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장황하긴 하지만 먼저 약간의 회고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그때 몹시 비분강개하고 있었다. 1972년 가을. <
삼국대협>이라는 영화 앞에서 보기도 전에 마음껏 비웃고 경멸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홍콩 쇼 브라더즈 영화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사실을 먼저 염두에 두어주기 바란다. 이제 막 중학생이었던 소년은 호금전의 <
용문의 결투>를 시작으로 장철의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
돌아온 외팔이>,그리고 <
심야의 결투>에서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삼국대협>의 신문광고를 노려보듯이 쳐다보았다. “最後의 勝者는 누구냐! 映畵史上 類例없는 殘酷! 激情! 興趣! 의 크라이막스!! 中國의 외팔이, 日本의 盲俠, 韓國의 一枝梅가 한꺼번에 나온다!!” 나는 중얼거렸다.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조건반사적으로 그해 여름에 본 <
외팔이와 맹협>이 떠올랐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때 나는 트랜스 내쇼널 시네마를 알지 못했고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영화적 개념 자체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고) 그저 이건 쇼 브라더즈 ‘짝퉁’을 다시 ‘짝퉁’으로 한 번 더 버전 ‘다운(!)’시킨 것이라는 생각에 분노를 거의 참을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때 나는 막 열 살이 넘었을 뿐이다. 용돈은 충분하지 않았고 그래서 동네 극장에서 상영하기를 기다렸다. 오랜 교훈. (보기도 전에) 일단 적의가 생기면 영화는 어떤 장점에도 모두 눈이 멀어버리는 법이다. 물론 나는 이 자리에서 <삼국대협>이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보고 난 다음 나는 이전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기분에 빠졌다. <삼국대협>은 영화 자체가 몹시 불쾌하다는 어떤 긴장의 유지랄까,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기분, 단지 이 영화가 형편없어, 라거나 나는 이 영화가 싫어, 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내팽개칠 수 없는 예기치 않은 그 무언가의 방해에 맞닥트린 것만 같은, 그런 기묘한 거부감에 사로잡혔다. 그때 나는 그걸 잘 설명할 수 없었다. 어떤 장면이, 이를테면 과도하게 폭력적이거나 혹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성적인 순간들이 돌발적으로 분출하는, 말하자면 그런 이미지나 쇼트, 혹은 대사가 문제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어린 소년이 받아들이기 힘든 심리적인 관계가 설정되었거나 숨겨져 있던 것도 아니었다. 이건 내가 미처 방어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삼국대협>은 (그것이 부정적이었다 할지라도) 내게 하나의 에너지로 등록되지 않았다. 좀 더 정확하게 나는 그것을 영화를 보면서 셈을 하는 항수(恒數)로 등록하는 데 실패했다. 대신 어떤 상처를 받았다. 잘못으로서의 세계. 속임수와 그 무언가 그 사이에 숨어버린 어떤 방법.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방법이다.
두 번째 만남은 이상하게 이루어졌다. 나는 <
삼국대협>이
임권택의 영화라는 사실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은 시절에 보았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게다가 임권택의 영화들은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
잡초>조차 찍기 이전의 이야기이다. 1987년 그해 겨울, 임권택 감독님과 인터뷰를 위해서 작품 목록을 정리하는 과정 중에 거의 난데없이 이 영화 제목과 다시 마주쳤을 때 망연자실하다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나의 심정을 한 번 상상해주기 바란다. 순서대로 인터뷰가 진행되었고 결국 이 영화에 대해서 질문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왔다. 그때 임권택 감독님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다음 “내가 그런 영화도 찍었어요?” 라고 반문했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정리한 줄 알고 다시 작품 목록을 찾아보았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고 일일이 신문광고를 찾아보아야만 했다. 물론 <삼국대협> 신문광고에는 ‘監督 林權澤’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확인을 하고 다시 질문을 했을 때 한참을 들어보시더니 “전혀 기억이 안 나요”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어쩔 수 없이 질문은 거기서 끝났다. 정말 기억이 안 나시는 건지 아니면 기억을 안 하고 싶은 건지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1972년 그해에 임권택은 (
변장호,
최인현과 함께 옴니버스 영화) <
명동 잔혹사>와 <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그리고 <삼국대협> 세 편을 찍었다. 한 가지 더. 다소 의미심장하게 <삼국대협>은 임권택의 마지막 무국적 무협활극영화이다. 그는 <
장군의 아들>로 ‘다찌마와리’ 장르에 돌아온 적은 있지만 두 번 다시 무협활극을 찍지 않았다. 그런 다음 2013년 부산영화제에서 다시 한 번 임권택 전작전을 (2010년 영상자료원 회고전에 이어 두 번째로) 하면서 이전에 공개된 적이 없는 <삼국대협>을 포함시켰다. 그제서야 나는 다시 한 번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국적을 가리지 않고) B무비의 열렬한 팬이자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이었던)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 감독인 샤를 테송은 뉴 커런츠 심사를 하는 바쁜 와중에도 달려와서 이 영화를 본 다음 앉아서 해설까지 듣더니 내게 기쁘게 악수를 청했다. 샤를 테송은 올리비에 아사이야와 함께 1984년 9월호 카이에 뒤 시네마 특집호 「홍콩 시네마」의 특집호를 만들었던 비평가이다. 아마 그는 토니 레인즈와 함께 홍콩영화에 매혹된 서방세계의 첫 번째 세대일 것이다. 이때 샤를 테송은 이미 소림사 영화의 계보를 썼으며, 쇼 브라더즈 영화사의 대표 런런쇼와 인터뷰를 했다. 물론 이 특집호에는 호금전과 장철의 인터뷰뿐만 아니라 (<
매트릭스>가 등장하기 20년 전에) 무술감독 류가량과의 인터뷰와 무술 동작지도의 장면 분석(shot_by_shot)도 실려 있다. 말하자면 그는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의 존재를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본 ‘찬바라’ 장르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는 비평가이다. 샤를 테송은 <삼국대협>을 본 다음 약간 흥분상태로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This is so funny lovely treasure!”라고 약간 외치듯이 말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답을 피하거나 아니면 자리를 떠나는 비교적 예의바른 프랑스 비평가이다.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그냥 맞받아치거나 구태여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자기의 반대 의견을 반드시 전해서 기어이 그 자리를 망쳐놓는다.) 나는 이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삼국대협>이 내 앞에서 걸작으로 둔갑한 것은 아니다. 그건 그의 견해이다. 내 관심은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본 다음 불쾌라는 기분, 너무 사소하게 느껴져서 이론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대답하고 싶어졌다.
다소 어색하더라도 먼저 <
삼국대협>에 이르는 과정을 약간 추리소설처럼 생각해보자. 물론 가장 앞에 있었던 영화는 홍콩 무협활극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와 <
돌아온 외팔이>일 것이다. 장철과 왕우. 과도할 정도로 커다란 성공.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스타일. 고전주의적 규범들을 중단시킬 만큼의 어떤 단절감. 물론 이 장르를 열어놓은 사람은 <
용문의 결투>의 호금전이었지만 장철은 그 방향을 완전히 틀어놓았다. 뭐랄까, 장철은 마치 이 장르에서 (제한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셀지오 레오네가 서부극에 대해서 한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장르 안에서 반칙으로서의 자기 순환의 에너지. 두 편의 ‘독비도(獨臂刀)’는 홍콩영화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 안에서 법칙은 단순하게 영화 안에서만 활동하지 않았다. 쇼 브라더즈는 일본 영화사들의 방식을 받아들였고 소속 영화인들을 월급제로 운영하였다. 왕우는 두 영화의 성공 이후 쇼 브라더즈를 떠났다. 우연의 일치. 쇼 브라더즈에서 경력을 쌓은 제작 프로듀서 레이먼드 쵸우(鄒文懷)도 마침 떠나서 새로운 영화사 골든 하베스트를 세웠다. 레이먼드는 영화사의 핵심은 스타라고 생각했고 재빨리 왕우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골든 하베스트는 화어권 영화 극장 체인을 장악한 싱가폴 화교출신의 소씨(邵氏) 두 형제가 세운 쇼 브라더즈의 독과점 방식의 배급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만 했다. 중국 본토는 문화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서방세계의 시장은 너무 멀었다. 아시아의 가장 활발한 영화시장 일본. 만일 동경을 점령할 수 있다면 홍콩영화를 들고 미국 시장을 두들겨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골든 하베스트는 왕우라는 스타를 일본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쇼 브라더즈는 초기 무협영화에서 무술 동작지도를 위해 일본에서 사무라이들의 활극장면 미장센을 연출하는 살진(殺陣) 감독들을 초대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레이먼드는 비교적 일본 영화계의 인맥과 잘 알고 있었다. 골든 하베스트는 한편으로는 화어권 내에서의 새로운 ‘독비도’ 연작을 염두에 두면서 일본에서 자토이치(座頭市) 연작과의 합작을 타진하였다. 떠돌이 장님 안마사이자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뛰어난 검술을 지닌 자토이치는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막부시대를 배경으로 악인들을 물리치고 서민들을 돕는 정체불명의 협객이자 방랑자이다. 1962년에 시작한 ‘자토이치’ 연작은 단숨에 가츠 신타로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눈이 먼 자토이치가 흰자위를 껌뻑거리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맹인 지팡이인 줄 알았던 막대기에서 불현듯 칼을 빼내 순식간에 그를 둘러싼 사무라이들을 물리치는 장면은 하나의 컨벤션이 되었다. 이 연작 중의 한 편도 보지 못한 분들은 기타노 다케시가 다소 패러디하듯 (그 자신의 인터뷰를 빌리면) “흉내를 내면서 리메이크한” <
자토이치>의 활극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하지만 자토이치 연작은 너무 많이 만들어졌고 게다가 매번 귀신같은 칼 솜씨를 뽐내는 자토이치와 일대 일 막상막하의 대결 장면을 펼치기 위해서 다른 텍스트로부터 라이벌을 꺼내 들었는데 미야모토 무사시까지 등장했을 때 사실상 이 연작은 거의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그때 골든 하베스트의 제안은 자토이치 구미(組)에게도 흥미로운 제안이었(을 것이)다. 왕우가 누군지도 모르고 단 한 편의 ‘독비도’ 영화도 동경에 개봉하지 않았지만 절정의 무술을 지닌 장님과 중국 대륙에서 온 외팔이가 대결을 벌인다는 것은 대중들에게 색다른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시리즈 번외편’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 영화산업으로서는 (이차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전역에서 일본영화가 수입 금지되거나 (한국도 그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극심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는 상황에서 홍콩 영화의 배급망을 통해 대표적인 일본 대중영화의 시리즈물이 알려지는 것은 여러모로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야스다 기미요시가 감독을 하고 외팔이 검객 왕강이 혈혈단신으로 (쇼 브라더즈 버전의 외팔이 검객의 이름은 방강이며 아내가 있다) “단지 조용히 살고 싶어서” 일본을 찾아왔다가 그만 왕족 행렬에 휘말려 들어 우연히 만난 중국인 부부가 죽고 거기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가 전개된 끝에 결국 오해에 오해가 반복되면서 자토이치와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자토이치’ 연작 22번째 영화 <신 자토이치, 물리쳐라! 당나라에서 온 검객(新 座頭市, 破れ!唐人劍)>이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화어권 개봉을 위해서 일본판과 홍콩판을 별도로 편집했고 각 버전은 각 나라의 주인공이 최후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래서 홍콩판은 서증굉(徐增宏)이 다시 편집했고 제목은 <獨臂刀大戰盲俠>이다. 세 개의 후일담. 그 하나. 쇼 브라더즈로서는 황당무계한 상황을 맞이한 꼴이 되었다. 아마 장철의 입장에서도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나는 1971년 홍콩의 판권분쟁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골든 하베스트의 왕우판 ‘독비도’ 제작을 막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대신 장철은 자신의 새로운 주인공인 (그때는 ‘깡따위’로 알려진) 강대위를 주연으로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오른팔을 자기 손으로 자른 다음 왼팔 검법을 익힌 주인공을 내세워 <신 독비도(新 獨臂刀)>를 연출하였다. 이 영화가 나쁘지는 않지만 (마지막 시퀀스 전체는 장관이다) 이 연작에 감돌던 그 어떤 매혹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장철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그는 더 이상 ‘독비도’ 연작을 찍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왕우는 온갖 변주를 만들면서 ‘외팔이’ 시리즈를 계속해서 제작하고 종종 연출도 직접하면서 주연 영화에 출연하였다. 장르와 연출과 스타의 삼각형 중 한쪽 꼭짓점이 괄호 쳐졌을 때 도형은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 에 관한 하나의 사례. 후일담 그 둘. 일본 진출은 생각만큼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 관객들은 이 영화를 홍콩에서 온 새로운 스타의 발견이라기보다는 ‘자토이치’ 연작의 외전(外傳)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오히려 전 지구적 DVD 마켓이 (말 그대로) 개방된 다음 좀 괴상한 경로를 거쳐서 (일부 서방세계 자토이치 ‘덕후’들의) 컬트영화의 반열에 올랐다. 진정한 의미에서 골든 하베스트의 꿈이 이루어진 것은 왕우의 다음 세대, 이소룡이 그들을 찾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첫 번째 영화 <
당산대형>, 그리고 <
정무문>, 하지만 그건 이 글과 상관없는 후일담이다. 후일담 그 셋. 그런 다음 ‘자토이치’ 연작은 네 편이 더 만들어진 다음 거기서 끝났다. 다음 세대들이 각자 자기의 방식으로 새로운 ‘자토이치’를 연출했지만 그건 오마주거나 향수로만 반복되었다. 가츠 신타로 없는 ‘자토이치’는 아마도 왕우 없는 ‘외팔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제 세 번째 이야기의 차례. 1972년 7월 30일 서울 단성사. 그때 일본영화는 아직 수입을 허락받지 못했다. 일본에 관한 대중적 상품들은 종종 적대적이거나 경멸을 담아서 (그리고 반민족적이라는 위협적인 어조로) 왜색문화로 불리었으며 영화와 대중음악은 모두 금지되었다. 금지는 근거 없는 소문을 만들었고, 소문은 덧칠이 된 전설을 만들었다.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일본 사무라이 영화들은 화면에 피 칠갑을 하고 시체들은 칼바람에 사지 절단되어 온 사방에 뒹굴고 대결장면들은 너무나 눈부셔서 화면을 마주 보기도 전에 끝난다고 전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홍콩영화로 둔갑한 <
외팔이와 맹협>이 개봉을 한 것이다. 모두들 말하진 않았지만 이 영화가 일본 사무라이 활극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중학생이었던 나도 알고 있었다. 맹렬하게 홍콩영화를 보던 나(와 내 친구들)은 하나의 사건으로 이 사태를 받아들였다. 정말로 불가능한 순간이 이루어진 화면을 보고 싶었다. 꿈의 영화. 당신은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무엇을 상상하고 있어도 그보다 더 훌륭한 영화를 우리는 기적처럼 마주치곤 하지 않았던가. 각자의 비장의 목록들. 그러나 <외팔이와 맹협>은 나를 완전히 실망시켰다. 장철의 영화처럼 비장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미지의 영화가 만들어낼 수 있는 신비로운 비밀 따위도 없었다. 액션 시퀀스는 시시했고 왕우는 홍콩 쇼 브라더스 영화에 비해서 눈에 띄게 둔해 보였다. 게다가 가츠 신타로가 연기하는 맹협은 무언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두 팔 중의 하나를 제거한 다음 던져진 제한적인 조건. 두 눈을 멀게 만든 다음 시각적인 암흑 상태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세상의 청각 기호들. 두 개의 조건을 바탕으로 마주한 세상의 상이한 재구성. 나는 아직 육체의 권리를 놓고 신체훼손이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질문할 나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외팔이와 맹협>은 그해 여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아무 정보도 없이 <외팔이와 맹협>이 ‘독비도’ 연작의 팬들을 능멸하는 영화일 뿐만 아니라 이런 영화가 성공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해 추석, 9월 22일에 <
삼국대협>이 개봉하고 말았다. 그렇게 쓸 수밖에 없다. 대중적 성공의 재생산. 이제 여기에 조선의 일지매를 더해서 ‘독비도’를 한국영화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황당무계한 전술적 배치. 그런데 여기에는 그나마 <외팔이와 맹협>에 출연했던 왕우도, 가츠 신타로도 없다. 물론 누구든 한쪽 팔을 숨기고 외팔이 검객 방강을 연기할 수 있으며, 흰자위를 드러내고 눈을 껌뻑거리면서 맹협 자토이치를 흉내 낼 수 있다. 하지만 배우가 장르 안에 들어가 고유한 스타가 된 다음 텍스트의 주인을 자처할 때 그 자리를 훔쳐내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이미 주인의 자리에 들어선 고유한 상대와 사랑에 빠진 관객들의 연애감정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나타난 다음 그 사람이라고 허풍을 늘어놓기 시작할 때, 그건 정말이지 마치 같은 옷을 입고 나온 전혀 다른 상대와 데이트를 하라는 요구만큼이나 무례한 짓이다. 일단 연애감정이 발생하면 내가 사랑한 상대방이 왕우인지 외팔이 방강인지 그 경계선이 애매모호해진다. 흐릿해진 경계. 이때 경계를 두고 마술이 벌어진다. 그 둘은 서로를 교환하면서 매혹의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시시각각 밀어내거나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데이트는 미묘해서 아주 작은 부분들까지도 때로는 능동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고 대부분 그냥 지나쳤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된 것들이 그 어느 것보다도 힘들의 관계 안에서 (정감으로서의) 무드를 자아내거나 (가시적인 형식으로서의) 모드를 이룬다. <삼국대협>은 어린 내게 허풍 뒤에 나타난 거짓말처럼 보였다. 여기엔 물론 어떤 종합도 없고 마찬가지로 어떤 분화도 없었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주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다시 그 안에서 같은 것 안의 새로운 것이 나타난 것도 아니다. 여기엔 우스꽝스러운 위장이 있을 뿐이었다. 그뿐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줄거리. 1598년 선조 31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 사신의 방문을 앞둔 조정은 중신들이 모여 의논하면서 “상감의 신표나 다름없는 귀중한 나라의 보물인 천하의 명검 천룡검마저도 왜놈들에게 약탈당했다는 사실이 탄로 나면 나라의 체면이 뭐가 되며 우리들은 무슨 면목으로 상감을 대할 수 있단 말이요”라며 탄식하자 다른 중신이 “그저 사생결단 하고 일본 땅으로 건너가 천룡검을 찾아오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는 줄 아오”라고 답한다. 그러자 “그렇다고 군사를 파병할 수는 없는 일...” 하자 “허나 지모를 겸한 고수급 검객을 한 사람 밀파한다면 일루의 희망은 있을 것 같소이다만...” 라고 덧붙인다. 구태여 길게 대사를 옮긴 것은 조정에서 중신들의 대화 장면이 녹음대본에는 남아있지만 현재 복원된 판본에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극장 상영판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고, 현재 디지털 복원판은 이 씬이 녹음대본에만 있고 상영판본에서는 편집된 것이 아닐까, 라는 추론을 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 장면이 없기 때문에 (혹은 없다면) 일지매가 왜 일본까지 와서 악전고투 끝에 천룡검을 빼앗아 조선에 가져가야 하는지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외팔이 검객과 맹협의 사연은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면서 일지매만 어떤 과거의 장면도 없기 때문에 마치 신비한 인물처럼 감춰진다. (현재의 복원판본의) 첫 장면은 요란한 사운드트랙과 함께 느닷없이 검은 복면을 두르고 지붕에서 나타난 일지매가 자신의 무술을 뽐내듯이 뛰어내려 일당 수십 명의 검사(劍士)들을 추풍낙엽처럼 무찌른다. 그런 다음 거만하게 칼집에 칼을 꽂으며 복면을 벗으면 곁에 ‘일지매 신영일’이라는 자막이 뜬다. 두 번째 등장인물. 한쪽 팔이 없는 무사가 건물의 실내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열댓 명이 칼을 빼 들고 달려들자 순식간에 그들을 물리치고 마찬가지로 거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그러면 곁에 ‘외팔이 김기주’라는 자막이 오른다. 두 가지 지적. 이미 충분히 설명했지만 ‘독비도’는 왕우여야만 한다. 두 번째 불만. 아마도
임권택은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를 보긴 했지만 (인터뷰에서 질문하자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고 대답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은 것 같다. 혹은 이 연작에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독비도’는 장철의 버전이건 ‘외전편’ <
외팔이와 맹협>이건 언제나 ‘외팔이 검객’ 방강은 절반으로 동강난 칼을 사용하였다. 그건 하나의 약속이다. 왜냐하면 팔이 잘려진 후 새로 검법을 익히는 중에 온전한 검을 사용하면 균형을 잡기에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반검(半劍)을 선택하였다. 이건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에 영감을 얻어 연출된 (아마도 최상의 리메이크 버전일) 서극의 <
칼>에서도 지켜진다. 그러나 임권택 버전의 ‘외팔이’ 검객은 삼국의 협객 중 어떤 결함도 없는 가장 큰 칼을 사용하고 있다. 한 가지 더. 왕우 버전의 ‘외팔이’ 검객은 마치 단 한 벌의 옷을 지닌 것처럼 검은 옷만을 입었다. 임권택 버전의 ‘외팔이’는 단 한 번도 검은 옷을 입지 않는다. 장르 영화에서 옷은 기호 체계일 뿐만 아니라 신화를 구성하는 다소 복잡한 코드군(群)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어떤 의미나 상징이 개입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혹은 그 어떤 해석을 요구하지 않아도, 기능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거기서 만들어지는 즐거움이라는 유혹이 당신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중이다. 무언가? 잘 설명되지 않는 쾌락. 그 안에서 오랫동안 기억에 머물고 있는 알 수 없는 섬세함. 어떤 비평적 시선도 거절하면서 거기서 비로소 온전하게 이 영화를 보는 관객과의 은밀한 유희가 시작된다. <
삼국대협>은 이 유희를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거나, 혹은 모르거나, 아니면 무시하고 있)다. 세 번째 등장인물. 지팡이를 더듬거리면서 다리 위를 걸어오는 자토이치는 갑자기 나타난 사무라이들이 자기를 둘러싸자 언제 그런 걸음을 걸었나 싶게 재빨리 칼을 꺼내 순식간에 쓰러트린다. 그러면 곁에 ‘맹인 김희라’ 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포스터에도 ‘盲俠’이라고 소개하면서 정작 영화 자막에 ‘맹인’이라고 써 있는 것은 좀 어리둥절하다. 그런 다음 이야기는 일본을 무대로 해서 (물론 모두 한국에서 찍었다) 일지매와 외팔이 검객, 맹협이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에 사소한 오해를 반복하다가 세 명이 힘을 합쳐 모두의 원수이기도 한 구로다 시게야쓰의 적진에 쳐들어가 함께 물리치고 천룡검을 되찾은 일지매는 일본을 떠난다, 는 줄거리이다. 나는 구태여 이야기의 디테일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
삼국대협>의 모든 장면이 ‘독비도’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나는
임권택이 <삼국대협>을 연출하기 위해서 <
돌아온 외팔이>를 보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대나무 숲에서의 활극장면. 장철은 이 장면을 쇼 브라더즈 세트 안에서 찍었다. 외팔이 협객 방강은 대나무 숲에 숨어있던 적을 물리치기 위해 재빨리 경공술로 날아오른 다음 대나무를 베고 쓰러진 숲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잘려나간 대나무를 밟아가면서 위에서 아래로 공격한다. 임권택은 대나무 숲에 가서 이 장면을 찍었다. 잠입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위장을 하여 구로다의 편에 선 일지매가 (그의 돈을 훔치려다가 그만 사랑에 빠진) 은월과 함께 대나무 숲을 거닐다 그를 찾던 (기다리던?) 외팔이 검객과 맹협을 마주친다. 하지만 이건 구로다의 무사들이 파 놓은 함정이었다. 대나무 숲에서 모두들 칼을 뽑고 활극이 펼쳐진다. 임권택은 진행을 하던 영화의 물리적 리듬이 갑자기 변주를 만들어내는 것을 즐기지 않는 감독이다. 그래서 101편의 영화에서 슬로우 모션을 마주치는 것은 이례적인 순간이다. 나는 1980년 <
짝코>에서 슬로우 모션을 본 다음 임권택이라는 영화의 속도 안에서 두 번 다시 슬로우 모션을 보지 못했다. <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이 골목에서 학생 깡패 오찌아리를 물리칠 때의 짧은 스텝 프린팅, 그리고 <서편제>에서 동호가 누이를 떠올릴 때 이미 눈이 멀어 지팡이를 짚고 서성거리는 송화, 그런 다음 마지막 장면에서 눈 내리는 날 소녀의 손에 이끌려 떠나가는 송화를 보여주는 장면에서의 옵티컬 프린팅을 제외하면 영화의 이미지들은 질서정연하게 24분의 일초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 대나무 숲에서의 활극에서 활동하는 슬로우 모션은 아름답다.
먼저 장소. 대나무 숲은 호금전이 <
협녀>에서 빛과 안개, 바람으로 가득 채운 다음 동양화의 풍경으로 만든 공간이다. 무협영화 안에서 대나무 숲의 전통은 리안의 <와호장룡>과 장이모우의 <연인>에서 매너리즘의 대상이 되었다.
임권택이 <협녀>를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서울에서 개봉한 적이 없고, 아직 DVD는 발명되지 않았으며, 1969년에 제작된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 첫 상영된 것은 1975년의 일이다. <
삼국대협>은 <협녀>에 지나치게 가깝게 있다. 여기서 임권택이 대나무 숲을 선택한 것은 풍경(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 나무를 건드리는 바람의 힘)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수직으로 서 있는 나무들의 방향과 칼로 베어 쓰러트릴 때 만들어내는 빗변의 대각선 운동 때문이다. 그런 다음 사방으로 서 있던 대나무들이 쓰러지면 새롭게 확보할 수 있는 시야의 확장과 활동 반경의 접선을 더 멀리 펼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다음 동선. 이 장면은 세 사람이 서로 대결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구로다의 사무라이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면서 살진(殺陣)은 세 개의 집합으로 분화된다. 여기에 일지매와 숲에 함께 온 여인 은월이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녀는 무술을 전혀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이 집합의 어느 안으로도 들어갈 수 없다. 만일 구태여 끌어들이려면 일지매가 그녀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을 연출해야만 한다. 재빠른 무술과 전혀 대결의 리듬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위험한 생명의 자리 사이의 불협화음이 만들어내는 긴장의 구도. 그런 다음 예정된 장르의 (따분한) 약속. 그 둘 사이에서 주인공은 희생을 무릅쓰고 자신의 리듬에 대한 제약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그녀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임권택은 완전히 다른 방식을 택했다. 그녀를 세 개의 집합 바깥으로 내보내는 대신 이 삼각형의 구심점으로 활용한다. 대나무 숲에서의 활극 장면에는 지금 하나의 극(劇)을 바탕으로 한 기승전결이 없었을뿐더러 일지매와 외팔이 검객, 맹협은 각자 싸우고 있기 때문에 장소의 공집합 이외에 어떤 이접적 접합의 이음새도 갖지 못하고 마치 다 각자의 활동영역 안에 머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장면은 하나의 씬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들은 검의 활동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시야 앞의 대나무를 계속 베어나간다. 그때 대나무는 어느 각도에서 베어도 은월을 향해서 쓰러져 내린다. 말하자면 은월은 이 씬에서 대나무들이 쓰러져 내리는 방향을 유도하면서 움직이는 자석의 미장센이다. 그래서 세 개의 집합의 쇼트들은 매번 은월을 중심으로 오가면서 왕복운동을 계속한다. 세 번째 문제. 이접적 종합을 위한 모멘트. 검의 활동. 대나무 숲 장면이 무심코 볼 때는 그저 살진(殺陣)의 교집합을 단순하게 변주시키면서 숲 안에서 이동하는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여기서 동선의 모멘트는 접촉의 괴상한 무효로 이루어져 있다. 분명히 이 장면은 그것이 일대 일이건, 일대 이건, 일대 다수이건 서로 검을 겨루면서 진행되는데 정작 검과 검이 서로 부딪치는 순간이 거의 없다. 끊임없이, 그리고 반복적으로 휘두르는 장면만이 서로의 검의 곡선을 그은 다음 그 반경 거리 안으로 들어가서 쓰러지거나 바깥에서 마주하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진행된다. 무심결에 볼 때에는 그게 잘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세 가지이다. 하나는 과도하게 사운드 효과를 사용하고 있어서 마치 검에서 어떤 힘(劍氣)이 반경거리를 확장한 것 같은 착시를 이용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단지 쇼트가 짧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연결 지점 없이(match_cut) 어떤 생략의 순간들만으로 (jump_cut)으로 편집했기 때문에 칼과 칼이 부딪치는 순간이 없는데도 그걸 생략한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 이유가 좀 기괴하게 보인다. 이 씬에서 검술 장면을 전개하면서 동작을 연출한다기보다는 마치 그 동작의 어떤 순간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켜서 찍은 것만 같은 순간들의 쇼트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슬로우 모션은 하나의 장치이다. 샘 페킨파는 액션의 방점을 찍기 위해서 갑자기 어느 순간을 멈추듯이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
와일드 번치>. 몹시 인상적인 <
가르샤(의 목을 가져와라)>. 장철은 할 수 있는 한 늦추기 위해서 시간의 확장으로 이용한다. 막상막하의 <
심야의 결투>와 <
복수>. 그리고 리듬의 인상주의라고 할 만한 왕가위의 <
화양연화>. 임권택은 단락(短絡)의 순간에 갑자기 사용한다. 거의 카오스에 가까운 대나무 숲에서의 활극 장면들은 쇼트가 제각각일 뿐 아니라 사실상 검술 대결의 순간이 없기 때문에 쇼트들의 콜라주 같은 느낌마저 든다. 이렇게 되면 고전적 영화의 규칙 안에서 유기적 구성의 윤곽이 부서질 수 있는 순간을 서로 다른 리듬의 교차라는 불협화음의 몽타주로 해결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몽타주의 프로그램에서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르의 대가들이 만들어낸 계보를 경유하여 만들어진 이 장면은 활극장면이기 때문에 우리와의 약속안에서 허용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이 씬 전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건 열세 살의 나이에 볼 때도 그렇게 생각했다. 단지 지금은 그걸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장면의 디테일이 미학적으로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곤궁에 처한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설명하려는 장면은 거기가 아니다. 알 수 없는 불쾌감.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기분을 넘어서서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켰을 때 나는 (여기서 서로 다르게 사용한 두 개의) 무언가에 대해서 대답하고 싶어졌다. 그것이 <
삼국대협>을 간절할 정도로 다시 보고 싶게 만들었다. 여기엔 내가 미처 듣지 못한 소음과 같은 영화적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마저 세우고 싶게 만들었다. 명백히 실패했는데 단지 그것만으로는 통과할 수 없게 만드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어떤 메아리랄까, 말하자면 내가 이제까지 다루어 온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어둡고 축축한 불길함이 거기 버티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보면서 단지 그게 기분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시퀀스가 되었을 때 어떤 대답을 거기서 보았다. 구로다의 성에 붙잡혀 온 외팔이 검객과 맹협, 그리고 정체가 탄로 난 일지매는 감옥에 갇힌다. 여기에 목숨을 걸고 (일지매와 사랑에 빠진) 은월이 구하러 온다. 그들은 이제 힘을 합쳐 구로다의 사무라이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구로다와 대결을 한다. 구로다는 명검 천룡검을 뽑아든다. 말하자면 <삼국대협>의 클라이맥스. 이때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구로다가 천룡검을 휘두르자 이 세 사람의 칼이 모두 잘려나간다. 무시무시한 검. 게다가 구로다는 (영화 속의 설명에 따르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에 오른 장군 중의 한 명이다. 대결이 시작되자마자 칼이 모두 잘려나간 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때부터 미로처럼 이어진 일본식 다다미방의 방문 사이로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게 전부이다. <삼국대협>은 유머가 있긴 하지만 희극이 아니다. 이들이 구로다를 피해 도망 다닐 때 천룡검에 그만 바지가 찢겨져 나가 속옷 바람이 되고, 그나마 흘러내려 엉덩이를 보일까봐 두 손으로 치켜 올리면서 겅중겅중 뛰면서 칼을 피해 도망 다닌다. 구로다는 이들을 뒤따라 천룡검을 움켜쥐고 이 방 저 방 뛰어다닌다. 헛 칼질. 전혀 위험해 보이지도 않은 채 절대로 천룡검에 베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도망 다니는 세 사람. 이때 약간 프레임의 속도를 빨리해서(slow_speed_shooting) 마치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왜곡되고 깨어진 표면. 잘못 작동되기 시작한 장르의 장치들. 나는 중얼거렸다. 아아, 이 노골적으로 잔인한 장면이여. <삼국대협>은 안티 클라이맥스의 영화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나는 이미 대나무 숲에서의 활극 장면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했다.
임권택은 이 장면을 장르에 충실하게 묘사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를 부분적으로나마 만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언가 자해하는 심정으로 스스로 장면 전체를 부숴버리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왜 그런지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다. 그건 소설의 영역이다. 그 대신 여기서는 어떻게, 에 대해서만 쳐다볼 생각이다. 임권택은 일지매와 외팔이 검객과 맹협의 검술을 여기서 보여줄 생각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시작하자마자 그들의 검을 모두 잘라버려야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구로다의 검술이 가히 절정이라는 것을 보여주어도 이미 잘려나간 상대방의 검 앞에서 달리 보여줄 수 있는 순간의 장면이 없다. 정말 이상한 것은 의도적으로 보여줄 게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때 이 말을 비틀고 싶다. 정말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 상황이 우스꽝스럽다는 것이다. 이 씬의 중요한 특징은 갑자기 장르를 이동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까지 왜곡되고 부풀려진 방식의 긴장을 갑자기 망쳐 버리면서 재빨리 지금까지 전혀 건드리지 않았던 (혹은 금지되었던) 상황으로 몰아넣은 다음 무언가를 교란시킨다. 무언가? 여기에서 저기에로, 혹은 저기에서 여기에로. 말하자면 도약. 아니, 그 말이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면 단지 추락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건 도약이자 추락이다. 내 대답은 의미 안에서 갑자기 그 자체의 효과를 무의미하게 만덫였模?어리둥절한 횡단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수평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 마지막 장면 전체를 기괴하게 만들어버린다. 여기에는 유머도 없고, 역설도 없고, 패러디도 없고, 어떤 냉소도 없다. 게다가 여기서 무언가를 하려다가 실패했다기보다 오히려 그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그냥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걸 해버렸다는 것이다. 우스꽝스러엔옙실?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의 무의미. 내가 여기서 보는 것은 달리 말하기 힘든 우울증이다. 무언가를 없애버리고 싶어서 눈앞에 있는 것을 증오하면서 그것을 만들어내는 영화 자체를 나쁜 것으로 규정 내려 버리고 마는 이 이상한 감정 상태 앞에서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임권택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알 수도 없다. 그 자신도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영화의 규칙 안에서 자기가 펼쳐놓은 상황에 대해 쓸모없음을 탄식하는듯한 슬픈 웃음이다. 여기에는 자기 안에 들어온 나쁜 것과 저항하며 싸우는 대신, 혹은 달래며 자기편을 만드는 대신, 거기에 편승하는 대신, 거기에 의지하는 대신, 그저 상처받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이미 벌어진 상황을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치 남의 일이기라도 한 듯, 그냥 아무것도 감추지 않은 채, 결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고통받고 있는 듯한 방법을 택하고 있다. 나는 비로소 알았다. 쇼 브라더즈 영화를 보면서 언제나 내가 즐긴 것은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매번 비극의 영웅적 승화를 맛보는 순간이었다. <삼국대협>은 그 순간을 무의미와의 만남이라고 선언해버리듯이 만든 다음 어떤 불연속성의 자리에로 데려가 망쳐놓았다. 우울한 목소리. 거기엔 볼 것이 없어. 만일 멜라니 클라인이라면 훨씬 정교하면서 시적으로 내 마음의 상태를 설명했을 것이다. 거기서 내 즐거움은 토막 난 상태가 되어버렸다. 영화는 (그때라면) 미처 반격도 하기 전에, (지금은) 더 설명을 할 수 있기 전에 재빨리 끝난다. 나는 <삼국대협>을 다시 보면서 하여튼 대답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나를 우울한 슬픔에 젖게 만들었다. 거기엔 임권택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시행착오의 힘도, 무언가를 참고 견디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다시 만들어내는 의지도, 아니 최소한의 영화에 대한 긍정도 잃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을 내게 안겨 주었다. 그 마지막 장면의 순간에서 내가 본 것은 고통받는 시간뿐이었다. 하여튼 이 이야기를 마치기는 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장면 없이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 장면을 만들어내는 과정의 고통을 거기에 고스란히 남겨놓았다. 어떤 비장감도 없이, 지나칠 정도로 통속적인 상황 안에서, 그저 거기서 덧없다는 듯, 거기서 끝날 수 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영화가 끝난다. 나는 여기서 영화가 또 다른 의미에서 과정의 예술이라는 것을 배운다. 악순환은 중단되어야 하고 주사위는 다시 던져져야 한다. 임권택은 이듬해 <
잡초>를 찍었다. (계속)
1972년 90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우진필름
각본 권용
촬영 최호진
조명 최입춘
편집 김희수
음악 황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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