서 성경을 만지작거리던 크리스는 이후 다시는 성경을 펼쳐보지 않는다. 후에 “네가 성경 읽는 걸 본 적이 없는데”라고 전장의 동료는 말한다.

#4

인간의 불가피한 무지를 강조하는 목사의 설교, 펼쳐지지 않는 성경, 아버지의 신경증적이고 단순한 양치기론이 크리스의 전문가주의를 구성한다. 그러나 아직 그는 전문가가 아니다. 다음 장면에서 크리스는 청년으로 등장하고 전 장면의 아버지의 말씀이 내레이션처럼 이어진다. “넌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너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 장면은 기묘하다. 크리스의 건장한 신체와 얼굴을 줌인하는 카메라워크는 영웅 등장의 관습적인 기법이며 아버지의 내레이션은 그의 영웅성을 보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이은 장면들에서 그의 모습은 로데오경기를 쫓아다니는 한심한 반백수일 따름이다. 외도 현장을 들켜 쫓겨나는 그의 여자 친구는 소리친다. “당신이 카우보이인줄 아나본데 천만에. 하찮은 농장지기 주제에!”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이 테러리스트에 의해 공격당했다는 뉴스가 그를 잊었던 전문가 세상으로 이끈다. 그는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고 다시 총을 쥔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의 사내들에게 초계정과 어뢰는 이 영화의 서사 이전에 이미 주어진 주물이지만,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크리스에게 총은 서사 초반의 어떤 과정을 통해 되찾아지는 대상이다. 크리스의 총 재획득이라는 선택에 시간적으로 앞선 주요 사건 혹은 상황은 네 가지다. ①“총은 절대 내려놔선 안 된다” “넌 너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아버지의 오래된 말씀, ②펼쳐지지 않은 성경, ③여자 친구의 모욕, ④케냐와 탄자니아의 미 대사관 테러. 하지만 이 사건들과 총 재획득의 인과관계는 모호하다. 총 재획득 직전에 발생한 ④의 테러를 유일하거나 가장 강력한 원인의 자리에 놓으면 총 재획득은 단선적인 애국주의적 선택이 된다. 이 해석은 편리하고 일반적이다.(이 영화가 미국에서 이스트우드 연출작으로는 최고의 흥행성적을 올린 사실, 미국과 한국의 일부 평자들이 이 영화를 이스트우드의 극우적 성향을 드러낸 영화로 간주한 사실, 그리고 크리스의 장례식장에서 각본가 제이슨 홀에게 “허튼 이야기 쓰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하던 크리스의 전우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만족했다는 사실은 이 해석의 보편성을 방증한다.)

이 해석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스트우드는 그렇게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르게도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①을 초자아의 무자비한 명령으로, ②를 무지와 비성찰의 은유로 ③을 총=남근 재획득을 욕망하는 계기로 간주해 전혀 다른 계열의 해석을 제시할 수도 있으며 그 해석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정말 사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들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표정과 공기다. 미 대사관 테러라는 사건 이전까지 크리스의 얼굴에는 불안과 공허가 새겨져 있고, 화면에는 스산한 냉기와 기묘한 침묵이 흐른다. 불안과 공허의 표정, 냉기와 침묵의 공기. 이들은 사건과 무관하게 혹은 사건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으며, 이후 사건의 진행 과정에 수시로 틈입한다. 서사를 안갯속에 가두거나 마치 그 위에서 세워진 모래성처럼 보이게 하는, 그래서 인물들의 어떤 강렬한 결단과 선택도 한순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듯한 알 수 없는 불안과 침묵의 공기라는 초텍스트적 환경 혹은 기후가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주재한다. 그러니 크리스의 마지막 전투에서 아군과 적군의 경계를 지우며 세상을 삼킬 듯 불어오는 모래바람(#5)보다 그 주재자의 더 적절한 현신을 상상하기 힘들다.

#5
총은 안갯속에 있고 모래바람 속에 있다. 총알은 안개를 뚫고 모래바람을 가르며 목표물을 향해 돌진한다. 총과 총알의 물신성은 그 특별한 운동능력에 기반할 것이다. 그런데 총알의 궁극적 목적지는 과연 적인가, 나인가. 2km를 순식간에 날아 가장 강력한 적의 몸을 꿰뚫었던 그 총알이 어째서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위로 결국 크리스의 몸에 도달하는가.(집에 돌아와 ‘평화롭게’ 살던 크리스는 자신이 돕던 정신이상자 상이군인의 총에 살해당한다. 그 살해 장면은 생략되어 있다.) 카메라 조작으로 우리가 볼 수 있었던, 적을 관통한 총알의 운동 장면, 그리고 총알이 크리스의 몸을 뚫었을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장면. 그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안개와 모래바람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대답 될 수 없는 이 질문은 총이라는 주물의 이중성에 이르게 한다. 우리가 그 안개와 모래바람을 알 수 없는 한, 총은 언제 자리바꿈할지 모르는 공격의 무기/자해의 도구다. 이것이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 총이라는 주물이 지닌 불안정과 모호성의 정체다.

3.
<데이 워 익스펜더블>의 기묘한 점은 국운과 생사가 걸린 전투가 이어지지만 그것이 사건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사건의 사건성을 압류하는 공기가 흐른다. 한 사건의 사건성은 다음 사건을 이끌어내는 물리적 정서적 강도이며, 대개 그 힘에 상응하는 정념적 주체의 감정 반응을 동반한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에는 양자 모두 왜소하거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의와 의무의 육중함도, 승리의 환희도, 죽음의 공포도 일상의 한 국면처럼 무심히 흘러가며 인물들은 격정 없이 소멸해간다. 이것이 지난 회에 말한 무언가 자꾸 사라져 간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 느낌은 한두 가지 장치의 효과는 아니다. 먼저 인물들의 전문가적 냉소주의라는 태도가 있다. 소형 초계정으로 일본 구축함을 침몰시키고 귀환한 영웅들의 표정은 하루 일과를 무사히 끝낸 직공의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들을 맞는 전우들의 태도는 동네 요리대회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이웃을 맞는 주민의 태도보다 시큰둥하다. 이야기에 포함된 비관주의도 있다. 초반에 이미 사령관은 두 영웅에게 자신들이 완전히 소모될 때까지 소모 시간을 연장하는 역할만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인물들이 소실점으로 이동하는 구도의 심도 화면들, 어둠의 지속과 힘을 암시하는 표현주의적 조명 등도 함께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엔 사건들 사이에 침묵의 숏이라고 부르고 싶은 공백의 장면들이 있다. 영화는 때로 침묵한다. 유성 영화가 발명한 것은 발성이지만 발견한 것은 침묵이다. 무성영화에서 침묵은 조건이었지만 유성영화에서 침묵은 표현이다. 어떤 침묵의 표현은 모든 소리의 표현을 압도한다. 지난 회에 언급한, 남녀가 묵묵히 앉아있는 숏(#6)처럼, 사건들 사이에 등장해 사건을 잊은 채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장면들. 사건들의 힘은 이 장면들에 이르면 증발해버린다.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맥아더의 언어들, 그리고 영웅들의 용맹한 전투 서사는 남녀의 침묵 장면 앞에서 무력해진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이 체험되어야 할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런 숏과 장면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6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도 사건은 사건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 카일은 이라크에 네 번 파병되지만 네 번의 전투는 진전이 아니라 반복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사건은 조금씩 진전되지만 사건의 힘에 상응하는 정념적 주체의 감정 반응이 즉각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는 반응의 감정 기제가 없는 사람, 내면이 텅 빈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허트 로커>에서처럼 전문가-기계가 정념적 주체를 대체한 건 아니다. 여기엔 모종의 반응 활동이 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사건과 감정 반응 사이에는 그 메커니즘이 극히 복잡하고 불투명한 신경증적 회로가 작동하는 것 같다.

이 회로의 작동에 침묵의 표현이 동원된다.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있다. 딸이 태어난 직후 크리스는 들뜬 표정으로 병원 신생아실 앞에 서 있다. 신생아실 유리 벽 너머로 갓 태어난 딸이 보인다. 그런데 딸이 울고 있다. 간호사들은 아무도 크리스의 딸을 보지 않는다. 크리스는 거의 미칠듯한 얼굴로 자신의 딸을 보아달라고 소리친다.(#7) 하지만 유리 벽 안의 간호사들은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공포영화의 효과음과도 같은 날카로운 현악 사운드가 기습적으로 흘러나오지만, 이 장면은 이후의 어떤 사건과도 연관되지 않는 괴이한 삽화다.

#7

손쉬운 해석은 이 장면을, 어린 크리스가 사슴을 쏘아죽인 초반 플래시백의 첫 장면, 그리고 그가 대전차 수류탄을 든 아이를 저격한 첫 파병 장면에 대한 지체된 반응으로 보는 것이다. 사건은 벌어지고 즉각적 반응은 침묵한다(크리스는 저격에 성공하고 나서도 승리의 웃음이 없다). 하지만 사건의 힘은 인물의 내부에 잠입해 예측할 수 없는 지점에서 모종의 증상(고혈압, 신경증, 불안, 대인기피)으로 출몰한다. 그런데 여기까진 많은 이상심리의 병사들을 그린 많은 반전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은 크리스는 그럼에도 ‘정상’이었다는 것이며, 퇴역 군인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 살인자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며 관객인 우리는 그 살인에 대해서 완전한 무지의 상태에 놓인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비극은 터무니없는 비극이며, 난센스 유머와도 같은 비극이다.

정리해보자. 크리스는 자신의 정상성을 완강하게 주장한다. 그런데 비정상적인 퇴역 군인이 그를 죽였다. 비정상인이 정상인을 죽인 것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둘은 모두 퇴역 군인이다. 우리는 크리스의 정상성으로 가정된 상태가 살인자의 비정상성으로 추정된 상태와 멀지 않다고 짐작할 수 있다. 둘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 둘은 동지인가 적인가. 영화는 침묵한다. 둘 사이에 모래바람이 불어 식별할 수 없다. 어떤 터무니없는 것이 작동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공동체의 완전한 내파가 있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의 영웅들은 부하를 사지에 버렸지만 유대감마저 파괴된 건 아니다. 거기엔 공동체의 기억과 기대가 여전히 남아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에는 어떤 종류의 유대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전쟁의 효과인가. 그렇지 않다. 첫 플래시백의 가족들을 떠올려보라. 거기엔 강퍅한 명령 외엔 어떤 유대도 존재하지 않으며 아버지는 이미 강박증자다. 이라크에서 아이가 죽기 오래전에 이미 사슴이 죽어있다.

신생아실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크리스는 지금 유리 벽 밖에서 소리치고 있다. 그런데 간호사들은 듣지 못한다. 그는 딸을 보살피라고 유리 벽 안의 간호사에게 요구하고 있지만, 간호사들에게 그의 말은 들리지 않으며 아이들의 울음이 예사인 신생아실에서 그 요구는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크리스의 말을 듣기 전에 가위눌림의 형식을 뒤집어놓은 그 구도를 봐야 한다. 지금 유리벽 안에 갇혀 있는 건 크리스다. 그는 구조의 비명을 외치고 있지만 아무도 듣지 못한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크리스는 자신의 외침이 유리벽 너머의 딸아이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구조되어야 할 자는 소리 지르고 싶지만 온몸을 뒤틀어도 소리를 낼 수 없는 그 자신이다. 그는 침묵 당한 자다. 그 침묵 아래 가위눌린 목소리를 누구도 듣지 못하며, 더 불행하게는 자신도 알지 못한다. 빤히 보이지만 듣지 못하는 유리 벽, 아와 타의 경계를 지우고 불어오는 모래바람, 그리고 그 연원을 알 수 없는 침묵이 서사의 소리를 압도한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사건을 읽기 전에 질식과 가위눌림을 체험하고 침묵을 들어야 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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