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갤러거와의 대화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4-09-29조회 20,872
태그 캘러거

태그 갤러거(Tag Gallagher)는 부산 영화의전당 초청으로 지난 9월 11일에 방한했다. 부산에서 영화의전당에서 12일에 강연회, 13일에 임재철, 김성욱, 허문영과의 좌담을 가졌다. 서울 아트시네마에서도 14일 강연회를 가졌다. 태그 갤러거는 「John Ford: The Man and His Films」(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6), 「The Adventure of Roberto Rossellini: His Life and Films」(DaCapo, 1998)라는 탁월한 두 권의 저서를 썼고, 조셉 폰 스턴버그, 막스 오퓔스, 킹 비더, 장 마리 스트라우브, 페드로 코스타 등에 관한 뛰어난 평론을 써왔다.

이 연재를 읽어온 독자라면 태그 갤러거라는 이름을 여러 번 만났을 것이다. 포드의 열광자인 그의 견해는 특정한 이론에 바탕을 두지 않으며 동시에 시네필적 수사학에만 의존하지도 않는다. 대신 포드의 개별 영화가 지닌 풍성한 영화적 자질을 개인사적 산업적 맥락 안에서 정교하고도 포괄적으로 제시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의 견해를 참조하지 않고 존 포드의 영화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의 강연은 육성이 아니라 비디오에세이로 이루어졌다. 우리에게 아직 익숙지 않은 비디오에세이는 강연을 진행하며 필요할 때마다 영상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선택하고 재배열한 영상들과 그의 코멘트가 마치 대화하듯 진행되는, 새로운 비평 형식이다. 그의 존 포드 비디오에세이는 존 포드의 영화적 리듬과 공기를 재배열된 영상으로 체험케 했다는 점에서 관객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그는 “왜 다른 비평가들은 이 방식을 모방하지 않는가”라고 웃으며 말했다.

아래의 인터뷰는 부산에서의 좌담, 사적 대화, 그리고 이메일 등에서 주고받은 말들을 추린 것이다. 예상보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만족할만한 인터뷰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한 사람의 시네필이자 뛰어난 평론가로서의 의미 있는 발언들이어서 여기 소개하려 한다.(로베르토 로셀리니에 관한 발언도 다수 포함된 갤러거-임재철의 대담은 『씨네21』972호에 실려있다. 참고하시길.)

1960년대에서 바로 건너온 듯한, 허름한 히피풍 차림의 이 노비평가는 작은 가방 두 개만을 들고 먼 길을 왔고, 두 도시의 시네필들에게 기억할만한 많은 말들을 들려준 뒤 9월 16일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허문영_ 당신의 사적인 이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개인 소개를 부탁한다.

태그 갤러거_ 나는 1943년에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NYU에서 영화이론으로 석사학위를,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보스턴 대학교에서 조교수로 4년간 있었지만 학교와의 인연은 그게 끝이다. 20대에는 베트남 전쟁 징집을 피하기 위해 피아노 교사를 하기도 했고 이탈리아에서 2년 동안 살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한 달 생활비가 300달러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거기서 크리슈나무르티의 이탈리아인 제자를 만났다. 그가 내게 「역경 易經」을 소개해 읽었고 크리슈나무르티 강의에도 데리고 갔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정좌하고 앉아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말할 게 없다”고 하고선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강의가 내가 들은 가장 훌륭한 강의의 하나로 남았다. 8번 정도 강의를 들었는데 다른 건 기억나지 않는다. 베스파(스쿠터)를 사서 이탈리아 일주를 하기도 했다. 1920년대에 조셉 폰 스턴버그도 스쿠터로 이탈리아 일주를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한때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12살부터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너무 늦었다. 대신 내 아들이 피아니스트여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를 한다. 아들 이름이 킴벨인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 「킴」(루디어드 키플링)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왔다.

허문영_ 당신은 학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독립적으로 비평과 저술 작업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같은 길을 택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이며 어떤 좋은 점과 힘든 점이 있었는가.

태그 갤러거_ 내가 아카데미를 거부한 게 아니라 아카데미가 나를 거부한 거다(웃음). 보스턴대학교의 윌리엄 애로우스미스 교수가 나를 고용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고 대통령의 친구였다. 그는 영화이론 전공을 도입하려고 나를 고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도중에 죽었다. 학교에서는 언론 전공학자를 그의 후임으로 고용했다. 그는 영화전공 도입을 원치 않아 내 자리가 사라져버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대학교에 있었을 것이다. 미국 대학교 시스템의 이상한 점은 박사 학위 취득하고 1, 2년 안에는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6년 동안 한 사람의 교수 아래서 조교수 노릇을 해야 테뉴어가 되는데, 4년간 나를 돌봐주던 교수가 죽은 것이다. 더구나 나는 이미 존 포드에 관한 책을 써서, 이름이 약간 알려지는 바람에 더욱 고용되기 힘든 어중간한 사람이 되었다. 독립적인 작업을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허문영_ 경제적으로는 힘들지 않았는가.

태그 갤러거_ 그렇지 않았다. 나는 돈이 많다.(웃음) 나는 16mm 필름 거래로 돈을 많이 벌었다. 필름 딜러들은 대부분 영화에 대해선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강점이 있었다. 다른 이들은 포드의 <굽이도는 증기선>이 얼마나 귀한 필름인지 모르는 것이다. 나는 귀한 필름들을 사서 내 라이브러리도 만들고 장사도 했다. 필름 거래는 마약 거래와 비슷하다. 마약 중독자는 보통 마약 장사를 겸한다. 마약 장사로 번 돈으로 자기도 마약을 하는 것이다. 마진율이 높다는 점도 비슷하다. 보통 100% 정도다. 비싼 건 한편 팔아 200달러 정도 남겼다. 둘다 간단한 사업이다. 전화나 팩스로만 거래한다. 내게 필름 장사는 많은 걸 줬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16mm 프린트로 영화제를 여는 데가 많아서, 예컨대 런던에서 로셀리니 영화제를 한다고 하면 나는 내가 가진 프린트들을 짊어지고 가서 상영하고 끝나면 싸들고 돌아왔다. 필름장사를 하면서 나는 누구보다 큰 필름 라이브러리도 갖고, 돈도 벌고, 여행도 다녔다. 행운이었던 셈이다. 물론 초산화 때문에 집 안에 식초 냄새가 진동하긴 했지만. 아직 빌려줄 가치가 있어서 로셀리니 영화는 몇 편 가지고 있고 존 포드의 <순례여행>도 갖고 있다.

로빈 우드 Robin Wood, 조너선 로젠봄 Jonathan Rosenbaum
 
허문영_ 영화적 견해를 교류하는 가까운 동료 비평가가 있는가.

태그 갤러거_ 음, 미국에는 거의 없다. 오히려 외국에 조금씩 있다. 로빈 우드는 죽기 1년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다. 토론토에서 로셀리니 회고전을 할 때였다. 그와 와인 3병을 마셨고 그는 내 발과 사랑에 빠졌다(로빈 우드는 게이이며, 갤러거는 주로 맨발로 다닌다). 나는 논쟁을 즐기는 편이지만 로빈 우드와는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로빈은 포드의 최고작이 <모호크족의 북소리>라고 말했는데, 그 영화는 나의 존 포드 톱 30 정도에 겨우 넣을 수 있는 영화다. 보통의 경우라면 반박했을 텐데 그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너무 쇠약해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너선 로젠봄과는 굉장히 친했는데, 2000년에 심하게 싸운 뒤로 보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아드리아노 아프라와는 매우 친하다. 그는 나의 로셀리니 책을 꼼꼼히 읽고 코멘트해주었다.

허문영_ 조너선 로젠봄과는 왜 싸웠는가.

태그 갤러거_ 글쎄, 왜 싸웠는지 누가 알겠는가. 싸움이란 알 수 없는 거다... 싸움이 궁금하다면 다른 싸움 하나를 알려주겠다. 로셀리니에 관한 책을 준비하면서 생긴 일이다. 나는 로셀리니의 오랜 친구 프랭크로부터 로셀리니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당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셀리니의 아들 렌조를 만나 그 이야기를 했더니 처음엔 “프랭크 아저씨가 말했으면 사실일 것”이라고 순순히 수긍했다. 무솔리니 시절엔 당원증이 없으면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로셀리니가 2차대전 중에 군대에 관한 영화를 몇 편 만들었는데 당원증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하지만 무솔리니 시절에 당원증을 얻는 건 잡지 구독하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었다. 약간의 돈을 내면 1년짜리 당원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이 대신 신청해서 받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가입 날짜 조작까지 가능했다. 로젤리니가 당원이었다는 것은 사실 거의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내가 렌조를 만나고 나서 며칠 뒤에 팩스를 보내 결투 신청을 해왔다. 이유는 내가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죽은 이를 공격하는 겁쟁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렌조가 가족과 이야기하고 나서 가족의 방침이 그렇게 내려졌던 것 같다. 나는 “그 사실을 아는 건 지금 너와 나밖에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사실”이라며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나는 결투 신청을 받아들였는데, 무기 선택까지는 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내게 “너를 평생 괴롭히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이탈리아는 정치적 힘을 가진 몇몇 사람들이 사회의 거의 모든 부문에 힘을 미치는 특별한 사회다. 나와 렌조와의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이탈리아서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로셀리니와 관련된 어떤 행사에서도 나는 금지된 사람이 되었다. 나의 로셀리니 책이 출간된 뒤로 이탈리아서 로셀리니 관련 책이 6, 7권 출간되었는데 내 이름은 어디에도 인용되지 않는다. 다만 ‘어떤 학자가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는 식으로만 내 견해가 인용될 뿐이다. 내 책은 불어로는 번역되었지만 정작 로젤리니의 조국인 이탈리아에선 번역될 수 없었다.

허문영_ 존 포드라는 영화감독에게 매혹된 최초의 순간이 있었을 것 같다. 그 순간의 경험에 대해서 듣고 싶다.

태그 갤러거_ 나는 사실 존 포드를 알기 전에 존 포드를 알게 되었다. 십 대 시절에 나는 텔레비전에서 많은 영화를 보았다. 사실 그때는 크레딧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는 배우 이름조차도 관심 밖이었다. 감독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굉장히 많은 영화를 보았고,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기도 했다. 대학에 갔을 때 영화 연출에 관심이 있는 친구를 만났다. 내가 좋아했던 그 영화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그 친구가 그 영화의 감독들에 대해서 얘기해줬다. 그때서야 내가 좋아했던 대부분의 영화들이 존 포드가 만든 영화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존 포드를 알기 전에 존 포드를 알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젊은 날의 링컨 Young Mr.Lincoln
 
허문영_ 당신의 저서에서 <젊은 날의 링컨>을 언급하면서 50번을 넘게 봤지만 볼 때마다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고 했다. 이런 경험은 시네필에게는 즐거운 것이지만, 무언가를 써야 하는 비평가들에게는 좌절감을 안겨주는 면도 있다. 끝없이 고쳐 써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저서에서 스스로 불만족스럽다고 여기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태그 갤러거_ 발견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물론 나의 포드 책도 3번째 개정판을 냈다. 포드의 경우, 나는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노트를 하고 다시 쓰는 일을 지속해왔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가 쓴 「존 포드」 초판을 좋아하지 않는다. 형용사가 너무 많다. 5년 전 스페인어로 출간하자는 제안이 왔을 때, 나는 25% 정도를 다시 썼다. 올해는 프랑스의 한 출판사가 짧은 버전 출판을 제의해왔다. 그걸 위해 다시 내가 쓴 걸 봤을 때, 여전히 형용사가 너무 많다고 느꼈다. 형용사는 부정직해지거나 과장하기 쉽다. 지금으로선 단순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쓰고 싶다. 내 책이 지닌 좋은 점도 있다. 나는 프레임 확대(frame enlargement)에 의한 스틸을 쓴 첫 연구자 중의 하나다. 16mm 프린트로 내가 일일이 작업을 한 것이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영화 책은 영화사가 제공한 프로덕션 스틸을 썼다. 이건 가짜다. 왜냐하면 감독은 그 스틸을 찍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건 영화연구에서 가장 중대한 부정직함 중의 하나다. 내가 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아카데미 쪽 사람들은 나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그들은 스틸 사진의 화질을 따지고 있었다. 과연 존 포드가 그 장면을 찍은 게 맞는지를 따지지 않고 말이다. 이젠 DVD가 있어서 훨씬 좋은 프레임을 얻을 수 있다. 어쨌거나 긴 버전을 줄이면 내 책이 훨씬 좋아질 것이다.

 
「John Ford, the Man His Films」

허문영_ 당신이 존 포드 연구에 몰두하고, 첫 저서(「John Ford, the Man His Films」)가 출간된 것은 1986년이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존 포드를 인종주의자, 극우파, 군국주의자로 보는 시선이 강하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당신의 저서는 존 포드에 대한 그런 선입견, 오인 혹은 잘못된 평가를 불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태그 갤러거_ 그랬기를 바란다.

허문영_ 자신의 책이 존 포드에 대한 평가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느낌을 실감한 경험이 있나.

태그 갤러거_ 나로선 그 책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책을 읽고 나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70년대, 80년대 당시에 존 포드가 이러한 오해를 받았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존 웨인과의 관계 때문이다. 존 웨인은 그 당시에 반공산주의 활동을 굉장히 활발히 하고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존 포드를 변론하고, 부당한 공격으로부터 존 포드를 보호하는 것에서 시작을 했다. 존 포드에 대한 이해는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 책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다. 나로선 그 목적에 이 책이 도움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허문영_ 존 포드와 로베르토 로셀리니에 대한 당신의 저서는 전기와 감독론이 결합되어 있다. 전기 작성은 매우 많은 자료 조사를 필요로 하는, 비평가들에게는 매우 힘들고 소모적인 작업일 수도 있다. 존 포드와 로셀리니에 관한 책을 쓰면서 전기적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

태그 갤러거_ 존 포드의 책을 준비하면서 16mm 필름 반복해 보았다. 한 영화를 숏 별로 기록하면서 앵글과 숏의 크기, 카메라 움직임 등등을 적는다. 한 영화당 대략 4, 5일이 걸린다. 그러고 나서 다른 영화로 넘어간다. 각 영화별 기록을 마치면 영화들 간의 관계를 찾아본다. 이 과정에서 존 포드가 어떤 시기에는 좋은 영화들을 집중적으로 만들었는데, 어떤 시기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컨대, <수색자>(1956) 이후에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 사이의 기간이 후자에 해당한다. 물론 <투 로드 투게더>나 <기병대> 등의 괜찮은 영화들이 있지만 좋았던 시기에 비하면 확실히 좀 떨어진다. 이 시기에 존 포드는 한쪽 눈의 시력과 그의 집을 잃을 정도로 개인적 어려움을 겪었다. 산업적으로도 스튜디오 붕괴하면서 그의 개인 프로덕션도 문을 닫았다. 이제 개인이 모든 걸 알아서 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예를 들어 스튜디오와의 계약서가 30년대에는 2쪽이었는데, 50년대에는 전화번호부 두께가 되었다. 이 모든 나쁜 일이 50년대 후반에 일어났다. 영화 외적인 요소가 영화에 영향을 미친다. 전기는 나의 우선 분야가 아니어서 자료가 불충분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에 가서 10일 동안 인터뷰를 했다. 존 포드 지인들을 두루 만났는데, 그들 포드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어서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정확히 말해주었다. 조셉 맥브라이드의 포드 전기는 훌륭하다. 나는 그 책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화는 무에서 오지 않는다. 삶의 여러 사실들이 영향을 미친다. 로셀리니도 그런 사례다. 그는 다른 영화인들과 직업적인 관계를 맺은 적 없고, 가까운 사람들과의 친밀한 혹은 적대적 관계 속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제작의 커뮤니티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존 포드, 장 르누아르도 그런 사례다. 만드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기운, 특별한 친밀함이 영화에 반영된다. 무엇보다 포드의 <조용한 사나이>가 그렇지 않은가. 나는 로베르 브레송의 전기를 여전히 기다린다. 그에 관해 알려진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고다르의 동반자였던 안느 비아젬스키가 <당나귀 발타자르>에서 같이 작업한 경험에 대해 쓰긴 했지만 사적인 부분은 별로 없다. 대신 그녀가 쓴 고다르에 관한 책은 정말 훌륭하다. 여하튼 궁금하다. 브레송의 삶은 영화 같았을까. 그의 영화 이를테면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의 주인공처럼 얀세니스트였을가. 그렇지 않다는 말도 있다. 돈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했다는. 나는 브레송의 전기 작가라는 영웅을 기다린다.

허문영_ 존 포드 영화(특히 <젊은 날의 링컨>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 <분노의 포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등)에서 프로듀서 대릴 F. 자눅의 역할은 비평가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면이 있다. 포드는 종종 자눅에게 편집권을 넘겼고, <황야의 결투>의 마지막 장면은 직접 찍기도 했다. 그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한다고 보는가.

태그 갤러거_ 물론 자눅은 포드가 인정한 위대한 편집자다. 하지만 자눅이 제작한 다른 감독들의 영화들을 생각해봐라. 대부분 끔찍하다. 비밀은 포드의 영화 만들기의 방식에 있다. 존 포드는 스토리보드 없이 이미 머릿속에 영화를 만들어 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포드는 촬영하는 과정에서 이미 편집을 해버렸다. 촬영이 끝나면, 더 이상 다르게 편집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다. 자눅이 포드의 영화들을 편집한 건 맞지만,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았다. 때로 자눅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황야의 결투>를 30분 줄이고 자신이 마지막 장면을 찍은 것 같은 일 말이다. 물론 포드가 자신의 제작사(Argosy)에서 찍은 영화에서는 완전한 통제권을 발휘했다.

역마차 Stagecoach

허문영_ 당신의 베스트 존 포드 리스트가 궁금하다.

태그 갤러거_ 내가 늘 좋아하는 10편의 존 포드 영화가 있다. 먼저 <역마차>가 있고, <젊은 링컨>,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미드웨이 전투>, <웨건 마스터>, <조용한 사나이>, <태양은 밝게 빛난다>, <도노반의 산호초>,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7명의 여인>. 재작년에『사이트 앤 사운드 Sight and Sound』라는 잡지가 올타임 베스트 설문조사를 했는데, 존 포드 영화 중에 어떤 걸 고르느냐를 두고 고민했다. <역마차>와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사이에서 오래 고민하다가 결국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로 정했다. 하지만 아마 내일이라도 <역마차>로 마음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존 포드가 방금 얘기했던 그 열 편 중에 한 편만 만들었다 할지라도 존 포드는 지금만큼이나 존경받는 감독으로 인식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문영_ 내일 바뀔 수 있다 해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최고로 꼽았다는 건 약간 놀라운 일일 수 있다. 이 영화는 주류 평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많은 시네필들에게는 오랫동안 감상적인 멜로드라마로 간주되어왔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어떤 점을 그토록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태그 갤러거_ 히치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기증>을 최고로 꼽는다. 존 포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각기 다른 자기만의 최고작을 꼽는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감상적인 멜로드라마라고 보는 건 주로 영국인들이다. 데이비드 톰슨 같은 사람이다. <시민 케인>과 같은 해에 나왔기 때문에 혁신적인 <시민 케인>과 비교해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관습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건 피상적인 생각일 뿐이다. 이 영화가 왜 좋으냐고?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모든 것이 좋다. 캐릭터, 숏, 촬영, 이야기, 감정 모두 좋다. 소년이라는 한 캐릭터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드문 존 포드 영화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도 같은 방식이다. 단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둘 다 거의 전체가 플래시백인 영화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반복해서 보면 제임스 스튜어트가 자기식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플래시백에서 베라 마일스가 존 웨인을 사랑한다는 걸 못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는 기억을 왜곡한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도 기억의 왜곡이 있다. 포드의 영화는 의식과 전통에 관한 것이라는 통념이 있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의 흥미로운 점은 이런 의식과 전통이 사회를 유지하기도 하면서 파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이걸 결코 깨닫지 못한다. 아이가 가치 있게 생각하고 성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공동체를 파괴시킨다. 이 영화의 센티멘탈리티는 이중적이다. 사람들은 비극적 사건에만 주목하고 그 뒤에 감춰진 잔혹함을 보지 못한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How Green Was My Valley

허문영_ 나도 그런 관객이었다. 20년 전에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많이 울었다. 그리고 그저 비극적 멜로드라마라고만 생각했다. 몇 년 지나 다시 봤을 때, 이 영화가 매우 기괴하고 뒤틀려 있다고 느꼈다. 거의 무서웠다.

태그 갤러거_ 포드의 마법이 그런 것이다. 울게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섭게 한다(horrifying). <아파치 요새>도 그러하지 않은가. 백인 장교와 하사관들은 고귀한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병사들을 그리고 인디언들을 몰살시키는 명령에 복종한다. 포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이중성을 못 본다. 포드가 그들의 행동을 찬미하는 것처럼 보는 것이다. <나의 계곡 푸르렀다>는 아이가 밸리를 50년이 지나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그가 엄마의 숄로 싸는 책들은 자기가 어릴 때 읽었던 책들뿐이다. 새 책이 없다. 이 영화의 전체 이야기는 가족이 파괴되고 밸리가 망가지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이 든 주인공은 가족들 밸리 사람들이 죽지 않았고, 그들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여전히 어리다. 그는 과거를 반복, 반복, 반복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는 과거에 갇힌 사람이다. 포드는 이 인물의 슬픈 사연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 인물의 어리석음, 의도하지 않은 파괴성이라는 이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위대한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것은 위대한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것과 같다. 하나의 이유는 나를 울게 하니까, 이다. 훌륭한 예술은 우리를 울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감정적으로 연루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예술은 감정에 관한 것이니까. 예술의 또 다른 자질은 창의성(invention)이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한 순간도 경이롭지(marvelous) 않은 때가 없다. 구도는 아름답고 사람들의 움직임은 발레 같다. 너무나 우아하다. 오손 웰스가 이런 걸 하면 그게 도드라져 보인다. 사람들은 그걸 미학적이라고 알아차리게 된다. 근데 포드가 하면 그 솜씨를 눈치 못 채고 그저 울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모차르트를 좋아한다. 자기 시대의 보통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물론 지적인 사람도. 포드의 영화도 영화를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봐도 충분히 즐기고 나올 수 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50번 넘게 봐도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아직 두 번밖에 안 봤나? 계곡 봐라! 좋은 음악 몇 번 듣나? 좋아하는 시는 몇 번 읽나? 처음 읽을 때 얼마나 이해하나? 계속 보면서 심장으로 알 수 있게 된다. 리듬, 단어의 느낌 등등을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영화들도 그러하다. 존 포드 영화가 그런 영화다.

스테핀 페칫 Stepin Fetchit
 
허문영_ 이번 특별전 동안 <태양은 밝게 빛난다>를 관객과 함께 다시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이 영화에서의 흑인 묘사가 불편하다고 말하는 관객도 있었다. 존 포드 영화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스테핀 페칫(Stepin Fetchit)이 보여주는 바보스러운 언행을 말하는 것 같다.

태그 갤러거_ 스테핀 페칫의 문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하다. 미국에서 인종적 편견은 단순히 피부색의 문제가 아니라 말하는 방식과 몸 동작의 문제이기도 하다. 50년 전이라면 당신이 통화하고 있는 사람이 흑인이라면 말투만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늘에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관용의 증대인가, 아니면 다름에 대한 불관용의 승리인가. 어느 쪽의 주장도 가능하다.
<태양은 밝게 빛난다>에서 스테핀 페칫처럼 행동하는 흑인이 그 당시에 존재했는가. 그렇게 말하고 걷는 사람이 그때 존재했는가. 그렇다. 프랜시스 포드와 같은 백인 주정뱅이, 혹은 메이듀 같은 백인 정치가가 존재했듯이 말이다. 페칫은 백인의 편견을 증대시키는 특질들의 패러다임인가. 물론 그렇다. 그는 이것이 의도적이라고까지 말했다. 영화가 좋은 롤모델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같은 이유로 존 스탈의 <슬픔은 그대 가슴에 Imitation of Life>(1934)가 더글라스 서크의 1959년 리메이크작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페칫은 최악의 이미지일 것이고, 그래서 TV에서 금지되었다. 하지만 정반대로, 포드는 페칫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관용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복잡한 문제다.

허문영_ 존 포드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재확인하게 된 사실이 있다. 기획전을 준비하면서 보도 자료에 이런 내용을 써서 돌렸다. ‘존 포드는 서부극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서부극에 한정되지 않는 위대한 예술가이며, 영상시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보도기사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서부극의 거장이 찾아온다’, ‘고전 서부극의 맛을 다시 만끽하기를’. 이 기획전의 의도가 서부극의 감독으로 한정된 존 포드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고자 하는 점도 중요했는데, 이런 보도들을 보면 서부극 감독으로서의 존 포드의 이미지는 여전히 강고하다고 다시 느끼게 되었다.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서부극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뛰어난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존 포드의 영화를 보고 말하는 데 있어서 서부극이라는 틀, 혹은 장르 어프로치가 유용성이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것이다.

태그 갤러거_ 난 개인적으로는 존 포드를 서부극 감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존 포드를 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와 같은 영화와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포드는 1926년부터 1936년까지는 단 한 편의 서부 영화도 만든 적이 없다. 그가 해리 캐리와 유니버설 영화사에서 많은 서부영화를 만들었지만, 폭스사로 옮기고 난 이후, 자신의 이름을 잭에서 존으로 바꾸고 난 이후에는 서부영화를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웨스턴이 아닌 일반 극영화들이 보다 존중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밀고자>, <분노의 포도>, <롱 보이지 홈>,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같은 비서부극로 아카데미상을 받았기 때문에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포드를 서부영화 감독으로 특정화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가 영화계로 다시 돌아왔을 때, <황야의 결투>를 만들 생각이 별로 없었지만 폭스사와의 계약 때문에 의무적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자기 제작사 아르고시(Argosy)에서 <도망자>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훌륭한 영화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싫어했던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가 상업적으로 완전히 실패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일련의 서부 영화들을 다시 만들게 된다. 그중에 하나가 <아파치 요새>다. 굉장히 많은 제작비가 투여된 영화였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결국 <조용한 사나이>를 만들기 위한 전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1940년대 이후에 그의 유일한 목적은 <조용한 사나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조용한 사나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같은 배우들을 데리고 <리오 그란데>라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사실상 그 이후의 유일한 서부극은 <수색자>이다. 그 뒤로는 영화를 만들기 어렵고 돈을 벌기 위해서 이따금씩 서부영화를 만드는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됐다. <투 로드 투게더> 같은 경우는 그가 그다지 만들고 싶지 않았던 영화다. 물론 나는 존 포드가 만든 서부극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그를 서부영화 감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난 장르라는 틀 자체를 별로 믿지 않는 편이다.

허문영_ 1894년은 위대한 감독들이 많이 태어난 해다. 포드 뿐 아니라, 조셉 폰 스턴버그, 킹 비더(장 르누아르도 있지만) 등. 스턴버그나 킹 비더는 그들의 전성기에 재능에서는 포드를 능가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포드만이 1950년대를 살아남았고, 70세가 넘어서 만든 마지막 작품(<일곱 여인> 1966)에서도 그의 재능을 입증시켰다. 포드의 예술가로서의 긴 수명을 가능케 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태그 갤러거_ 오해가 있다. 킹 비더도 살아남았다. 1959년에 만든 <솔로몬과 시바>는 훌륭하다. 1956년에 만든 <전쟁과 평화>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다만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았을 뿐이다. 그 점에선 존 포드도 당대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작품 <일곱 여인>은 처참한 대우를 받았다. 재난 수준이었다. 나만 그 영화를 좋아했다. 필라델피아의 빈민지구에서 상영되었을 때, 나는 서너 번 정도 봤다. 다른 사람들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포드의 예술가적 수명의 이유? 그것은 그가 그저 훌륭한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가의 수명은 그의 재능과 의지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떤 예술가는 병이나 사적 곤경을 넘어서는 재능을 발휘한다. 존 포드가 그런 사람이었다.

해리 캐리 Harry Carey
허문영_ 포드에 관한 비디오 에세이에서 당신은 “포드적 영웅은 도착하고, 바로잡고, 떠나간다. 이 모든 것은 해리 캐리를 모델로 삼았다”고 말했다. 질문은 이것이다. 이런 영웅상이 작가들이나 감독들이 아니라 해리 캐리라는 한 배우로부터 유래했다는 뜻인가. 또 이런 영웅상은 포드 영화에만 고유한 것인가. 보통의 영화 교과서는 그런 영웅상이 대부분의 서부극에 공통적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태그 갤러거_ 그 표현에서 해리 캐리는 배우 혹은 스크린 캐릭터를 의미한다. 우리가 아는 바에 따르면(포드 연출-캐리 주연작은 3편만 남아있다), 그는 같은 캐릭터를 연기했고, 존 웨인도 같은 방식으로 연기했다. 몇 가지로 나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모델로서이다. 이것은 우선 연기와 스크린 페르소나에 관계한다. 바로 그의 느긋함(Laid-back)이다. 그는 자신을 관객에게 들이밀지 않는다. 존 웨인도 이것을 복제했다. 다른 하나는 캐릭터로서이다. 바로 선한 악인(good badman)이다. 존 웨인도 <역마차><3인의 대부> 등에서 같은 캐릭터를 연기했다. 마지막은 포드적 영웅으로서이다. 그는 가족을 재결합시키고 마지막엔 떠나간다.(<스트레이트 슈팅>의 원래 결말은 그가 마지막에 떠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그것을 해피엔딩으로 바꿨다.) ‘도착하고 / 바로잡고 / 떠나간다’는 물론 모든 포드 영화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많은 변주가 있다. <프리스트 판사>에서는 도착하지 않고 떠나가지 않는다. <황색 리본>에서도 도착하지 않는다. 떠나가지만 돌아온다. 그런 영웅상이 서부극에 공통적이지 않느냐고? 모르겠다. 나는 아마도 모든 서부극 중의 1% 정도만 보았을 것이다. 아마 더 적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서부극을 떠올릴 수 있을까. <셰인>? 혹은 세르지오 레오네 혹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서부극?(하지만 그들은 존 포드를 모방하지 않았는가). 하워드 혹스의 어떤 서부극이 이런 패턴일까? 혹은 프리츠 랑, 자크 투르뇌르, 새뮤얼 풀러? 어쩌면 <하이 눈>? 1970년대 이후 서부극의 공통 요소가 1910년대,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의 서부극에도 적용될까?

허문영_ 당신은 오늘의 영화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유를 말해줄 수 있는가. 동시대 영화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는 것이 비평가들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가.

태그 갤러거_ 오늘의 영화에 대한 내 무관심이 내 잘못인지 영화의 잘못인지는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오늘의 영화를 다루는 비평가나 프로그래머는 아니다. 나는 오늘의 영화에서 구도, 편집, 블로킹의 혁신성과 정교함을 찾지 못한다. 또한 내가 원하는 깊은 휴머니즘을 찾지 못한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의 영화들을 떠올려본다면, 오늘날에도 1년에 만들어지는 500편의 할리우드 영화 중에서 오직 2, 3편 정도만이 흥미로울 것이다. 거기에 얼마간의 외국영화를 보탤 수 있을 것이다.(물론 나는 월드 시네마의 아주 일부만을 봐왔을 뿐이다.). 나는 옛 영화의 99%도 좋아하지 않는 셈이다. 내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TV 시리즈를 좋아한다는 점은 인정해야겠다.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 <라크 라이즈에서 캔들포드까지>(Lark Rise to Candleford) 등. 물론 이들은 ‘작가’ 영화는 아니다. 프로듀서, 대본작가, 배우들이 ‘작가’들이다. 흥미로운 미장센이 많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캐릭터와 이야기가 흥미롭다. 반면 오늘의 영화들은 지루하고 흥미로운 점을 찾기 힘들다. 너무 많은 미국 영화들이 진부하고 가식적이다. 너무 많은 외국 영화들이 느리고 무겁다. 50년 전 나는 수천 편의 영화를 즐거워하며 죽치고 앉아 보았다. 오늘에는 10분 혹은 15분이 지나면 멈춘다. 내가 망가졌는지도 모르겠다. 내 잘못일까. 영화 잘못일까. 내 철학은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올바른(right)”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술의 보편적 핵심은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도덕(morality) 또한 제공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도덕은 가장 큰 즐거움이다.

허문영_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페드로 코스타에는 깊은 관심을 보여왔고 그들에 관한 글을 썼다. 이런 예외적 관심의 이유가 궁금하다.

태그 갤러거_ 아벨 페라라도 포함시켜야 한다.(적어도 <뉴 로즈 호텔>(1998)까지는 그렇다.) 그들에게는 앞서 말한 내가 좋아하는 자질들이 있다. 다른 자리에서도 말했지만, 비평가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한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아름답다’는 텅 빈 형용사 같은 것을 쓰지 않고서 말이다. 스타라우브와 코스타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왜 그들을 좋아하는지 말하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그것을 25단어로 요약할 수는 없다. 당신은 그럴 수 있는가. 나는 스트라우브의 DVD와 자막을 만들어왔다.(비공식적인 작업이어서 그는 모른다. 판매용이 아니라 내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의 작품을 여전히 좋아하지만 다니엘 위예와의 공동연출작보다는 덜 강렬하고 덜 정교하다. 얼굴들은 작고 표정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이것이 스트라우브-위예의 작품들을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존 포드 영화의 두 쇼트가 내가 막스 오퓔스, 장 르누아르, 로베르토 로셀리니, 킹 비더, 무르나우, 조셉 폰 스턴버그, 칼 드레이어, 미조구치 겐지, 스트라우브 등의 영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오늘의 영화에서 내가 찾지 못하는 것이고, 옛 영화의 1% 정도에서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한 쇼트는 <조용한 사나이>에서 모린 오하라가 존 웨인에게서 꽃을 건네받는 장면이다. 다른 쇼트는 <아파치 요새>에서 워드 본드가 성경을 읽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이 들어오는 장면이다. 서울에서 인터뷰할 때, 한 영화잡지의 표지를 보았다. 한 젊은 한국 스타가 표지에 실렸는데, 그는 마치 자기를 죽이고 싶은 것처럼 쏘아보고 있었다. 내가 말한 두 쇼트에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눈빛을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턴버그는 “예술은 한정된 공간에 무한한 정신의 힘을 압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존 포드 John F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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