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 워 익스펜더블 They Were Expendable 존 포드, 1945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5-02-13조회 9,019
데이 워 익스펜더블 They Were Expendable (1945)

<데이 워 익스펜더블>은 2차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초에 촬영되었고 그해 12월에 개봉되었다. 전쟁 중에 만들어져 전쟁 직후에 공개된 셈이다. 이런 정황은 이 영화가 전쟁 영웅을 미화하는 선전영화일 것이라고 짐작하도록 이끈다. 누구보다 존 포드는 전쟁기록 촬영 팀을 이끌고 자진 입대한 ‘애국자’였고 이 영화 연출을 위해 본국으로 불려 오기 전까지 정보장교로서 태평양, 북아프리카, 노르망디를 누비고 다녔다. 크레딧의 감독 이름도 ‘John Ford Captain U.S.N.R.’(해군 예비역 대위 존 포드)로 되어 있다.

초계 어뢰정 함장인 두 주인공 중 브릭 중위 역을 맡은 배우 로버트 몽고메리는 톱스타 시절에 과감히 입대한 뒤 주인공의 실제 모델인 초계어뢰정 함장 조니 벌킬리(Johnny Bulkeley)의 부관으로 1943년 남태평양 전투에 참여했고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는 구축함 작전장교를 맡았다. (스크린 캐릭터로만 짐작하면 가장 앞장섰을 법한 존 웨인은 의아하게도 입대하지 않았는데, 이 ‘오점’ 때문에 존 포드는 이 영화 촬영 때 존 웨인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어 로버트 몽고메리가 뜯어말릴 정도였다고 한다. 존 웨인이 입대하지 않은 이유는 가족문제와 계약문제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요컨대, <데이 워 익스펜더블>은 전쟁 중에 군인들이 만든 전쟁영화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우리의 짐작은 완전히 빗나간다. 수십 대의 전투기까지 동원된 대규모 해전 장면이 두 번 등장하지만 화면에는 종종 회한의 기운이 짙게 번져있고 인물들은 비장하기보다 심드렁하거나 침울하다. 그러고 보면 제목부터 선전영화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들은 소모품이었다’가 아닌가. 그렇다고 반대로 이 영화를 전쟁의 참혹함에 몰두하는 반전영화라고 말하는 건 사태를 너무 단순화하는 것이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은, 포드의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 단일한 해석과 손쉬운 범주화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 미묘한 표정과 시적 정감으로 가득하다.

앞서 소개한 두 영화 <태양은 밝게 빛난다> <도망자>와 달리, 존 포드는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영화의 열렬한 지지자 린지 앤더슨(Lindsay Anderson)과의 인터뷰에서 포드는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자신은 ‘명령에 따라’ 만들었을 뿐이고 촬영한 뒤에는 다시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편집에도 관여하지 않았고 음악도 제작사 간부가 임의대로 넣었다는 것이다. 포드는 인터뷰 한 달 뒤 앤더슨에게 “<익스펜더블>을 봤는데, 당신이 맞았어”라고 전보를 보내긴 했지만, 말년의 특강에서 이 영화를 싫어한다고 다시 말했다. 인터뷰, 특히 비평가와의 인터뷰를 싫어했던 존 포드가 앤더슨에게 진심을 말했는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적어도 포드 스스로 만족하는 작품에 속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앤더슨은 이렇게 썼다. “내켜서 만들었건 그렇지 않건 간에, <데이 워 익스펜더블>을 보면 그 주제가 포드의 마음을 깊이 움직였음이 분명하다. 영화의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심원한 사적 체험이 명료하고도 힘 있게 담겨 있다. 입대 권유라는 의도가 처음부터 제작과정에 개입되었다 해도, 결과물은 그것을 초월한다. 근본적으로, 이 영화의 가치와 인간적인 반응은 <분노의 포도>의 그것이기도 하다. 사랑과 동지애, 신념에의 헌신, 패배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인내의 영혼을 두 영화는 공유한다. 강렬하고 일관된 표현을 통해 이 영화는 걸출한 시적 성취를 이루었다.”

나도 이 영화를 존 포드의 10베스트에 넣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지만, 그 이유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좋은 영화가 좋은 이유를 말하는 건 늘 난감한 일이지만 <데이 워 익스펜더블>의 경우엔 좀 더 까다롭다. 앤더슨의 말에는 대체로 동의할 수 있지만 얼마간의 보충설명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약간의 우회로를 택해보자.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1941년 필리핀 마닐라에 주둔 중인 초계어뢰정 함대의 지휘관 브릭 중위(로버트 몽고메리)와 부지휘관 러스티 중위(존 웨인)는 라이벌이자 실전 명령이 떨어지기를 고대하는 전투적 해군 장교다. 그들은 소형 초계정으로 거대한 일본 구축함과 순양함을 침몰시키는 전과를 발휘해왔다. 하지만 일본군은 막강한 화력과 거대 병력으로 필리핀의 각 미군 주둔지를 포위해온다. 미군 사령부는 필리핀 철군을 결정하고, 맥아더 장군은 브릭과 러스티가 이끄는 초계정을 타고 필리핀을 탈출한다. 맥아더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지만, 필리핀에 남은 수만 명의 미군 병사들은 그저 일본군의 진격을 지체시키고 그들의 병력과 무기를 소진케 하는 한시적 용도의 소모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브릭과 러스티는 알고 있다. 두 장교 역시 병사들을 남겨두고 필리핀을 떠나는 마지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이 이야기는 전쟁 중에 자원입대 고취라는 목적 아래 메이저 제작사가 만든 전쟁영화에는 전혀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누가 자원해서 소모품이 되려 할 것인가. 자원입대 고취라는 목적이 없었다면 왜 미군은 이 영화에 대대적인 지원을 했을까. 제작사의 기획 의도, 제작과정에 관한 증언과 자료가 별로 없다는 것도 이상하다. 앤더슨에게는 극히 부정적으로 말한 포드가 이 영화를 만들 때는 어느 때보다 열성적이었다고 존 웨인은 회고했다.

포드에게 이 영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제작사의 개입으로 그의 의도가 어디선가 훼손된 것일까. 태그 갤러거에 따르면 이 영화의 평판은 좋은 편이었고 흥행성적도 10위 안에 들었다고 한다. 그렇다 해도 린지 앤더슨 외에 이 영화를 포드의 중요한 작품으로 다룬 후대의 비평가도 거의 없다. 말하자면 <데이 워 익스펜더블>은 존 포드 영화 중에서도 유달리 기묘하고 애매한 자리에 놓인 영화다.

영화의 내부로 들어가면 애매성은 배가된다. 한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이 영화의 가장 특별한 장면은 맥아더 장군의 쇼트다. 그는 이 영화의 주요 인물이 아니며 탈출하는 순간에 잠깐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이 장면의 카메라는 맥아더를 신격화한다(#1). 그가 모습을 보이자 병사들의 얼굴에는 경외의 눈빛과 표정이 번져가고 국가만큼 유명한 공화국 찬가(The Battle Hymn of the Republic)가 울려 퍼진다(#2, #3). 철없는 한 병사는 그에게 사인을 부탁한다.

#1


#2


#3

맥아더의 비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사는 없지만 그의 발언은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4은 영화의 시작 장면이고 #5는 마지막 장면이다. 모두 맥아더의 말이며,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도 실은 그의 명령에 의해 진행된다. 맥아더는 특정 장면의 시각적 표상에서뿐만 아니라 서사의 질서에서도 <데이 워 익스펜더블>이라는 영화적 소우주의 보이지 않는 군주다.

#4


#5
 
이런 장면들은 이 영화를 선전영화라고 보는 관점을 지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동시에 맥아더의 신격을 은밀히 훼손한다. #1의 다음 장면에서 맥아더를 실은 배가 떠나자 병사들은 그것을 물끄러미 본다(#6). 그리고 떠나는 배를 흘끔흘끔 보며 반대 방향으로 터덜터덜 행진하기 시작한다(#7). 다음 쇼트에서 그들은 소실점을 향해 걸어간다(#8).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죽음 혹은 포로이다. 신적 영웅은 신도를 버리고 삶을 향하며, 그를 떠나보낸 신도는 죽음을 향한다.

#6


#7


#8

이 대목은 마지막 장면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장교 브릭과 러스티를 실은 비행기가 이륙한 직후 장면에 병사들은 역시 소실점을 향해 힘없이 걷고 있다(#9). 비행기 소리를 듣고 그들은 하늘을 바라본다(#10). 그들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다음에 등장하는 마지막 쇼트가 바로 “우리는 돌아올 것이다”라는 맥아더의 말이 새겨진 #5이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 비행기를 쳐다보던 병사들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영웅은 그들을 버렸다.

#9


#10


#5
아마도 브릭과 러스티(그리고 맥아더)는 자신의 부하들을 사지에 두고 떠나는 포드의 유일한 영웅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전쟁영웅을 비판하는 반전영화인가. 그렇게 말하는 건 초점이 빗나간 것 같다. 러스티(존 웨인)가 마지막 순간에 비행기에서 내리려 할 때(물론 부하들과 함께하기 위해) 브릭은 “자넨 누굴 위해서 일하고 있나? 자네 자신인가?”라고 말하며 그를 주저앉힌다. 여기서 영웅의 명예율과 국가의 명령은 충돌한다. 스스로 전쟁의 최전선에 나섰던 서부사나이 존 포드는 전쟁 막바지에 만든 이 영화에서 두 계율이 화해할 수 없는 순간에 이른다. 이 영화의 애매함은 화해할 수 없는 두 계율 앞에 선 영웅의 망설임과 깊게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존 포드가 <데이 워 익스펜더블>에서 찍은 건 망설임이다. 물론 앞 장에서 살펴본 전전(戰前) 영화들에서도 포드의 주인공들은 확신에 찬 고결한 속인이 아니라, 망설이고 주저하는 범속한 성인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망설임은 인물의 망설임이 아니라 쇼트의 망설임이다. 브릭과 러스티는 전투에 나서고 싶어 안달하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포드의 쇼트는 인물의 심리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지배하는 모종의 공기 혹은 보이지 않는 질서의 리듬을 따른다. 무언가가 그들을 멈춰 세우거나 그들의 행위를 지나쳐간다. 그것이 이 영화의 특별한 시적 정취를 빚어낸다.

이 영화의 매혹적인 시정(詩情)은 한두 가지 요소로 환원될 수 없으며, 프레임, 미장센, 인서트 컷, 리듬이 모여 빚어내는 합주의 효과다. 이 영화를 분석자의 태도로 반복해서 볼 때도 어느새 그 합주의 능란함에 홀려 평자의 임무를 잊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심도 화면이다. 나는 포드의 영화를 볼 때마다 종종 동굴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가진다. 존 포드는 심도 화면의 대가이다. 무성영화 시절부터 그는 화면의 전경 중경 후경을 동시에 활용했다. 포드는 고전기 감독 가운데 2차원의 화면으로 3차원의 효과를 빚어내는 데 가장 능숙한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의 심도 화면은 포드의 영화 가운데 가장 공간 중심적이며, 가장 정서적이다.

#11


#12


#13
초반에 등장하는 이 장면(#11) 은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이들이 이미 어둠의 운명 깊숙이 가라앉아있음을 암시한다. 브릭과 러스티가 일본군 폭격기와 맞서 싸우고 돌아오자 그들의 진지는 이미 폐허가 되어있는 장면(#12), 출정을 앞두고 죽음을 앞둔 전우를 문병 온 장면(#13) 역시 깊은 심도로 황량하거나 어둡게 묘사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심도화면은 소실점을 향한 병사들의 수직 혹은 사선방향의 이동 쇼트에서도 등장한다. 그것은 짐작할 수 있듯 죽음을 향한 행진이다.(#14, #15, #9) <데이 워 익스펜더블>에는 포드의 서부극과는 달리 수평 이동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움직임은 소실점을 향한 수직 이동 혹은 사선 이동이다. 인물들은 관객으로부터 멀어져 소멸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풍기는 깊은 회한의 정서는 이 움직임의 방향과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14


#15


#9

이 영화의 심도화면과 대구를 이루는 것이 인물화 쇼트라고 부르고 싶은 클로즈업이다. 일반적으로 클로즈업은 사건이나 상황이 벌어진 다음의 감정 반응을 드러내는 주관적 쇼트로 사용된다. 하지만 포드는 이 영화에서 다큐멘터리의 카메라가 인물의 얼굴을 기록하듯이 클로즈업을 사용했다(#16, #17, #18, #19). 대부분은 클로즈업 쇼트는 렘브란트 조명을 연상시키듯 어둠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사건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그때 그곳의 있었던 사람들의 표정을 보듯 이 인물 쇼트들을 마주하게 된다.

#16


#17


#18


#19
<데이 워 익스펜더블>의 사건의 영화가 아니라, 장소의 영화, 표정의 영화, 나아가 공기의 영화다. 무언가 하나씩 사라져 간다. 진지와 물자와 무기와 사람들이 어둠 속으로 혹은 소실점을 향해 차츰 사라져 간다. 마지막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전쟁이라는 사건의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포드는 일본군의 모습을 묘사하지 않았고 그들의 공격 장면도 찍지 않았다. 전쟁, 더 정확히 말해 패배한 전투를 이처럼 자연적 소멸과정처럼 묘사하는 다른 전쟁영화를 기억해내기 힘들다. 이 영화가 풍기는 애매함이라는 첫인상은 우리가 이런 영화를 접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 역시 재발견되어야 할 포드의 걸작이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한 장면을 언급하고 싶다. 러스티와 간호장교의 저녁 식사 직후 장면이다(#20). 다른 손님들이 먼저 자리를 뜬 뒤, 남녀는 지금 문밖을 향해 가만히 앉아있다.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이날 이후 둘은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쇼트를 오랫동안 롱테이크라고 기억하고 있었지만 확인해보니 실제 지속시간은 10초 정도에 불과했다. 좋은 영화에는, 쇼트의 물리적 길이에 관계없이, 앞뒤의 모든 사건을 잊고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아득한 순간이 등장한다. 그런 순간을 담고 있는 영화는 다른 어떤 결함들도 사소하게 만든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에선 이 장면이 바로 그런 순간을 선사한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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