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당신들은 호환마마보다 더 유해하다

by.한태식(괴수연구가) 2012-09-13조회 6,859
당신들은 호환마마보다 더 유해하다

얼마 전 SNS에서 있었던 일이다. 서울 시내 모 중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한 예술강사가 수업시간 인터넷을 통해 소개하려던 한 홈페이지가 열리지 않았다. 확인해보니 그 사이트는 유해사이트로 판명되어 학교에서는 쉽게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홈페이지는 다름 아닌 인디애니페스트 영화제. 유해한 홈페이지를 차단하는 프로그램에 애니메이션이라는 단어가 지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곧 바로 SNS 내부에서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졌고, 애니메이션, 만화 전공자들과 업계 종사자들의 분개도 빗발쳤다. 

하나의 매체를 바라보는 시대와 사회의 요구는 분명 다를 수 있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 이로 인해 형식으로서의 매체가 다양한 스펙트럼을 담아내는 좋은 그릇으로 변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요구는 매체라는 형식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식 내부의 구성, 즉 내용에 방점이 찍힌다. 만약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자체에 ‘유해하다’라는 사회의 요구가 있다면, 매체자체가 가진 특성, 즉 이미지, 그림, 움직임 등에 대한 유해함을 판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도대체 이들 중에 어떤 것이 유해하다는 걸까? 고대 그리스나, 중세사회라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성상파괴운동과 십자군 원정을 펼치던 자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면,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유해하다는 판명은 분명히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유해함의 판명이다. 물론 (어쩌면) 개별적으로 유해한 어떤 것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통제하기 위한 모종의 장치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의 필터링을 위해 모든 애니메이션을 차단한다는 것은 코미디에 가깝다. 단적으로 말해, 흔한 헐리우드 영화의 얼치기 외계인들처럼 “지구인들은 지구를 오염시키는 주범이기에 모두 몰살해야 한다”라는 논리와 다를 것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대상의 존재나 공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불관용. 이런 걸 파쇼(fascism)라 하지 않나? 맘에 들지 않는 낙서나 예술을 풍기문란이라는 법령으로 재갈을 물리고, 살인자나 강력 범죄자가 나타나면 폭력적인 게임이나, 영화, 애니메이션 등을 연결해 어떻게든 통제의 방식을 양산해내는 구조. 여기에는 분명 최근 한국 사회가 몇몇 사건들에 대해 취한 포즈와 겹쳐지는 지점이 있다. 우리에게 많은 유아용 애니메이션들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와 양보를 가르치고 있는 점을 생각해 보자. 뭐가 더 ‘호환마마 보다 더 유해’한 것들일까? 

[그림]한때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애니메이션이었던 <크라잉 프리맨>
[그림]한때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애니메이션이었던 <크라잉 프리맨>

유해함이라는 말은 임상의학적 판명을 전제로 하는 권력이다. 그것에 대한 반성이나 저항은 “국민건강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세균”과 동등한 취급이 떨어진다. 누가 암이나,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적극적인 찬성을 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임상의학에서의 유해함의 판결은 누구보다도 신중하고 신중해야 한다. 여기에 인터넷 번역기 수준의 지성이 끼워들 자리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임상의학의 권력을 대중문화의 단위로 옮겨버린 ‘유해함’은 거부할 수 없는 권력이 되어버릴 확률이 크다. 예컨대 (물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믿어두자) 유해함을 가장 대중적인 문화의 한 양식인 애니메이션에 던져두었으니 이제 담배, 암, 오염물, 녹차라떼처럼 우리들도 조만간 사회로부터 격리 수용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게임, 실사영화, 만화책 등의 관계자들 다 포함해서 말이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나오는 짤막한 이야기로 답답한 글을 그냥 마무리 해버리자. 문자가 없던 시절, 이집트의 왕에게 문자를 선물한 토트 신은 문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지혜의 묘약으로 사용될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는 ‘그것을 배운 사람이 기억에 관심을 갖지 않게 만들어 그들의 영혼 속에 망각을 낳을 것’이라며 문자의 불안함을 언급한다. 문자의 유용함과 위험성에 대한 이들의 대화는 일종의 새로운 매체(new media)에 대한 시대와 사회의 대표적인 반응을 언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자는 지금 이 시대까지 존재해 내려오며 유용함의 건재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근대의 회화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사진도 마찬가지였고,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위험한 건 정말 다른 것이었다는 점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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