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늘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왜 공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어째서 건축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나로서는 공간과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하다. 오늘 점심에 무엇을 먹을까, 내일은 어떤 옷을 입고 나갈까, 만큼이나 내가 어떤 공간을 좋아하고 그 공간이 어떻게 설계되고 어떤 재료로 마무리되었는지 관심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라고 대답해보지만 질문자들은 그다지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공간이나 건축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나와 굉장히 특별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관객들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는 것일까. 그러다 문득 우리 모두 공간에 대한 선택권을 부여받지 못한 채 주어진 공간에 순응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유럽에 가서 오래된 성이나 교회를 둘러보는 것 정도가 건축에 대한 특별한 경험의 전부일 테니, 새로운 빌딩이 생기면 찾아가서 이모저모 살펴보는 건축덕후는 조금 특이한 존재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주어진 공간에 대해 어떤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어릴 때 학교에서, 더 나아가 직장에서 그 누구에게도 어디에서 공부하고 싶은지, 어디에 앉아서 일하면 능률이 오를 것인지 물어보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준 적이 없다. 그러다 많은 사람들은 삶의 공간에 대한 무결정의 확장판인 아파트 생활을 하게 된다. 인테리어라는 이름으로 내부구조를 변경하고 디테일을 새로 손보는 중산층이 늘어가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세입자들은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집에 내 돈을 들여 고치는 것을 아깝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느새 그런 아파트가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이 되었기에 공간에 대해, 그리고 건축에 대해 생각을 해보는 것은 사치라 여기는 것도 당연할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중국마저도 방의 크기와 개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아파트를 공급하는데 한국에서는 건설사가 내 삶의 제반요소를 결정해버린 공간을 수용하기만 해야 한다. 그저 벽지 색깔을 고르는 것이 공간에 대한 결정권의 전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공간에 대해 결정 권리를 가질 때는 멀티플렉스 극장의 좌석을 결정할 때나, 카페에 가서 어디에 앉을까를 결정하는 순간 정도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 삶에서 전혀 중요해 본적이 없는 공간이나 건축에 굳이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없다. 물론 내가 사적인 공간을 어떻게 꾸밀까 하는 문제로 공간과 건축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공적인 공간과 공공건축이 어떤 경로로 결정되고 그 결과는 어떠한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우리가 공적 공간의 탄생과 논의과정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그 사회의 공공성에 대한 많은 해답을 찾게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최근 박정희기념관 건립과 동상 문제가 화제가 되고 있다. 서울시와 박정희기념회 간의 논의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중이다. 우리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의미가 있는 모뉴먼트를 만들기 위해 공공건축을 한다. <
말하는 건축 시티:홀>을 만들면서도 그 논의과정을 지켜보았다. 디자인의 결정 과정이 과잉 의미화된 정치투쟁의 장이 되는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서울시청을 새로 설계한다는 것은 그 출발부터 논쟁을 예고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서울시청의 설계 공모 지침서를 보면 우리가 건축물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 수 있다. 의미와 의미가 과잉 충돌하는 지난한 과정은 마치 정치권의 되돌이표와 같이 빙빙 도는 정치투쟁처럼 실리 없고 공허하게 보였다. 건축은 결국 디자인인데 말이다. 디자인은 디자인이고 그 자체로 보기에 좋아야 하는데 말이다. 디자인 감각을 실종시키는 추상적인 말과 한국적 콘셉트의 충돌들을 지켜보면, 건축에 관해서나 삶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의미 과잉된, 의미가 되고 싶어 하는, 의미 없는 존재들인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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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건축 시티:홀>을 개봉한 이후에는 이 다큐멘터리가 누구의 편인가를 확실하게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 선생을 지지하는 어떤 분이 잊히지 않는다. 그는 오세훈 시장과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설계자 유걸 선생을 다룬 영화가 정기용 선생을 다룬 다큐와 같은 시리즈 제목을 따르고 있다며 불쾌감을 표현했다. 논쟁적인 영화보다는 두루두루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고 칭찬받는 영화를 지향하던 나는 한국사회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일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시청 직원들에게는 매일 출근하는 직장이고, 서울시민들에게는 민원을 제출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건축이 왜 이렇게 많은 소모적 논쟁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지금이라면 서울 신청사의 새로운 디자인을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결정했을까. 디자인의 결정 권한은 누가 위임받는 것이 좋을까. 전문가로 구성된 각종 위원회가 모든 결정을 위임받는 현대사회에서 공공프로젝트의 선정은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위원회의 결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촬영하면서 위원들의 심사 과정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결정의 표수를 하나하나 확인해나갔다. 어떤 위원이 어떤 이유로 유걸 선생의 디자인을 선택했는지가 모두 공개되어 있다. 그런데도 모든 책임은 시장과 대통령이 좌파인가 우파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나 역시 영화와 관련된 심사에 위원으로 참가할 때가 있다. 과연 내가 참여한 심사의 결과에 대해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해야한다면 나는 과연 인터뷰에 응할까. 심사의 시간은 짧고 심사해야 할 내용은 많다. 그리고 심사비는 낮다. 심사에 최선을 다하기가 힘든 구조이다. 결국 결과에 대한 책임은 시스템에 미루게 된다. 공적 기금의 심사문제는 간단하지가 않다. 몇백만 원을 주는 결정부터 서울시청처럼 몇천억을 들이는 결정까지, 모든 공적 심사는 시민에게 권리를 위임받은 위원회의 결정에 의존한다. 우리가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 위원회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결정되고 누가 어떤 결정을 했는지가 투명하게 공개되었는가 하는 부분이다. 최근에는 공공 건축 프로젝트의 경우 선정된 작품에 대한 잡음을 없애기 위해 해외의 디자이너를 선호하는 경향도 있다고 한다.
누가 디자인을 하는가가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 디자인을 어떻게 구현하는가의 문제도 역시 중요하다. 각각의 재료와 요소들에 대한 간섭이 심하고 절충이 많아질수록 원래의 디자인은 실종된다. 개성은 사라지고 평균적인 결과물로 귀착된다. 창작 주체의 디자인 감각이나 주제는 주변의 개입을 통해 실종되고 심지어 왜곡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좋은 공공건축이 나오기 힘든 반면 몇몇 기업이 만드는 건축물은 완성도 있는 좋은 건축물이 많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오너의 집요한 열정의 결과일 때가 많다. 건축 분야의 전문 공무원들이 기업의 오너처럼 자신의 건축물이라는 생각으로 건축 전 과정에 애정과 관심을 쏟는 것이 좋은 공공건축을 가지는 일이 될 것이다. 서울시는 공공건축가라는 제도를 도입해서 공공건축의 질을 높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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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건축 시티:홀>은 현장 담당자의 편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자신이 담당한 프로젝트가 더 나빠지지는 않기를 바라며 피곤에 지쳐 일하는 담당자들이 참으로 많았다. <말하는 건축 시티:홀>이 그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영화가 되길 바랐지만, 그들은 자신의 피곤한 얼굴을 영화에서 보기를 원하지 않았다. 슬펐다.(계속)
#1. 아파트 생태계(Ecology in Concrete) -재개발에서 재건축으로
#2. 말하는 건축 시티:홀(Talking Architect City:Hall) -우리가 공간에 대한 결정에 직면했을 때
#3. 말하는 건축가(Talking Architect)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