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된 자식들 Polluted Ones 임권택, 1982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4-07-31조회 14,752
오염된 자식들 Polluted Ones

... (계속) 이 글은 <내일 또 내일>에서 이어진다. 그러므로 혹시 그 글을 놓쳤다면 먼저 읽어주기 바란다. 다시 한 번이라는 반복. 임권택은 매우 부정확한 방법으로 반복을 반복하고 있다. (같은 말을 서로 다르게 두 번 사용했다는 것을 주목해주기 바란다) 핵심은 그게 전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환원이나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진화적 관점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재현하는 데 실패했다고 여겨질 때, 심지어 어디선가 자기가 다룬 세계와 분리된 무언가가 거기 표현되기를 거부하고 멈추었을 때, 그것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다시 한 번 건드리기 시작한다. 이미 나는 이 가정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이 가정을 따분한 작가주의의 지루한 도식 안에서 다시 한 번 종합을 시도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럴 생각이었다면 (그저 간단하게 말해야 한다면) 성공적인 통과에 매달렸을 것이다. 내 질문은 반대의 자리에 놓여있다. 무엇이 무엇을 더하는가. 혹은 무엇에서 무엇을 덜 하는가. 아니, 이 정반대처럼 보이는 시도가 어떻게 동시에 일어나는가. 그때마다 임권택이 확장하려는 폭은 무엇인가. 이상하게도 거기에는 무언가 깨어난다기보다는 발생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다음 그것을 육화시키려 하는 대신 어떤 정신적인 이미지라는 기호로 만들기 시작한다. 간단한 비교의 예. 거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쉬지 않고 걸어가고 있는데 <만다라>와 <취화선>이 보여주는 그 차이의 폭을 떠올려보라. 그런 다음 그 사이에 <개벽>을 놓으면 거의 삼항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약간의 우회. 영화에서 이미지는 단 하나의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매번의 영화, 매번의 시도 안에서 구별되는 순간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서 무언가 보는 대신 어떻게 출몰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임권택은 영화 안에서 이미지가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건 처음부터 그러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의 마지막 장면, 눈 위에서 펼쳐지는 전멸의 이미지에 대해서 나는 이미 길게 썼다. 물론 여기에는 불연속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선이 가늘게, 종종 희미하게, 때로는 완전히 지워져 가면서, 그러다가 어느 순간 불쑥 나타나면서, 다시 이어진다. 누군가는 이걸 매번의 매듭으로 만들어 연결고리의 개념화를 시도하고 싶을지 모른다. 나는 그런 시도가 항상 실패할 것이라고 그저 무심코 조심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충고할 수밖에 없다. 임권택 영화 안에는 식별 불가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순환이 맴돌고 있다. 때로는 작고 가끔은 크지만 그게 일종의 블랙홀처럼 건드리는 순간 마치 암흑처럼 여겨지기는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어떤 때는 임권택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블랙홀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나는 <티켓>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방 마담 민지숙이 백치가 되어버렸을 때 그것을 느낀다. 그런 다음 이 선은 다시 약간의 진동, 혹은 회전을 만들면서 <노는계집 창(娼)>에서 이어진다. 나는 언젠가 이 영화의 이상한, 정말 이상한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할 것이다. 물론 영화는 사유를 재현하는 예술이 아니다. 하지만 재현을 매개하는 방법을 놓치면 그 안에서 전개되는 표현의 양태에 대한 범주를 세워볼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 준 영화는 고다르의 <영화사(들)>이다.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 앞에서 악순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나는 그걸 용기 있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먼저 영화의 주변. <오염된 자식들>은 화천공사에서 이장호의 <어둠의 자식들>이 성공을 거둔 다음 마치 연작(이라는 이름을 내세운 속편)처럼 기획된 영화이다. 이장호는 처음에는 <어둠의 자식들>을 정말 일련의 연작처럼 찍을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빈민 철거촌에서 자란 이철용은 교육도 잘 받지 못했고 게다가 한쪽 다리도 불편한 신체장애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가난과 말 그대로 ‘투쟁’하면서 진보적인 기독교 교회의 민중 신학을 접하면서 의식화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알리고자 이동철이라는 필명으로 (약간 자조적으로 자신을 ‘이똥철’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자신의 이웃들을 한사람씩 소개하는 <어둠의 자식들>을 썼고 이 책은 1980년대 사회과학에 피와 살을 나눠준 현장문학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아마도 이 소설은 중남미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작가 비디아다르 S 네이폴의 (1970년대 내내 ‘창작과 비평’과 ‘세계의 문학’에서 산발적으로 발췌 번역해서 소개해온) 작품 <미겔 스트리트>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다음 이철용은 13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장호는 <바람불어 좋은 날>을 만든 다음 다시 한 번 더 깊이 도시 빈민의 구체적인 삶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때 소설 <어둠의 자식들>은 이장호에게 도시 빈민들의 뒷골목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이 영화의 조감독을 했던 배창호는 <꼬방동네 사람들>로 첫 영화를 찍었다. 이장호는 <어둠의 자식들>을 만들면서 제목 뒤에 ‘첫 번째 이야기, 카수 영애’라고 붙였다. 물론 이 영화에 가수 지망생이었던 영애의 후일담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장호는 금방 이 이야기에 흥미를 잃었다. <어둠의 자식들> 두 번째 이야기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 인조 카빈총 강도단 이종대와 문도석 사건을 각색한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를 만든 다음 다시 한 번 빈민촌 사람들을 다루긴 했지만 형식적인 실험영화에 가까운 <과부춤>과 <바보선언>에로 이끌렸다. 그리고 재빨리 다시 그 길을 중단하고 대중적인 사극영화 <어우동>과 거의 컬트적인 인기를 누린 만화를 영화로 옮긴 <외인구단>를 만들었다. 여기서 변덕스러운 목록을 멈추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자. 임권택이 <오염된 자식들>을 만든 것은 그 사이의 어느 즈음이다. 이 영화는 유익서의 원작 소설 「비를 타고 오른 망둥이」를 각색했으며 이동철의 소설이나 이장호의 <어둠의 자식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 구태여 둘 사이의 교집합을 찾아야 한다면 주연에 안성기가 출연한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오염된 자식들>의) 병구와 (< 어둠의 자식들>의) 태봉 사이에는 아무 연관이 없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이 영화사의 기획이었는지 임권택의 제안이었는지 어리둥절하게 보인다. 만일 영화사의 기획이라면 이동철의 소설에서 이장호가 영화로 담지 않은 수많은 다른 에피소드를 다시 각색해서 제작했으면 되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어둠의 자식 2>라는 제목을 달면 되었을 것이다. 그때는 아직 임권택은 영화사에서 기획한 다음 제안하는 영화를 연출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만다라>를 찍은 ‘직후’에 만든 (국책) 전쟁영화 <아벤고 공수군단>으로 이어지는 목록. (그리고 만일 임권택이 연출을 내켜 하지 않았다면 그때 화천공사에는 많은 감독들이 있었다.) 반대로 임권택 감독은 내 질문을 간단하게 부정하면서 “화천공사 시절 내가 먼저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했던 소설은 <만다라>가 유일”하다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그때에는 누구라도 <오염된 자식들>은 <어둠의 자식들>을 연상할 수밖에 없는 제목이었다. 만일 원작이 필요했다면 왜 <비를 타고 오른 망둥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지 않은 것일까. (이 소설은 연재소설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다음 한 권의 소설로 묶였다.) 나는 이상하게 이 제목 앞에서 서성거리게 된다. 임권택은 어떤 때는 제목에 대해서 몹시 소중하게 여기다가 어떤 경우는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를 취한다. 물론 그 제목이 그 작품에 대한 그 자신의 호의와 (직접적으로) 연결 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오염된 자식들’은 어딘가 환경운동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제목이다. (물론 이 영화는 환경운동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때 AIDS는 지구 상 어느 사회에서나 공포의 병명이었고 문화정치학의 논쟁적인 담론이었다. (물론 이 영화는 퀴어 시네마가 아니다.) 임권택은 이 영화의 제목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그렇지만 보고 난 다음에도 이 제목은 영화로부터 이상할 정도로 멀리 있다.

오염된 자식들 

내일 또 내일

규화와 진우
규화와 진우

병구
병구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자. 여기서는 먼저 이야기 안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의 공통된 모양을 건드려보고 싶다. 단순하게 형태론적으로 다가가서 서사를 양쪽에서 바라보면 <오염된 자식들>은 <내일 또 내일>을 느슨하게 리메이크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간단한 복기. (<내일 또 내일>) 규화는 대학을 졸업한 다음 기자생활을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큰 회사의 사장 딸인 가희를 만나 어린 시절부터 친구이자 가난한 애인인 미연을 버리고 결혼한 다음 회사의 상무가 된다. 하지만 결국 추락하고 그 집을 떠난다. 간단한 반복. (<오염된 자식들>) 병구는 대학을 졸업한 다음 하숙집에서 만난 약혼녀 형자가 있지만 회사 사장의 제안으로 사장의 딸 명희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결국 추락하고 그 집을 떠난다. 사회적 계급의 상승, 그리고 추락. 돈을 둘러싼 욕망의 경제학. 다음 차이. 규화에게는 지치지 않고 곁에 머물면서 도덕적 의무를 상기시키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 진우가 있지만 병구에게는 그런 친구가 없다. 나는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규화가 처음부터 진우라는 친구 없이 도덕적 균형을 유지할 수 없는 주인공이었으며 두 인물을 전형적인 대립의 배치로 설정하고 둘 사이의 힘의 관계 안에서 이야기를 진행했다면 <오염된 자식들>의 병구는 규화와 진우를 한 인물 안에 서로 일그러뜨리는 방식을 거쳐 하나로 합쳐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때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둘 사이에서 종합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 반대의 힘. 그 둘이 하나가 되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쳐부수거나 혹은 굴복시키거나 아니면 둘 사이에서 위계질서를 세운 다음 공존하는 방식을 취해야만 한다. 이것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양하거나 혹은 지향하려는 것과는 다른 문제와 만나게 된다. 하나 안에 둘이 있게 될 때 그중 하나는 유령이 되어 어슬렁거리면서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임권택은 이걸 염두에 두면서 기형적인 덧셈을 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덧셈은 영화에 관한 담론에서 위험한 도박이다. 나는 여기서 어떤 도식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저 영화에로 건너갈 때, 앞에서 뒤로 나아갈 때, 한 것을 다시 할 때, 그 안에서 대상이 어떻게 형상을 이루어갈까, 를 질문하려들 때, 거기서 무언가를 어쩔 수 없이 느껴볼 때, 나는 그 안에서 발생하는 덧셈이 일으키는 일종의 경련에 대해 피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느껴볼 때마다 (이 단어가 철 지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그걸 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끌어당긴다면) 그 안에서 임권택의 인물들은 실존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스스로 느껴보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여기서 내가 거의 필사적으로 인상에 머무르려 한다는 점을 계산에 포함시켜주기 바란다. 실존과 인상 사이에서 어떤 대화의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규화와 가희
규화와 가희






















 
그런 다음 변주. 임권택은 둘을 하나로 섞으면서 마치 카드를 서로 뒤섞듯이 어떤 법칙 없이 하나의 다른 질서로 만들어낸다. 하지만 카드를 섞어서 그 순서가 바뀌었다고 해서 있었던 카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주의할 점. 그때 카드의 순서가 바뀌면 같은 카드가 다른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규화의 친구 진우는 이야기의 진행 안에서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한쪽 다리를 절룩거린다. 보는 내내 그 불편한 걸음이 이야기 안을 맴돌고 있지만 마치 맥거핀처럼 이야기에서나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거의 다른 기능을 하지 않는다. 혹은 임권택 자신조차도 진우가 왜 그런 설정이 되었는지 잊어버린 것처럼 단 한마디도 그에 대해서 언급되지 않는다. <오염된 자식들>에서 (한쪽 다리가 불편한) 친구 진우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병구가 결혼하게 될 회사 사장의 딸 명희가 두 다리를 쓰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서 그를 맞이한다. 여기서는 <내일 또 내일>과 달리 명희가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설정이 이야기의 진행에서 중심으로 옮겨온다. 명희가 두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의 무능력할 뿐만 아니라 어떤 사회적 배경도 갖지 못한 병구가 그녀와 결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임권택의 인물들 사이에서 등장하는 반복적인 신체적 불구. 요점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나는 규화와 진우를 하나로 더한 다음 다시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병구 1과 병구 2로 환원시켰다고 말했다. 그 둘은 종종 숨바꼭질을 벌이고 때로 하나 뒤에 다른 하나가 숨어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진우의 외양은 병구에게 머물지 않고 명희에게로 옮겨간다. 그런데 여기서 그 인물의 성격이 옮겨가지는 않으면서 그 장애라는 한계가 전도된 고정점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카드를 펼쳐보자. <내일 또 내일>에서 맨 먼저 규화와 진우라는 두 친구를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 둘 사이에 미연이 있다. 미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우지만 미연은 규화를 사랑한다. 그런데 (진우와 달리 이미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을 차지한) 규화는 계급 상승을 위해서 (외동딸을 가진 부자 아버지를 경유하여) 가희를 선택한 다음 그녀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간다. 다음 차례. <오염된 자식들>. 병구가 있다. (달동네 하숙집에 사는) 병구를 (뒷바라지까지 하면서 결혼을 약속한 옆방 이웃의 가난한) 사랑하는 형자가 있지만 (취직을 한 다음) 병구는 계급 상승을 위해서 (외동딸을 가진 부자 아버지를 경유하여) 명희를 선택한 다음 그녀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간다. 아마도 당신께서는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는 착각을 느낄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단지 진우가 괄호 쳐진 것만은 아니다. (<내일 또 내일>) 규화와 가희가 처음 만나는 날 다소 가학적인 섹스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면서 결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결혼하자마자 중단된다. 그래서 임권택은 두 사람 사이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단 한 쇼트도 찍지 않는다. 반대로 <오염된 자식들>에서는 병구가 명희와 결혼 다음 거의 이야기 전체를 결혼생활로 진행한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다음 명희는 휠체어에 앉아서 다소 가련하게 병구에게 “사람이 그리웠어요,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어요”라고 고백한다. 아마 그 말은 (그때까지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결혼한 다음 형자는 그 둘 사이에 끼어들 틈이 없다. 하지만 명희의 부모가 손자를 보기 원하고 병구는 매일 밤 명희와 섹스를 해서 임신을 시켜야 하는 상황에 떨어지면서 서로 다르지만 동일한 지옥 가까이 다가간다. 두 영화 사이의 차이는 이 틈에서 시작한다. 






여기까지 오면 약간 까다로운 전환점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왜 거의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두 영화는 서로 합류할 수 없는 것일까. 그때 두 영화에서 가희와 명희의 차이는 단지 신체적인 제한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 불가능에 관한 간단한 가설. 가희의 자리에 명희를 가져다 놓고 명희의 자리에 가희를 데려다 놓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규화와 병구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 서로 상반된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규화는 가희가 이미 여러 남자들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다른 남자들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오직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정작 자신이 결혼하지 않는 미연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규화가 파국을 맞이하는 것은 그들 사이의 게임과 상관없이 완전히 외재적 요인인 시장경제에 의한 자기 토대의 붕괴에 따른 것이다. 반대로 병구는 명희가 다리를 고친 다음 다른 남자를 만날 때, 그런 다음 그 자신을 제외하고 모든 가족이 그를 속이려들 때, 병구 자신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규화처럼)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위해서 눈가림의 게임에 참여했다면 그 상태를 계속해서 연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병구는 그걸 참지 못한다. 물론 영화가 완결된 다음 가정법을 계속해서 밀고 나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만일 병구가 그걸 못 본 척하고 오로지 자신의 계급적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 거기 계속해서 자발적으로 눈 감은 척 머문다면, 적어도 그럴 수만 있다면, 병구의 잔인한 승리(를 가장한 패배)는 도덕적으로 몹시 끔찍한 지옥이 될 것이다. 우리는 원래의 영화로 돌아와야 한다. 이 이야기의 순환 구조 자체는 외형적으로 동일하지만 그것이 순환을 그려나가는 궤적의 차이는 기묘해 보인다. 무엇보다 점점 사회적으로 확장되어나가던 원의 궤적이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이번에는 반대로 차이가 그 안으로 파고들어 오면서 신체적으로 육화되어가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가장 이상한 순간과 마주친다. 두 영화가 거의 동일한 배움을 얻는다는 것이다. 마치 그것은 서로 다른 경로를 통과했지만 마침내는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두 개의 길을 간 것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나는 이야기의 형태가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한 ‘엔딩’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규화와 병구가 동일한 ‘엔딩’에 도달했다고 해서 서로 다른 경로를 통과한 두 사람이 동일한 배움을 얻는 것은 말 그대로 괴상한 일이다. 이 말뜻은 임권택이 두 편의 영화에서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같은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 이야기를 소급해서 거슬러 올라간 다음 어느 쪽을 선택해도 마찬가지라는 무시무시한 필연성의 법칙을 보여주는 중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때 배움은 과정의 선택을 통해서 얻게 된 우연한 소득이 아니라 어느 쪽을 선택해도 동일한 목적에 이르게 되는 운동의 감옥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좀 더 중요한 질문. 임권택은 그렇게 해서 거기서 나오는 열쇠를 찾았는가. 

나는 질문을 좀 더 밀고 나아가고 싶다. 동어반복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여기서는 두 번이 중요해진다. 두 번째는 하나가 미리 주어졌기 때문에 그 안에서 제한적으로만 활동할 수 있다. 여기서 두 번째는 부정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두 개의 순간이 동시에 찾아오는 긴장으로 가득 찰 것이다. 하나는 기대의 순간이지만 다른 하나는 환멸의 순간이다. 그 둘 중 어느 쪽도 버려서는 안 된다. 하나가 다른 하나와 대화를 나눌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그 둘 어느 쪽도 사라지지 않고 공존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임권택도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임권택의 인물들이 그 안에서 구조적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실존적으로 변화하는 과정 중에 놓여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때 규화와 병구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단지 그 두 사람의 성격이라는 따분한 설명에 기댄 것이 아니다. 그 둘이 시간 안에서 자기를 수행할 때 임권택은 내용을 탐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 자신들은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전체를 구성하는 한 요소라는 사실을 결국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추락해가는 자신의 운명이 구조적 필연성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렇다. 그렇게 쳐다보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임권택은 그걸 전복시킬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처음에도 그러했고 이후에도 언제나 그러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실존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 운명을 부정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도덕과 윤리 사이에 모호하게 선 결정이라는 결론에로 밀고 나아간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했다. 그 자신은 그걸 <잡초>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다. 지금은 그걸 놓고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때가 아니다. 여기서 내가 항상 뛰어넘기 힘겹게 여기는 것은 그 틈새이다. 틈새? 그 사이에는 결핍 혹은 공백이라는 심연이 기다리고 있다. 그 안에서 임권택은 체현의 놀이를 반복한다. 틈새를 메우겠다는 헛된 약속. 물론 거기서 한계까지 밀고 나아가면 기다리는 것은 환상이다. 우리는 이미 <천년학>과 <달빛 길어 올리기>에서 그걸 보았다. 이때 내가 <내일 또 내일>과 <오염된 자식들>에서 보려는 것은 어느 순간 대상과 그 거리를 상실해버린 것만 같은 어떤 역설적 자리이다. 어떤 자리? 인물들이 무언가 (다소 따분함을 무릅쓰고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자를 향해 한발 나아갈 때 다시 저자가 인물들을 향해서 한발 들어온 것 같은 그 자리. 여기서 임권택은 이 자리가 이 모든 이야기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부터 준비된 이 자리에 가기 위해서 자리 자체가 다가온 것처럼 마련한다. 여기엔 아무리 인물들이 실존적 태도를 취한다 할지라도 비참한 운명의 계획이 어른거린다. 나는 여기서 두 개의 동일한 결론을 앞에 놓고 그 사이에서 이루어진 차이가 그 안에서 가져야 하는 도덕과 윤리 사이의 내기에서 내적인 발전이라고 불러볼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영화 안에서 임권택의 이미지들이 정신적인 기호가 된다면 오로지 이 순간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은 어떻게 새겨지는가, 이미지들은 사건 안에 어떻게 흔적을 남기는가, 그 흔적 안에서 인물들은 무엇을 배우는가, 그런 다음 그것이 모여서 어디로 나아가는가. 그때 선한 것과 악한 것은 어디서 서로 나뉘는가.

여기서 먼저 혹시나 가질지 모르는 오해를 거절해야겠다. 나는 규화와 병구가 동일인물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그들이 거의 유사한 단계를 밟아가다가 갑자기 자신이 허공에 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추락한 다음 기이하게도 동일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치 임권택은 인물들을 다룬다기보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다음 사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그 둘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사실상 동일한 병명을 가진 증후가 통과하는 과정을 복기하는 것만 같다. 이때 이 두 인물을 둘러싼 흔적들은 놀랄 만큼 서로 닮아있다. 착한 조언자. 그런 다음 실종, 희생하는 여자, 두 명의 여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 부의 페티시즘.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동일한 증후를 앓고 있는 사람의 두 번의 꿈. 이때 흔적들은 (우리가 잘 설명할 수 없는 규칙에 따라) 매번 새롭게 자리를 바꾸거나 이동하고 종종 압축된다. 단지 둘 사이에 교집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요구들이 서로 자리를 바꾸면서 같은 이야기로 두 개의 무대를 만든다. 하지만 무대를 꾸밀 수 있는 형상화의 재료는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두 개의 무대는 사실상 서로 마주 보는 거울처럼 보인다. 둘은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처음에는 잠시 다르게 보이지만 곧 그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면 그 둘이 같은 것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여기서 반복은 흔적에 의해 자기를 보존하고 관리하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두 개의 이야기는 마치 물구나무를 선 것처럼 마주 보면서 서로에게 빠진 것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내일 또 내일>과 <오염된 자식들>을 마주 보면서 두 개의 무대가 고통의 특권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여기서는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라 무대가 인물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임권택은 여기서 그 운동의 질량이 그들을 둘러싼 세계라는 결론에로 밀고 나아간다. 물론 그 안에서 두 인물 사이의 심리적인 기제가 동일한 흔적들로 이루어진 무대의 서로 다른 배치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관한 차이와 간격을 설명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규화와 미연
규화와 미연






















그런 다음 규화와 병구를 서로 좀 더 가까이 데려다 놓아보자. 두 영화는 이상한 방식으로 거의 동일한데 규화와 병구는 자신의 리비도를 해결하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시작한다. 규화는 진우에게 거짓말을 한 다음 멀리 지방까지 가서 (규화와 진우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진우가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미연과 섹스를 한다. 병구는 저녁이 다가오는 오후 5시 40분에 하숙집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면서 AFKN 방송을 들으며 영어 공부를 하는 척하다가 (방이 약간 반지하의 위치에 자리해서 아래서 올려다보이는) 유리창 바깥에서 형자가 빨래를 내걸 때 보이는 치마 속을 훔쳐보면서 자위행위를 한다. 둘은 자신의 리비도를 처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다. 이때 두 영화 모두 리비도의 환상의 장막을 찢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규화가 미연과 섹스를 할 때 갑자기 비밀 뒤에서 이들의 사이를 잘 알고 있는 진우의 목소리가 침입하면서(voice_over_narration) 고통스럽게 양쪽으로부터 배신당한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다. 이때 찢어진 장막은 반복해서 <내일 또 내일>을 구성하는 일종의 막(幕)의 역할을 한다. <오염된 자식들>은 같은 척하면서 다르다. 우리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병구가 창문 바깥의 여자를 바라보면서 자위를 할 때 처음에는 그 행위를 대상과 주체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거리가 확보된 상황에서 자아가 만들어낸 환상과의 놀이로 받아들인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이 시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여자가 돌아서서 창문을 두들기며 병구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하며 말을 걸 때 갑자기 환상과 가졌던 그 거리가 무효가 되면서 생겨난 소통의 거래가 욕망을 욕구에로 물러나게 만들면서 이 자위를 역겹게 만든다. 간단해 보이는 차이. 그러나 일단 시작하자마자 그 둘 사이의 욕망에 이제 돈의 계급적 환원이라고 부를만한 교환가치들이 달라붙으면서 벡터의 포물선을 그으며 점점 서로 멀어지기 시작한다. 규화가 자본의 경제학이라고 부를 전쟁터 안으로 들어간다면 병구는 리비도의 감옥 안으로 들어간다. 물론 둘 다 지옥이다. 하지만 그 둘 사이의 차이는 그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충실한 수행이 가져올 단순한 결과보다 크다. 명희로부터 자신의 집안이 얼마나 가난했으며 부모님은 돈을 벌기 위해 어린 남매를 방치하다시피 했고 그런 중에 풀빵이 너무 먹고 싶어서 길을 나섰던 오빠가 트럭에 치여 죽고 자신은 소아마비가 된 사연을 들려주면서 왜 부모님이 그토록 자식을 갖고 싶어 하는지를 설명 들은 다음 병구는 오로지 손자를 낳기 위한 섹스에 몰두해야만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규화가 섹스라는 관계를 통해서 가희와 결혼을 하고 부가 베푸는 자리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을 때만 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성기와 욕망의 관계에 대해서 여전히 주인의 자리에 머무른다. 하지만 병구는 자기 육신의 권리를 포기한 대가로 그 자리에 간다. 두 개의 성기 사이의 지위와 위치의 교환. 섹스는 언제나 아내인 명희의 요구로 시작된다. 여기서 상징적 성기(phallus)의 의미는 사라지고 오로지 생물학적 기능만이 남을 때(penis) 반대로 병구는 자신의 존재자로서의 실존적 의미를 상실하고 아주 작고 초라하고 축축한 기표만 남은 기호로서의 존재로 축소된다. 여기에는 욕망의 그래프가 이미 부서진 다음이다. 그때, 바로 그때, 마치 인형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어쩌면 다소 변태적으로 보이는) 보조도구까지 동원하면서 섹스를 위한 음악을 크게 틀어놓을 때, 그래서 보니 M의 ‘금성으로 가는 야간 비행(Night Flight to Venus)’의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우스꽝스러운 (초기) 일렉트로니카 비트가 그에 맞춰 삽입을 반복해야 하는 병구의 성기에게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율동의 명령으로 변할 때 소름 끼치도록 무시무시해진다. 

여기서 임권택은 다소 완만한 경사를 오르내리는 방법을 통해 저쪽에서 이쪽으로 돌아온 다음, 자기의 무대를 만들더니 마침내 여기서 자기의 위치를 바꾼다.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세계의 법칙으로부터 방 안에서 벌어지는 관계에로,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에서 리비도에로, 차라리 제도로부터 몸에로, (반복해서 말하자면) 사회로부터 규방 안으로 파고들어 온다. 어쩌면 그 둘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때부터 임권택은 반복적으로 몸의 관리와 기술에로 자기의 이야기를 변형시키고 무대를 바깥에서 안으로 옮겨놓기 시작했다. 나는 <오염된 자식들> 이후의 임권택 영화를 그렇게 다시 써보고 싶어진다. 반지하 다방 안의 다섯 여자들이 몸을 팔아가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이 얼마나 부서져가는 지를 물어본다. (<티켓>) 분단이라는 무게 아래서 어린 시절 헤어진 화영을 평생 찾던 동진을 만남의 광장에서 만나 그들이 낳은 아들 석철을 찾아가지만 몸의 기억은 그들 사이에 놓인 시간이라는 차이 안에서 애써 부정된다. (<길소뜸>) 조선 시대 사대부의 무자비한 유교 사상이 어떻게 집행되는지를 어린 옥녀의 자궁을 둘러싸고 풀어나간다. (<씨받이>) 아다다의 이야기를 <오염된 자식들>의 반대 버전이라고 불러볼 수는 없는 것일까. 선천적으로 말을 못하는 아다다가 돈을 지참하고 시집 간 다음 사랑을 받지만 (돈 많은 회사 사장이 회사 직원에게 소아마비로 불구가 된 딸을 맡기고 사랑을 요구하지만) 이제 돈을 번 시댁은 온갖 구실로 그녀를 쫓아내고 친정집에서도 출가외인이라 돌아오는 것을 거절당하자 결국 저잣거리 남자를 만났다가 물에 빠져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에는 둘 사이에서 어떤 공명감이 떠돈다. (<아다다>) 비구니가 되겠다고 나선 순녀는 남자들과 만나는 자기 몸을 통해서 불가의 가르침을 깨우쳐 나간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아버지 유봉과 송화는 끝까지 근친상간의 위험한 거리에 놓여있으며 동호는 배다른 누이를 홀린 듯이 평생에 걸쳐 뒤쫓는다. (<서편제> 그리고 <천년학>) 사창가에 팔려온 영은은 처음에는 자기를 사러 방에 들어섰지만 그런 다음부터 자기만 바라보는 남자 길룡과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인연으로 그렇게 살아간다. (<노는계집 창>) 성춘향과 이몽룡은 몸이 맺어진 다음 조선 시대 신분의 차이에서 벌어지는 고통스러운 시련의 시간을 이겨낸다. (<춘향뎐>) 오원 장승업은 조선 팔도를 떠돌며 그림을 그리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 여자 사이를 떠돌며 그의 삶 전체를 보낸다. (<취화선>) 태웅은 밑바닥에서 시작해 돈을 모으면서 그 과정에서 점점 망가져 가지만 한편으로 혜옥과의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쓴다. (<하류인생>) 오 상무는 지금 막 세상을 떠난 아내의 장례식에서 내내 마음을 두었던 젊은 여자 추은주의 몸을 바라보며 시간의 막 사이를 오간다. (<화장>) 나는 여기서 단지 세 편의 <장군의 아들>, 그리고 <개벽>, <태백산맥>, 그리고 <축제>만을 셈에서 제했을 뿐이다. 













두 영화가 동일한 배움을 얻는다고 했지만 <오염된 자식들>이 훨씬 비참하게 끝난다. 여기서 비판은 완전히 다른 자리에로 모두를 옮겨놓는다. 그런 다음 임권택은 거의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듯한 결정을 내려버린다. <내일 또 내일>에서는 한 가닥 가능성으로 내버려두었던 순환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규화는 사업이 실패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기회가 남아있고 진우는 (규화가 버린) 미연과 그녀의 딸과 함께 살고 있지만 여전히 친구로서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언제든지 준비가 되면 데리러 오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내일 또 내일>) 그러나 <오염된 자식들>은 이야기를 막다른 골목으로 처넣는다. 병구는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병원에 들른 병구는 말기 간 경화 판정을 받은 환자에게 다가가 자기 증세가 당신과 똑같다고 말하자 아무 설명 없이 “노형, 몇 살이요? 아까운 나이구먼”이라는 대답만 듣는다. 우리는 그 대답이 영화에서 무슨 말을 함축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여기서는 소멸을 목표로 한 것처럼 밀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때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누리던 대상과의 거리는 사라져가는 중인 셈이다. 이 이야기 전체에서 병구가 제로가 될 때 그 배움은 무엇을 향한 것일까. 여기서 이야기는 좀 더 잔인해진다. 명희는 두 다리를 고쳤고, 그녀의 부모는 병구를 내쫓는 것에 대해서 어떤 미안한 감정도 없다. 병구도 더 이상 여기 남아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부모에게 보상금을 요구한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한 집에 살 수 없을 것이다. 병구를 제외하고 이 집에서 모든 것은 재빨리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대상인 줄 알았던 명희는 주체의 자리를 되찾고 이제 다시 대상이 된 병구는 대상의 상실이라는 이중의 상실에 내몰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임권택이 새롭게 시도하는 실존적 자각의 자리이다. 이때 병구를 진정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이 집을 떠나는 것을 바라보는 임권택의 시선이다. 병구는 할 수 있는 한 이 집을 천천히 떠난다. 그는 명희가 타던 휠체어를, 한때 그가 밀어주었던 그 휠체어를, 거기 앉아서 자기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고백을 했던 그 휠체어를, 그 집을 향해 미련을 떨치기라도 하듯 밀어낸다. 하지만 병구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듯, 아니 어쩌면 너무나 잘 안다는 듯,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슬로우 모션으로 미끄러지듯이, 마치 기어가듯이, 멈추기라도 할 듯이,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세 개의 쇼트로 나뉘어서, 그렇게 굴러가서 쓰러진다. 그런 다음에도 병구는 금방 이 집을 떠나지 못한다. 그는 문을 열다 말고 다시 돌아본다. 여기에는 어떤 아쉬움의 감정이 묻어난다. 병구는 이 순간에조차 이 집, 이 집이 베풀었던 부의 맛, 그 맛에 길들여진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다음 그걸 내다 버렸다. 그래서 거기서 내려오는 법을 알지 못한다. 내 질문은 그걸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때 그 사다리를 어디에 숨겨놓았느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 자체를 차단하는 것만 같은 어떤 단절이 있다. 사라진 절차. 그 안에 담겨있을 비판적인 질문. 왜 그런 일이 벌어져야 하는 것일까. 임권택은 이 문제에 분석적으로 다가가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다. 나는 그것이 그의 예술적인 선택인지, 아니면 문제 자체를 피해서 무언가 영화 저편의 고유한 형식 뒤편에 숨겨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단지 그가 이 세계 자체를 혐오한다는 사실만이 텅 빈 상태로 불균형한 쇼트의 결여 속에 거기에 잔향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오염된 자식들>의 거의 추신과도 같은 마지막 장면 전체가 모호하게 느껴진다. 물론 병구가 죽음을 마주했기 때문에 마지막 선택은 성립될 것이다. 그는 자기가 태어난 고아원을 찾아와 원장에게 명희의 부모로부터 받아낸 돈을 전부 희사하고 떠난다. 물론 형자는 왜 병구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고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도 있다. 어쩌면 병구가 형자와 결혼을 했다면 그 자리에 대신 서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병구에게는 이제 기회가 없다. 병구는 그저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이, 마치 도망치기라도 하듯이, 그 고아원을 빠져나온다. 하늘에서는 큰 비가 내릴 것만 같다. 그때 김영동이 애처롭게 부르는 ‘하나이었는데’가 몇 번이고 반복해서 흐른다. “사랑이었는데, 하나이었는데, 사랑이었는데, 하나이었는데...” 여기서 병구의 행위는 물론 어떤 배움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의 절차는 어떤 미지수처럼 남아서 수수께끼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만일 이것이 병구가 자신이 잃어버린 주체의 자리를 되찾는 과정에서 얻은 실존적 배움이라면 그 안에서 다시 잃게 될 존재자로서의 슬픔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임권택은 여기서 물러난다. 나는 물러난다, 라고 썼다. 여기서 그 말은 단지 수사학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 정말 필요 이상으로 멀리 물러난 롱 쇼트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 마지막 씬에서 임권택은 다가간 다음 순식간에 뒤로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마치 거기에 어떤비밀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그걸 알아버리는 것은 몹시 위험한 것이라도 한 것처럼, 혹은 그걸 건드리는 것은 간섭해서는 안 되는 그 무언가를 훔쳐보기라도 한 것인 것처럼, 할 수 있는 한 멀리 물러난다. 임권택은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오염된 자식들>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임권택의 생각의 형식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물론 그 안에는 놀랄 만큼 기묘한 비대칭이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진리는 내용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 결론을 형식주의의 도식으로 읽는 바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읽었다면 처음부터 이 글을 다시 읽어주기 바란다. 만일 여기까지 당신이 동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함께 이제부터 좀 더 많은 긍정적인 비판을 수행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것을 비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것이라는 긍정. 여기가 1980년대 ‘이후’ 임권택 영화의 (또 한 번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재빨리 다시 1970년대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 흥미진진한 (미학적) 운동의 영화라는 경기장, 그리고 임권택이라는 영화적 제스처. (계속)



1982년 102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화천공사
각본  나한봉
촬영  정일성
조명  차정남
편집  김희수
음악  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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