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나의 건축 3부작] 1. 아파트 생태계 (Ecology in Concrete) -재개발에서 재건축으로

by.정재은(영화감독) 2017-11-20조회 6,287
[나의 건축 3부작] 1. 아파트 생태계 (Ecology in Concrete) -재개발에서 재건축으로

<아파트 생태계>는 작년에 고인이 되신 손정목 선생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라는 5권짜리 책을 읽으면서 시작되었다. 손정목 선생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는 무척 쉽게 읽히면서도 애잔한 감정을 전해주는 책이다. 선생의 거리낌 없는 주변에 대한 디스와 도시 덕후로서의 면모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특히 본인이 서울시의 도시계획국장으로 일했던 1970년대에 대한 서술은 손에 잡힐 듯 눈에 보일 듯 생생했다. 2014년 봄에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다섯 번의 인터뷰 촬영을 진행했고 일상의 모습도 촬영해 두었다. 당시 선생은 자신의 도시계획에 대한 모든 자료를 서울시립대학교에 기증하고 그 기증자료실에 매일 출근해서 새로운 책을 집필 중이셨다. 이때만 해도 이 인터뷰가 어떻게 영화에 쓰일지는 알 수가 없었다. 손정목 선생은 인터뷰 당시 혼자 거주하던 전농동 래미안아파트 내부까지 촬영을 허락하셨고 솔직담백한 말로 자신이 속한 한 세대의 종언을 예고하셨다. 나는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구상을 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손정목 선생에게 작품의 완성 시기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했다. 손정목 선생은 자신도 쓰다가 나중에 완성하려고 쌓아둔 원고 뭉치들이 많다고 했다. 그 비슷한 거냐고 했다. 나는 딱 알맞은 비유라고 답했다.

2015년에 건축가 조성룡 선생에게 연락이 왔다. 올해의 건축가로 선정된 건축가에게 제공하는 작은 전시 기회가 있다고 했다. 그 전시에 본인이 설계한 아시아선수촌아파트에 관한 영상물을 상영하고 싶다고 하셨다. 1986년에 완공된 아시아선수촌아파트는 건축가에게 아파트 설계를 맡긴 파격적인 프로젝트였다. 나는 아파트 단지 곳곳을 둘러보았다. 정말 좋은 아파트였다. 그리고 무지하게 비싼 아파트였다. 다양한 나무들과 다채로운 길들이 공원으로 이어진다. 아파트 단지 안을 거닐면서 느껴지는 거리감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다. 인간과 인간의 적절한 거리 감각을 아파트에서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최근에 만들어지는 고급 아파트들과 달리 공간들은 열려있으면서도 개인의 사적인 영역은 존중되었다. 진짜 고급아파트라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일주일 정도 촬영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목적으로 촬영된 푸티지들로 올해 봄부터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구성해보기 시작했다. 서울 아파트 역사를 개인들의 삶과 기억을 통해 전개시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다큐멘터리 만드는 방식이나 서사에 좀 변화를 추구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장기간 지속되는 다큐 촬영에 지쳤던지라 제작의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고 스토리텔링의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구성해 보고자 했다. 먼저 아파트 전문학자들의 자문과 자료조사를 통해 촬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아파트들을 리스트업 했다. 배우를 캐스팅하는 심정으로 아파트 헌팅을 다녔다. 그렇게 세운상가아파트, 여의도시범아파트, 남산제2회현아파트, 서소문아파트, 반포주공아파트, 상계동아파트단지, 목동아파트단지 등을 영화에 담았다. 시민아파트로 시작된 아파트가 어떻게 중산층을 위한 단지형 아파트로 변화했는지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주거의 의미에 대해서도 표현해보려 시도했다. 아파트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과, 경제 가치를 위해 그저 아파트를 사고팔고 재건축하기에 급급한 삐뚤어진 사랑 사이에서, 우리가 잊은 것은 없는지 질문해 보고 싶었다. 아파트에도 우리의 역사, 우리의 기억이 있다. 도시의 역사와 함께 형성된 다양한 생태계가 있다. 무책임한 주거정책과 건설자본의 비윤리성에 대한 비판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사는 아파트와 도시가 애정과 관심의 대상임을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 다큐멘터리의 역사는 주거 공간에 대한 투쟁을 기록하는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8년 만들어진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에서처럼 하루아침에 재개발로 삶의 공간에서 내몰리던 사람들을 기록하며 시작된 것이 한국 다큐멘터리였다.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이 무단 점유해 삶의 공간으로 변화시켰던 구도심의 산동네와 개천변을 공유지라는 이유로 철거하던 시대를 경유해 이제 그 공간들은 아파트로 빽빽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파트들이 이제는 재건축이라는 새로운 화두에 직면해 있다. 쫓겨나면 갈 데가 없었기에 절박했던 폭력적인 재개발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그 아파트 단지로 이루어진 공간들이, 이제 재건축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공간 파괴의 시작점이 되고 있다. 아파트에 살던 세입자들은 재건축이 결정되면 그냥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이주비를 받아서 떠나는 세입자들에게 재건축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혜택을 주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공적인 녹지공간을 줄이고 최대한의 사적 공간 확보와 고층화를 원하는 것이 이전처럼 정부나 서울시가 아니라 아파트 소유자들이 주축이 된 재조합이라는 것이다. 현재 강남3구의 아파트 재조합들과 서울시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나는 과거 국가권력의 폭력적인 철거를 탓하는 것은 차라리 쉬운 편에 속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내부 안에 아우성치는 아파트 재건축을 통한 불로소득에 대한 통제 불능의 끝없는 욕망은 정말 알아갈수록 답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국가권력에 대해서는 공공성의 잣대로 비판할 수 있지만 내 이웃의 이기적인 탐욕과 욕망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답을 찾기가 힘들다. 재건축을 통해 불로소득의 맛을 본 노령세대의 부동산 사랑은 이제 우리 모두의 열망으로 자리 잡았다. 다들 자기가 사는 아파트의 자산가치가 재건축을 통해 한 번 더 뻥튀기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서울은 다시 아파트 재건축의 시대에 돌입하고 있다. <아파트 생태계>를 촬영하며 그 욕망을 비교적 가깝게 볼 수가 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국가권력에 대한 분노를 보여줄 수 있다. 대기업의 불법성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 내부의 부동산 열정을 각성하게 하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집과 거주가 본연의 의미를 찾게 될 수 있을까.

<아파트 생태계>를 완성해 몇 개의 영화제를 통해 공개했다. <말하는 건축가>와 <말하는 건축 시티:홀>에 이어지는 건축 3부작의 세 번째 작품이다. 주변에서 언제 극장에서 개봉하는지, 어떻게 볼 수 있는지 묻곤 하지만, 현재로서는 개봉을 고려하고 있지는 않다. 다큐멘터리의 개봉이란 나에게 100번의 관객과의 대화를 의미하고, 친구와 지인들에게 각종 민폐성 부탁을 해야 하는 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배급이 결정되지 않은 영화의 창작 활동이 피해갈 수 없는 그! 예정된 가시밭 길을, 이번에는 왠지 피하고만 싶다. 나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극장배급이 아니라면, 어떤 경로로 관객과 만날 수 있는가를 모색 중에 있다. 그 모색에 대한 간단한 생각을 피력하며, 이번 연재분을 마치고자 한다. 

많은 개인들이 다큐멘터리 제작에 뛰어들고 있다. 그들은 의뢰를 받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풍덩 뛰어들어 일단 촬영을 시작한다. 만들고 나면 배급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촬영을 하고, 마침내 작품을 완성한다. 그러나 배급의 방법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최근 들어 공적 매체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는 다양한 내용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쏟아지고 있다. 한국 다큐멘터리 창작자들의 질적, 양적 성장을 지켜보노라면 놀랍기만 하다. 혼자만의 기대일 수도 있겠지만, 곧 다큐멘터리가 한국영화를 이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방송 쪽에서 창작의 자유를 위해 넘어온 다큐멘터리스트, 관객과의 접점을 넓히려고 미술의 영역에서 다큐멘터리를 시도하고 있는 아티스트들, 데뷔작으로 다큐멘터리를 선택한 신인 감독들까지, 서로 다른 영역에서 다른 목표로 다큐멘터리에 입문하고 있다. 그러나 배급에 있어서는 그저 극장용 예술영화 배급시장에서의 개봉만을 바라보고 있다. 독립적인 시선과 개인적인 접근을 허용하는 방송 다큐멘터리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독립다큐들이 방송 편성권에 들어갔을 때 언제나 완성도 문제를 지적받는다. 매끄러운 전개와 친절한 방송어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송되기가 힘들다. 다큐멘터리의 영화적, 개인적 표현을 인정하고 ‘KBS 독립영화관’ 같은 프로그램으로 독립다큐들을 정기적으로 방송해 주면 좋겠다. 다큐멘터리는 지식이나 정보의 입체적 전달이 가능한, 교양을 쌓는 데 무척 우월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정보나 보도 중심의 다큐가 아닌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시선에 포착된 이야기들로도 충분히 새로운 교양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공영 방송국이 시민 교양의 향상을 위해 제 기능을 다 하기를 바라본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아파트 문화를 대략 10부작 정도의 시리즈로 만들어 보고 싶다.(계속)

#1. 아파트 생태계(Ecology in Concrete) -재개발에서 재건축으로
#2. 말하는 건축 시티:홀(Talking Architect City:Hall) -우리가 공간에 대한 결정에 직면했을 때
#3. 말하는 건축가(Talking Architect)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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