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눈길 Bare Feet In The Snow 임권택, 1976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5-08-07조회 11,254
맨발의 눈길 스틸이미지

나의 애도의 방식. 먼저 작별인사를 해야 할 것 같다. 이제 여기 없는 이름. 서정민 촬영감독은 한국영화사에서 빛나는 이름 중의 한 분이다. 그건 누구라도 인정할 것이다. 촬영이라는 자리. 연출의 곁. 임권택에게 정일성이 따라오는 것처럼 서정민을 이야기할 때는 이만희가 따라왔다. 하지만 종종 현장에서 그보다 더 중심에 있는 자리. 일화에서 시작하겠다. 나는 고인을 현장에서 단 한 번 뵈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여고괴담> 현장을 견학하게 되었다. 먼저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998년은 어떤 단절이 이어지던 시간이었다. 전혀 준비되지 않았지만 갑자기 새로운 영화들이 사방에서 나타났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미학적 연대도 하지 않았으며(이를테면 네오 리얼리즘), 그렇다고 같은 영화사에서 자본의 일시적인 변덕의 힘으로 나타난 것도 아니며(이를테면 쇼오치쿠 누벨바그), 어떤 정치적 입장도 공유하지 않았으며(이를테면 체코 누벨바그), 같은 시대의 공기를 공감하고 있지도 않았다. (이를테면 파리의 누벨바그) 그냥 난데없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오던 충무로에 갑자기 새로운 영화가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전통을 따랐고, 누군가는 희미하게 연결 지었고, 누군가는 완전히 외면했다. 1996년 5월에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개봉하여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고, 그해 11월에 김기덕의 <악어>가 소리소문 없이 개봉한 다음 사라졌다. 1997년 이창동이 <초록물고기>를 찍었다. 그리고 송능한이 <넘버 3>를 찍었다. 정반대의 두 영화. 그 이듬 해 1998년,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와 이광모의 <아름다운 시절>이 각자의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같은 해 봄에 김지운이 <조용한 가족>을, 가을에는 임상수가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찍었다. 이 시기를 소개하면서 서방세계에서는 포스트 뉴 ‘코리언’ 웨이브라고 부른다. (첫 번째 물결은 1989년 장선우, 이명세, 박광수가 나타났을 때이다. 그런 다음 이 영화들을 앞선 영화들에서 분리해냈다) 박기형은 충무로 도제제도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고 서울단편영화제에서 (거의 중편에 가까운) <과대망상>으로 주목을 모은 다음 곧장 첫 번째 장편영화 <여고괴담>을 만들었다. 지금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그때는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그는 다른 ‘신인’ 감독들과 달리 장르영화로 곧장 달려갔다. 나는 새로운 작가는 새로운 영화를 발명하면서 발견되지만 영화산업 전체가 새로워질 때는 새로운 장르영화가 나타날 때라는 로빈 우드의 문장에 밑줄을 그은 세대이다. <여고괴담>은 박기형의 야심과 상관없이 앞으로 십 년의 한국영화 산업을 결판 지을 거라는 생각을 그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박기형은 이 새로운 물결에 합류하였다. 현장을 보러 간 날은 마지막 클라이맥스 장면을 위해 밤샘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 영화의 촬영이 서정민이었다. 그때 서정민은 이미 148편의 영화를 찍었고 현장에서 모두가 어려워하는 ‘촬영감독님’이었다. 149번째 영화라는 표현을 한번 상상해주기 바란다. 1961년에 첫 영화를 찍은 촬영감독과 어떤 도제제도의 수업 없이 1998년에 첫 영화를 찍고 있는 감독.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배우들은 이미연을 제외하고 그때 모두 신인이었고 박기형은 첫 번째 장편영화를 찍는 상황에서 곤혹스러워하는 게 눈에 보였다. 현장에 스태프들이 너무 많았고 콘티는 정확하지 않았고 (아마도 중간에 무언가 문제가 생겨서 변화가 생겼음이 틀림없고) 게다가 영화촬영을 하면 아침이 일찍 찾아오는 법이다. 온 사방이 교실 창문이었고 필름으로 촬영하던 그때는 지금처럼 색 보정 작업이 많은 부분을 감당할 수 없었다. 박기형은 완전히 지친 상태였고 새벽까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조감독을 불러 몇 장면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 그때 카메라 옆에 조용히 있던 서정민 촬영감독이 다가와서 화가 난 목소리로 박기형을 꾸짖었다. “박기형, 당신 으악새 감독이야? 이거 데뷔작이잖아. 첫 번째 영화 찍는 감독이 이러면 안 돼. 이 바닥에서 한번 호구 잡히면 그냥 끌려다니다가 인생 종 치는 거야. 창문에 암바(暗部處理) 쳐 줄 테니까 당신이 원래 하고 싶었던 거 그냥 해. 그래도 돼, 데뷔감독은 그래도 돼” 시간이 오래되어서 기억이 희미해지긴 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나는 이 사람이 멋있는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서정민 촬영감독
서정민 촬영감독
 
물론 서정민의 대표작들은 1960년대에 이만희와의 작업이다. 그 중에는 <만추>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다음 1980년대에는 ‘돌아온’ 이장호와 <바람 불어 좋은 날>을 시작으로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영화들을 찍었다. 서정민의 마지막 파트너는 김기덕이었다. <야생동물보호구역> <파란 대문>과 <수취인불명>을 작업했고, 김기덕은 가끔 내게 서정민 ‘촬영감독님’과의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석임에도 최대한의 존경을 표하는 태도를 취한 다음 기꺼이 그와 함께 작업한 현장에서 “영화를 배웠다”는 표현을 썼다.

임권택과는 많은 작업을 하지는 않았지만 50편의 습작을 찍고 난 다음 그 자신의 ‘첫 번째’ 연출이라고 부른 <잡초>를 서정민이 찍었다. 아마도 임권택을 임권택답게 만든 그 순간. 거의 필사적인 도약의 결정. 차라리 절망으로 인한 결심이라고 불러야 그 자리. 그때 임권택은 이름을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수많은 촬영감독들과 영화를 찍었다. 그 많은 이름 중에서 임권택은 <잡초>를 위해서 서정민을 선택했다. 이 영화는 임권택이 제작한 처음이자 유일한 영화이다. 임권택과 서정민이 함께 작업한 영화는 모두 14편이다. 그러므로 160편에 달하는 촬영목록을 생각하면 아마도 그저 잠시 머문 것 같다. 처음 작업한 영화는 1970년 <애꾸눈 박>이었고, 순서대로 이야기하면 1971년에는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둘째 어머니> <명동 삼국지>, 그리고 1972년에는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명동잔혹사>, 1973년에는 <잡초> <대추격> <증언>을 찍었다. 그런 다음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1975) <맨발의 눈길>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를 찍었다. 그 사이에 <왕십리>와 <상록수> <족보>를 이석기와 찍었다. 그저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만희는 서정민과 헤어진 다음 이석기와 작업을 했다. 연출과 촬영 사이의 각자의 모색. 끊임없는 실현. 이미지 사이에서의 미세한 차이들. 이 시기에 임권택은 정일성을 만나 <신궁>(1979)을 찍었고, 1980년에 <복부인>을 서정민과 찍었다. 그런 다음 1984년에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를 찍은 게 마지막이다. 서정민은 다른 감독들과 그 이후에도 계속 작업했고 그 명단에는 김기영도 포함되어 있다. 임권택도 물론 이석기, 구중모, 그리고 정일성과 다음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거기서 끝났다. 영화가 무언가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은 것일까. 나는 그것이 안타깝다. 왜냐하면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는 임권택의 모든 영화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의 한 편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의 새로운 예술적인 우정이 막 시작하려는 순간 멈춘 것만 같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우정을 나누려는 준비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다.
 
<맨발의 눈길>의 혜선(左), <잡초>의 분례(右)
<맨발의 눈길>의 혜선(左), <잡초>의 분례(右)

 
두 사람의 인연을 이야기하면서 <맨발의 눈길>을 선택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임권택 감독께서 단 한 번도 긍정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잡초>를 한 번 더 찍은 것이라고 거의 단정 내리고 싶어진다. 다만 이렇게는 약간 망설인 끝에 덧붙였다. “그 영화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잡초>를 쓴 나한봉씨 밑에서 오랫동안 수업을 쌓은 박찬성씨에요, 아마 그런 영향이 있겠지요” 그런데 그 원작을 찍은 사람이 그걸 몰라볼 수가 있을까. 예술에서 한 번 더 한다는 것. 임권택의 다시 한 번. <잡초>는 분례가 차례로 네 명의 남자를 만나면서 그 세월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맨발의 눈길>은 고아원에서 나온 혜선이 세 명의 남자를 만나면서 그 세월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두 영화의 이야기는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이미 어디선가 두 점의 <양산을 든 여인>을 예로 들면서 임권택이 모네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임권택은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실패를 응시하는 것. 하지만 그 실패가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다. 이때 놓쳐서 안 되는 것은 임권택이 반복할 때 그 과정에서 무엇을 훔쳐내고 싶어 하는지를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잡초>를 볼 수 없다. 사라진 자리. 그리고 임권택은 그 자리에 다시 왔다. 도대체 다시 온 것은 무엇일까. 임권택은 거기서 무엇을 다시 한 번 ‘재연’하고 싶었던 것일까. 거기에 어떤 보물이 있었던 것일까. 이때 임권택은 <맨발의 눈길>을 찍으면서 <잡초>를 찍은 서정민을 다시 불렀다. 그 해에 임권택은 서정민과 이석기 두 촬영감독과 번갈아 작업했다. 그저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서로의 일정이 맞았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서정민의 쪽에서 바라보면 좀 더 기괴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서정민은 이 해에 6편의 영화를 찍었고 두 편을 임권택과 작업했다. 이때 두 편은 <맨발의 눈길>과 <낙동강은 흐르는가>이다. 다시 설명하겠지만 <낙동강은 흐르는가>는 마치 <증언>에 흩어져있는 수많은 단편 중의 하나를 다시 한 번 확장시켜놓은 것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증언>은 (특수촬영을 장석준이 하고) 서정민이 찍었다. 1976년에 임권택은 이미 해본 것을 다시 한 번 해보는 것만 같은 반복 안에서 그 무언가를 확장시켜놓은 다음 마치 이미 해본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서정민과 다시 한 번 그걸 해보고 있다. 그 안에서 무엇이 활동하는 것일까. 거기서 무엇을 수정하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 차라리 그 과정에서 무엇을 느껴보려는 것일까. 이 우연의 일치는 무언가 자꾸만 이 과정을 능동적인 선택이라고 해석하고 싶게 유혹한다. 
 
두 번째 이유는 다소 내속적인 성질에 관한 설명이다. 반복은 여기서 기이하게도 재귀의 순환운동 안으로 들어서자 자기 파괴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맨발의 눈길>을 처음 보면 무언가 영화의 기호들이 대부분 부서졌다는 인상을 준다. 단지 실패했다고 설명하면 쉽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어떤 순간들이 이 영화에 있다. 그렇다고 일부러 그것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어떤 자리에서 영화가 멈춰 서 있다. 그냥 단순하게 말하면 기괴하리만큼 불만족스러운 히스테리에 가득 차 보인다. 임권택은 단 한 번도 단편영화를 찍은 적이 없다. 그건 그의 세대들이 모두 그러하다. 다만 옴니버스의 형태로 다른 감독들과 함께 만들기는 했다. 그래서 이미 <맨발의 눈길> 이전에 <명동잔혹사>를 변장호, 최인현과 함께 찍었다. 하지만 홍상수의 <첩첩산중>(<디지털 삼인삼색>의 한 편), 박찬욱의 <심판> <찬드라의 경우>(<여섯 개의 시선> 중의 한편), <컷 Cut!>(<쓰리 몬스터>의 한 편) <파란만장> <청출어람>, 봉준호의 <인플루엔자>(<디지털 삼인삼색>의 한 편)처럼 적극적으로 작업하지 않았다. 하지만 <맨발의 눈길>은 혜선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세 명의 남자와의 우여곡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 개의 이야기, 세 편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이다. 임권택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렇게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그는 한 편의 영화 안의 고유한 리듬, 그 안의 균형감각, 그 세계의 일관성,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감흥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적어도 그런 의미에서) 고전적인 연출자이다. 심지어 실패할 때조차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거기서 무너지면 그건 더 이상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치 예외의 기준을 세워둔 것처럼 그냥 밀고 나아간다. 심지어 어떤 곤궁처럼 여겨지는 데도 상관없다는 것만 같은 어떤 태도가 있다. 틀림없이 이 영화의 어느 순간에는 재앙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차라리 어떤 균형을 갖추고 그 위험을 빠져나가는 것이 더 참을 수 없다는 최악의 방식에 이끌리고 있다. 말하자면 여기서는 매번의 영화가 하나의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임권택의 불평을 쫓아내는 임권택이 있는 것만 같다. 세 조각이 나버린 영화,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만 같은 이야기. 서로 완전히 다른 리듬. 혜선을 연기하는 주연 이인옥만이 가까스로 하나로 연결되는 세 개의 단편. 여기서는 마치 이 영화를 자신의 영화 목록 안에서 예외의 자리에 두어야만 한다는 대립 같은 것이 있다. 임권택의 영화를 부주의하게 다루는 대부분의 비평의 공통점은 이 대립을 간과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상투적인 공식. 임권택은 상투적인 상업영화에서 시작했으며, 새마을 영화와 반공영화를 만든 어두운 시기를 거친 다음 <만다라>를 전환점으로 하여 자기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운운, 이라는 식의 전형적인 도식화. 물론 이 설명이 거짓은 아니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과정을 간과하고 있다. 나는 반대로 임권택의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대립의 과정을 발견한다. 무언가 가까이 다가간 다음 혹시 그것이 오류가 아니었을까, 라는 질문만큼 뒤로 물러난다. 여기에는 예술에서 오래된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자유로운 선택 안에는 이미 강제된 선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 이때 서정민은 여기서 무엇을 보았을까. 다시 그 자리에 왔는데 이미 한 것을 스스로 부수고 있는 것을 바라볼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초대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임권택은 이 사이에 <왕십리>와 <족보>를 만들었다. 두 영화의 조건이 특별하게 좋은 것도 아니었으며, 임권택이 하려고만 했다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었다. <맨발의 눈길>은 그것을 하지 않은 영화이다. 나는 임권택을 위하여 일부러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맨발의 눈길>이 걸작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는 실패작이다. 하지만 이 실패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완전히 내부적인 폭발로 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맨발의 눈길>은 새마을영화도 아니고 반공영화도 아니다. 그렇다고 문예영화도 아니다. 이 영화는 우수영화의 요건과 아무 상관 없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해 우수영화에 선정되었다) ‘고무신 부대를 불러오는’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와도 거리가 멀고, ‘노골적인 노출’을 염두에 둔 장면도 없다. (<별들의 고향>에서 시작해서 <바보들의 행진>에서 정점에 오른) 대학생 관객들을 향한 ‘영상시대’ 영화들과 합류할 생각도 없다. 말하자면 임권택에게 <맨발의 눈길>은 무언가 필사적인 이행의 과정이라는 자리에 있는 매개자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어쩌면 불가피한 교차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궁극적으로 실패를 목표로 한 영화라고 부르고 싶은 기획. 다소 위험을 무릎 쓰고 말하고 싶다. 세 번의 가정. 어쩌면 임권택은 더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 <잡초>를 부숴버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미 부숴버릴 수 없는 <잡초>를 부정하기 위하여 <맨발의 눈길>이 필요해진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이 출현의 재귀성이 가리키는 것은 임권택 자신이 스스로 그때의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시켜 보인 다음 그걸 실패로 간주하는 방법을 채택한 것은 아닐까.
 
맨발의 눈길 스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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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을 나서는 혜선
 
나는 이 괴이한 영화를 한 번 본 다음 망설이지 않고 즉시 다시 보기 시작했다. 임권택은 같은 이야기를 두 번 찍었고 나는 같은 영화를 (그 자리에서) 두 번 보았다. 첫 쇼트는 ‘日新院’이라는 팻말을 보여준다. 한 소녀가 고아원을 나서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그녀와 함께 여기서 자란 것 같은 아이들과 원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배웅을 하면서 손을 흔들고 있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너무나 기쁜 듯, 마치 이곳을 탈출하기라도 하듯, 어쩌면 감옥을 떠나는 사람처럼, 그렇게 밝은 미소로 가방 하나를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선다. 아마도 내내 거기서 자랐을 텐데 그렇게 한 치의 미련도 없을 수 있을까. 마치 뒤를 돌아보기라도 하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오직 앞만 보고 간다. 영화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잘 알기라도 하듯 뒤에서 손을 흔드는 아이들과 원장에서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그녀는 마침 기다렸다는 듯 도착한 버스를 타고 떠난다. 그런 다음에야 안심을 하듯이 맨 뒷자리에 잠시 뒤를 돌아보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다. 그렇게 떠나가는 그녀는 아마도 어제, 혹은 며칠 전, 아니면 방금 전 들었을 원장님의 목소리를(voice_over_narration) 듣는다. 이 장면이 아무렇지도 않게 슬그머니 지나가고 있지만 수상쩍은 것은 명백히 원장님의 목소리이며, 그 목소리는 떠나가는 혜선의 마음속에서 다시 불러낸 것인데, 그녀를 떠나보내는 사람들 틈에 서 있는 원장님에게 혜선도, 영화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이한 효과가 일어나는데 마치 원장님의 목소리는 고아원 그 자체의 목소리가 되어 그녀의 운명을 예언하는 신탁의 소리처럼 들린다. 좀 더 간단한 설명.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 

.... “너의 실제 나이는 스물도 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마는 그야 어쨌든 우리 고아원에서 올린 호적상의 나이로는 만 십 팔세가 되었다. 규정에 따라 우리 고아원에서 제적되었고 혜선이 너는 이제 사회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란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하지가 않아요. 어린 시절을 고아원에서 보낸 너희들은 막연히 정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매사에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아요. 그건 항상 실수의 원인이 되기도 하거니와 매우 위험한 일이야. 그 점 명심하고 열심히 살아라. 너의 앞길에 행운이 있길 빌겠다” 

우리는 이 조언이 사실은 예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동시에 이 말은 반어적인 방식으로 실현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혜선은 앞으로 ‘정 때문에’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쳐 대부분의 일을 그르칠 것이며, 그 실수로 점점 위험해질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정에 충실해지면 질수록 점점 더 행운은 그녀 곁을 떠나가고 불행해질 것이다. <맨발의 눈길>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대사는 없다. 혜선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으며 다시 한 번을 반복할 때마다 원래의 자리보다 더 나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때 점점 더 사태를 나쁘게 만드는 정(情)을 준다, 는 행위에 대해서 임권택은 마치 악을 대하는 것처럼 약간 몸서리치면서 바라본다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녀 앞에 누군가 나타나고 그러면 그녀는 그에게 반응한다. 이때 이 반응의 동사(動詞)를 정을 준다, 라고 정의내릴 때, 그렇게 나쁜 사태를 일원화시킬 때, 매번 다른 장면들을 그렇게 나쁜 하나로 해석할 때, 사회가 자신과 처음 접촉하는 텅 빈 형식의 출현을 파괴하는 하나의 원리로 귀납 시킬 때, 거기에는 임권택이 세상과 맺는 계약으로서의 정(情)에 대한 실망이 담겨있다. 나는 지금 이 사태를 단순하게 통속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맨발의 눈길 스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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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구, 이별
 
이때 우리가 놓쳐서 안 되는 것은 혜선이 그 남자들을 만났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남자들이 혜선을 기다렸다고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혜선에게는 정(情)의 순환 속에서 단지 오작동을 일으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순환에서 과잉하는 순간 발생하는 그 잉여의 처리에서 실패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나는 약간 반어적으로 사태를 뒤집어보고 싶다. 혜선은 왜 이 세 명의 남자를 반대의 순서로 만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안타깝지만 대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추락의 과정은 혜선이 고아원 원장님의 마지막 한 마디인 행운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실수를 해야만 마지막에 행운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고아원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만나는 남자들의 요구를 잘 알고 자신이 그들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 위한 능동적인 전술을 전개했다면 혜선은 그저 첫 번째 남자에 머물게 되었을 것이다. 임권택의 두 번 만들기에 호응하듯이 반복해서 두 번 보기. 맨 마지막 장면을 본 다음 다시 앞으로 돌아오면 첫 번째 남자인 명구와 행복(하지만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자리에서 멈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영화 ‘이후’를 물어보고 싶다. ‘아직 끝나지 않은’ 영화 안에서 명구는 자기 앞에 나타난 돈 많은 집의 딸이 청혼을 하자 (그 과정을 영화는 설명하지 않지만 하여튼...) 그는 혜선을 만나지 못한 한 달 사이에 마음을 바꾼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가능성을 추론해볼 수 있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면, 그러니까 혜선의 뜻대로 명구와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 할지라도, 그 결혼은 명구 앞에 다른 기회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매우 연약하게 맺어진 일시적인 정지에 불과하다. 어쩌면 이 첫 번째 실패가 단지 서둘러 온 것이라고 설명해볼 수는 없을까. 

그런 다음 (약간의 시간을 건너뛰어) 혜선은 길거리에서 포장마차를 하는 자리로 간다.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다. 고아원에서 처음 나왔을 때 그녀는 양장점에 의탁해서 살면서 그녀를 맡겨야 했다. 이제 그녀는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녀의 운명에 대한 스스로의 일보전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운명이 집행되는 과정에서의 방점의 이동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운명의 신비주의를 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집행되는 방식은 운명의 유물론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운명은 반복되지만 그 주인이 발 딛고 서 있는 토대에 의해 끊임없이 변주되는 것이다. 거기서 혜선은 운명에 맞선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하게 그 과정이 운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임권택이 그 어느 한 편을 중심으로 영화 전체가 바뀌는 대신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들 전체의 사이를 통해서 무언가 그의 세상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읽어내고 싶다. 물론 임권택은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운명의 인과율에 대해서 항상 체념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운명은 동시에 혜선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지는 과정이라는 변화가 포함되어 있다. 운명에게 아니요, 하고 말할 때 욕망에게는 좋아요,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물론 그 둘은 화해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둘 다에게 동시에 충실해지는 방법을 택하는 기술을 익혀나가고 있는 중이다. 운명 안에서 자유롭게 살기. 그때 임권택은 그 자유가 대가를 치르는 대신 반대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 내주어야 할 대가를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는 단지 주체의 전복만이 아니라 좀 더 까다로운 변화가 담겨있다. 그때 표정을 찡그리게 되는 쪽은 세상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운명이 자신을 수행하기 위해서 세상을 작동시키고 있는 자신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로소 임권택은 그것이 주체의 잘못이 아니라 세상의 실수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논점이 남았다. 나는 잘못과 실수를 바꿔 쓴 것이 아니다. 그 둘은 서로 자리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임권택이 여전히 자유 앞에서 망설이는 순간이다.
 
맨발의 눈길 스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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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석, 첫만남
 
약간 장황하게 설명하겠다. 혜선은 거기서 “하던 사업을 말아먹고 그냥 마음 편하게 트럭운전이나 하면서 살겠다”는 희석을 손님으로 만난다. 그는 어느 모질게 비바람 치는 날 자신이 머무는 여인숙 앞에서 창문 바깥으로 비바람에 날아갈세라 한밤중에 포장마차의 포장과 혼자서 씨름하는 혜선을 보고 달려나가 도움을 주고 그날 밤 두 사람은 ‘정을 맺는다’ 혜선은 자신이 모은 돈을 털어 희석을 위해 트럭을 사고, 두 사람은 행복해진다. 만일 여기서 멈추었다면 이 이야기는 한 번의 비극과 다른 한 번의 행복을 통해서 실패와 보상이라는 방식으로 짝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다시 한 번 운명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희석은 예정보다 집에 늦게 돌아오는 날 혜선으로부터 왜 늦었는지를 추궁당한다. 그는 부끄럽긴 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오는 길에 한 여자를 태워줬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혜선은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잠든 희석을 깨우고 또 깨워가면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다그쳐 묻는다. 여기서 이 시퀀스는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웠지만 어느 쇼트를 지나가면서부터 점점 기괴해지기 시작한다. 핵심은 혜선이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만족할만한 진실을 얻는 것이다. 물론 그 지식은 희석이 길에서 태워준 여자와 섹스를 했다는 고백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 지식을 고백받기 전까지 혜선의 추궁은 끝나지 않는다. 혹은 만족하지 않는다. 물론 그 고백을 알게 되는 순간 동시에 얻게 되는 것은 더 큰 의심이다. 어떤 의심? 이제 미래에도 그런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의심. 선수 친 의심. 그 고백의 지식은 즉각적으로 미래 시제가 된다. 희석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의 반복된 재촉에 지쳐 남은 진실을 모두 말한 다음 잠을 청한다. 하지만 지식의 활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트럭으로 화물을 운송하는 희석 옆자리에 (마치 감시라도 하듯) 혜선이 사이좋게 앉아있다. 금실 좋은 부부처럼 사이좋은 대화를 나누던 혜선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길거리에 태운 그 여자 이야기를 다시 들려달라고 조르기 시작한다. 희석은 그 이야기를 왜 다시 꺼내 드느냐고 하지만 그녀는 심심하니까 그런다고 대수롭지 않게 덧붙이면서 다시 한 번을 재촉한다. 희석은 내키지 않으면서도 마치 그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것이 용서를 구하기 위한 행동이 되기라도 하듯이 한 번 더 한다. 즉각적으로 이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명구로부터의 배신을 본 다음 두 번째 이야기를 보는 중이다. 혜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희석이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상황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이때 혜선의 행위는 사실상 희석에게 첫 번째 상황의 반복을 제발 한 번 더 해달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희석은 자신이 해 보지 않은 행위를 반복해야 하는 자리에 불려가는 중이다. 여기서 혜선이 견딜 수 없는 것은 운명이 그녀를 이용하고 약탈하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거짓에) 속지 않기 위해 (있지도 않은 환상에) 속는 중이다. 혜선이 희석의 이야기(의 지식이 불러일으키는 환상의 서사)를 견디지 못하자 마치 그에 대한 응답이라도 하듯이 한겨울 산속에서 트럭이 고장 난다. 두 사람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희석은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부속품을 사러 읍내로 사고 혜선은 여기에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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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석, 트럭의 고장, 혼자 남겨진 혜선
 
우선 이 결정이 바보 같다는 지적을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한겨울 산속에서 히터도 틀 수 없는 고장 난 트럭과 함께 이미 저녁이 시작되고 있을 때 (영화에서처럼) 아내 혼자 여기에 남겨두고 부속품을 사러 가는 쪽과 차라리 (영화에서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트럭을 여기에 남겨두고 두 사람이 함께 읍내에 간 다음 혜선이 읍내에서 기다리며 희석이 트럭을 고쳐 읍내로 돌아오는 편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누구라도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트럭은 고장이 났고 부속품은 산속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렇다면 트럭을 여기에 놓아둔들 어둠이 다가오는 밤에 누가 가져갈 수 있겠는가. 혹은 트럭을 훔쳐갈 생각이라면 혜선 혼자서 그걸 무슨 힘으로 막을 수 있을까. 하지만 희석은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린 다음 혜선을 남겨놓고 혼자 부속품을 구하러 간다. 마치 거기서 보이지 않는 방해의 손길이 나타나기라도 한 듯 부속품 가게의 주인은 어디론가 가게를 비웠고 점점 어둠이 다가온다. 완전히 어둠이 내린 다음에야 비로소 부속품을 구한 희석은 택시를 부를 도리가 없자 그 먼 길을 뛰어서 가야 한다. 이때 임권택은 희석과 혜선을 번갈아 보여준다. (cross_cutting) 혜선은 어둠 속에서 무서워하기보다는 지금 이 시간에 희석이 자기를 버려두고 읍내에서 술집 여자와 벌거벗고 따뜻한 이불에서 뒹구는 환상에 사로 잡혀 괴로워한다. 세상은 짓궂게도 혜선이 좀 더 그녀 자신의 환상을 발전시킬 시간을 벌게 하기 위하여 어두운 산길을 달려가는 희석 앞에 자전거를 탄 경찰을 등장시킨 다음 그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서로 끌고 간다. 그때는 종종 산을 타고 간첩들이 남파된다는 이야기가 떠돌던 시절이라는 사실을 계산에 포함시켜 주기 바란다. 나는 세상의 실수와 주체의 잘못을 대립시켰다. 당신은 내게 간단하게 반문을 제기하고 싶을 것이다.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은 채 지금 부속품을 구하기 위하여 추운 겨울날 온 동네를 돌아다닌 다음 어두운 산길을 달려오고 있는 희석을 의심하는 건 혜선의 잘못이 아닌가요? 물론이다. 하지만 당신은 요점을 놓쳤다. 핵심은 세상의 실수가 주체의 잘못에 항상 선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의 잘못은 여기서 세상의 실수에 대한 효과처럼 나타난다. 자신의 환상에 완전히 사로잡힌 혜선은 먼동이 틀 무렵인 새벽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트럭에 도착한 희석에게 더럽다, 고 몇 번이고 외치면서 개, 돼지, 늑대, 짐승이라고 부른다. 희석은 혜선의 비난이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길거리에 희선을 버려두고 트럭을 끌고 혼자 떠난다. 이 행동은 정확하게 희석이 길거리에서 세워달라는 낯선 여자를 태워준 친절에 대한 정반대의 선택이다. 그는 이전에 길거리에서 낯선 여자를 태워주었고 이번에는 자신이 함께 살고 있는 여자를 길거리에 버리고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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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선의 불길한 예감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세상의 실수와 주체의 잘못은 자신의 효과를 타자가 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혹은 주체는 서사에서 자기의 위치를 포기하지 않는다. 혼자 남겨진 혜선은 희석이 떠나간 다음 약간의 시간을 길에서 보낸다. 그런 다음 임권택은 다시 한 번 혜선과 희석을 번갈아 보여준다. (cross_cutting) 이때 이 둘 사이를 오가는 환상의 침입은 정반대로 진행된다. 이번에 환상에 시달리는 것은 희석이다. 혜선은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여보, 를 외치며 눈길을 달려오지만 트럭은 떠난 다음이다. 그런데 희석은 바로 그 시간에 운전을 하면서 그런 혜선을 떠올리며 산골 비탈 눈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오던 길로 되돌아 가기 위해 운전대를 반대로 돌린다. 사태는 당신의 예감을 벗어나지 않는다. 뒤늦게 출발한 혜선은 마침 도착한 버스를 타고 간다. 사실 그녀에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그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자꾸만 창문 바깥을 두리번거린다. 그리피스 이후 오래된 관습. 서로 다른 두개웰염獒옐瑛黔옘哉엔엽냈颱玖庸?오가기 시작할 때 그 둘 사이의 간격은 점점 좁아지고 또한 점점 빨라질 것이다. 하나의 목표. 하지만 이 방법에는 단지 둘 사이의 교차가 아니라 반드시 그사이를 연결하는 상상적 제3항이 끼어든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만일 그 둘 사이를 연결하는 그 무언가의 작용이 없다면 이 둘 사이의 연결은 사실상 무효화 되거나 혹은 (종종 코미디에서 허무하게 종결지어지는) 조롱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이 제3항을 운명이라든가 혹은 영화 바깥의 관객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정의를 내리지 않는 것이다. 영화이론은 이 3항을 정의내리기 위해 긴 시간 논쟁을 했고 그 결과 어떤 식으로건 그 항을 개념화하는 순간 이데올로기적 시선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부르주아의 시선이고, 그건 가부장적 시선이고, 그건 서방세계의 시선이고, 그건 백인의 시선이고, 그건 등등... 으로 정의내리는 순간 즉각적으로 거기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놓여있음을 깨닫(고 그런 다음 무언가를 놓치)는 과정을 반복했다. 물론 이 과정을 가장 세련된 방법으로 정식화시킨 것은 히치콕의 영화이다. 임권택이 따르는 것은 히치콕에서 에릭 로메르로 이어지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다르다. 여기서는 이 빠른 속도의 결합이 상징적인 의미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반대로 이 둘 사이의 결합 사이에는 오직 불가사의한 인과관계의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혜선이 산골길 굽은 도로 사이로 접어들었을 때 저 멀리서 사람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저 아래 비탈에는 굴러떨어진 트럭이 불타고 있다. 버스에서 달려간 혜선 앞에 이미 죽은 희석이 차가운 땅바닥 위에 누워있다. 경찰이 목격자를 찾자 누군가 대답한다. “이 미끄러운 길을 좀 과하다 싶은 속도로 달려오더니 갑자기 방향을 꺾데요” “아니, 이 좁은 길목에서요?” “네, 다시 돌아갈 일이 생겼던 모양이에요. 아무튼 신통하게도 잘 돌아섰는가 싶었는데 뒷바퀴가 빙판에 쭈욱 밀리는 거예요, 그리고 처박혔죠. 아마도 다섯 번은 더 굴렀을 겁니다. 아무리 돌아갈 길이 급하기로 이렇게 성질 급한 운전수는 처음 보았습니다” 이때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한편으로 혜선을 꾸짖는 것만 같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끝내 알 수가 없다. (voice_off_frame) 왜냐하면 내내 화면은 희석의 시체 앞에서 무릎 꿇고 울고 있는 혜선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장면이 고아원에서 혜선이 떠날 때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원장님의 말씀의 연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매번 나타나는 목소리. 잘 알고 있는 목소리. 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목소리. 이때 혜선의 운명에 대한 지식은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돌아갈 일. 다시 돌아갈 일. 우리는 그 일이 무슨 일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세상의 찡그림에 의해 희석은 혜선에게 도착하지 못한다. 그리고 정확하게 그가 도착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그 메시지를 도착 시킨다. 맞아요, 당신의 뜻은 이제 실현되었어요. 혜선은 실패라는 과정을 통해서 그녀의 정을 돌려받는다. 두 번째 남자 희석이 혜선에게 알려준 것은 실수의 원인이 정을 받은 타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을 주는 그 과정의 과잉에 있다는 것이다. 마치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말. “어린 시절을 고아원에서 보낸 너희들은 막연히 정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매사에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아요. 그건 항상 실수의 원인이 되기도 하거니와 매우 위험한 일이야” 
 
세 번째 이야기는 두 번째 이야기와의 사이에 놓인 간주곡을 먼저 계산에 포함시켜야 한다. 죽은 희석이 묘 앞에 한복을 차려입은 혜선이 찾아와 임신한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 자신은 이 아이를 잘 키우겠다고 거듭 다짐을 한다. 그런 다음 갑자기 마치 다른 분위기, 다른 리듬. 다른 톤, 다른 영화처럼 장면이 옮겨간다. 좁은 골목에 차들이 줄을 이어 들어서고 다시 장면을 옮기면 혜선은 근수와 결혼식을 올리는 중이다. 근수는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인 데다가, 신부의 복장을 한 혜선을 보는 우리는 어리둥절해진다. 좀 전에 그 임신한 아이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녀는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좀 더 정확하게 두 이야기 사이에 끼어든 아이는 이제부터 어떻게 작동할까. 

세 번째 이야기는 앞선 두 이야기와 달리 단 하루 동안 일어난다. 그 사이에 세월이 흘렀고 혜선은 아이를 낳은 다음 술집에 나간다. 아이는 자라 소년이 되었다. 하지만 불치의 병에 걸렸고 혜선에게는 수술비용이 없다. 그녀의 계획은 자기의 신분을 속이고 위장결혼을 해서 남자와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돈을 훔친 다음 도망쳐서 그 돈을 들고 아들 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선 그녀의 계획이 지닌 세 가지 불합리한 점. 첫째, 신혼여행을 떠난 다음 남자에게서 돈을 훔쳐 돌아온다고 하지만 그 남자가 큰돈을 갖고 신혼여행을 떠날 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을까. 물론 그때는 카드가 없었고 사람들은 현금을 가지고 다녔지만 근수는 마치 그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지나치게 큰돈을 가방에 넣어 들고 신혼여행을 떠난다. 둘째, 결혼식을 올리는데 고아인 혜선은 어떻게 상대방의 가족 전체를 속일 수 있었을까. 잘 알다시피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긴 과정이 필요하다. 양가의 부모가 인사를 해야 하고 서로의 혼수를 주고받아야 한다. 신랑은 단 한 번도 신부의 집에 인사를 드리지 않고 부모를 만나지도 않은 채 결혼식에 이르는 것이 가능할까. 그보다 먼저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는 과정에서 아픈 소년은 돈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병실에서 내내 기다려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모두 해결한 것처럼 이 세 번째 이야기는 결혼식 하는 날에서 시작한다. 세 번째 이상한 점은 이야기 안에 내재되어 있다. 병원에서는 이제 더 이상 수술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아들을 퇴원시키라고 종용한다. 이미 실패한 수술. 사실상 혜선의 노력은 무의미한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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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수, 결혼식
 
여기서 세 번째 이야기가 이제까지 이야기와 다른 것은 결혼하는 근수에게 혜선은 어떤 정도 줄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녀의 목표는 근수를 속여 돈을 훔친 다음 재빨리 현장에서 떠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앞의 두 이야기가 혜선에게 준 교훈의 결과일 것이다. 나는 이미 두 개의 서로 다른 교훈에 대해서 셈을 했다. 하지만 여기서 혜선이 정을 주는 행위가 중단된 것은 아니다. 그녀는 병석에 누운 아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다만 혜선이 정을 주는 대상이 이야기의 외곽으로 옮겨졌으며 그 중심은 그녀에게 정을 주는 대상을 속이려는 행위에로 변주된다. 이때 혜선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은 그녀 자신이라기보다는 그녀가 만나는 상대방이 점점 나이가 많아지면서 자신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요점은 좀 더 분명해진다. 첫 번째 이야기는 (다소 논쟁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처녀로서 정을 주는 행위에 대한 실패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아내로서 정을 주는 행위의 실패라면, 세 번째 이야기는 어머니로서 정을 주는 행위의 실패에 대한 내기이다. 이때 (세상 안에서의) 반복적인 실패 속에서 변치 않는 것은 혜선이 (주체의 자발적인 선택인 것처럼) 반복적으로 정을 주는 행위이다. 마치 그녀는 이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행위인 것처럼 지치지 않고 되풀이한다.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그 행위를 반복하는 데서 오는 바보 같은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조금도 협조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다. 

임권택은 여기서 기묘한 한 가지 원칙을 고수한다. 어떤 장면에서도 혜선의 심리적 상태를 설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 대신 오로지 그녀의 동선만을 따라가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사실상 여기서는 혜선의 심리적인 동요를 제외하면 고요한 표면만을 가진 상황이다. 그런데 임권택은 혜선을 통해서 그 표면을 휘저어 놓는다. 혜선의 동선은 이 세 번째 이야기 안에서 다른 인물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 동선의 디테일은 다음과 같다. 혜선은 이날 하루 분주하게 두 세계 사이를 오가야 한다. 하나는 물론 근수와 올리는 결혼식과 이어지는 신혼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수시로 병원에 전화를 걸어서 죽어가는 아들의 병세를 물어보아야 한다. 그때마다 병원에서 아들을 돌보면서 전화를 받는 (혜선을 언니라 부르는) 여자는 자기가 내내 여기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면서 지금이라도 병실을 떠나야 한다고 통보한다. 혜선은 한편으로 그녀를 설득해야 하고 또 한 편으로 이제는 아들을 데리고 퇴원하라는 의사에게 다시 한 번만 더 수술을 해달라고 간청한다. 더 힘겨운 것은 자신의 그런 처지를 숨겨야하는 상황에서 기회가 올 때마다 막 결혼한 근수 몰래 전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함께 신혼여행 온 근수는 당연히도 혜선 곁에서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며, 혜선은 언제라도 돈이 든 그 가방을 들고 여기를 빨리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그 눈길을 피하려고 애를 쓴다. 이때 그녀가 알지 못하는 것은 지금 자신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단 하나, 그녀가 돈이 든 가방을 훔쳐야 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그녀는 이미 결혼했고, 게다가 결혼한 상대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혜선이 그렇게 원하는 삶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한 빨리 도망쳐야만 한다. 

임권택이 하려는 고통스러운 게임은 무엇인가. 그건 혜선을 끝까지 몰고 가 보는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임권택은 때로 던져진 상황에서 포기하는 법 없이 끝까지 가면 어떤 상황을 만나게 되는지를 보려고 할 때가 있다. 대부분 다른 영화에서는 어느 순간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며 결국 거기서 어떤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낀 다음 마치 그것이 해결인 것처럼 물러난다. 임권택도 피하지 않고 물론 그 지점까지 간다. 이상해지는 것은 거의 반드시라고 할 만큼 그 지점까지 온 다음 멈추지 않고 거기를 지나쳐서 더 밀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임권택이 문득 거기서 더 밀고 나아가기 시작할 때 눈물을 흘리다 말고 무슨 일이 생기는지를 고통스럽게 바라보거나 기괴하게 쳐다보게 된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혜선이 두 번째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는 운명에 굴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그 상황을 밀고 나아가기 시작하자 갑자기 그녀를 움켜쥐고 있는 (원장님의 예언에 가까운) 말씀의 네트워크를 찢고 스스로 능동적인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그녀의 선택은 바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행위 안에서 단지 한계를 보는 대신 그 안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혜선의 능동적인 자율성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혜선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멈춘 다음 죽은 희석의 묘지 앞에서 다짐을 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단지 그녀를 덮어씌운 말씀의 실현만을 우리는 보았을 것이다. 물론 거기서 끝나면 말씀은 만족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세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 갑자기 영화의 톤과 리듬이 변했다는 것을 함께 주목해주기 바란다. 임권택은 여기서 앞선 두 개의 이야기에 마치 영화 자체가 저항하기라도 하듯이 진행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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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죽음
 
물론 이번에도 혜선의 노력은 좌절로 끝난다. 그녀는 근수의 돈 가방을 훔치는 데 성공한다. 그래서 그 돈을 들고 병원으로 달려가지만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을 용서해준다면) 마침 때맞춰 죽은 아들의 시신이 실려 있는 바퀴 달린 침대의 이동이다. 사라져 가는 아들. 그녀의 하루는 실패로 끝난다. 이제 그 돈이 아무 의미가 없어진 혜선은 그걸 돌려주기 위해 근수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에게 모든 것을 자백하듯이 고백한다. 당신은 이번에도 결국 희석과 같은 결론을 맺은 것이 아니냐고 내게 반문할지 모른다. 얼핏 보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임권택은 몹시 잔인한 방법으로 혜선에게 그녀가 진정 도착해야 할 욕망의 대상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있는 중이다. 안타깝게도 혜선은 그녀의 아들을 잃었다. 하지만 그렇게 박탈하면서 그녀에게 안겨주는 선물이 있다. 그것은 물론 근수이다. 이 이야기의 가느다란 끈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혜선이 고아원에서 나왔을 때 그녀가 정을 주고 빠져드는 사람은 세상에 나와 우연히 만난 남자가 아니라 고아원에서 함께 큰 명구이다. 명구의 무언가가 혜선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같은 고아원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정을 끌어낸다. 그러므로 혜선이 한 행동은 고아원에서 이미 한 행동이 왜 사회에서는 반복할 수 없느냐는 반문과 마주친 것이다. 혜선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두 번째 이야기의 시작. 공사장에서 포장마차를 하면서 인부들이 와서 점심을 먹을 때 그 많은 사내들의 입맛을 잘 알고 척척 알아서 주문을 해준다. 한 사내가 “마누라 행세를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라고 농을 걸자 서슴없이 “하루에 두 끼씩 걷어 먹이면 그게 첫째 마누라지”라고 받아친다. 하지만 이때 희석은 그 자리에 없다. 그는 여기 공사장까지 흘러들어온 다음 혼자서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신다. 그때까지만 해도 희석은 혜선에게 관심이 없다. 그저 바라보다가 별안간 손을 잡아보고는 “얼핏 보면 아줌마 같기도 하고 처녀 같기도 하고” 가 전부이다. 그 말이 별말이 아닌 것이 그날 밤 술집에 가서 작부를 옆에 앉혀놓고 오늘 밤을 같이 보내자고 한 다음 초면에 이러면 안 되시죠, 라는 대꾸에 “자네하고 나하고는 전생에 인연이 있는 것 같아”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그날 밤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소리에 깬 희석은 포장마차가 바람에 날아갈세라 달려 나온 혜선을 본다. 그런 다음 그 둘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고 싶다. 희석이 혜선과 ‘정을 통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대사는 “내가 좋아하면 여자가 도망가고 내가 좋다고 안 도망가면 여자가 도망가고” 라고 한 다음 잠시 그녀를 바라본 다음 “당신과 같은 여자를 만났으면 좋은 가정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소”라는 제안이었다. 이때 포장마차 안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고 고작해야 성냥으로 켠 촛불 하나가 전부이다. 혜선은 희석에게 끌렸다기보다 차라리 그 한 마디에 이끌린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은 혜선이 명구에게 듣고 싶은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이 목소리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여기에는 같은 내용의 대안적 대상이라는 미끼가 있다. 그렇게 해서 혜선은 다시 원래 자리에로 돌아오는 것이다. 마치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혜선이 희석과 ‘정을 통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비바람 치는 밤 포장마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나는 일렉트릭 기타 연주가 반주처럼 흘러나온다. 아마도 예민한 관객들은 알아차릴 것이다. 이 음악은 혜선이 명구와 데이트를 할 때 흘러나오던 선율이었다. 이제 세 번째 이야기가 되었을 때 두 번째 이야기에서 넘어온 것은 물론 희석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들이다. 그녀는 아들을 구하는 것이 자기가 해야 할 임무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반대로 지금 그녀에게는 남겨진 아들만이 그녀의 삶의 장애물처럼 작동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몹시 잔인한 표현이라는 것을 이미 사과했다. 게다가 임권택은 그 아들을 더 이상 살릴 방법이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혜선의 현재의 삶에서 그녀에게 남겨진 아들의 존재만이 마치 잉여처럼 그렇게 버티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세 번째 이야기는 이미 시작할 때마다 결론이 나 있다. 아들은 죽을 것이고 그녀의 노력은 실패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녀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세 번째 이야기는 이상할 정도로 단순하고 공허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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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의 교환
 
이때 오직 이 세 번째 이야기에서만 혜선과 그 상대방은 서로의 목소리를 교환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외부의 목소리에서 벗어나서 혜선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한다. 혜선은 아들의 죽음을 본 다음 돌아와 근수에게 이 모든 과정에 대해서 자백을 하듯이 이야기한다. 이때 처음으로 혜선은 상대방으로부터 구체적인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은 물론 근수의 목소리이다. 그는 혜선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마치 대칭을 이루기라도 하듯이 참회에 가까운 고백을 한다. 먼저 자신이 혜선의 이제까지의 위장된 행동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근수는 자신을 고아라고 속이고 부잣집 양아들로 입양되었지만 사실은 시골에 자신의 어머니가 살고 있으며 그분의 유일한 소망은 며느리를 데려오는 것인데 당신이 괜찮다면 거기에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혜선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제안이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청혼인지는 분명치 않다. 눈이 덮인 시골 길이 보이고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라기보다는 중단된다. 

만일 여기서 해피엔딩을 보면 당신은 <맨발의 눈길>을 처음부터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임권택이 하려는 노력은 초자아의 명령으로부터 자신의 윤리적 선택에로 혜선을 되돌려 놓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이 영화는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 때로 그 선택은 위태롭게 보이고 가냘파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은 자신에게 내려진 가장 중요한 명령을 거절하지 않으면 자신의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자유로운 행위란 결국 무엇인가. 아마 임권택이 서정민과 함께 만든 <잡초>에서 했었던 질문은 결국 이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다시 만들었을 때 그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이라는 도약을 시도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될 임권택의 영화는 이 자유의 밤으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창씨개명에 반대하고 오로지 자신의 이름을 지키고자 자살을 선택하는 수원 설 씨 노인의 이야기(<족보>),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평생에 걸쳐 산에서 자신이 놓친 공비를 찾아 허송세월하는 한 사내의 이야기(<짝코>), 오로지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 용맹전진하는 승려의 만행 길(<만다라>). 임권택은 자기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세상이 자신에게 내린 명령을 거절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그 길을 임권택은 서정민과 함께 시작했지만 그와 함께 밀고 나아가지 않았다. 물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화 현장에는 너무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에 단지 그것을 예술적인 이유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부질없는 잣이다. 하지만 <맨발의 눈길>에서 보여준 몇몇 순간들, 특히 그중에서도 희석이 굴러떨어진 낭떠러지 가까이 다가가는 버스 안에서 그 절벽을 바라보는 혜선의 시선 앞에 놓인 그 짧지만 신비로울 정도로 정교한 리듬으로 다가오는 풍경은 임권택의 모든 영화 중에서도 가장 스산한 이미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예술에서 가지 않은 길을 탄식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나는 지금 바보 같은 일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서정민 촬영감독님을 생각하면 그건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가정이다. 부디 편히 잠드시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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