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어머니 임권택, 1971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20-09-11조회 12,168
먼저 제목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둘째 어머니>(1971)는 그 제목 때문에 첩, 혹은 소실, 별실, 여부인, (예전에는 이렇게도 불렀는데) 작은 댁, 그러니까 돈 많은 집안 남자들이 본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조선시대 태조 이후로는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여러 이유로 따로 둔 또 한 명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라는 선입견을 가질지 모르겠다. 이 불합리한 관습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그래서 1960년대까지 멜로드라마에서 이 관습으로 인한 서사는 조선시대 사극에 머물지 않고 전후 근대와 여전히 남겨진 봉건이 카오스처럼 뒤섞인 채 또 다른 비애극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둘째 어머니>에서 ‘둘째 어머니’는 두 남매를 둔 남자가 두 남매를 가진 여자와 재혼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제목은 ‘두번째 부인’이라는 표현이 올바를 것이다. 

이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까닭은 단지 제목을 정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두 표현은 서로 완전히 다른 뜻이며, 그 맥락도 다르며. 그 말의 용법, 대상, 상황, 법적인 지위와 권리, 사회적인 시선에서도 다르다. 그런데 이야기 안에서 두 번째 어머니의 지위는 처음과 달리 점점 둘째 어머니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마도 그 대목에서부터, 그걸 어느 장면이라고 설명하기는 까다롭지만, <둘째 어머니>는 비애극이라고 멈출 수 있는 순간을 지나쳐서 점점 기괴해진다. 단지 비애의 정서가 과잉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일까.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그 장면들, 거기에 있는 감정의 표지들, 그것들이 지칭하는 대상의 반응, 그들 사이를 구성하는 비애의 형상들이 지나치게 정확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반성적 차원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일단 이 서사가 요구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자 임권택은 마치 그 문법에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감정의 내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내면 안으로 들어가서, 더 들어가서, 더 깊이 들어가면서, 기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어떤 심급이 작동하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둘째 어머니>가 임권택의 가장 이상한 영화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처음 볼 때도 그러했고 다시 볼 때도 그러했다. 그때 벌어지는 일은 이 영화 안에서 서사의 내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심급의 형식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걸 전도되었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이상한 이야기를 먼저 소개하겠다. 아마도 장황하겠지만 참고 읽어주기 바란다. 그런 까닭은 감정의 변곡점이 지속적으로 출몰하면서 서사를 이리저리 구부러뜨리고 서로 다른 성질의 힘들이 여기저기로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객관적으로 (하지만 영화를 본 다음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나열해볼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 흥열은 어린 두 남매 형태와 형자와 함께 살고 있는 홀아비이다. 남옥은 어린 두 남매 윤호와 윤숙과 함께 사는 홀어미이다. 흥열은 남옥에게 구혼을 하고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런데 형태와 형자는 자신들의 집에 들어와 사는 윤호와 윤숙을 미워하고 괴롭힌다. 윤호와 형태가 싸움이 나자 말리러 온 엄마 남옥은 형태의 편을 들고 윤호를 나무란다. 그러자 윤호는 도망치듯 달아난다. 아버지 흥열이 밤거리 버스 종점에서 윤호를 찾고 둘은 함께 포장마차에서 다정하게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일요일에 흥열은 윤호만 데리고 사냥을 간다. 그런데 꿩 사냥을 하던 중 윤호가 실수로 벼랑에 매달리자 흥열은 윤호를 구하고 그 자신은 떨어져 죽는다. 여기서 일단 이야기가 중단된다. (영화가 시작하고 25분 46초) 그리고 십 오년이 흐른다. 형태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형자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 하지만 윤호는 아버지 흥열의 장례식 날 가출을 한 다음 가족과 소식을 끊고 서울 명동에서 건달로 살아간다. 윤숙은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지낸다. 엄마 남옥은 남편 흥열이 세상을 떠난 다음 집안이 몰락했는데도 형태와 형자의 뒷바라지를 하기위해 쉬지 않고 삯바느질 일을 한다. 서울에 갈 때마다 오빠를 찾던 윤숙은 윤호를 만나지만 윤호는 엄마에게 자기를 만났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오빠를 만나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윤숙은 기차에서 그날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동오를 만난다. 윤숙에게 한 눈에 반한 동오는 그녀를 자신의 신붓감으로 생각하고 부모에게 소개하려고 한다. 동오는 건축기사를 꿈꾸는 부잣집 아들이다. 그런데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 온 형자가 우연히 동오를 보고 그를 유혹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형자의 학교 등록을 알아보기 위해 윤숙이 서울에 간 동안 약속장소에 대신 나간 형자는 동오에게 핑계를 만들어 데이트를 한 다음 섬에 가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관계를 가진다. 윤숙은 동오에게 실망하고 떠나고, 동오는 형자에게 키스를 거절하고 떠난다. 그런 다음 이 년이 지난 어느 날 형자는 갓난아이를 안고 고향에 돌아온다. 엄마 남옥은 그 아이가 동오와의 사이에서 낳은 것이라 짐작한다. 그때 동오가 찾아와서 형자에게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는 윤숙이라고 말한다. 그때 엄마 남옥은 동오에게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서 이모 집에 가서 윤숙을 만나보면 안다고 말한다. 고백을 하기 위해 윤숙을 방문한 동오는 형자의 아이를 돌보고 있는 윤숙을 보고 자기를 잊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고 오해하고 떠난다. 윤숙이 그건 오해라고 설명하려고 하자 엄마 남옥은 언니 형자를 위해서 네가 포기하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형자와 동오의 약혼식이 결정된다. 약혼식 날 윤숙은 음독자살을 한다. 형자와 약혼을 하기로 했다는 편지를 받고 여동생을 만나러 온 오빠 윤호가 윤숙을 발견하고 병원에 데려간다. 약혼식을 중단하고 병원에 엄마 남옥과 형자, 동오가 찾아온다. 엄마 남옥이 병실에 누워있는 딸 윤숙을 만나려하자 윤호가 막아서면서 거절한다. 그리고 엄마 남옥에게 자격이 없다고 꾸짖으면서 딸 윤숙에게 준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엄마 남옥이 아들 윤호의 뺨을 때리면서 나는 너희들에게 내 젊음을 주었다, 라고 시작하는 긴 항변을 한 다음 사과를 하고 떠난다. 그때 병실에게 깨어난 윤숙이 아직도 정신을 잃은 채 엄마를 찾는 것을 보고 윤호가 달려나와 엄마에게 사과한다. 엄마 남옥과 형자, 윤호와 윤숙은 동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서 형자 아이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 형자와 아이, 그리고 그 아이의 아버지는 함께 떠난다. 
 

아마도 소설처럼 읽었다면 중간에 내가 무언가를 빠트렸거나 혹은 착각을 일으켰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대목이 있었을 것이다. 똑같은 느낌을 나는 영화를 보면서 가졌다. 첫 번째 질문. <둘째 어머니>에는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지만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사에서도 말끔히 지워진 두 명의 인물이 있다. 이 영화는 1972년 1월 13일에 개봉했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을 그 한 해 전, 1971년 현재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동오가 형자의 유혹에 굴복하고 윤숙을 떠나간 것이 이년 전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1969년에 윤숙은 동오를 만났고, 두 사람은 사랑의 언어를 나누었으며, 어른이 된 오빠 윤호를 만났고, 그 해에 형자의 오빠 형태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을 것이다. 아직 셈이 끝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15년 전에 윤호를 대신하여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아버지 흥열과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이 있다. 1954년. 한국전쟁이 휴전을 한 그 해 다음의 해. 그런데 우리는 <둘째 어머니>에서 어떤 전쟁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휴전 직후 제작된 많은 영화들은 의도적으로 전쟁을 지웠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거기에 있지 않다. 남옥은 두 남매를 키우고 있고, 흥열도 두 남매를 키우고 있다. 두 집은 마치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다. 그 나이를 미루어 보건데 각자의 부모 아래 해방 직전, 혹은 직후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남옥의 남편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상하게도 윤호와 윤숙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의 친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맞은  편을 향해서 똑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질문. 마치 같은 문장을 반복하는 것만 같은 구조. 흥열의 아내는 어디로 간 것일까. 마찬가지로 이상하게도 형태와 형자는 자신들의 친어머니를 단 한 순간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아버지, 자신들의 어머니와 살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평생 동안 말하고 (혹은 말하지 않고) 반응한다. (혹은 반응하지 않는다) 나는 구태여 <둘째 어머니>를 비애극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비극과의 구분을 벤야민에 따라 엄밀하게 나눈 것이 아니다. 여기서 구분은 서사의 무대 안와 외부에 있다. 이 서사로부터 한 걸음만 외부로 나가면 진짜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해방 전후의 남한. 그리고 한국전쟁. 그것이 어떤 비극인지 임권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내내 그걸 찍은 영화감독이다. 임권택은 이 셈을 해보고 여기서 재빨리 안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비극과 비애극 사이의 울타리. 그 울타리 안에서 (그러므로 같은 말이지만 영화 안에서) 금지된 질문, 금지된 호명. 형태와 형자, 그리고 윤호와 윤숙은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둘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원형이 판본이다. 그때 <둘째 어머니>의 비애의 무대는 무언가를 발설할까 두려워하는 어떤 비밀의 전제조건을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 느껴진다. 어떤 비밀? 진공상태에 놓인 시간. 갑자기 세계의 시간은 여기서 닫혔고, 그들은 예외 없이 그 안에서 활동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필사적으로 진짜 비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디에 갔느냐는 질문을 막기 위해서,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해방 직후에, 한국전쟁 중에 어떻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막기 위해서, 비애극에서 멈춘다. 지금 임권택에게 비애는 방어의 감정이다. 먼저 그걸 말해야 이 기이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는 도피의 장소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일 도피의 장소라면 <둘째 어머니>는 행복한 삶을 어떻게 해서든지 만들어내는 과정이 그 중심에 있어야 했다. 서로 다른 두 남매는 화해를 하고 그들 부모의 뜻처럼 하나의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아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한 편의 드라마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둘째 어머니>는 형자와 윤숙, 혹은 형자와 엄마 남옥, 차라리 형자와 남옥 가족과의 화해의 드라마가 전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은 마치 형자를 아이와 그 아이의 아버지와 함께 남옥의 가족으로부터 쫓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여기서 행복한 삶, 이라고 말한 것은 왜 그 삶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면 안 되냐는 것이다. 그들은 드라마의 셈을 끝내고 진정한 화해를 하자마자 행복한 삶을 기다리지 않고 영화를 끝낸다. 나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고 싶다. 아버지 흥열은 윤호의 마음을 열기위해 오로지 그와 시간을 보내면서 사냥을 한다. 아버지 흥열은 이 갈등에 권위를 갖고 있는 유일한 중재자였다. 말 그대로 아버지. 공정한 아버지. 자애로운 아버지. 하지만 임권택은 마치 이 행복에 저항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서 여기에 관여하기를 결심한 것처럼, 더 이상 행복해지지 않게 서둘러 균형을 깨트린다. 아버지 흥열은 가장 먼저 퇴장하는 인물이다. 이때 질문은 무엇인가. 그 저항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두 번째 질문. <둘째 어머니>는 보는 동안 종종 누가 주인공인지를 놓치게 된다. ‘둘째 어머니’ 남옥이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남옥은 그렇게 자주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종 외곽으로 물러나버린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오히려 아버지 흥열이 죽고 난 다음 남매들이 어른이 되자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는 사람은 윤숙이다. 그런 다음 마치 이야기는 윤숙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처럼 이루어져 있다. 약간 관점을 바꾸면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다. 비애극의 주인공은 자기의 상황에 감옥처럼 갇혀있는 자이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이야기가 안겨주는 모든 시련을 견뎌야한다. 그때 그(녀)는 홀린 것처럼 그 상황을 떠나지 못한다. 그러면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에 관한 알리바이를 만들거나 혹은 운명처럼 받아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윤숙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시련은 어디서 오는가. 그녀에게 진정한 시련을 안겨주는 사람은 형자가 아니라 그녀의 친어머니 남옥이다. “윤숙아, 한 번만 더 참아라, 형자의 행복을 빌자” 윤숙은 반복되는 시련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행위에 이른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완전히 파괴하려는 결단. 만일 윤숙의 단 한 번의 시도가 성공했다면 모든 관계는 남김없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어머니 남옥은 “반드시 너희들에게 밝은 앞날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다”는 알라바이를 말할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동오는 남옥과 형자의 거짓된 약혼식을 파혼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오해하고 그 대상을 파괴한 것이 자기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남은 삶 전체를 지내야했을 것이다. 정확하게 반대의 자리에서 형자는 모든 것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유일하게 사랑을 베푸는 대상인 여동생을 잃은 오빠 윤호는 어머니 남옥을 끝내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윤숙은 그렇게 시련을 받으면서 주인공이라는 자리의 특권을 얻게 된다. 하지만 왠지 이 설명이 영화를 보고 나면 충분하지 않다고 망설이게 된다. 왜 그러한가. 어머니 남옥은 자주 나오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어떤 결정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숙이 자살을 결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어머니에 대한 유일한 저항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오빠 윤호가 집을 떠난 다음 폭력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잠시 보여주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고향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지 않은 까닭은 여전히 어머니가 무섭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왜 무서운가. 나는 동어반복의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남옥이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윤허가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옥이 아니라 어머니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끝내 저항하지 못한다. 형자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고 하면서 등록금을 유흥비로 써버리며 마치 계모인 남옥을 마음껏 착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아이를 낳은 다음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곳은 남옥이 기다리는 고향집이다. 남옥는 마치 이 모든 인물들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그 중앙에 있으며 끝까지 그 힘을 잃지 않는다. 그 힘은 어디서 오는가. 한 번 더 같은 말을 하겠다. 남옥이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라는 자리의 힘. 이때 여기서 그 힘은 두 배가 된다. 왜 그러할 수 있는가. 아버지의 자리가 비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리까지 남옥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질문, 윤숙은 사랑의 대상이다. 그녀는 마치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사랑을 받는다. 나는 단지 지금 동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동오보다 더 윤숙을 사랑하는 사람은 오빠 윤호일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근친상간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 둘 사이에 드리워지지는 않는다. (서로 배다르기는 하지만) 임권택의 영화에서 남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는 것은 <서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윤숙과 윤호 사이에서 이상할 정도로 서로를 잡아당기는 어떤 힘을 본다. 두 사람이 어른이 된 다음에 처음 만나는 장면. 서울에 올라온 윤숙은 명동의 사교 클럽을 돌아다니면서 윤호를 수소문한다. 윤호가 한 걸음 늦게 여동생 윤숙이 자기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밤거리를 찾아다닌다. 이때 윤호가 윤숙을 알아보는 장면은 그 둘 사이에 어떤 사랑의 정감이 감도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어느 거리에서 그저 우연처럼 마주치는 대신 윤호는 어두운 밤거리에서, 불빛도 충분하지 않은데, 윤숙이 등을 돌리고 불 꺼진 양장점의 옷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을 보고도 오랜 동안 보지 못한 여동생이라는 걸 알아본다. 아무 장소, 아무 시간, 심지어 등을 돌리고 있어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오랜 동안 보지 못한 내 동생, 나는 너를 언제든지 알아볼 수 있단다. 그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존재. 윤호는 내내 여동생 윤숙을 마음속에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만들어내는 어떤 기호들. 그걸 알아보는 건 그 기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이 가능한 일이다. 혹은 그 기호를 신호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전달되는 어떤 힘들. 그 힘은 무엇인가.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 다음 그 둘은 반가움에 남매라고 하기에는 과잉할 정도로 껴안는다. 형식적인 시선의 교차로부터 육체적인 몸의 터치에로의 이행. 하지만 그 둘은 자신들의 반가움 사이에 무언가 과잉하고 있다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 장면을 기차 통로에서 동오와 윤숙이 마주치는 순간과 비교해보라. 기차 통로에 서 있는 윤숙을 그날 제대한 동오는 부딪치고 지나가면서 “실례 합니다”라고 인사한다. 그때 재빨리 임권택은 두 사람 사이에서 시선이 오가는 걸 보여준다. (shot_reverse shot) 시선이 무엇을 건드렸는지는 알지 못한다. 형식적인 교차로부터 심리적인 터치에로의 이행. 하지만 이 시선의 교환이 윤숙의 무언가를 건드렸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동오를 잃어버리는 대신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까지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동오도 도덕적 수치 때문에 잠시 동안 윤숙을 포기하지만 결국 돌아와서 다시 윤숙에게서 사랑을 기대한다. 물론 윤호와 동오가 윤숙을 사이에 두고 사랑의 대결을 벌이지는 않는다. 반대로 윤호는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닌데 무려 이 년 동안 수소문 끝에 동오를 찾아와 윤숙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배달자의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자신이 배달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건 윤호가 사랑의 대상을 바라보는 대신 자기 자신을 사랑의 순환 안으로 밀어 넣는 행위이다. 둘 사이의 차이. 윤호와 윤숙 사이의 거리. 지나치게 가깝지만 그러나 끝내 좁혀지지 않는 거리. 이때 오빠의 자리는 사랑의 대상에 다가가는 것을 도와주는 척 하면서 계속해서 밀어내는 호명이다. 윤호는 동오를 만나서 윤숙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줄 때 윤호는 자발적으로 자기의 자리를 사랑이 진행되는 전체 퍼포먼스의 일부로 옮겨간다. 그렇게 해서 이 사랑의 과정이 중단하지 않고 계속 진행될 수 있게 돕는 비결정상태의 역량의 일부, 좀 더 친절하게 사랑의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갑작스러운 도약의 계기, 말하자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제작방식에 뛰어든다. 어떤 방식? 사랑의 네트워크를 이어나가는 가능한 실행. 여기서 윤호가 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단순한 대답. 동오를 윤숙에게 발송하는 것이다. 역설적인 보충. 이때 윤호는 윤숙이 동오에게 발송하지 않은 편지이다. 나는 단지 비유적으로 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장면. 동오는 윤숙을 만나러 오기 전에 먼저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낸다. 그런데 그 편지는 윤숙에게 한 번은 도착하고 다음 한 번은 도착하지 않는다. 첫 번째 편지는 동오가 떠나면서 보낸 편지이다. 그런데 두 번째 편지는 돌아올 것을 약속하는 편지이다. 다시 시작하자는 다짐의 편지. 사랑의 편지, 하지만 이 편지는 도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엄마 남옥이 그 편지를 우체부에게서 받아본 다음 발신자를 확인하고 그 내용을 먼저 열어보기 때문이다. 행방불명된 편지. 나는 이야기를 다시 조금 앞 쪽으로 되돌리겠다. 
 

네 번째 질문, 여기서 윤숙과 동오의 가장 이상한 장면은 (이 말을 주의 깊게 읽어주기 바란다) 있어야 할 장면이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 사라진 장면. 생략한 것이 아니라 들어올 틈이 없는 장면. 윤숙과 동오는 서로 시선을 교환한 다음 다시 만날 약속을 한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남에서 동오는 윤숙을 자신이 부모에게 소개하겠다고 다시 약속한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약속을 한 날에 엄마 남옥이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고 윤숙은 병실을 지켜야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동오는 윤숙을 찾아와 남옥에게 인사를 한 다음 세 번이나 작별인사를 하면서 그 자리에 머물면서 자기를 소개한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윤숙과 동오의 데이트 장면의 전부이다. 무엇이 거기에 없는가. 동오가 윤숙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시간이 없고, 윤숙이 동오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이 없다. 

그 대신 <둘째 어머니>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퀀스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오가 윤숙을 만나러 간 자리에 대신 나와 있는 형자와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다. 아마 이 장면들은 임권택의 모든 영화들 중에서 가장 예외적이라고 할 만큼 이상한 리듬과 자유간접화법의 시선으로 갑자기 세계가 팽창하듯이 펼쳐진다. 여기에 이야기가 도착할 때까지 <둘째 어머니>는 몇 개의 장소, 남옥의 집과 몇 개의 방, 제한적인 장소에서 계속해서 마치 여기서 나가면 저기로 나오듯이 반복해서 되돌아왔다. 그런데 형자가 동오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나무들이 늘어선 것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공허하리만큼 텅 비어있는 한 겨울의 교외로 옮겨갔을 때 마치 이 장소는 이제까지 진행하던 영화의 답답하리만큼 비좁은 네트워크들로 서로 촘촘히 이어진 무대로부터 탈출하여 바깥 세계로 나온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래서 심지어 이 시퀀스 전체가 윤숙이 중심에서 잠시 벗어난 틈을 이용해,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영화가 잠시 잠든 틈을 이용해 드러난 꿈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갑자기 장면은 강 위에 떠 있는 작은 보트를 타고 가는 동오와 형자에게로 옮겨간다. 우리가 내내 본 것은 남옥이 살고 있는 고택(古宅)의 전경과 그 실내의 이 방과 저 방, 그리고 이따금 방문하는 서울의 그 해 겨울의 건조하고 무질서한 건물들의 풍경이 전부였기 때문에 강 위에 흘러가는 보트에로 데려왔을 때 마치 영화 안에 있기는 하지만 이야기 바깥으로 나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말하자면 이제까지 이 사랑의 네트워크 사이에 자리한 심리적인 갈등과 가족으로 만들어진 위계질서가 비가시적인 드라마를 만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기서 형자와 동오의 데이트가 시작하는 강 위에 떠 있는 보트의 장면은 수수께끼처럼 보일만큼 회화적인 운동이 화면을 압도한다. 임권택은 그걸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강위에서 운동은 수평으로 진행된다. 강이라는 표면. 그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작은 보트. 보트의 수평 운동. 그런 다음 갑자기 형자와 동오가 보잘 것 없게 보일 정도로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은 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이때 이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수직의 선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하지만 임권택은 수평의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때 매우 이상한 운동이 나온다. 갑자기 텅 빈 화면에서, 정확히 말하면 나무들만 보이는 풍경에서, 일정한 거리만큼 물러나있는 카메라는 수평으로 왼쪽에서 (travelling_shot) 오른 쪽으로 이동한다. (S#_1) 그러면 그 수평 이동의 끝에 형자와 동오가 멀리 보인다. 이제까지 인물들에게 카메라가 달라붙어있었던 것만 같았기 때문에 이 운동은 마치 떨어져 나온 것처럼 자유롭게 느껴진다. 형자와 동오는 나무들 사이를 걷는다. 그때 걸어가는 형자와 동오를 수평으로 세워진 나무들 저 편에서 이번에는 그 반대 방향으로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이동하면서 멀리서 쳐다본다. (S#_2) 이 이상한 운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정한 거리만큼 물러나있던 형자가 다가와서 말을 하며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하지만 동오는 어색하게 걷는다. 그때 두 사람과 아무 상관도 없이, 그저 난데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강위 수면을 따라서 카메라가 수평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갑자기 나온다. (insert_shot) 텅 빈 강의 수면. 거기에 볼 것이라곤 카메라의 이동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다. 동오가 시선을 돌린 것도 아니다. 형자는 옆에 있는 동오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 난데없는 장면은 무엇인가. 어색하긴 하지만 단 한 가지 설명만이 가능하다.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는 보트의 운동, 형자는 내리자마자 동오 몰래 보트를 묶어놓은 밧줄을 풀어버렸다. 동오와 형자로부터 멀어지는 보트. 그래서 보트는 지금 떠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이 떠내려가는 보트의 쇼트는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동오가 형자에게 이제 늦었으니 돌아가자고 말한 다음 한 번 더 나온다. 물론 동오와 형자는 그 보트를 발견하지 못한다. 떠내려가는 보트의 쇼트는 동오와 현자의 동선과 완전히 독립된 것이다. 두 개의 운동, 두 개의 보트의 쇼트. <들째 어머니> 안에서 특이한 사건이라고까지 부르고 싶은 이 장면들은 무엇을 향한 것일까. 여기서 내가 주의 깊게 본 것은 두 개의 운동, 두 개의 보트의 쇼트 사이의 공통점이 대상에서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이다. 어찌 해볼 수 없을 만큼 떨어져있는 거리. 여기 있어야하는 데 여기에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물론 그건 윤숙이다. 이때 윤숙 대신 갑작스럽게 풍경을 수평으로 이동하고 대화 사이에 끼어들듯이 지나가는 보트의 쇼트는 동오와 형자를 바라보는 도덕의 시선이다. 어찌해볼 수 없을 만큼 멀리 있지만 그러나 그 시선은 지금 여기서 바라보고 있다. 형자와 동오의 데이트 시퀀스 앞과 뒤에 윤숙의 씬이 마치 감싸듯이 놓여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제 이 질문들에 대해 대답할 차례이다. <둘째 어머니>에서 등장인물 모두를 괴롭히는 것은 누구도 끝내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대상 앞에서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누군가는 전부를 누군가는 부분을 포기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완전한 만족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인 것처럼 우울한 상태가 된다. 형자는 동오를 얻는데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동오는 윤숙에게 도착하지만 아마도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할 것이며, 윤숙은 동오가 자기에 안겨준 죄의 이면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윤호는 제 할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확하게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상태로 시작해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상태로 돌아간다. 그리고 ‘둘째 어머니’ 남옥이 남는다. 이 이야기의 수수께끼. 모든 순환은 번번이 남옥에게 이르면 갑자기 불투명한 상태가 되거나 목표를 잃거나 방향을 바꾸거나 대상이 부서진다. 우리는 매번 이 순환이 남옥을 올바르게 통과한다는 기분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남옥에게 도착하면 갑자기 불안을 맛보게 된다. 왜 그런 기분을 갖게 되는가. 남옥에게 도착하면 매번 무언가를 거기서 잘라내는 절단과 마주하게 된다. 무엇을 무엇으로 잘라내는가. 두 개의 장면. 첫 번째 장면. 어린 윤숙의 곰 인형에 대한 사랑. 어린 형자는 이 곰 인형을 뺏어간다. 그러자 엄마 남옥은 새 인형을 사줄 테니 언니에게 주렴, 하면서 달랜다. 그러자 오빠 윤호가 엄마 남옥에게 화를 내면서 말한다. 이 공 인형은 친 아버지가 사준 선물이에요. 물론 형자는 그걸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걸 남옥이 모를 리가 없다, 두 번째 장면. 엄마 남옥은 윤숙이 동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또한 동오가 윤숙을 사랑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남옥이 입원한 병원에 동오가 병간호를 하는 윤숙을 찾아와 밤 열한시까지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고 가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행복한 시퀀스이다. 그런데 형자가 동오를 원하자 엄마 남옥은 윤숙을 포기시키기 위해서 거의 모든 수단을 사용한다. 잘 알고 있는 남옥,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남옥은 번번이 친딸 윤숙대신 의붓딸 형자의 편에 서는 것일까. 객관적인 공정성에 따른 이해의 관점. 그때 그 둘의 선택은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곰 인형은 윤숙의 것이었고, 형자는 그것을 강제로 빼앗은 것이다. 그런데 남옥은 그 곰 인형을 언니 형자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한다. 동오는 윤숙을 사랑하고 윤숙도 동오를 사랑한다. 그 둘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 사이에 들어온 형자이다. 그런데 남옥은 윤숙에게 동오와의 결혼을 형자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한다. 남옥은 윤숙에게 정확하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여기서 남옥이 윤숙에게 동오를 형자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하는 장면과, 그런 다음 윤숙이 음독자살을 시도해서 병원에 실려간 다음 남옥과 윤호가 나누는 대화는 다소 길지만 인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첫 번째 장면. 윤숙은 자신이 엄마 남옥의 함정에 빠져 동오가 자신을 포기하고 형자에게 가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오씨만은 못 뺏기겠어요. 나를 짓밟고 형자 언니를 위하는 것도 한도가 있어요. 너무해요, 정말 모두 너무들 해요” 그러자 남옥은 마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이 말한다. “글쎄, 왜 그러니” 하지만 윤숙은 선언하듯이 말한다. “동오씨 만나겠어요. 그리고 애기를 언니 애기라고 분명히 말 하겠어요” 그리고 돌아서서 방을 나가려고 한다. 그러자 남옥은 “윤숙아”라고 부른 다음 돌아보는 윤숙의 뺨을 때린다. 그런 다음 말한다. “너 언제부터 이렇게 됐니, 너 언제부터 이렇게 엄마 앞에서 이렇게 도도해졌냐 말이다. 어서 가서 말해라. 언니는 애기가 누군 줄도 모르는 아이를 낳은 불순한 여자이니 언니를 버리고 너하고 결혼하자고 말이야, 그럼, 형자는 어떻게 하니, 그러면 형자는 집을 뛰쳐나가 또 다른 애비를 모르는 자식을 낳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오겠지, 그 꼴을 봐야겠어. 엄마가 그 꼴을 봐야겠느냐 말이다. 윤숙아, 넌 엄마의 친딸이야. 누가 뭐래도 난 친엄마야. 하지만 형자는 아무도 없지 않니. 지 오빠는 미국에 가 있고, 형자는 외로운 아이다, 그래서 타락한 거야, 이번에 우리 힘으로 구해줘야 하지 않겠니. 한 번만 더 참아라, 형자의 행복을 빌자” 그러자 윤숙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동오에게 가는 대신 자기 방으로 돌아온 다음 울면서 말한다. “전 못해요, 죽으면 죽었지 못해요” 남옥이 한 가지 몰랐던 것은  윤숙의 이 말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자살을 시도하는 선언이었다는 것이다. 윤숙은 약을 먹는다. 

두 번째 장면. 병실에 윤숙이 누워있을 때 약혼식장에서 엄마 남옥이 달려온다. 그러자 윤호가 병실을 막아서고 엄마 남옥이 병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이 방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자 의사가 윤호에게 묻는다. “자네는 윤숙에게 무얼 해주었나?” 윤호가 대답한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남옥을 가리키며) 이 분도 윤숙에게 준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이 다 주는 그 흔한 모정마저도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부끄럽게 얼굴을 숙이고 있던 남옥이 윤호의 뺨을 때리면서 긴 대사를 한다. “괘씸한 놈, 준 게 없다고? 받은 게 없다고? 난 너희들에게 내 젊음을 주었어. 너희들 때문에 젊음이 시들어가는 걸 보고도 아까운 줄 몰랐다. 내가 재혼을 한 것도 너희들 때문이고 형태나 형자를 위한 것도 너희들 때문이었다. 난 형태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가문이 몰락했을 때,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최씨 가문을 지키는 게 내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게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에미, 내게 희생을 강요하고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아왔다. 그러면 반드시 너희들에게 밝은 앞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게 에미가 너희들에게 줄 수 있는 애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되다니, 사과 하마,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말아 주거라. 에미는 한 번도 에미를 위한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그것만은 믿어줘” 형식적으로만 말하면 이 대사 장면은 김지미의 (그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더빙이긴 하지만) 가장 훌륭한 연기중의 한 순간이다. 임권택은 이 장면의 대사를 나누지 않고 하나의 쇼트로 찍었다(long_take) 여기까지 이야기를 따라왔다면 이 대사가 얼마나 불합리한 지 누구라도 알 것이다. 그런데 기괴하다고 밖에 달리 말할 도리가 없는 이 장면에서 김지미는 (나는 의도적으로 배역이 아니라 배우의 이름을 쓰고 있다) 자신의 표정으로 그걸 설득해내고 있다. 이 장면은 그저 임권택의 김지미에 대한 믿음이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말할 수 없는 쇼트이다. 
 

이 두 개의 장면, 엄마 남옥이 윤숙에게 요구하는 장면과 병실 앞에서 윤호에게 자신을 설명하는 장면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세계이다. 어떤 세계? 회계 장부의 세계. 남옥은 계속해서 계산을 한다. 외로운 형자의 불행에 비하면 윤숙아, 너는 얼마나 행복하니. 친엄마가 곁에 있지 않니. 그러니 우리 힘으로 형자를 구해주어야 한다. 고개를 돌려 윤호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내 젊음을 가져갔어. 그런데 준 게 없다고, 받은 게 없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희생을 강요했고 그게 내 의무라고 생각했어. 이 계산 앞에서 윤숙과 윤호는 어머니의 희생을 알지 못하는 배은망덕한 자식이 된다. 당신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이 계산이 어떻게 성립하나요. 이때 남옥의 결정적인 말, “(중략) 내 의무라고 생각했다” 의무, 라는 무시무시한 말. 남옥은 자식들을 희생시키는 그 자리에 가서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을 의무라는 명령 아래 수행하는 중이다. 왜 그런 의무의 자리에 가야하나요. 이때 남옥의 계산은 이중장부가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머니의 장부이지만 그 장부의 행간에는 두 명의 어머니가 서로 다투고 있다. 얼핏 보면 이 두 명의 어머니가 윤호와 윤숙의 어머니와 형태와 형자의 어머니로 보이지만 여기서 진정한 인정투쟁은 남옥과 (형태와) 형숙의 친어머니 사이에서 벌어지는 중이다. 남옥이 얻고 싶어 하는 진정한 자리는 (미국에 간 다음 영화에서 완전히 사라진 형태와) 형숙의 친어머니의 권위이다. 남옥은 그걸 얻을 수 있다면 친딸 윤숙을 희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왜 이런 이상한 장부가 생겨난 것일까. 이때 이 기괴한 이야기를 성립시키는 요구의 동사, 그래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활동의 순환이 복종하는 힘은 남옥의 욕망이 아니라 의무에서 온 것이다, 어떤 의무? 남옥이 말을 빌리면 “최씨 가문을 지키”라는 명령. 그게 왜 의무가 되나요. 그걸 지키는 동안은 남옥은 최씨의 아내 자리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옥이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신이 그 누구의 아내도 아닌 상태의 미망인이 되는 것이다. 그게 왜 견딜 수 없나요. 그렇게 되면 윤호와 윤숙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 이상한 순환의 논리. 그래서 남옥은 형태와 형자를 위해 “한 번 더 참아라”라고 요구하면서 그 행위가 “너희들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본 적이 없다”는 희생의 논리를 완성시킨다. 물론 이 논리의 허구를 지적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알겠어요, 어머니. 그런데 제 자리는 어디에 있나요. 윤숙의 반문. 하지만 윤숙은 반문하는 대신 자살의 행위를 택한다. 여기서 내가 궁금한 것은 남옥의 자리에서 이 수수께끼를 성립시키는 의무의 논리이다. 남옥의 희생이 통상적인 모성애에 관한 멜로드라마 판본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 의무의 논리가 남옥이라는 개인보다 더 큰 어머니의 자리에서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위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옥은 동오를 사이에 놓고 동오와 윤숙, 그리고 동오와 형자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동오와 형자의 항을 선택했다. 이때 남옥의 의무가 바라보는 자리에서 그 선택은 (우리가 바라보기에는)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 사이에서 나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나쁜 선택과 더 나쁜 선택 사이에서 나쁜 선택을 한 것이다. 왜 윤숙과 동오가 더 나쁜 선택인가. 형자가 남옥 곁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은 남옥에게 상징적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포기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친어머니로서 윤숙에게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나쁜 편이 어머니로서 의무를 포기함으로써 상징적 어머니의 자리가 말소되는 더 나쁜 선택보다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남옥은 상징적 어머니의 자리가 폐제된 다음 그 장소가 텅 빈 상태의 공백으로 남겨지는 공허를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때 난처한 상황은 무엇인가. 남옥의 의무에 따른 행위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그녀 자신 안에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남옥이 차지한 자리가 어머니의 장소이기 때문에 이 세계의 질서에 관한 거의 절대적인 권리를 갖는다. 이때 이 의무의 행위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징적 어머니의 순환 회로를 고장 나게 만드는 것뿐이다. 윤숙은 자살을 시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순환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하지만 이것은 위험한 내기이다. 이 시도는 언제나 절반은 성공할 가능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치는 가장 우울한 순간은 이 중단이 그 누군가의 절망적인 자기 파괴의 시도 다음에야 도착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우리를 내내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은 의무가 아니라 이 의무의 행위를 중단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무엇이 무엇을 잘라내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그 의무의 행위를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시도하는 상징적 어머니의 자리로부터 남옥을 잘라내는 유일한 시도로서 순환회로를 부수기 위해 그 회로를 성립시키는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분리의 순간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다행히도 윤숙의 시도는 실패한다. 그런 다음 이야기 안의 약속의 장치들은 등장인물들 모두를 재빨리 장르의 안전한 마지막 잠면, 그러니까 해피엔딩으로 되돌려 보낸다. 

하지만 임권택은 그 결말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영화가 끝난 그 다음 장면에서 어떤 해피엔딩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형자와 제 시간에 맞춰 나타난 남자는 그들의 아이와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년 동안 자신의 아이와 함께 사라진 자신의 아내 형자에 대해서 언제 질문을 던질까. 정확하게 같은 의미로 동오와 결혼한 윤숙은 언젠가 형자와 보낸 밤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동오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형자가 떠나간 다음 남옥은 이제부터 자신의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침묵은 언젠가 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균열을 내장하고 있는 엔딩에 아무 것도 보충하지 않는다. 그 대신 <둘째 어머니>에서 어머니에 관한 악순환의 이면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준 다음 물러난다. 아직 충분히 대답하지 않았다. 임권택은 어머니, 라는 자리에로 계속해서 되돌아올 것이다. 커다란 순환. 그러므로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어머니, 라는 의무의 악순환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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