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인터뷰 첫 번째 이야기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3-12-24조회 21,498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인터뷰 첫 번째 이야기: 
“그때는 내가 쓰면 최고의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시나리오는 영화에서 애매한 위치에 멈춰 서 있다. 아무도 연극에서 희곡에 해당하는 지위를 영화에서 시나리오에 부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영화에서는 <햄릿>이나 <벚꽃 동산>처럼 반복해서 (그것도 원작을 존중해가며 단지 해석만을 덧붙이면서) 만들어지는 시나리오란 없다. 시나리오는 오직 그 영화의 완성만을 위해서 쓰고 그 영화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 거기서 더 이상의 활동을 멈춘다. 아주 예외적으로 리메이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그건 이미 완성된 영화의 그림자 아래 놓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단지 소재나 인물이 흥미로웠을 지도 모른다. 영화가 어디서 시작되는 지는 영화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그저 이미지라고 말했다. 다른 누군가는 사건이라고 대답했다. 약간 신중하게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사람에 대한 흥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설명을 시작할 때도 있다. 저마다 다른 시작. 영화에서 아이디어는 사유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종종 영화에서 사유는 어디에 머무는가, 라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찾아내야 할 것이다. 시작이라는 장소. 서로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온 아이디어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 가장 먼저 문자에서 멈춘다. 왜 영화는 문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을까. 단지 기능적인 이유로? 그럴 지도 모른다. 이때 누군가는 이 과정이 영화를 산문적으로 만든다고 비판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문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떠도는 아이디어를 멈출 수 있을까. 시나리오는 정확하게 그 자리에 있다. 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쓰여진 시나리오를 보았다. 일부러 읽었다, 라고 하지 않고 보았다, 라고 썼다. 에이젠쉬테인의 <이반 대제>의 시나리오. 완전히 반대로 쓴 타르코프스키의 <향수>의 시나리오.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의 시나리오, 누가 이걸 읽은 다음 영화를 떠올릴 수 있을까. 브레송의 <무쉐뜨>의 시나리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지문들. 누구라도 금방 쓸 것만 같은 오즈의 <동경 이야기>의 시나리오. 거의 메모(의 콜라주)에 가까운 고다르의 <수난; 노동과 사랑>의 시나리오. 차라리 책에 가까운 에릭 로메의 시나리오. 종종 비평가들은 여기서 잘못을 저지른다. 혹은 여기서 금방 영화에로 옮겨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시나리오는 감독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단 쓰면 배우들의 독해라는 문제가 뒤따라온다. 그(녀)들은 감독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말하자면 시나리오는 그들에게 주어진 세계이다. 여기에 수정이란 없다. 단지 그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문제와 만나야만 한다. 대사에 불어넣어야 할 인격. 배우는 하여튼 그 말을 해야 한다. 그런 다음 무엇보다도 그 말을 믿게 만들어야 한다. 삶의 조건이라는 시나리오의 상황. 주어진 운명. 그 틈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똑같은 의미로 제작자는 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돈의 문제와 만난다. 영화가 요구하는 자본. 자본이 요구하는 영화. 그 둘 사이에서 힘겨운 투쟁. 노동은 교환되어야 할 것이다. 가치의 이동. 그 안에서 예술적 가치란 어디에 있을까. 이때 시나리오는 자본의 도면도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똑같은 시나리오를 읽어도 파올로 브랑코와 하비 와인스타인은 완전히 다른 전표를 만들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냉소적으로 대답할 것이다. 아마 그러기도 전에 두 사람 중 한 쪽이 완전히 매혹된 시나리오를 다른 한 쪽은 그냥 찢어버릴 것이에요. 그럴 것이다. 이때 영화는 어디에 살 것인가, 라는 질문과 만난다.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인터뷰 첫 번째 이야기

임권택은 오래 전, 1983년에 (당시 영화진흥공사에서 발간되던) <월간 영화>에 ‘저질 시나리오와 좋은 영화’라는 글을 썼다. 그때는 <만다라>를 찍고 난 다음, 그리고 <안개마을>을 만들고 난 다음, <불의 딸>을 준비할 때이다. 다소 길게 인용할 생각이다. 여기에는 시나리오에 대한 임권택의 입장이랄까, 약간 과장한다면 기대의 지평이랄 만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다. “(...) 흔히들 영화 예술은 감독의 것이라 한다. 그러나 좋은 시나리오를 감독이 망쳤다는 말은 자주 들었어도 저질 시나리오로 좋은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성공담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 영화를 생의 전부로 알고 살고 있던 영화인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어려운 생계를 위해 부업을 갖는 이조차 드문 것을 보면 자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저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방향 감각을 잃고 구원의 손길이 외부로 와 닿길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이런저런 구실에다 책임을 떠맡기고 저질연탄을 찍어내는 기능공정도에서 안주하고 있지나 않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살고 있는 때와 장소에 대해서 전혀 방향감각을 알 수 없는 영화, 그런 영화를 만든다는 것도 싫거니와 그런 인생을 사는 건 더더욱 이나 싫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자신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함에 있어서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수정을 불허한다는 단서를 붙이고서야 작품을 내주셨던 분도 계셨다. 그까짓 단서를 붙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느 경망스러운 감독이 한 지문인들 고치려 덤볐겠는가. 그 분의 작품은 모두 진실인 것을...” (<월간 영화> 7/8월호)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임권택송길한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국영화사에서 송길한이 차지하는 위치는 임권택을 떼어놓고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아마도 한국영화사에서 시나리오 작가가 가장 빛나던 시절은 1960년대 영화였을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그 당시에는 연출과 시나리오가 분리되어 있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다. 처음에는 시나리오가 돌아다녔다. 제작자는 감독을 구하고 그런 다음 재빨리 배우를 정했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자신이 시나리오를 연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배우들은 너무 많은 영화에 동시 출연을 했기 때문에 하루에도 두 세 개의 현장을 가야만 했다. 그들이 시나리오를 읽을 시간은 서로 다른 현장을 이동하는 차 안에서 였겠지만 아마도 대부분 피로에 지친 그들은 그저 잠을 잤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한국영화는 동시녹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대사를 성우가 녹음실에서 알아서 해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를 단순하게 비난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영화의 서로 다른 전통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를테면 네오리얼리즘 이후에도 이탈리아 영화들은 거의 동시녹음을 하지 않아서 그 소란스러운 오페라 아리아와도 같은 대사들의 목소리와 배우의 입은 거의 맞지 않는다. 반대로 프랑스영화들은 신경질적일 정도로 일치시키려고 애를 쓴다. 홍콩영화는 처음부터 북경 표준어와 광동어 사이에서 교체 가능하게 녹음한다. 말하자면 시스템의 체제 안에서의 역량의 통제에 관한 문제, 혹은 복잡한 인과관계 안의 중층적 결정으로서의 목소리의 위치. 자,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송길한은 (트뤼포가 공격적으로 정의내린 샤를 스파크와 앙리 장승, 자크 프레베르의 지문과 대사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좋은 시나리오’의 그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작가이다. 그는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흑조(黑潮)>라는 작품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첫 번째 작품이 영화 제작을 목표로 한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말은 송길한이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한국 영화현장의 조건을 잘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 시나리오 원작은 1970년 한국영화와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시나리오를 높이 평가하여 당선작으로 결정되었지만 영화로 옮겨지기까지 3년이나 걸렸다. 송길한은 나쁜 시간에 도착했다. 그해 6월 김지하는 <오적>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고 계간 사상계는 폐간되었다. 경부 고속도로가 7월에 개통되었지만 11월 13일 전태일이 청계천 6가 평화시장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친 다음 분신자살했다. 그래도 이듬해 4월 박정희는 다시 제 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였다. 정치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영화는 숨 죽였고,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었을 때 한국영화는 무자비한 검열과 무조건적인 항복 아래 정책홍보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그저 시시한 구경꺼리가 되었다. 막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었다. 송길한은 쓸 이야기가 많았지만 시간을 잘못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충무로에 남았다. 어쩌면 그 자신이 물러날 데가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모른다. 여기에 관한 그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그 자신은 “그냥 그게 내 운명인 거요”라는 대답만을 되풀이했다. 그의 첫 시나리오인 <흑조>가 이상언 감독에 의해 원래의 작품과 다르게 다시 각색되어 영화화가 된 다음 1974년부터 충무로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송길한은 거의 모든 장르의 시나리오를 썼다. 하이틴 영화인 <여고 얄개>, <우리들의 고교시대>, 애니메이션인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민병권과 공동 각본), 전쟁영화인 <도솔산의 최후>, <제 3공작>(윤삼육과 공동 각본), 에로물인 <독신녀>, 무국적 무술영화인 <낭화비권>, (그리고 좀 놀랍게도 성룡이 출연한) <금강혈인>. 이 목록은 다소 참혹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1940년생 작가의 빛나는 30대에 보여줄 수 있는 재능의 시간을 어쩔 수 없는 세월 속에서 그렇게 낭비하듯이 보내버렸을 때 그건 그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는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운명에 대해서, 운명의 책임에 대해서, 존재의 물음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영화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불러 일깨운다. 

<짝코>(1980)
<짝코>(1980)

(작품 연보에 따르면) 송길한은 15편을 쓰고 난 다음, 그러니까 첫 번째 시나리오를 쓰고 난 다음 11년이 지나던 해, 1980년에 처음 임권택을 만났다. 그때 임권택은 <족보>를 막 끝내고 난 다음이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영화 <낙동강은 흐르는가>를 만들고 난 다음이다. 누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문제. 말하자면 사건. 누군가는 너무 일찍 만났기 때문에 서로의 인연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며, 누군가는 너무 늦게 만났기 때문에 탄식을 할 지 모른다. 아마 임권택과 송길한은 몇 차례이고 충무로에서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충무로라는 경기장. 벤허다방에서의 전설적인 일화들. 베어가든, 혹은 퇴계로에서 을지로에로 이어지는 생선구이 대포집들. 두 사람은 충무로라는 좁은 골목길에서 11년을 서로 모르는 체 지냈다. 어떻게 서로를 모를 수 있을까. 어쩌면 서로 각자의 방식으로 둘 사이를 묶어내는 인연을 기다렸을 지도 모른다. 그 둘을 처음 묶어준 영화는 <짝코>이다. 지리산 태백산맥 어귀에서 만난 두 남자. 그 사이에 끼어든 한국전쟁이라는 시간. 빨치산 공비 짝코는 도망치고 그를 붙잡았던 송기열 경사는 그를 놓치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 아마 그 자신도 짝코를 잡으려던 세월이 그렇게 오래 계속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짝코도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이 밤 그림자 타고 도망 다니게 될 것이라곤 몰랐을 것이다. 하긴 누군들 알았겠는가. 이야기는 그 둘 사이를 오가면서 플래시백이 시시때때로 스며든다. 두 남자의 삶의 시간. 우리들의 역사. 거미줄처럼 이어진 시간. 그들을 칭칭 동여매기 시작했을 때 임권택과 송길한은 종종 좁디좁은 작은 방 안으로 삶을 수축시키기도 하고 때로 그 작은 사건을 역사 전체로 확장시키기도 한다. 끝없는 추락. 비탈에서 그렇게 떨어지는 짝코. 잘못된 미끄러짐. 그 앞에서 순간적인 송기열의 실수. 그런 다음 그들은 정반대의 이유이지만 동시에 같은 이유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역사의 오류. 단 한 마디로 이 영화는 걸작이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이 영화를 알아보지 못했다. 21세기가 된 다음에 긴 세월의 먼지를 털고 이 영화는 임권택의 걸작의 반열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짝코>가 자신의 야심과 깊이를 충분히 대접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더 멀리 갈 것이다. 

<만다라>(1981)
<만다라>(1981)
그렇다고 해서 금방 임권택송길한이 함께 작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영화사에서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사이의 오랜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 오즈 야스지로와 노다 고고, 노년의 루이스 부뉴엘과 장-클로드 카리에르, 데이빗 린과 로버트 볼트, (그리고) 수 없이 많은 예. 하지만 종종 두 사람의 대표작이라고 알려진 <만다라>의 첫 번째 각색자는 송길한이 아니라 이상현이었다. 송길한은 두 번째 각색을 했다. 물론 여기에는 영화사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조건들이 겹쳤을 것이다. 나는 이런 문제가 간단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영화 <만다라>는 두 번째 판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송길한의 시나리오 판본을 읽어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미 임권택과 <신궁>에서 손발을 맞춰 본 정일성 촬영감독이 (잘 알려진 대로) 큰 수술을 받고 난 다음 “의사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건 내가 찍다가 죽어도 후회가 없다는 심정으로” 촬영을 했다. <만다라>는 (아역배우를 하다 긴 공백을 끝내고 돌아온 다음) 주연 배우를 한 안성기에게도 전환점이 되었다. <만다라>는 어떤 마술 같은 순간의 힘이 사방에서 빛나는 신기한 영화이다. 198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음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떤 영화는 누군가의 힘, 때로는 감독, 혹은 배우, 가끔은 촬영이나 각본(의 대사)가 그 영화의 이것임을 드러내는 힘의 중심에서 형태를 만들어내고 존재를 증명하지만 또 어떤 영화는 그 모든 힘이 화음처럼 서로 조화의 기적을 만들어낸다. 나는 기적이라고 썼다. 왜냐하면 이런 순간을 영화에서 맛보는 것은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영화의 힘은 한편으로 서로 다른 힘들 사이의 긴장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은 이 긴장의 균형이 불화를 일으키고 종종 그 누군가의 힘으로 다른 힘들을 복종시킨다. 

임권택송길한, 그리고 정일성은 때로 제한된 조건과 시간 속에서조차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안개마을>은 한쪽에서 쓰고 다른 한쪽에서는 찍으면서 12일 만에 완성해낸 영화이다.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부를 순 없지만 어떤 순간들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종종 대담한 힘의 결정. 그들은 그것을 때로 서로 믿었다. 서로 다른 힘들의 위상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구성. 갑자기 변형을 일으킨 시청각 기호들의 활용. 그들 자신은 별로 믿지 않았지만 그건 <안개마을>과 거의 동시에 찍은 <나비 품에서 울었다>의 알 수 없는 불균질에서 조차 그 힘을 가끔씩 거만하게 드러냈다. 무엇보다도 임권택과 송길한은 한국영화에서 거의 손대지 않은 영토를 차례로 건드려나갔다. <불의 딸>은 이미<신궁>에서 임권택이 다루었던 무속의 세계를 거의 환골탈태하다시피 하여 밀고 나아갔다. 여전히 숨어있는 이 걸작. 임권택과 송길한, 그들은 어떤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의 일상생활 안까지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 사람이 산사에서 불경을 외우면서 해탈을 꿈꾸는 승려라 할지라도(<만다라>), 혹은 사람들의 사주팔자를 들여다보면서 신 내린 무당일 지라도(<불의 딸>), 전쟁 통에 부모를 잃어버리고 강가에 빠져죽은 사람들 시체를 건져내서 살아가는 사내의 삶일지라도(<길소뜸>), 그저 삶의 비루한 곁에 다가가서 생활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생활 없이 인간이 어떻게 하루를 견딜 수 있을까. 아마도 <길소뜸>은 임권택과 송길한이 만들어낸 화음의 절정일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모든 대사, 모든 씬에서 어떻게 영화가 자기의 순간을 만들어내는지를 이끌어낸다. 여기서 모든 장면들은 그 스스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안에서 자기를 보존하면서 단지 체험되는 것을 매번 넘어서서 그것을 바라보게 만든다. 여기서 방점은 바라본다, 는 말이다. <길소뜸>은 대부분 불안정한 감정의 관계에 내내 머물면서도 매번 어느 순간 마치 곡예를 하듯이 그 안에서 자기 개연성을 찾아 균형을 맞추고야 만다. 이 영화는 분명히 그 두 사람 누구에게나 이전에 보여주지 못했던 경지에 스스로 가 닿은 작품이다. 

비구니회 제작중단 요구 현장
비구니회 제작중단 요구 현장

그런 다음 <비구니>가 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한 여인의 비구니로서의 고행 길. 불가에서는 수행을 하기에 전쟁보다 더 좋은 시절은 없다, 라고 할 만큼 지옥의 수행의 나날들. 1984년 4월 7일 신흥사에서 주연배우 김지미 씨가 삭발의식을 하면서 첫 촬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국 비구니회에서 제작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유는 시나리오에서 다룬 비구니의 육보시 장면을 예로 들었다(고 한다). 나는 정확하게 어느 씬이 문제가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시나리오를 읽어보았지만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추측으로) 아마도 씬 87, 한국전쟁 중에 피난중인 아이들을 떠안은 비구니 수경이 중공군을 피해서 추운 겨울날 남하하다가 타이어가 펑크 나서 수리중인 트럭에 아이들을 태워 고아원까지 내려가기를 부탁하자 운전수가 수경에게 담요를 내밀면서 “(은밀히) 마누라 잃은 지가 3년이우, 애들은 책임지고 태워줄 테니까 대신 내 사정도 좀 봐 주슈” 라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나리오에는 그런 다음 별다른 장면이 없다. 아이들을 태우고 멀리서 포성이 울리고 나면 다음 씬으로 옮겨간다. 4월 16일 전국 비구니회는 법원에 제작중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그러자 영화인회의에서는 4월 31일에 창작자유 수호결의 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전국 비구니회는 5월 11일에 제작 중지를 요구하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초파일이 그 무렵이었고 <비구니> 팀은 수몰 지구에서 일단 촬영을 시작했다. 하지만 항의는 점점 거세졌다. 태흥영화사는 6월 13일 제작중단을 선언했다. 분하지만 <비구니>는 거기서 끝났다. (임권택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전쟁 장면은 내가 이제까지 찍은 것 중에 가장 힘 있게 찍혔는데...” 라고 대답했지만 그건 이미 회고담이다. 시나리오를 읽은 내 기분으로 <비구니>는 <만다라>와 <길소뜸>, 그리고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중간 어디쯤에 자리 잡았을 것만 같다. 혹은 그 영화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다음 임권택송길한, 정일성은 다시 함께 작업하지 못했다. 임권택과 송길한의 다음 작품 <티켓>은 구중모가 찍었다. 강원도 항구도시 구석 지하에 자리 잡은 다방을 무대로 티켓을 팔며 먹고 사는 네 명의 여자와 그녀들을 다시 뜯어먹는 다방 마담을 중심으로 바닥까지 떨어져 내린 삶의 안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이 영화는 임권택과 송길한이 찾고 싶어 했던 리얼리즘의 한쪽 끝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리얼리즘은 임권택의 목표였던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일상생활의 디테일 안에서 살고 싶어 했다. 그는 오로지 그것만이 믿을만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안에서 성찰의 방법을 끌어내려고 했다. 그게 조선시대가 되었건 일제 강점하가 되었건, 혹은 해방 전후의 혼란 속으로 들어가건 새마을 운동을 하던 농촌 마을로 가건 거기엔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소재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송길한은 <티켓>을 위해서 강원도 항구도시에 머물면서 여관방에서 계속 티켓을 끊어가며 낯선 다방에 커피 배달을 시켰고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고 오래 전 인터뷰에서 내게 말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켜켜이 쌓이면서 이 영화의 인물이 되어갔다. <티켓>에는 사람에 대한 어두운 실망과 삶에 대한 피로가 가득히 고여 있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단 한 번도 그들의 작업을 해피엔딩으로 끝내지 않았다. 물론 그것을 단순히 반대말인 비극으로 끝냈다고 말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그저 열어놓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파국을 맞이했으며 그 앞에서 결국 비관적인 비감이 감돌고 있었다. 비극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지라도 세상 앞에 선 슬픈 자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에 대한 연민. 어쩌면 여기서 더 밀고 나아갔다면 임권택과 송길한은 각자에게 새로운 구성의 방법에로 나아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공동 작업은 여기서 끝났다. <씨받이>를 작업하던 중 송길한은 미국에 가서 다음 영화 <아메리카 아메리카>의 취재를 했고 임권택은 그 시나리오를 부여잡고 세트에서 조선시대 양반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남자 아이를 낳으러 안채에 들여다 놓은 어린 소녀 옥녀의 이야기를 찍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영화는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되었고 강수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 주었다. 유럽의 (이른바) 3대 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수상한 공식적인 첫 번째 호명이었다. 그들은 그런 다음 각자의 영화를 만들어나갔다. 아마 긴 이야기가 거기 있을 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가 별로 궁금하지 않다. 누군가는 만날 것이며, 또 누군가는 헤어질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은 그렇게 자기의 힘을 가다듬을 것이다. 물론 송길한은 여전히 시나리오만을 고집스럽게 썼다. 장길수의 두 편의 영화, <아메리카 아메리카>와 <불의 나라>를 썼고, 노세한의 두 편의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와 <대학촌의 달빛>을 썼다. 그런 다음 이장호의 <명자 아끼꼬 소냐>를 쓰고 나서 그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새로운 작품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그가 임권택과 왜 더 오래 작업하지 않았느냐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왜 더 많은 작업을 더 오랜 기간 동안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만일 송길한이 이른바 1995년 세대와 함께 작업할 기회가 있었다면 한국영화는 지금 보다 훨씬 성숙한 영화의 명단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작업할 행운을 가질 수 있었던 젊은 감독들은 새로운 경지에 이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기회를 잃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남았다. 나는 다가올 시간을 기대하면서 송길한이라는 이 힘센 작가를 만나러 간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정성일 평론가(이하 정성일)_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면 먼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감독, 촬영, 편집, 배우, 이렇게 많은 결정 중에서 선생님은 시나리오를 선택했습니다. 1970년 동아일보에 <흑조>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시나리오 작가로 입봉하였습니다. 많은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런 다음 감독으로 다시 데뷔하기도 하지만 선생님은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작업만을 해오셨습니다. 

송길한 작가(이하 송길한)_ 처음부터 영화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영화를 좋아하고 그랬지만, 근데 나이 육십을 넘어서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까 영화는 내게 적어도 운명이었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어. 그전에는 늘 전전긍긍이었지. 여차하면 보따리 싸려고 하다 세월이 간 거지. 그때 한번 해볼 만하다, 하고 나를 붙들어 주신 게 임권택 감독님이었어. 서로 그런 것이 없었으면 떠났지, 그렇게 수많은 감독하고 한 건 아니지만. 나는 영화하고는 안 맞았거든. 생계형이었던 거지. 나는 생계형이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엄밀히 말해 생계랑 상관없이 내가 모두 걸고 한번 써봐야지 하는 거랑은 다르거든. 생계형도 많이 썼지. 그건 서로 알아. 먹고 살아야지, 란 말이 안 나오고, 목숨까지는 아니어도 그 다음을 걸고 임 감독님이랑 같이 작업을 한 거여.

정성일_ 작가로서 영화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선생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화는 어떤 작품들이었습니까? 

송길한_ 쥘리앙 뒤비비에부터 시작해야하는 얘기지. (고향) 전주라는 데가 군산 비행장이 바로 옆에 있어서 군인들에게 틀어줘야 하는 영화를 할리우드랑 프랑스 등지에서 많이 수급했어. 그걸 야매로 살짝 빼내가지고, 소위 ‘깡통극장’이라고 하는, 지붕이 깡통으로 되어 있고 낮은 나무의자가 있는 극장에서 봤었어.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뭔가 알만할 때가 고(등학교) 일, 이(학년)가 아닌가 싶어. 그때 한국영화 촬영장을 갔거든. 이강천 감독이 <피아골>, <아리랑>을 지리산, 전주에서 찍었다고. 참말로 그때만 해도 엉성스러웠고, (웃음) 그래도 소위 내로라, 하는 배우들이 6.25 전쟁 끝나고 오고갈 데가 없으니까, 한 무더기가 부산에 있었고 한 무더기가 전주에 있었거든. 그때 전주 극장에서 그들을 먹여 살렸어. 거기서 있던 것이 김진규 선생, 허장강 선생, 이예춘 선생, 그들을 다 거기서 만났던 거야. 아주 조그만 골목이 있는데, 그땐 배우인줄도 몰랐는데, 뭔가 분위기가 달랐어. 어느 날 이강천 감독이, 그러니까 원래 전주가 아니고 군산에 있던 양반이야. 이 양반이 군산에서 극장 간판 그렸는데 미술을 잘했어. 전주 백도 극장 홍보맨으로 와서 극장 간판을 그렸어. 그때 아직 잔류 공비가 있어가지고 민간 버스가 털리고 그랬었는데, 휴전이 53년도 7월 27일이었는데 그 이후에도 공비들이 산간에서 버스 스톱시키고 먹을 거 다 거둬가고 그럴 때였으니까. 도(道) 경찰국에서 반공의식을 길러야한다는 의도에서 영화제작을 한 거야. 그게 그 유명한 <피아골>이야. 요 며칠 전에도 국군방송에서 그걸 봤어. 그 시나리오를 나중에 영화인 되고나서 이강천 감독이 줘서 시나리오를 봤는데 지금 봐도 잘 쓴 시나리오야. 영화가 여건상 그걸 못 따라가서 그렇지 참 잘 쓴 시나리오야. 전라북도 경찰국 공보과장 김종환 씨가 썼는데, 그 양반이 소위 빨치산을 많이 다루고 현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건 거짓말 없는 시나리오야. 그땐 몰랐어. 어느 땐가 돌아가신 노경희 씨가 김지미 씨를 붙잡고 <피아골>을 (다시 제작) 해볼 생각이 없냐, 했는데 나는 귀가 번쩍 뜨였지. 근데 그 양반이 돌아가셨어. 나는 그걸 좋게 생각하고 (제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근데 그 무렵 패션에는 안 맞었어, 사실 (그때 제작을 하려고) 다루면 오히려 <짝코> 스타일이 되는 거였어. 빨치산이고, 적이다 공비다, 이런 반공 개념 말고. 그들이 거기서 싸우고 최후까지 버텨내고 그런 게 결국 인간이거든, 이게 나는 뭉클했던 거지. 영화로는 (크리스티앙-자크감독의) <싱고아라 Singoara>(1949) 그게 어려운 영화였어. 어릴 때부터 좋은 영화를 많이 접했었어. 아주 어렸을 때 본 채플린 영화 빼고는 고등학생 쯤 되어 본 것은 <나의 청춘 마리안느>였는데, 그 영화 땜에 잠도 잘 못자고 (웃음) 난 그때 왜 그렇게 조숙했나 몰라. 할리우드 영화보다는 프랑스 영화가 흥행성은 없어도 예술성이랄까 막연하나마 그게 월등히 차이난다는 것을 느꼈어. 이 차이가 중요한 거지. 영화판에 들어와서도 내게 암암리에 정신적 영향력을 줬을 거야. 내 감수성에 너무 맞았고 그때는 텔레비전도 없고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그때 꿈을 주고 판타지를 주고 했던 게 영화가 아니었을까. 

정성일_ 선생님 연배의 영화인들을 뵙고 같은 질문을 하면 대부분 할리우드 영화들, 특히 서부영화나 <자전거 도둑> 같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얘기하시는데 선생님은 프랑스 영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게 참 인상적입니다. (웃음)

송길한_ 난 프랑스 영화에 끌렸어. 물론 <자전거 도둑>이나 펠리니의 <>이나 나도 다 재밌게 감동적으로 봤어. 여러 날 가슴 속에 생각하곤 했는데, 난 대사가 시끄럽고 그런지 이태리 영화보다 프랑스 영화가 훨씬 부드럽게 마음에 와 닿았어. 이태리 영화는 간단한 것도 왜 그렇게 시끄럽게 떠드는지, (웃음) 나는 조용하게 젖어 들어오는 것들이 훨씬 좋았어. 쥘리앙 뒤비비에는 시인이기도 하고.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본 채플린은 만화 개념이었고, 영화가 이런 것이었구나, 아, 죽이네, 그런 생각이 든 건 프랑스 영화였어. <나의 청춘 마리안느>는 나를 숙성시킨 영화였어. 소년단계에서 청년 단계까지, 상당한 영향력이야. 주인공 마리안느를 왜 그렇게 찾고 싶었던지.. (웃음)

정성일_ 선생님이 영화 현장에 도착하기 전 한국영화는 1960년대 황금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대마다 한국영화에 대한 전제랄까., 선입견이랄까, 그런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전 선생님에게 한국영화란 어떤 것이었습니까? 

송길한_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을 보고 반했죠. 그게 이범선의 소설도 좋았지만, 영상의 그 현실 감각이 너무 좋았다고. 아 이런 감독도 있었구나. 사실 유현목 감독을 흠모했어. 그때는 영화판에 들어 올라고 생각도 안했거든. 근데 그 뒤에 이 양반의 일련의 영화들은 그냥 그랬어. (잠시 생각) 한국영화 중에 특히 <오발탄>이 그렇게 좋았어. 그 리얼리즘도 좋았지만 그 속에 담긴 유현목 특유의 허무주의 같은 게 그때 감성에는 매우 맞았던 거 같아요.

정성일_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전에는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송길한_ 학교를 다니다가 관두고, 거 참, 개인 사정이 거기 있었는데, 나는 청춘이나 이런 거랑 거리가 멀게 이십대를 보낸 거야, 그러다가 대한 석탄공사 시험에 합격을 해서 도계 광합소에서 한 삼년 석탄을 캤지, 근데 가만히 보니 아무래도 석탄을 캐기는 아까운지 소장이 나를 계장으로 앉히더라고. 그때 수입이 괜찮았어. 술 좋아하고 여자들 많고 거기가 아주 재미있는 데였어. 근데 거기 계속 있는 게 아닌 거 같아서 퇴직금 받아서 나와 버렸지. 서울에 다시 오니 힘들지. 중부시장가면 까대기라는 게 있었어. 쌀 한가마니를 어깨에 짊어지고 내리면 5원, 들어 올리면 10원. 그런 노동을 했어. 살아야 하니까. 짬이 생기면 시네마 코리아 알지? 조선일보 있는 데 있던. 동시 상영할 때 난 그때 거기서 정말 좋은 영화를 많이 봤어. 아침에 일찍 가. 그래서 하루 종일 앉아 있다가 저녁에 오고, 시원찮은 거 볼 때는 잠을 자기도 하고.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날, 맨날 소비적으로 보기만 할 것인가 그래서 수첩에다 보기 좋았던 것, 인상적이었던 것, 대사가 쌈빡했던 것. 끄적 끄적 메모하면서 그걸 봤어 그게 나의 유일한 학교였어. 그러던 차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 부문이 나오더라고. 근데 내가 무슨 텍스트가 있겠어, 탄광에서 서울 올라왔을 때 갈 데라고는 시네마 코리아뿐이 없는 거여. 한 씬에서 다음 씬으로 넘어가고, 거기서 디렉션이 움직이는 거고, 이 씬에는 뭔 얘기를 하는 것이고 가장 원시적인 거지. 그냥 무대뽀로 썼어. (웃음) 그때 돌아가신 오영진 선생님이 심사위원이셨어. 그런대로 심사평도 괜찮았어. 내용은 별 거 없고 프랑스 스타일의 러브 드라마였는데, 감각이나 그런 것이 씀씀이가 너무 아름답다고 뽑아주셨던 거죠. 그렇게 그 양반을 만나게 되고. 그 양반이 정치하느라고 무척 바빴는데, 시간 나면 토요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당사(堂舍) 앞으로 와라, 그러면 거기 가서 얘기 듣고, 이 양반은 얘기해도 시나리오 가르쳐줄 정신은 없고. 그런데 사상계에 이 양반 작품이 실렸는데 아, 이거 장난 아니구나, 많이 배웠어. 당선작은 이상언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서 당시 국도극장에 붙였는데 흥행은 부진했어요. 그때 당선작이 수준이 너무 높다고 한 단계만 낮춰서 신파로 만들어 달라는 거야, 그때 내가 학을 띠고 속으로 여기서 얼른 짐을 싸야겠다 했어. 

정성일_ 맨 처음 시나리오를 쓰실 때 영화를 본 것 말고는 배운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시나리오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양식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씬의 분류나 장면의 기술적 표기랄까, 그런 것들을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송길한_ 영화보고 배웠지. 이달 말이 동아일보 마감이야. 그런데 문서화를 해야 하니까, 그래서 생각을 해본 거지, 씬은 도대체 어떻게 되고. 고등학교인가 중학교인가, 교과서에 시나리오 단편 공부한 게 생각나서. 헌책방을 더듬어 갖고 그걸 다시 찾아봤어. 그게 유일한 교재였어. 그리고 나서 시네마코리아에서 본 것을 그 이튿날 또 종일 보고, 며칠 또 종일 보고, 내가 쓴 걸 그거하고 씬이나 지문을 맞춰 보는 거여. 씬이 구분이 되잖아. 요즘과 같이 커트로 갈 때도 아니고. 내가 쓰고 싶은 데로 썼는데 됐어. 그런 것이 오히려 오영진 선생한테 더 좋아 보였나봐. 실험적이고, 불란서 감각이 있는 것처럼 보였나봐. 내가 속았는지 그 양반이 속았는지 모르지(웃음)

정성일_ 그 당시 문학은 모든 예술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시나리오 작가는 결국 이야기꾼이기도 한 건데, 그때 선생님께 영향을 미쳤었던 소설가 혹은 소설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습니까?

송길한_ 당연히 최인훈의 <광장>이지. 딱 하나야. 두 개도 필요 없어. 나는 깜짝 놀랐어. 이런 작가가 우리나라에도 있는가. 그때 의식 있는 학생들에게는 센세이셔널 했지. 4.19 직후니까. 반짝 자유로울 때 그 찬스에 잡지에 실린 거야. 그러고 나서 바로 5.16으로 아작이 났지만. 그러니 참 우리 삶이 험준해. 

정성일_ 죄송하게도 선생님의 당선작 <흑조>가 영화화 된 작품을 보지 못해서 그저 줄거리로 짐작을 해보면 줄거리는 불륜이지만 섬에 갇혀 벌어지는 이야기의 상황이랄까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느낌은 부조리극과 실존주의적 질문을 떠올리게 합니다만....

송길한_ 당연하지. 칼 마르크스, 이런 거 집어치우고 나면 가는 게 실존주의니까. 그리고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이 한마디에 우리는 완전히 갔어. 살아 실존하는 것이 우리가 만들어내는 문학이나 기타 등등 이런 거에 앞서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큰 윤리나 도덕보다도 더 앞에 서서 우선 살고, 살아 숨 쉬고 보자는 거지. 이건 뭐, 굉장히 대단했지. 그래서 내게 영향을 줬던 것은 오히려 카뮈의 <이방인>의 뫼르소였지. 근데 오랜 기간 동안 이런 걸 못하고 영화 하니까 재미도 없고, 그렇다고 한국영화가 그때 장사가 잘 된 것도 아니고, 긴 시간 힘들었던 거지. 

정성일_ <흑조>를 쓰면서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영화는 어떤 작품이었습니까? 

송길한_ 그 뒤에 본 것인데 클로드 를르슈의 <남과 여>를 볼 때, 아 이렇게 못 만드는가? 부러워했던 기억이 나요. 난 요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젊은 친구들의 창작과정이 불만이야. 그냥 머리만 써. 정말로 욕구하고 피나게 갈구하는 게 없으니까 안 되는 거다. 그게 뭔지 한번 찾아보고 생각해봐라, 그때는 그런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쓴 것 같아. 

정성일_ 시나리오 작가의 운명 중의 하나는 누가 자기 작품을 연출하느냐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쩌면 처음 등단하신 무렵에는 임 감독님을 만나지 않는 쪽이 다행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때 감독님은 다찌마와리 액션영화, 만주 웨스턴 영화. 무국적 무협영화를 만들면서, 지금도 그때 시절 영화가 모두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늘 말씀하고 계시니까요. 

송길한_ 맞어. 감독님도 그런 소리했어. 기억 남는 것은 <애꾸눈 박>뿐이여. 그때에도 내가 볼 때 이 작품은 꽉 짜여있고 좋았다고 하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구. (웃음) 

정성일_ 처음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을 때 당시에 한국영화에서 활동 중인 감독 중에서 선생님의 작품을 이 사람이 연출하면 참 좋겠다, 하고 염두에 둔 감독이 있었습니까?

송길한_ 없었어. 그게 유일하게 그나마 눈에 띠었던 것이 유현목 감독이었지. 신상옥, 한형모, 이 분들은 흥행은 됐지만 내가 하고 싶은 세계와는 멀었고, 그나마 얘기를 하면 좀 소통을 할 수 있는 건, 그래서 내가 작가가 되고 나서 우연히 유현목 감독을 만났는데, 둘이서 술도 먹고 이러고, 지금은 알겠는데, 그때는 이 양반이 뭔 얘기를 하는지 몰랐어. 자기하고 하나 해볼 생각이 없냐 그러는데, 이게 판타지인지 뭔지 모를 소릴 하는 거야. 어느 날 불쑥 나를 만나더니 <삼일로 왕>이라는 시나리오를 딱 주고, 그때 삼일빌딩이 생길 때거든. 그게 삼일빌딩 건축주의 입지전을 쓴 시나리오야. 그게 도저히 마음에 안 맞는다고 내게 각색을 해달라는 얘기야. 그런 얘기는 쓴 사람한테 가서 얘기하시죠. 건축주를 하늘같이 모시자는 얘긴데 <오발탄> 정신은 다 어디 갔냐고 내가 막 항의하고 자리를 떴어. 철이 없었지.(웃음) 내가 그때 상당히 사나웠어. (웃음) 

정성일_ 그 당시 감독들 중에서 김기영 감독이나 이만희 감독은 어땠습니까? 이를테면 <하녀>나 <만추>는 어른이 된 다음에 본 세대이기도 하신데요. 

송길한_ 두 개는 다 좋았지. 난 이만희 감독 작품 중에 <만추>에 빡 갔지. (웃음) 이 소재가 이만희 감독한테 딱 맞은 거야. (<7인의 여포로> 때문에) 반공법에 걸려 감방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같은 감방에 있었던 사람이 휴가를 얻어 촬영현장에 있는 이만희를 만나러 온 거야. “너 언제 나왔냐” 그러니까 “석방이 아니라 휴가 나왔다.” 이게 포인트가 됐대요. 이게 정말 중요한 얘기여.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야. 이만희 감독이니까 그 생각을 한 거지. 이걸 여자로 바꾸면 어떨까 그림 나오잖아. 대단한 거여. 그 뒤에 <삼포 가는 길>도 처음은 괜찮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빠져서 좀 그냥 그랬고. 

정성일_ 선생님이 등단했을 때 시기가 안 좋았습니다. 정확하게 그때부터 한국영화가 이중 검열과 외화수입을 위한 스크린 쿼터제로 긴 시간 동안 내리막이었습니다. 아마도 매일 매일이 선생님께 실망의 시기가 되었을 텐데, 그럼에도 임권택 감독님을 만나기 전 십년의 시간 동안 영화를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계셨습니다. 영화의 어떤 매력이 선생님을 실망 속에서도 붙잡아두었나요?

송길한_ 내가 떠난다고 해도 세상에서 내가 딱히 할 만한 일이 안 떠올랐어요. 게다가 그 시절에는 내 노동에 대한 가치가 있고 대가가 있고 해야 할 텐데 그런 게 너무 없었어. 그 무렵에 찬스만 있으면 떠나고 싶었어. 더 볼 것이 없다. 예술이고 지랄이고 아무것도 없다. 완전히 공황 상태에다가 일종의 절망. 그래도 하자고 찾아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때가 참말로 웃기는 시대로 가잖아. 저급한 멜로드라마 아니면 얄개시리즈까지. 또 여자 시리즈가 십 년 동안 판을 쳤어. 나도 여자 시리즈 많이 썼어. ‘여자’자 안 붙으면 간판을 못 걸 정도였으니까.

정성일_ (웃음) 작품 제목을 찾아보니 많이 쓰셨습니다. <순자야>랄까...

송길한_ (정색을 하며) 그 중에 <순자야>는 괜찮았어요. 그건 하길종, 최인호가 보고 깜짝 놀란 작품이야. 원래 그 제목이 <순자야 문 열어라>야. 그게 전두환 부인한테 문열어라하니 시나리오 검열에서 가만있었겠어, ‘문 열어라’를 빼고 그냥 <순자야>로 간 거지. 그때 한진에서 하길종이 <한네의 승천>을 하려고 했던가, 그랬는데 최인호 작가랑 제목만 보고 킥킥 웃은 거야. 근데 읽어보니 그게 아닌 거야. 그걸 보고 최인호가 깜짝 놀랐지. 형을 달리 보게 되었다고. 나도 재밌게 썼고. 그 내용이 트랜지스터 라디오 월부장사를 신성일이가 하고 정윤희가 순자를 했으면 더 재밌었을 텐데 (신성일, 이영옥 주연) 미스캐스트에다 감독이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 영화 나온 거 보니까 부끄럽더라구. 감독이 운명이란 이야기를 했잖아. 아무리 잘 써도 최종집행은 감독이 하니까 감독이랑 소통이 안 되면 안 되잖아, 그때 짐 싸려고 하는데 삼영필림에서 (기획실장을 하라고) 나를 부른 거야. 그때 월급도 꽤 빵빵했지. 작품도 하고 싶은 거 쓰고 니가 해라. 이렇게 제의가 온 것이지. 거기서 제일 처음 하고 싶어 한 게 임권택 감독이야. 회사에서 전폭적인 기획권한을 내게 줬으니까. 그때 레퍼토리가 뭐냐. 맨 처음 만난 게 김원일의 <노을>이었어. <짝코>가 신(新) 빨치산 얘기라면 그것은 원조 빨치, 구(舊) 빨치산 얘기였어. 어떻게 해방직후 빨치가 태어났는가, 그걸 찍으려면 세트를 다 지어야 하는데, 몇 번이나 강대진 사장 옆구리 찔러봐도 대꾸가 없어.(웃음) 임 감독님한테 소설을 한번 읽어보라고 했어. 근데 읽고 오더니 이런 걸 영화하자는 사람이 다 있네, 이러는 거야. 긴 소리 짧은 소리 할 거 없고. 회사가 이 세트 지어줄 거 같아요? 나보고 그래. 그걸 맨 처음 하려고 했었어. 판이 무너지려고 했었는데 삼영필름 부속 영화사에서 임 감독님이랑 나를 부른 거야. 소위 탱크 부대 얘기였지. 탱크 부대를 찾아갔는데 안기부, 보안사 요원들이 따라붙는 거여. 탱크가 뒤집어져 폭파하는 얘긴데, 소대장이 부하들을 살려내고 탱크가 폭발하는 바람에 장렬하게 죽었다는 신문기사인데 이건 반공영화나 우수영화상감이지, 우린 재미가 없었어. 그래도 일단 전방에 가봤지. 이 이야기는 소대장과 탱크 부대원간의 병영 생활이 어떻게 얽혀있는가가 키를 갖고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병영에서 머무르려고 했는데... 택도 없어. 완전 자포자기 하고 오다가 내가 <짝코> 얘기를 넌지시 했지. 여관방에 둘이 들어가서 소주를 한 잔씩 한 거여. 30년 동안 잡으러 댕기는 얘기인데 우리가 하자. 그렇게 시작된 거여. 

정성일_ 선생님께서 임권택이라는 이름에 관심을 갖고 보기 시작한 첫 번째 영화는 무엇이었습니까? 

송길한_ <잡초>는 기억에서 좀 멀어지고 그렇게 와 닿지는 않더라고. 내가 깜짝 놀랐던 거는 그 <족보>. 아주 좋았어요. 주선태로 상정되는 설씨 집안의 비극은 감독님의 직간접적인 체험이 없다면 그렇듯 생생하게 표현될 수 없다고 느꼈어요. 일제시대를 살아내면서 멸망하는 나라를 표현하는데 라스트의 만장행렬과 새파란 보리 싹이 돋아나는 황토 언덕을 보는데, 어휴 뭉클하게 하는 거요. 그리고 <깃발 없는 기수>, 해방 무렵에 전기부족으로 전봇대 불이 꺼졌다 들어왔다 하는 장면을 보면 정말 소품을 다루는 대가야. 그런 것들이 다 빈틈없고, 특히 선우휘의 원작 소설에서 간결하게 넘어간 대목들, 거기가 영화를 하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대목들이 있는데 거기서 추가한 부분들이 정말 빛나는 거야. 단순히 영화를 본 게 아니라 괄목할만한 발견이었죠. 임 감독님의 세심하고 사려 깊은 연출력에 대해... 

정성일_ 임권택 감독님을 사람으로서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은 어떠셨어요? 

송길한_ 뭐랄까. 눈이 빛나고, 순발력이 뛰어난 건 이미 소문이 나 있었지만, 안으로 많은 얘기를 간직한 분 같았어요. 내가 임 감독님을 굉장히 순수하게 본 거는, 언젠가 대포집에서 내게 그러더라고. 송 작가 나 그렇게 순진한 사람 아니요, (웃음) 그때 알아본 거지, 임권택 감독에게 사실 어느 시간이 제일 기가 막히게 좋았냐면 제도권의 시간이 아닐까 싶어요. 이 양반은 부담이 없잖아. 이때가 최고로 좋았던 때고 충만한 때인 거지. 우수영화만 찍으면 되니까 얼마나 좋아. 우선 상업성에서 벗어나는 것만 해도 살판나는 거지. 이거 아는 사람 별로 없어. 그때 이 양반이 정리하고 앞으로 가야하고 침잠되고 그러면서 자기 성찰의 시간이 딱 온 거야. 그거 낭비한 사람 무지 많거든. 난 그걸 굉장히 대단하게 봐. 좌충우돌하며 깨달은 것도 있지만 정돈해가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유용하게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어. 

정성일_ 그래서 그 시간에 임권택 감독님만 살아남은 거군요?

송길한_ 다 좋았잖아. 작품이 나쁜 것 없었잖아. 박스오피스에서 벗어나올 수 있었다는 건 정말 행복한 거지. 거기서 자기 하고 싶은 걸 한다고 생각해봐. 그걸 또 백 프로 활용한 것도 무서운 거야. 유일하게 살아남았잖아. 

정성일_ 선생님과 처음 만난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짝코>입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짝코>는 어떤 영화입니까? 

송길한_ (잠시 생각) 일단은 획기적이었고, 그때 소위 흐름이란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짝코>에 대한 시점을 사람을 위한 내면적인 측면(에 두고 보면), 영화상에는 그렇게 안 나타나 보인다고 하더라도 서브텍스트가 굉장히 좋은 영화야. 내면을 읽어나간 거요. 형식적으로 플래시백은 늘 있는 것이지만, 플래시백이 현재진행형에 들락날락하면서도 극을 추동할 수 있는 힘을 갖느냐, 안 갖느냐, 그게 문젠데 묘하게도 힘을 받는 거요. 처음에는 다들 이상하다 생각했지. 그때는 영화진흥공사에서 어떤 영화든지 영화인들을 모아놓고 시사를 했어. <짝코>가 상영되는 동안 임 감독님이랑 나랑 뒤에 서있었어. 완전히 사람들이 빨린 거야. 송길한이 술만 마시고 하더니 다시 봤다고 하더라고. 임 감독님도 표정을 보니 흐뭇해하더라고. 그때 플래시백이 참 많았지만 딱 줄자로 잰 것처럼 절묘하게 들어갔어. 플래시백은 내면의 흐름 이런 걸 모르면 안 돼. 그것이 살아있다는 거지. 지난 일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더 열 받게 하고 정서적으로 파란(波瀾)을 만들어내는 것. 거기서 서브텍스트가 들어가야 더 발전을 하거든. 그게 굉장한 생명력이야. 나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 영화를 보고서야 알았어. 임 감독님 말마따나 영화가 흐르는 방향, 영화가 가고자 하는 쪽으로 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게 그 말이여. 겉보기에는 그저 소박해보이지만 그 양반의 철학이 제일 맞는 철학이여. 영화도 생물이죠. 가고 싶은 쪽이 있다고 그런데 우리가 작위적으로 만들어서 미끈하게 못 가잖아.. 굉장히 단순하고 철학적인 얘기야. 영화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 부단히 그 길만 천착해 온 게 임 감독님이 지금까지 작업을 이뤄낸 저력인거 같아. 크게 봐서. 

정성일_ <짝코>를 작업할 때가 등단한지 10년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 전까지 많은 감독들과 작업을 했습니다. 임권택 감독님은, 이 사람은 이 점은 좀 다르구나, 느꼈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송길한_ 치밀한 준비성! <짝코>를 나하고 얘기하면서도, 앉았다 누웠다 뒹굴뒹굴하면서 얘기한 거 같아도 며칠 준비한 거여. 나한테 준비한 메시지가. 어떤 에피소드를 갖고 웃다가도 자기 절제, 흐트러질까봐서 우리 너무 웃는 거 아니여? 그럴 때 나는 매력을 느꼈어. 그때 작가인 나도 경계를 하게 되는 거야. 우리가 집필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에피소드 얘기하면서 웃는 건 당연한 건데, 거기까지 절제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 만만치 않네, 굉장하네. 무서움 같은 것이 느껴졌어. 

정성일_ 임권택 감독님이 <짝코>를 쓰기 전에 선생님에게 요구한 점이 있었습니까?

송길한_ 없었어. 내가 초고를 썼지. 나는 다분히 그때 그 시절 검열을 솔찬히 의식했었어. 거기서 풀어지게 된 것, 내가 기뻤던 것이 뭐냐면,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인간으로 놔버리니까 그때부터 이야기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한 거야. 당신은 그 작품 준비하고, 나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쓰고, 그리고 이삼일 만에 만나서 쓴 거 보여주면 군소리가 없었어. 그 양반 특징 중 하나가 아주 기분 좋고, 그 작품이 마음에 들면 아무 소리 없는 거여. 원고지를 낚아채듯이 확 갖고 없어져버려. 수고했고 그런 소리도 없어. 본인도 벅차서 그런 거겠지. 나는 그게 작가와 감독으로써 최고 희열이라고 생각해. 

정성일_ 처음 작업하셨을 때부터 표현이 그렇지만 서로 궁합이 잘 맞은 거군요. 

송길한_ 처음부터 잘 맞았지. 왜냐하면 살아온 배경이랄지 피차간에 개인적 편차가 있다고 해도, 지금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서 맞아 떨어지고, 살아있는 에피소드들이 둘 다 있거든. 지금까지 은밀하게 다져놓은 것들이 서로에게서 막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정성일_ <짝코>는 플래시백이 몹시 복잡하게 진행됩니다. 시간을 압축시킬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이야기 안의 긴 시간 때문에 리듬이 흐트러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구성을 결정했을 때 어떤 위기감도 느꼈을 것 같습니다. 

송길한_ 당연하죠. 그런데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어떻게 제한된 시간에 구겨 넣겠어.

정성일_ 한편으로는 이전에 해 오셨던 작법에서 시행착오와 함께 훈련을 해 온 방법이 아니라 <짝코>에서 거의 처음 쓰다시피 한 작법이 아닙니까? 

송길한_ 그건 둘이 다 마찬가지야. 그래서 어느 정도 모험성도 있었다고 봐. 구성상도 그렇고 이야기도. 여기엔 그때의 냉혹한 검열에 대해 모험이 있었어. 그런데 검열에서 딱 핵심만 잘라냈어. 그들이 한수 위지. 그런 다음에 반공영화상도 두 번이나 타고. 우리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은 반공영화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여. 가만 두면 그럭저럭 살 사람들을, 이 많은 햇수 내내 둘이 도망가고 잡게 만들었냐는 거지. 이 두 사람의 긴 기간의 삶을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궁극적으로 무화(無化)가 되어버리는 이 허망한 삶, 이것을 안 그릴 수 없죠. 


정성일_ 시나리오를 쓰시면서 선생님만의 원칙이 있습니까? 이를테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경우 무조건 엔딩을 먼저 쓴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영화가 어떻게 흘러가도 엔딩을 향해 달려가서 길을 잃지 않으니까. 선생님만이 갖고 있는 그런 습관이랄까, 원칙이 있습니까?

송길한_ 나는 엔딩을 설정하지만 절대적이지 않아. 변화 가능하다. 가변성을 두고. 엔딩을 정해두면 목적성이 있어서 좀 스피디하게 갈 수 있어도 이게 휘어지면 엉뚱하게 휘어진단 말이야. 언제든지 가변성이 있되 일차적으로는 엔딩이 있지. 그게 <길소뜸>같은 경우지. 이게 말하자면 글을 꾸리기 위한 나름의 계산이지. 이야기를 어떤 구조로 가느냐. 우리는 그냥 가보자, 엔딩을 설정하지 말자. 일단 글이 흘러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따르되 많은 고민을 했어. 완성을 하고도. 우리 조선 사람으로서는 에미들이 갖고 있는 멜로드라마적인 속성이 있잖아. 어떻게 자식을 버려. 그래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이라이트지. 그렇게 통일을 본거지.

정성일_ 선생님은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어느 정도 쓰고자하는 얘기의 배경을 취재하시는 지요? 이를테면 <짝코>에서 두 사람의 삶에 대해 배경이 되는 갱생원이란 장소는 범인들은 쉽게 알기 힘든 세계이지 않습니까? <만다라>의 산사 안의 스님들의 세계도 잘 모르는 세계고. 또 <티켓>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의 일상생활도 그렇고... 

송길한_ 그렇지. 나는 시나리오 쓸 때 절대 머리로 쓰지 마라 이거지. 발로 써라 가슴으로 써라. 가보지도 않고 비슷한 삶을 산 사람을 만나보지도 않고. 니 멋대로 규정화하고 작위적인 것을 쓰지 마라. 

정성일_ 배경이 되는 것을 늘 취재하세요?

송길한_ 그건 필연적으로 하는 거지. <짝코>의 갱생원도 원래 갱생원이 아니여. 그냥 행려병자 병원이야. 이것을 회사에 얘기해서 서울시에 질문하니까 그런 사람들을 모아둔 데가 있어. 거기를 감독님이랑 나랑 갔어. 가보니까 완전 깡패 소굴이야. 대장은 고가의 외제 오토바이도 갖고 있고. 실제로 가보니까. 그리고 집도 절도 없고 이판 사판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루기가 힘들잖아. 실장 이런 놈들은 주먹도 세고. 그리고 아마 갱생원 원장하고 커넥션 같은 다른 것도 있는 거 같아. 우리 작품이 그걸 얘기하려는 게 아니어서 관심을 껐는데 실제는 그런 상황이었지. 근데 그런 것은 다르지. <짝코>에서 군 내무반 같은 실내는 우리가 설정해야지. 왜냐면 갱생원 거기는 다 온돌방이거든. 카메라 워킹도 안 되고. 노숙자들이 밥만 기다리고 앉아있는데 극을 어떻게 진행하겠어. 일단 메인 세팅이 될 수 있는 곳은 다 가서 헌팅 해야지. 그걸 그러려니 하고 머리로만 하려고 하면 안 되지. 인물들의 삶의 터전이고 생활 현장인데.
   <짝코>의 김희라

정성일_ <짝코>를 보고 있으면 두 인물이 연기를 통해 영화에서 구현되는 것도 그렇지만 시나리오에서도 두 인물이 주는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실제 모델이 있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습니다. 생생한 생기를 불어넣은 인물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특별한 작법이 있는 건지요?

송길한_ 특별한 작법이 있는 건 아니고, 한국전쟁을 통과하면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나도 많이 봤고, 임 감독님도 많이 봤어. 하나는 음흉하고 교활하지. 짝코 같은 경우에. 이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지. 엄마 만나려고 고향집에 가는 거 보면 소년인데, 험한 세상 살다보니 그렇게 음흉해지고 교활해진 거여. 또 송기열 같은 경우는 오히려 심플하면서도 올곧았거든. 그러니까 편집증이 생긴 거야. 자기가 안했는데 했다고 하니까. 그건 평생을 갈 수밖에 없어. 도망 다니는 놈과 잡으러 다니는 놈은 톰과 제리가 되는 거고 이들이 갖고 있는 갈등이 정서적인 원한과 회한의 앙금이고 그러니 상당히 긴장이 살 수밖에 없지. 인물들이 뭘 해도 다 의미가 있는 것이고. 헛소리를 할 짬이 없지. 그러니 캐릭터가 살아나지.

정성일_ 시나리오에서 어떤 인물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그걸 연기하는 것은 뼈와 살을 가진 배우이기 때문에 실제 누가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구체적인 배우를 염두에 둘 때가 있습니까? 

송길한_ 나는 천지차이라고 봐. 제일 처음에 짝코김희라를 찍어놨어. 송기열을 하려고 보니, 곽지균이가 젊은 시절의 백윤식을 데리고 왔어. 감독님이 나를 이렇게 보더라고. (웃음) 이게 소위 섹스어필한 데가 없어. 근데 최윤석은 섹시한 데가 있어. 그때 텔레비전에선 알랭 들롱으로 막 떴을 때거든. 이놈을 짝코랑 비교하면 집요한 성격이 확 보이지. (잠시 생각) 시나리오를 쓸 때 미리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대부분 주인공은 상정이 돼. 감독님도 갖고 있고 나도 비슷하고. 뭐 누구라고 딱 지칭하고 거기에 맞출 수는 없는 거고. 시나리오 쓸 때랑 영화 캐릭터랑 편차가 많이 컸지. 김지미랑 <길소뜸> 할 때도, 우리가 이 캐릭터를 밟아버리자. 아예 아작 내는 방향으로 가자했어. 김지미 씨가 쌓아온 기성 이미지가 있잖아. 이거 그대로 가져갔다가는 우리 셋 다 죽는 거지. 감독도 죽고 나도 죽고 배우도 죽고 영화도 죽고. 그러니까 그 얘기를 임 감독님이 나한테 가끔 해. <잡초> 때 김지미 보고 이기적인 에미의 모습을 한번 하라는데 죽어도 못하겠다고 했대. 그런데 결국에 이기적인 에미의 모습을 <길소뜸>의 화영에서 결국 한 거지. 그걸 임 감독이 굉장히 깊이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하더라고. <잡초>때는 그것까지는 못하겠다고 했는데 김지미가 <길소뜸>에서는 했거든.

정성일_ 디테일에 관한 질문입니다. <짝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가 짝코가 지리산 토벌대에서 쫓기다가 점순이 손을 잡고 언덕에서 뛰어내릴 때 슬로우 모션으로 화면이 바뀌면서 김영동의 음악이 깔리는 대목입니다. 제 질문은, 이 장면을 시나리오에서 찾아보니 슬로우 모션을 지문으로 써놓은 것입니다. ( S#_39. 지리산 계곡. 포화 속에 도망쳐 오는 짝코와 점순. 공비들도 뿔뿔이 도망쳐간다. 사방에 터지는 포탄과 총소리. 계속 달리고 있는 짝코와 점순. 앞서 도망치던 공비 하나가 총을 맞고 나뒹군다. 쫙 깔려 포위하고 있던 전경대원들이 일제히 사격한다. 너울거리듯 도망치고 도망치는 짝코와 점순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계속되다가 멎어서면 더벅머리의 공비 하나가 두 사람 앞에 다가와 선다) 이건 연출의 권리라는 게 제 생각인데, 임권택 감독님과의 작업에서 이런 대목들은 미리 이야기를 나누신 것인가요?

송길한_ 그것은 내가 썼을 수도 있어. 왜 그러냐면 이건 절박한 상황이라고. 슬로우 모션 효과가 뭐여, 발이 땅에서 안 떨어지는 거잖아. 사랑한 여자가 임신해서 데리고 도망가야 하는데 그게 우리에게도 안타까움이 있어야 되잖아. 막 쏘아대고 있는데. 모든 빨치산이 다 그랬을 거야. 급박할 때일수록 몸은 마음을 따라가 주지 않는 게 사람 아닌가? 아마 나는 그런 감정으로 썼을 거야. 하지만 나는 그런 (촬영) 부분에 일체 개입을 안 해. 그건 시나리오 작가가 할 일이 아니야. 감독이 할일이지. 그리고 임 감독은 절대 나에게 콘티에 대해 귀뜸 안 해. 나는 촬영현장을 거의 안 빠지고 갔거든. 그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한다고 하더라고. 당연히 난 좋았지. 말을 나누거나 그러진 않았어. 그래도 서로 아니까. 그리고 감독님이 검열관이었어. 며칠 만에 와서 보고 기분 좋으면 휙 나가고. <짝코>같은 경우는 시나리오 손 한번 안대고 그냥 찍었다고. 그건 이게 유일한 시나리오야. 그만큼 집필 전 사전협의가 충분했던 거죠.

정성일_ 방에서 끝나지 않고 촬영 현장까지 쫓아갔다고 하셨는데, <짝코> 이전에도 그러셨나요? 

송길한_ 안 그랬어요. 어떻게 찍고 있나 우선 그것도 궁금했고, 어느 날은 현장에 갔는데, 임 감독이 나보고 넌지시 그러는 거여 “어이, 자기 감독 하려고 그러지” 대답을 했지. “걱정하지 마세요. 감독 안 해요. 이것, 시나리오 하나만으로도 가랑이가 찢어지려는데” 임 감독님 입장에서는 자기를 알고 그렇게 쉽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작가가 어디 쉽냐고. 그리고 작가가 현장에 있나 없나, 는 실제적으로 큰 차이가 있어. 유명한 얘기인데 가령 <만다라>때 후시 작업할 때 녹음실에 보니까 찍힌 게 녹음이 나온 거여. 지산이 “나 같은 짐승도 제도를 해주고”하는 장면이 있는데 ‘짐승’은 아닌 거여. ‘짐승’을 영어 번역하면 ‘애니멀’인데 여기서는 중생(衆生)이지. 근데 당시 시나리오를 인쇄하던 <영문사>에서 타자를 잘못 친 거야. 아무리 자기를 낮춘다고 해도 짐승은 아닌 거지. 그런데 그러려면 녹음을 새로 해야 하는데 녹음실에서 누가 좋아 하겠냐고. 그래도 바르게 가야지. 단어 하나지만 엄청 큰 차이가 있어. 그리고 안성기와 함께 수학했던 도반 수관이 손가락을 불사를 때 인상만 쓰고 있는 거여. “감독님 지가 도통한 놈이 아닌데, 손가락에 불이 닿았는데 이마빡에 땀도 안나요?” “맞어. 땀 나야해…” (웃음) 작가는 그런 조그만 한 것들도 구체적으로 알고 있으니까, 애정을 갖고 또 정확하게 봐주니까. 임권택 감독하고 작업할 때는 거진 현장에 있었어. 

정성일_ 임권택 감독님과 <짝코>를 처음 작업할 때 가장 좋았던 점은 무엇입니까?

송길한_ 둘이 죽이 맞는 것. 시대적 배경이나 얘기하는 것들이 착착 앵기니까. (웃음) 감독님이 고등학교 삼학년이면 내 나이는 초등학교 졸업할 때거든, 여섯 살 차이니까. 지금 청소년시절에서 청년단계로 갈 때가 감독님이었다면 난 소년이었으니까. 그때가 전쟁이라는 시국이어서 감독님도 나도 굉장히 민감했거든. 그런 과거의 시절이 분출이 되는 지점이 공유되니까 굉장히 좋았지. 하여튼 둘이 많이 웃었어. 

정성일_ 그러면 첫 번째 작업을 하면서 특별히 힘들었던 점은 무엇입니까?

송길한_ 특별히 힘들었던 점은 없었어. 해야 할 얘기를 하고 있고, 해야 할 감독과 같이 하고 있다는 게 더 이상 좋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무슨 얘기도 두 번 얘기할 필요 없이 한 번에 거두절미하고 통하니까 얼마나 해피한 거겠어.

정성일_ 제가 임권택 감독님을 1987년에 인터뷰하면서 외람된 질문이지만 “감독님, 이제까지 찍은 모든 영화중 한 번 더 다시 찍으라고 한다면 어떤 영화입니까”라고 질문 드리니 “<짝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어떤 점이 두 분에게 제일 아쉬웠습니까?

송길한_ 많이 아쉽지. 우선 필름도 싼 이스트만 컬러인데 게다가 불량품이었고, 근자에 다시 한 번 보니까 내가 손대고 싶은 부분도 있고, 아마 감독님도 더 찍을 수 있는 부분도 있고, 보완해야할 부분이 꽤 있었어요.

정성일_ 기술적인 부분들 말고 작품 내적인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아쉬웠습니까?

송길한_ 내적인 부분을 보면, (잠시 생각) 본인이 리메이크하려고 했다가 부질없다고 생각했다고 하는 거는 지금 내용에서 크게 상황이 바뀔 수는 없다는 거지. 외면을 매끈하게 더 근사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원천적인 소스를 바꿀 수 없는 거지. 그때가 작품이 없어서 궁핍할 때가 아니었거든. 어느 날, 동숭로라고 생각되는데, 거기서 술을 먹는데 <짝코>를 다시 만들어보자는 그 얘기를 하는 거야. ''''''''좋지요'''''''' 나도 그 생각을 했거든.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소리가 없어. 그리고 서로 해야 하는 작품이 있었고... 임권택 감독님은 본인이 프로로써 견지하고 살아왔고, 부단히 준비하고 노력하면서 살아온 것이 충무로 판에서 살아남은 비결이기도 했지만, 내가 보기에 감독님은 그래. 뒤늦었지만, 내 결론은 천재였어. 적어도 스토리텔링에 대해서는 천재였어. 존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미스터리를 심도 있게 그려내는 스토리텔링의 달인이기도 하고, 나는 그 양반을 얘기하라면 이제 그것밖에 안남아. 작가로써 상당한 시간을 같이 겪었고, 떨어져서 쳐다보기도 했지만, 예찬이 아니라 임권택 감독님에 대해 냉정하게 말하더라도 달인이고 천재였어. 생각해봐. 아니면 백편 넘는 작품을 할 수 있겠어요. 그것도 서로 다른 소재를 소화해 내다니 놀라울 따름이죠. 

정성일_ 다음 작품은 <우상의 눈물>입니다. 전상국 작가의 원작에 먼저 끌린 것은 두 분 중 누구입니까? 

송길한_ 감독님은 다음 작품이 준비되어 있어야 안심이 되는 분 같아요. 아까 언급했던 준비성! 하루는 나한테 <우상의 눈물>이라고 읽어봤어,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 단편을 전상국씨 만나서 판권을 사왔어. <우상의 눈물>과 <돼지새끼들의 울음> 단편 두 개를 합쳤어. 주인공(기표)는 낙제해 꿇었지만 동(同)학년으로 여대생이 된 애인을 설정하자. 너무 남자 애들만 나오니까. 그렇게 하고 간 거여. 

정성일_ <우상의 눈물>에서부터 임권택 감독님과 정일성 촬영감독님, 그리고 선생님, 어쩌면 198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팀워크가 갖춰졌습니다.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가장 높이 산 것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송길한_ 임 감독하고는 <신궁>에서 둘이 이미 만났어. 일단은 풍광이었지. <만다라>에서 이게 특히 중요했는데 이 영화는 풍광이 없으면 안 되는 영화니까. 너무 관념적인 게 많으니까. 사토 다다오 평론가한테 <만다라> 알겠냐? 물어보니 안다는 거야. 표정이나 언어 리듬이나 풍광이나 백그라운드에 가진 영상들을 통해 감은 잡혔겠지. 관념 투성이의 그 언어들을 어떻게 알겠어? 어쨌든 <만다라>에선 풍광이 인물들의 심상을 많이 반영했지요.

정성일_ 잠시만 <우상의 눈물>을 좀 더 질문 드리겠습니다. 그때 한국영화에서 하이틴 청춘물이 유행이긴 했지만 이 영화는 십대들이 주인공이긴 해도 하이틴들이 볼 수 없는 정치적인 알레고리의 영화입니다. 말하자면 관객이 없는 이상한 영화라고 할까요. 

송길한_ 이것은 군사정권에 대한 어떤 은유지. 전상국의 단편소설이 갖고 있는 은유야. 권위 있는 담임선생이 아이들을 동원해 주인공의 순수한 야성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얘기지. 개성이 있어야 하는데 개인의 개성을 밟아 일사불란 통솔하는 얘기잖아. 전상국 씨도 보통 맹랑한 사람이 아니거든. 하지만 너무 짧은 단편인 거야. 그래서 전상국 씨의 다른 단편도 합쳐서 각색한 거죠. 나는 주제가 선명해서 오히려 그게 좋았어요. 전상국 씨가 그때 대학교 교수가 아니라 고등학교 선생이었거든. 그래서 애들을 잘 알아. 그걸 정치적인 시각으로 봤기 때문에 생생하게 끌어낸 거지, 하지만 이 영화는 어른 영화지. 그런데 이걸 제작한 영화사는 얄개 시리즈인 줄 안거야. (웃음) 그래서 (시나리오) 잔금 받을 때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얄개>시리즈인줄 알았는데 작품이 이게 뭐냐고, 나한테 그러는 거야. 그래서 눈 똑똑히 뜨고 소설 다시 봐. 그게 어디 얄개냐? 감독한테는 못 그러고 나를 만만하게 보고 막 그러는 거야. 내가 만만한가. 입금 안하면 회사 불질러버리겠다고 했지(웃음)
(첫 번째 이야기 끝, 두 번째 이야기 계속)


인터뷰_ 11월 10일, 날씨 화창했지만 바람이 몹시 차가웠음. 
정리, 진행, 사진_ 이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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