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배우 안성기에서 감독 임권택에로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3-06-04조회 27,018
인터뷰: 배우 안성기에서 감독 임권택에로

나는 임권택 감독님에게 그냥 무턱대고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만일 두 명의 배우가 있다면, 그러니까 한 명은 연기는 별로지만 이미지가 그 이야기 속의 인물에 딱 맞는 경우와 그 배역과 이미지가 동떨어졌지만 정말 연기를 잘하는 배우인 경우, 둘 중 감독님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는지요?” 나는 인물이란 이야기의 연출 안에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후자라고 이미 결론을 내리고 그냥 지나가듯이 드린 질문이었다. 그런데 감독님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히 전자지요. 왜냐하면 영화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잖아요. 만일 인물이 화면에 나왔는데 그게 한눈에 보고 믿어지지 않으면 그걸 설득하느라고 내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거요, 그러다가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할 시간을 쫓기게 된단 말이에요, 영화는 그런 거예요” 나는 이 말이 기묘하게 들렸다. 왜냐하면 영화를 촬영하는 현장에서 임권택 감독님이 한 장면을 찍기 위해 수십 테이크를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이미 목격한 다음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저 간단하게 돌담길을 걸어가는 장면을 초저녁에 시작해서 한여름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반복해서 다시 찍은 다음 결국 오케이 없이 끝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정말 보는 쪽에서조차 숨이 막힐 지경이 된다. 그는 미세한 실수조차 놓치는 법이 없다. 이따금 혹시 그가 연기하는 배우를 슬로우 모션으로 관찰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런데도 망설이지 않고 임권택은 배우란 연기가 아니라 그 인물이 주는 인상이 먼저라고 대답했다. 이때 인상이라는 말은 무언가 설명을 빠져나가는 불안한 느낌을 준다. 

영화배우는 영화 안에서 가장 까다로운 존재이다. 그건 영화 이론에서 배우에 관한 개념이 가장 빈곤하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는 지금 스타라는 이미지의 기호와 그 활용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배우라는 존재. 연기라는 장치. 인물이라는 기계. 영화에서 연기를 잘한다는 말은 항상 최선의 찬사가 아니다. 감독들은 영화배우에 대해서 서로 완전히 다른 원칙을 갖고 접근하였다. 장 르누아르는 오로지 배우들과 일하는 기쁨 때문에 영화를 만든다고 말했다. 그건 아마도 아버지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모델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작업 과정을 지켜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로베르 브레송은 <블루뉴 숲의 귀부인들>을 찍은 다음 마리아 카자레스 때문에 이 영화를 완전히 망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브레송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마리아 카자레스 때문에 보고 또 본다. 브레송은 그런 다음 훈련된 연기자를 포기하였다. 그리고 배우들을 모델이라고 부르면서 끔찍한 연극적 습관, 이라고 선언한 다음 모델들은 밖으로부터 내부로 요구되는 움직임에 충실하고, 배우들은 내부의 감정적 동요를 외부로 드러내는 움직임에 충실하다, 라고 덧붙였다. 종종 세잔을 인용한 브레송은 자신의 카메라 앞에 선 배우를 (세잔의 탁자 위에 올려진 바구니 속의) 사과들처럼 대하기도 하였다. 파졸리니는 <마태복음>을 준비하면서 어떤 오디션도 보지 않았다. 그는 단지 그들의 사진을 본 다음 배역을 결정하였다. 누군가 이유를 물어보자 관객들은 무대를 보지 않고 결국 스크린을 볼 텐데 왜 그들의 실물을 보아야 하느냐고 반문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영화배우의 관상이라는 관점을 미학적으로 발전시켰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배우란 일종의 실내장식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있느냐가 아니라 어디 서 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믿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 이동할 수 있는 미장센이라는 정도이다. 

나는 약간 단순하게 말하고 싶다. 배우는 어떤 성질을 지닌 영화 안의 코나투스이다. 그레타 가르보, 루돌프 발렌티노, 루이즈 브룩스, 릴리안 기쉬, 누구보다도 (배우로서의) 찰리 채플린. 이들은 각자가 각자의 원인으로 정당화되며, 그러면서 동시에 이야기 안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한 개체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영화를 예로 들 수도 있다. 결정적인 두 명의 이름. 김승호허장강. 언제든지 나를 멈춰 세우는 최은희, 그리고 문희. 누군가는 이들의 활동을 요구하는 쇼트 안의 기계적 관계에 의해서 영화 안의 구조의 내재적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건 영화의 효과이며 그들의 활동 자체와 다른 것이다. 오즈와 나루세의 절반씩의 하라 세츠코. 더할 나위 없이 이 흥미로운 존재. 영화를 아무리 제로로 환원해도 배우라는 존재가 그것을 마지막 순간에 거절할 것이다. 때로 나는 영화를 보면서 자명하게 여겨진 것이 이 존재들 앞에서 불투명해지는 수많은 순간을 만났다. 이를테면 <빅 슬립>의 험프리 보가트. 종종 하워드 혹스의 바깥에 놓여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순간들. 그들은 자신을 그 안에서 연장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방식 그 자체의 속성을 이루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게 어떤 영화라 할지라도, 결국 영화는 배우에 대한 긍정에서 시작한다. (물론 나는 지금 극영화에 한정 지어 말하는 중이다) 왜냐하면 가장 단순하게 영화는 사람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존재가 영화 안에서 조건으로 주어진 이야기 안에서조차 끊임없이 연장하는 실존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다소 과도하게 도식적으로 말하고 싶다. 배우는 영화 안에서 존재하기 위해 실존적 계약을 맺는 것이다. 그 혹은 그녀가 주연이건 혹은 조연이건 둘이건 셋이건 그 자신의 영원한 실존의 힘이 그 안에서 지속으로 이어진다. 영화에서 배우를 본다는 것은 그 힘의 지속을 경험하는 것이다. 

인터뷰: 배우 안성기에서 감독 임권택에로

나는 재빨리 안성기에게 돌아오고 싶다. 이 이름 앞에 서면 무언가 긴 서문을 쓰고 싶어진다. 단지 그건 안성기가 차지하는 자리 때문이 아니다. 큰 자리. 물론 안성기를 설명하기 시작하면 그건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한국영화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임권택의 영화에 한정 지어서만 말할 것이며, 단지 이따금 필요할 때에만 다른 영화를 참고할 것이다. 일종의 연대기적 서술. 그냥 산술적으로만 말하면 안성기는 (2013년 5월까지 개봉작을 기준으로) 출연작이 122편이다. 의미 없는 비교이기는 하지만 (한 사람은 배우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감독이다. 그 둘은 서로 하는 일이 다르다) 그저 양적으로만 말하면 임권택이 만든 101편의 영화를 넘어선지 오래이다. 또한 임권택의 영화에서 안성기가 출연한 영화가 고작 6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 인터뷰가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성기가 임권택의 영화 중에 <만다라>에 처음 출연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임권택이 1964년에 찍은 희극영화 <십자매 선생>에 아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는 (현재로서) 볼 수 없는 임권택의 (사라진) 영화 중의 한편이다. <십자매 선생>는 김승호, 주증녀, 황정순, 김지미, 도금봉, 최지희, 태현실, 노경희, 전계현, 나애심, 김진규, 장동휘, 김석훈, 이대엽으로 이어지는 1960년대 스타들의 이름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아역이기는 하지만 안성기에게 이 영화는 그의 27번째 출연작이다. (임권택에게 <십자매 선생>은 8번째 연출작이다) 안성기는 1957년 김기영의 <황혼열차>에 처음 출연한 이후 34편의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하였다. 하지만 <십자매 선생> 이후 안성기는 더 이상 아역으로는 임권택의 영화에 나오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다는 임권택의 영화에서 우리는 어린아이를 거의 볼 수 없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에 출연한 전후로, 말하자면 중학생이 된 안성기의 출연작은 눈에 보이게 줄어들었다. 안성기는 1968년 이성구의 <젊은 느티나무>를 마지막으로 영화 현장을 떠났다. 이 영화의 주연은 신성일문희이다. 아마도 그는 아역으로서 자신의 역할이 끝났으며, 어른이 된 다음에 영화배우를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이 결정이 그 자신의 선택인지 아니면 그의 부모의 조언인지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그때 그는 아직 열일곱 살이었다) 그런 다음 12년 동안 안성기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그의 공백 기간 동안 한국영화는 반공법과 유신정책, 국책영화, 이중의 검열 속에서 거의 부서졌다. 

일종의 빈칸. (인터뷰에 따르면) 안성기는 월남전에 장교로 복무하고 제대한 다음 다시 영화로 돌아왔다. 1977년 김기가 연출한 <병사와 아가씨들>에 출연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때는 한국영화를 사람들이 거의 보지 않았다. 음울한 시대. 1979년 10월 15일 부산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독재에 반대하는 시국선언이 발표되고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이어졌다. 이 시위는 마산과 창원으로 확산되면서 닷새 동안 이어졌다. 위수령이 발동되고 505명이 연행되고 59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10월 26일, ‘그때 그 사람들’.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였고, 긴 어둠이 끝났다. 그런 다음 아주 잠깐 1980년 민주의 봄이 왔다. 하지만 그해 5월 광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정치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그때 이장호의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도착했다. 도시 변두리의 중국집 배달부인 덕배와 그의 동네친구인 길남과 춘식은 매일매일 부서져 가는 희망을 안고서 살아간다. 아무것도 잘되지 않고 그들은 차례로 세상 안에서 자기의 꿈을 배신당한다. 덕배는 우스꽝스럽고 무기력한 남성성(masculinity)이 마주친 어떤 몰락의 증후처럼 보였다. 여기서 한국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괴이할 정도로 과장된 가부장제의 권위는 사라졌으며,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계급적 권위의 폭력과 그것을 몸으로 막아내야 하는 위기의 경계들뿐이었다. 웃음들, 하지만 조롱. 안성기는 그 덕배라는 인물 안에 들어가서 1980년대의 초상화가 되었다. 슬픈 왜소함. 위태로운 얼굴선. 약간 쇳소리가 섞여 들어간 것만 같은 목소리. 아름다운 얼굴은 1980년 5월 광주 이후에 풍화작용을 거치기라도 한 것처럼 닳아버렸다. 대중들은 그 얼굴에서 어렴풋하게 자기들의 존재 방식을 보았다. 지식인들은 그 얼굴에서 시대정신의 패배를 예감했다. 안성기는 정확하게 그 순간에 그 자리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정반대의 방향으로 등을 돌렸다. 임권택은 <만다라>를 준비하면서 속세를 등지고 한겨울 소승불교의 여정을 떠나는 젊은 승려 법운으로 안성기를 떠올렸다. 그는 여기서 속세의 소란스러움에서 눈을 돌린 채 병 속의 새를 찾아 걷고 또 걷는다. 그때 그가 만행 길에서 마주친 사람은 여자와 ‘이층을 쌓은’ 다음 파문당하고 대승불교의 길을 걷고 또 걷는 지산 스님이다. 선승들의 각(覺)의 세계에 들어서기 위한 쉴 사이 없는 대화들. 그때 안성기는 세상의 삼라만상의 풍경과 연기 경쟁을 벌여야만 했다. 그는 종종 바람에 흔들이는 나뭇잎 없는 나무처럼 서 있었고, 어디 낙하할지 장소를 정하지 않은 채 바람에 흩날리는 홀씨처럼 중력을 잃어버린 듯 걸었고, 등을 돌린 채 자신의 뒷모습으로 연기를 해야만 했다. 안성기는 시나리오의 인물을 재현한다기보다는 그를 보고 있는 사람에게 그 인물의 진실을 묘사한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인터뷰: 배우 안성기에서 감독 임권택에로

임권택안성기와 두 편의 영화를 연이어 찍었다. <오염된 자식들>과 <안개마을>. 그러나 두 사람의 작업은 거기서 일시적이긴 하지만 중단되었다. 안성기는 배창호의 페르소나가 되었다. 홍콩 이코노미스트의 표현을 빌리면 배창호는 “1980년대 한국영화의 스필버그”였다. 그중에서도 <깊고 푸른 밤>은 모든 면에서 성공적이었다. 이장호는 그와의 작업을 이어나갔다. 1988년 세대라고 불리는 장선우(<성공시대>), 박광수(<칠수와 만수>), 이명세(<개그맨>)가 모두 안성기와 함께 작업을 했다. 그런 다음 강우석의 영화에 지속적으로 출연했다. (<투캅스> 이후) 여기에 정지영을 더해야 할 것이다. (<남부군>) 안성기는 이들의 영화에서 자신이 주연인지 혹은 조연인지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저 자기가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인물. 그는 분장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았다. 안성기가 즐기는 순간은 어떤 감정이 자기 몸을 통과해갈 때 일단 잠시 멈춰 세운 다음 그걸 음미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걸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오구리 고헤이일 지 모른다. 그는 <잠자는 남자>에 안성기를 초대한 다음 자기 영화 안에서 우주를 꿈꾸는 잠자리에 눕힌다. 가끔 그는 연기하지 않는 대신 그저 존재하듯이 거기 있을 때가 있다. 

임권택과 다시 만난 영화는 그로부터 한참이 더 지난 1994년에 만들어진 <태백산맥>이다. 이 영화의 중심에는 빨치산이 된 형 염상진과 토벌대가 되어 뒤를 쫓는 동생 염상구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중심을 잡는 자리에 지주이지만 이들 모두에게 연민의 시선을 던지는 김범우가 있다. 안성기는 김범우가 되었다. 지주라는 반동분자. 기회주의적인 지식인.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는 민족주의자. 안성기는 마치 이야기 바깥에 있는 것처럼 영화 안에 머물렀다. 임권택은 거기서 무엇을 끌어낸다기보다 무언가를 활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안성기는 초상화 같았던 자신을 때로는 풍경화로 사용하는 법을 익혔다. 염상진을 연기한 김명곤과 염상구를 연기한 김갑수는 전혀 다른 전통에 놓인 연기자이다. 안성기는 영화 속에서 이 둘을 번갈아 마주친다. 이때 안성기는 단지 자신의 역할 때문만이 아니라 연기의 관계 속에서 이 둘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어떤 균형을 유지한다. 말하자면 간격의 연기. 

커다란 짐을 내려놓듯이 <태백산맥>을 마치자 임권택은 거의 동화와 같은 구조 안에 들어가서 장례식에 관한 영화 <축제>를 찍었다. 이 영화에서 안성기는 치매를 오랜간 앓아온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상주 역할을 맡으면서 거의 무색무취한 인물을 그려내는 데 성공하였다. 말하자면 승리. 진정한 승리. 연기하지 않는 배우라는 존재감. <축제>는 사실상 드라마라고는 장례식을 치르면서 만나는 소소한 일상의 사건이 전부인 영화이다. 호상이라는 상가.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세상이라는 이치 앞에서의 슬픔. 안성기는 여기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아무것도 덜하지 않았다. 몸의 의미로부터 안성기는 의미라는 몸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먹어가는 나이를 이제는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기술을 익혔다. 

그런 다음 임권택은 아마도 그 자신의 자화상에 가까운 영화일 <취화선>을 찍었다. 그때 오원 장승업을 연기한 사람은 최민식이다. 안성기는 여기서 장승업을 평생에 걸쳐 지켜보는 개화파 학자 김병문으로 그 곁에서 이따금 등장하면서 연기한다. 2002년 이후 임권택은 세 편의 영화를 더 찍었지만(<하류인생>, <천년학>, <달빛 길어 올리기>) 안성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지금 102번째 영화 <화장>을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 이 영화의 배역에 대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안성기는 어떤 이미지로 정의되기 어려울 만큼 서로 다른 영화에서 서로 다른 배역을 맡았으며, 그때마다 나는 그 역할이 지나치게 정확하거나 때로는 다소 희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상대 배역의 연기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았으며, 그 거리가 주는 안정감만큼이나 어쩔 수 없이 거기에서 기대되는 예외적인 힘의 돌출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한 가지 더. 안성기는 이야기 안의 인물에 대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취했다. 더도 덜도 아닌 바로 그 이야기 속의 그 인물. 나는 일반론으로 더 밀고 나가지 않을 것이다. 여기는 그런 자리가 아니다. 하지만 이 질문을 던져본다. 임권택 감독님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안성기 씨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역할이 생겨났을 때 그걸 해낼 수 있는 배우란 말이에요. 영화는 그런 인물과 만날 때가 있어요” 이 말이 내게는 이상할 정도로 모든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런 인물이라는 표현 대신 누구도 할 수 없는 역할이 생겨났을 때 마치 구조를 구하듯이 그 자리에 초대되는 배우. 임권택의 영화에서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역할이라는 인물이란 누구일까. 말하자면 안성기 선배에게 질문을 준비하는 지금 내가 떠올리고 있는 말은 그 한 마디이다. 그래서...... 
 
인터뷰: 배우 안성기에서 감독 임권택에로

정성일_ 모두들 두 분 사이 인연의 시작에 대해서 <만다라>를 얘기하지만 임권택 감독님과 가장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건 1964년 작품인 <십자매 선생>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현재 프린트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김승호 선생님을 시작으로 올 스타 출연 인정미담 희극이었습니다. 이 영화 현장이 기억나시는지요? 

안성기_ 그런 스타일의 영화가 당시 많이 있었어요. 임권택 감독님만의 색깔이라기보다는 이봉래 감독님이라고 계시는데, 영화가 유행이 있잖아요, 이건 그분 스타일의 영화인 거 같아요. 아기자기하고 소시민적인 주변의 이야기, 아마 그런 가족드라마가 아니었나. 진짜 영화는 생각이 안 나요. (잠시 생각) 임 감독님 인상착의는 생각나는데 굉장히 무섭다, 젊었을 때 보면 굉장히 마르고 무서우셨어요. 어린 시절에 보면. 그랬어요. 지금같이 온화한 그런 모습이 아니라, 물론 지금도 역정을 내시면 무서우시지만 보통 때는 안 그러신데, (웃음) 젊으셨을 때는 보통 때도 굉장히 무서웠어요.

정성일_ <십자매 선생>이 임 감독님께는 6번째 영화지만, 안성기 선배께는 벌써 22번째 영화였습니다. 임 감독님보다 데뷔도 먼저 한 선배 신데(웃음), 김기영 감독님의 영화에서 시작하셨고, 영화라는 경험으로만 본다면 임권택 감독님보다 더 많은 작업을 한 셈입니다. 희미한 기억일지라도 이 연출자는 이전에 내가 함께 작업한 감독과 다르다고 느꼈던 점이 떠오르는 에피소드나 그런 대목이 있으신가요?

안성기_ 아역 때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임 감독님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다 마찬가지예요. 어렸을 때는 거의 끌려갔던 기억밖에 안 나요. 나도 어렸을 때는 거의 서너 편 동시 출연을 했어요. 같은 옷 입고 여기 나가고, 저기 나가고 그래서 야 이놈아 너 또 이거 입고 나왔니, 이런 소리도 듣고(웃음) 그 당시는 진짜 정리된 게 없고 너무 소모적이었죠.

정성일_ 어떤 점에서 안성기 선배는 한국영화사의 일부이자 증인이기도 한데 그 시절 동시 출연이 기억을 겹쳐놓은 것이 저로서는 안타깝습니다. 안성기 선배는 중간에 공백이 있었습니다. 1968년 <젊은 느티나무>를 마지막으로 충무로를 떠났고, 그런 다음 1977년까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단지 학업 상의 이유라면 대학입학을 한 다음 다시 연기생활을 계속했을 텐데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전공도 연기가 아니라 베트남어 학과를 선택했습니다. 필모그래피로만 보면 영화를 떠날 결심을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안성기_ 중학교 때 <얄개전>(1965)에서 정점을 다 찍은 거 같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니까 섭외 들어오는 영화도 없어지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이 약간 시들시들해졌어요. 나도 하려면 정말 제대로, 열심히 하면 모르겠는데, 어쩌다가 연락 오고 출연하고 이러는 게 부담이 되더라구요. 게다가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그 시기는 입시 때문에 공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때이고 성적은 너무 안 좋고, 특히 수학은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에, 신경을 써야 되겠다, 라는 걱정이 생겼죠. 그리고 그전에는 성격도 외향적이었는데, 사람들이 자꾸만 알아보고 하는 것이 그 당시 사춘기 때는 좀 가라앉는 분위기잖아요, 자꾸 혼자 있으려고 하는, 그런 내향적인 성격으로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를 떠나게 되었어요. <하얀 까마귀>, <젊은 느티나무> 이 정도 하고, 그러고 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도 한정된 데다가, 고등학생 역할이 없었고. 하이틴 영화는 내가 떠난 이후에 임예진, 이승현이 나오는 영화들이 유행을 했구요, 사실 영화를 어렸을 때부터 하면서도 매력을 갖고 야 이거 재밌는 작업이다, 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 판단 능력도 없었고. 어렸을 때 뽑혀가지고 한 거고, 아, 그렇다고 부모가 강제한 것도 아니고, 나 같은 경우는 친구 아버지인 김기영 감독에게 픽업 돼서 연기한 거여서 제작부장이 나 데리고 다니고, 끝나면 집에 데려다 주고, 그런 생활이었어요. 만약 영화라는 게 좋고 그랬으면 아마 거기에 대한 향수가 있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텐데, 나한테는 그런 느낌이 없었어요. 더 어렸을 때는 자고 싶은 데 잠 못 자는 게 그저 기분 안 좋았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공부하고 놀고 싶었는데 제작부에서 와서 데리고 끌고 가고. 내 의지대로 안 되니까 그런 것이 싫었던 느낌, 뭔가 불안한 느낌이 있었어요. 아이들과 친구들과 있을 때는 굉장히 마음이 푸근하고 편했었는데 어른들 세계로 가면 뭔가 정서적으로 불안해. 가정이 잘 버텨줬기 때문에 내 스스로 큰 변화는 없었지만 느낌이 즐겁고 편하고 이러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냥 자연스럽게 역할이 없어지면서 영화에서 멀어진 거지요. 
 
정성일_ 그렇다면 1977년 <병사와 아가씨들>에 출연하면서 다시 영화로 돌아온 결심이랄까, 계기가 있으신가요?

안성기_ 그것도 뭔가 결심이나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취직이 안 되다 보니까, (웃음) 그런 거였지. 애초에 선택은 타의적이었고, 하지만 일단은 내가 이거 해야 되겠다 했을 때는 희망을 갖고 아주 적극적으로 포부를 갖고, 이젠 내가 결심을 하는 거고, 어른이 되어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니까, 기왕 하는 거 평생 할 것이다 마음먹고 한 거지요. 대학교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해서 베트남에 가려고 했는데, 알다시피 뭐, 그때 패망해서 갈 수 없게 되었고, 대기업 원서 넣은 것도 다른 친구들은 다 되는데 나만 잘 안되면서, 취직이란 건 나하고는 잘 안 맞는가 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내가 가장 남들보다 잘 할 수 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니 그게 영화였고, 그때 아버지가 세경영화사에 전무님으로 기획 일을 하셨어요. 그래서 수월했죠. 그때는 (한국영화 진흥정책에 따라) 흥행영화와 우수영화가 있는데, 흥행영화는 다른 사람이 하고, 흥행과 상관없는 <병사와 아가씨들>이라는 우수영화에 출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어요. 76년에 제대해서 이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2년간은 나름대로 준비기간을 가졌어요. 영화를 하는데 바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나 나름대로 준비를 했어요. 프랑스 문화원에 자주 가서 영화도 많이 보고, 운동도 좀 하고, 몇 가지 배우로써 준비기간을 2년 가졌고 기회가 와서 데뷔를 했어요. 근데 결과는 참담했죠. 

정성일_ 그때는 한국영화 자체가 흥행이 안 되던 시절이었지 않습니까? 당시 기억나는 기사는 해방 이후 발전하지 않은 건 국회와 한국영화뿐이다, 라는 말이 있었고, 대중들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안방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안성기 선배는 아역으로 시작하면서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일정 기간 연기수업을 쌓은 다음 배우가 되는데 안성기 선배는 아역 시절부터 여러 감독들의 연기지도를 받으면서, 혹은 선배 연기자들의 지적을 받으면서, 시행착오를 통해 스스로 성장한 배우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혹은 지금 돌아보면 누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까? 

안성기_ (잠시 생각) 배창호 감독인 거 같아요. 배창호 감독하고는 진짜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장가가기 전까지는 일이 없어도 날마다 만났어요. 사귀는 사람처럼 매일 만났어요. (웃음) 그리고 영화 얘기만 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영화얘기와 그 다음에 할 영화 얘기를 끊임없이 했어요. 그러면서 여러 편 같이하다 보니까 겹쳐지지 않게 하자. 캐릭터라든가 그런 것들을 되풀이하는 걸 경계하자, 했어요, <고래사냥 2>는 최악의 필름이라고 배 감독도 얘기했지만(웃음) 겹쳐지는 것 말고, 매번 조금 더 다른 모습을 찾고, 끊임없이 얘기해서 아이디어도 주고 어떤 성격적인 변화라는 것을 끊임없이 얘기했어요. 배 감독하고 한 영화를 주욱 보면 <꼬방동네 사람들>, 약간 홍보영화 비슷한 <철인들>, <적도의 꽃>, <개그맨>,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황진이>,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안녕하세요 하나님>, 그렇게 자꾸만 새로운 걸 해나가자. 그렇게 나의 연기의 폭을 점점 더 넓혀 나간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렸을 때는 내가 연기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거지. 나는 요즘 아역 배우들을 보면 정말 저놈이 생각들이 있는 거 같아. 너무 잘하는데, 내걸 보면 그냥 개구쟁이야. 근데 나는 그런 모습도 좋더라고. 외국영화들 보면 연기 못 하는 놈들 있잖아. 그게 너무 좋은 거야. 어린애다우니까. 어렸을 때는 나는 진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커가지고 생각이 들어간 건 네 편 영화에서 조역을 할 때가 처음이야(<병사와 아가씨들>, <제 3공작>, <야시>, <우요일>) 그러다가 <바람 불어 좋은 날> 할 때 이장호 감독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걸 완전히 뒤집었다고 그럴까. 하나의 인물을 만들어가는 그 과정이. 내가 맡았던 중국집 배달부 덕배라는 인물이, 최일남 선생의 (원작 소설인) <우리들의 넝쿨>에서 그 역할이 사시 캐릭터거든. 진짜 사시를 데려다가 집에서 연기훈련을 시켰어요. 배창호 감독이 그때 조감독 할 때인데, 배 감독이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나한테 되게 많이 시켰어요. 코에 힘 좀 줘봐, 입 좀 한번 벌려봐, 눈 멀뚱멀뚱하게 뜨고, 걸음걸이 그렇게 하고, 이런 방법적인 거를 통해서, 그렇게 덕배라는 인물로 가기 위해서 굉장히 진짜, (잠시 생각) 그 전에는 캐릭터라는 게 없었어요. 한 역할이라는 게 소품처럼 쓰여 지는 것이지. 이 사람이 갖고 있는 개체로서의 매력은 처음 느낀 거거든. 진짜 많은 것을 얻었고, 배웠어요. 그런 다음에 임 감독님의 <만다라>를 했는데, 임 감독님의 연출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 거예요. 근데 나는 그것도 굉장히 좋더라구요. 얘기해주는 것도 좋은데 말없이 이렇게, 이렇게, 그냥 그 말만 하는 것이 굉장히 방향을 좋게 잡아줬어요. 정지영 감독님이 약간 그런 스타일이이에요. 된 것 말고 안 된 것만 얘기해서 슬슬 잡아나가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그게 오히려 굉장히 편안해. 뭐랄까. 감독님이 갖고 있는 어떤 생각의 깊이가 나한테 잘 와가지고 나도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달까, 임 감독님과는 매 작품마다 그랬어요.

인터뷰: 배우 안성기에서 감독 임권택에로

정성일_ 안성기 선배께 아마 굉장히 많은 시나리오가 찾아올 텐데, 그때마다 영화출연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안성기_ 대부분 시나리오예요. 

정성일_ 감독보다도? 

안성기_ 하지만 예외적인 것은 있었어요. 예를 들어 이장호 감독은 다시 영화를 시작했을 때 배우란 것이 이런 거구나, 를 만들어주신 분이에요. 그래서 그분이 작품 한번 하자 이러면 해요. <천재선언>은. 이것 참, 이런 건 아닌데 미치겠다. (웃음) 그래도 하는 거죠. 그것도 <헤어드레서>란 영화를 하고 있는 중간에 그 영화를 출연하고 그랬어요. 하여튼 영화가 실패하고, 그럴 때는 늘 부담을 갖고 있죠. 배창호 감독은 뭐랄까, 시나리오도 아니고 배 감독 때문도 아니고 늘 얘기를 해서 뭘 할지 늘 알았기 때문에 계속했었던 거예요. 그것도 감독 플러스 시나리오라 할 수 있고...

정성일_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두 개의 제안이 동시에 안 선배님을 찾아온 겁니다. 시나리오는 정말 좋은데 이 감독의 예전 작품이 아니라는 평가를 계속 받았던 경우와 시나리오는 무척 별로인데 이 감독의 앞에 찍었던 작품이 정말 좋은 겁니다. 두 감독 다 같이 일해본 적이 없는 경우고, 두 영화가 다 일정이 딱 겹쳐서 하나만 결정해야만 하는 겁니다. 이런 경우 어떤 작품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안성기_ 이거 장고에 들어가야 할 거 같은데? 바둑처럼 (웃음) 그럴 수 있지. 그럼 일정을 조절하는 게 낫겠는데.(웃음, 그러고 나서 한참을 생각하고) 그 전에 안 좋은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때는 잘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고, 물론 그거는 영화란 게 감독 따라나온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 감독이 망나니고 인간성 안 좋고 그러면 좀 그렇지만, 영화 자체가 기술이 안 좋은 경우, 하지만 작품이 좋다면, 그 감독도 작품에 힘을 얻고 배우도 작품에 힘을 얻고 그러면 괜찮을 거 같애. 그리고 실력 좋은 분은 달리 실력이 좋은 게 아니라 그렇게 안 좋은 경우도 계속 영화를 만들어가면서, 또 바꿔가면서 완성도를 높이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예전에 저런 경험이 있었어요. 김기영 감독님을 15년 전쯤에 연강홀인가에서 무슨 행사에서 만났어요. 거기서 나랑 영화 해야지, 나랑 하는 거야,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럼 한다고 하면 되는 건데, 나는 한다고 하면 그때까지도 무조건 하는 거였어요. 뭐, 할게요, 그러고 안 하는 걸 너무 싫어했어요. 말을 못 뱉는 거예요. 그래서 답을 못했어요. 그분한테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었는데, 시나리오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니 허, 이 자식 봐라, 이러셨어요. 그런 거 보면 시나리오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인데, 어른한테 그렇게 말한 거 보면...

정성일_ 시나리오 받고 인물을 연기하게 되면 따로 준비하는 게 있으신지요? 배우들을 인터뷰하다 보면, 두 가지 다른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만나보고 때로 그 직업을 가져보기도 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게 선입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시나리오 안의 인물에만 집중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안성기_ 변한 거 같애. 초반에는 인물 안으로 들어가서 해볼 거 다 해보고, 그랬는데 차츰차츰 그냥 시나리오로 들어와서 이렇게 해석하고, 물론 중요한 정보라든가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만, 나 나름대로 생각을 갖는 편이에요.

<바람불어 좋은 날>(1980)의 덕배
<바람불어 좋은 날>(1980)의 덕배

정성일_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덕배라는 인물은 한국영화사 속의 남자 주인공을 새롭게 만든, 말 그대로 처음 보는, 주인공의 탄생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한국영화 속의 남자는 아버지의 이미지이거나 ‘싸나이’ 문화의 다양한 변주였는데, 덕배는 처음으로 마초적이지 않은 남자였습니다. 전례 없는 인물을 만들었달까요, 문제는 이런 인물은 잔향효과라고나 할까, 일종의 그림자처럼 남아서, 안성기 선배가 이 인물을 통과하는 순간, 전형적인 아버지의 역할이나 마초적인 인물을 연기할 때, 무언가 그 역이 몸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안성기 선배에게 어떤 영화였습니까? 

안성기_ 뭐라 그럴까. 그 역할을 하면서 내가 빠져 들어가고, 사람들이 느낌에서 오는 것도 있는데, 그 영화를 정말 많이 봤다고 그러면 거기서 빠져나오기 힘든 어떤 부담감이 있는데 <바람 불어 좋은 날>은 명보극장에서 십 몇 만이 본거 죠. 당시라면 뉴 엘리트계층들이 본 영화이고 그분들은 쉽게 빠지지 않는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영화에서 또 다른 걸 기대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지금 같은 천만 든 영화다, 이런 영화보다 훨씬 자유로울 수 있었죠. 속박이 아니었고, 그냥 연기자로서 하나의 좋은 방법도 알고 길을 찾은 영화라고 생각하지. 근데 저런 건 있어요. 80년대라는 시대적인 것이 직선적이지 않고 표현이 우회적이어야 되고 풍자적이라는 것, 주인공이 똑똑해서는 위험하다는 것. 그러한 캐릭터는 그 이후부터 주욱 가져간 거죠. 심지어 사랑 이야기인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도 더듬더듬 거리면서 말하는 톤이 된 것이고. 그것은 또 시대가 요구하는 캐릭터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성일_ 그리고 마침내 임 감독님의 <만다라>를 만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순서대로 반복해보겠습니다. 1964년 처음 만났을 때는 임권택 감독님도 대중영화를 만들면서 충무로에서 자기 자리를 잡아야 할 때였고, 안성기 선배로 아역으로 만났습니다. 1980년 다시 만났을 때 임권택 감독님은 예술적인 결단을 내렸고, 안성기 선배는 연기자로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의 시간의 변화라기보다는 어른으로 영화에서 다시 만났을 때 첫 느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안성기_ 그 당시만 해도 요즘 같은 편안함은 없었죠. 그때 임 감독님도 영화를 만들 때 굉장히 투철하게 몰두해서 최선을 다해 만들지 않으셨을까 해요. 임 감독님 눈빛이 사실 좀 무섭다고. 마주 보기 굉장히 힘든 면이 있는데, 이렇게 의중을 꿰뚫어보시는 듯한. 그런 건 있어요. 어렸을 때 같이 했다는 걸로 엉겨 붙는 그런 거. (웃음) 난 어렸을 때 한 걸로 굉장히 덕 봤어요. 안녕하세요, 이러면 신인 같으면 생면부지니까 아는 체를 잘 안 하실 텐데, 나는 오래 같이 일한 데에 대한 호감들이 있어서, 난 사실 굉장히 편하게 접근이 되었죠. 다른 신인들은 굉장히 힘들었을 거예요. <만다라> 찍을 때 임 감독님과 많이 이야기를 했는데 영화에 대한 내 열정도 대단해서 어떻게 하면 십 년 수행한 스님의 모습을 가질 수 있을까 고민을 했어요. 유니폼이 주는, 세월이 묻어있는 그런 느낌이 있잖아요. 그래서 승복을 맞춰가지고 잠잘 때도 입고 하루 종일 입고 뒹굴었죠. 때 국물이 흐를 정도로. 그게 나한테 맞아야지 되니까. 감독도 그걸 보면 알지. 이놈 되게 노력하는 놈이구나. 잘 때도 시나리오를 딱 머리맡에 두고 자니까. 어쩌다와서 그걸 봤나봐. 그런 것에 대한 좋은 마음. 감독님도 나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나도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어요. 근데 되게 혼난 적이 있었어요. 이장호 감독이 짓궂어서 그런 건데, 그때 <어둠의 자식들>을 화천공사에서 같이 찍었어요, 거기서는 잠깐 나오는 거고, 두 작품 다 같은 영화사에서 작업하니까 괜찮겠지 했어요. 근데 <만다라> 때문에 머리를 깎았으니까 <어둠의 자식들>에서는 가발을 쓰기로 했는데 이장호 감독님이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걸로 하고, 그냥 가발 쓰지 말고 머리 깎은 걸로 가자 해서 그렇게 찍었죠. 굉장히 무거운 마음으로 찍었어요. 그때 내가 교도소 나와서 나영희 찾아가는 기둥서방이었어요. 결국 그 얘기를 안 하면 안 될 거 같아서 임 감독님께 내가 얘기를 했어요. 진짜 화를 내셨어요. 집에까지 찾아가서 잘못했습니다, 무릎 꿇고 빌 정도로 정말 화를 내셨죠. 집에서까지 화를 내실 정도였어요. 정말 내가 잘못했구나. 못 한다 그럴 걸. 그 영화가 끝나고 나서 임 감독님이 <오염된 자식들>을 하셨어요. 그때는 화가 풀리셨고. 결국은 임 감독님도 내가 원해서 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아셨기 때문에 화를 푸셨어요.

<만다라>(1981)의 법운 / <어둠의 자식들>(1981)의 태봉
<만다라>(1981)의 법운 / <어둠의 자식들>(1981)의 태봉
 
정성일_ <만다라>에 출연하던 시기 즈음에 임권택 감독님의 다른 영화를 보신 게 있으세요? <깃발 없는 기수>랄까, <짝코>랄까...

안성기_ <짝코>를 봤는데 아주 좋았어요. <짝코>는 배우 입장에서 보면 두 인물들이 아주 매력적인 영화라, 작품성도 있고 상업성도 나는 있다고 보았어요. (<짝코>는 개봉을 못 하고 재개봉관에서 상영되었다) 

정성일_ 단도직입적으로 질문 드리겠습니다. 배우는 머리를 삭발하고 나면 상당기간 동안 다른 영화 출연을 못하기 때문에 그건 큰 결정입니다. <만다라> 출연을 결정한 건 시나리오와 감독 둘 중 어느 비중이 더 좋았나요? 

안성기_ <만다라> 그 작품이지. 원작소설을 굉장히 잘 읽었고 그걸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그 자체가 너무 매력이 있었고, 그걸 임 감독님이 한다고 하시고, 그리고 당시 최고의 영화사인 화천공사에서 한다고 하니 안 할 수 없었어요.

정성일_ <만다라>를 찍으면서 임권택 감독님이 다른 감독들과 연출이 다르구나, 느낀 대목들은 어떤 순간이었나요? 

안성기_ 현장 콘티가 달랐어요. 

정성일_ 그때는 다 현장콘티 아니었나요?

안성기_ 배 감독은 진짜 자기가 다 써가지고 했고, 이장호 감독도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시나리오가 진짜 탄탄하고 좋았어요. 하나하나 정성 들여가지고 누구나 보기 좋고, 완성도 있게 했어요. 시나리오가 이미 콘티였어요. 근데 그다음에는 현장에서 뭐 이거 어떠냐, 그렇게 즉흥적으로 바뀌셨지만. 임 감독님은 혼자 생각이 많으시고 즉흥적인 부분도 많으시고 그 전날이나 아침에 생각을 정리하신 경우가 많았어요. 나는 그 당시 그것도 좋았어요. <만다라> 할 때는 나는 스님같이 살았으니까. 내가 다른 거 하다가 스님으로 들어오면 부대꼈을 텐데, 그때 내가 영화 하려는 열의와 혼자 장가도 안 갔겠다, 그냥 스님처럼 살았어요. 뭐가 들어와도 다 흡수했어요. 대사가 길어도 아무 생각 없이 다 오케이였고 그것이 힘들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요. <축제> 때도 그랬고 현장 콘티가 많았는데 그러려니 생각해서 어려움이 없었어요.

정성일_ 이렇게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만다라>를 하면서 그런 건 다 좋은 점이긴 하지만, 임권택 감독님과 작업을 하면서 이건 되게 힘들구나, 라고 느낀 적도 있으셨을 거 같은데. 나쁜 점을 여쭤보는 게 아닙니다. 단지 육체적인 고난이 아니라 무언가 배우와 연출 사이에서 특별하게 만들어지는 긴장은 영화마다, 감독마다 달라지지 않습니까? 

안성기_ 난 그런 거 당한 적이 없는데. 그런데 예를 들어 (<서편제>에서) 오정해 같은 경우는 감독님이 부담되고 힘들다고 그렇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런 거 못 느껴봤어요. 감독님과 잘 맞는다고 해야 하나 힘든 거 전혀 없었던 거 같아요. 

정성일_ 임권택 감독님의 연기지도는 어디까지 지도를 하시나요? 이를테면 제가 현장에 방문을 해서 많은 감독들이 연기지도를 하는 걸 옆에서 보면 어떤 감독들은 아무 지시도 안 하고 배우가 하는 걸 지켜본 다음에 자신이 원하는 게 나오는 걸 기다렸다가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다른 게 나와도 그게 좋으면 오케이를 하는 감독도 있는가 하면, 어떤 감독은 때로 자신이 직접 시연을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작은 손동작까지 필요한 것들을 꼭 설명하거나 설명하지 않더라도 다른 것이 나오는 것을 모두 버리고 자기가 바라는 게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연출자들이 있습니다. 

안성기_ 전자 쪽이지. 그리고 얘기해줄 때 보면 주관적인 얘기보다 객관화시켜갖고 말씀하세요. 약간 건성 건성하면서 뭐 이런 거 있잖아, 뭐 그런 거 아닌가, 이런 식으로 말씀하세요. 그때 연기자가 캐치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이게 뭐하는 거요, 하고 꾸중이 바로 들어오는 거고, 그래서 배우가 영리하게 받아야 해요. 내가 감독님 표현을 잘 알잖아요. 요즘도 “액션”이 아니라 “고!” 하시죠. (연기가 끝났는데) 그냥 멈춰있으시면 다시 한 번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그런 걸 보지 않아야 되는데, 연기하면서도 옆에서 보이는 거예요. 중간에 멈추시면 신이 안 나는 거죠. 아 이거 또 해야 하는구나.(웃음) 정확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전체적인 느낌으로서의 감정이 맞아 들어가는 걸 좋아하세요. 디테일한 거 이런 거 보다는 큰 거를 좋아하세요.

정성일_ 근데 인물에 대한 해석이라는 게 배우와 감독이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임권택 감독님과 영화를 하시면서 그 인물 연기에 대해서 이견이 있을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항상 연출자의 생각을 좇아가는 쪽이세요, 아니면 장면에 따라 연출자를 설득을 한달까요?

안성기_ 거의 다 난 신인감독이래도 무조건 존중해요. 거의 무조건. 감독과 얘기할 때도 아이디어를 내는 거지, 이건 이렇게 가야 해, 하고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연기자로써 사줘야 하겠지만 아무리 신인감독이래도 그 사람을 사줘야 할 부분이 있어요. 나도 전체를 본다했어도 감독이 더 전체를 생각했을 것이고, 도움이 된다고 그러면 전체를 위해서 더 좋은 거지만, 내가 우기고 해서 내 입장을 설득한다고 노력한 적은 없는 거 같애. 영화 외적인 건 굉장히 설득하지. 나 지금 밥 먹고 해야 해. 스텝들은 지금 배가 고파, 이런 게 현장은 중요해요. 예전에 <영원한 제국> 할 때 박종원 감독이 밥을 안 먹어. 아침 먹고 하는데 오후 2시, 3시 됐는데도 밥을 안 먹어. 애들이 전부 빌빌하는 거야. 나도 배고프고. 연기해야겠다가 아니고 밥 먹어야 되는데 이런 거야. 박 감독, 밥 먹는 걸 리듬이 끊긴다고 생각을 하면 안 돼. 리듬 중에 밥이 쑥 들어갔다가 나온다고 생각해야지. 이걸 감정이 다 끊겨서 안 된다고 생각하면 너무 힘든 거야. 그냥 시간 되면 밥 먹고 하자. 아주 쉽게 생각하자구, 뭐 그런 걸 이야기한 적은 있죠. (웃음) 

정성일_ <만다라> 시기부터 80년대 내내 임권택 감독님 영화가 다른 시기와의 차이점 중 하나가 배우의 입장에서 롱 테이크 촬영입니다. 또한 이 시기에 안성기 선배와 작업한 감독들은 이상할 정도로 롱 테이크 감독들이었습니다. <황진이> 이후의 배창호 감독, 박광수 감독, <아름다운 시절>의 이광모 감독이 있습니다. 배우에게 롱 테이크는 미학적인 문제라기보다 육체적인 문제이지 않습니까? 임권택 감독님의 롱 테이크는 어떻게 달랐습니까? 제가 안성기 선배와 처음 인터뷰를 한 게 1991년 6월 청담동에서였는데 그때 연기하실 때 가장 힘든 게 무엇입니까, 라고 여쭤보니 두 가지가 힘들죠, 하나가 베드 신이고 다른 하나가 겨울에 찬물에 들어가는 겁니다, 하하하, 이건 농담이고, 롱 테이크 촬영이 힘들죠, 라고 대답해주셨습니다. (웃음) 

안성기_ 지금은 너나 할 거 없이 디지털화 되가지고 너무들 길게 많이 찍잖아요. 시나리오를 통째로 씬 별로 외우고 준비를 해야 되는데, 그 당시만 해도 요거 찍고, (그런 다음에 다시 촬영 준비하고 그 사이에 준비해서) 저거 찍고 가야지 이런 거에 익숙하다가, 계속 롱 테이크로 찍으니까, 감정 긴 거를 나누는데 굉장히 익숙하게 만들어 놨다가 그걸 다시 연결해 붙이려니 호흡이 굉장히 안 맞는 거예요. 연결을 해야 되니까 힘들고 벅찬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롱 테이크가 힘들다는 거였고, 임권택 감독님의 롱 테이크는 그렇게 롱 테이크는 아니었어요. 의도적인 롱 테이크도 아니었고, <만다라>의 경우에는 작품이 가진 성격 때문에 그것을 따라가다 보니까 롱 테이크가 들어갔던 거 같고, <기쁜 우리 젊은날>에서 황신혜 기다리는 장면은 의도적으로 버텨놓고 한 통의 사 분의 일을 돌려버리는 롱 테이크, 나중에는 그게 굉장히 재밌더라고, 그때는 NG나면 필름을 통째로 버린다는 게. (웃음) 요즘은 디지털이니까 그렇지 않겠지만. 그때 한강 변에서 리버사이드라는 카페에서 오전에 롱 테이크 들어가는데, 리허설을 보통 많이 한 게 아니야. 필름이 조금 돌아가는 게 아니라 한 통 다 들어가니까. 연극을 하듯이 그렇게 끝나고 나니 굉장히 성취감이 좋았어요. 또 감정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맛을 조금씩 알게도 되고, 초반에는 너무나 잘라놨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감정을 탁탁 끊는 거에 익숙해져서 힘들었어요.

정성일_ 임권택 감독님과 작업하면 가장 좋은 점은 어떤 건가요?

안성기_ 감독님께 묻어가면 된다는 거가 일단은 굉장히 큰 거예요. (웃음)

정성일_ 그러면 임권택 감독님과 작업하면 가장 힘든 점은 무엇입니까?

안성기_ 심리적 정신적으로 힘든 건 나는 별로 못 느끼겠고 감독님도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감정으로 나를 대한 거 같애. 감독님도 나를 대하는 게 아주 편안하게 하신 거 같고. 하나 있다면 새벽에 일찍 집합해야 하는 거. 겨울에도 새벽 5시 껌껌할 때 나가야 하고. 우리 리듬이 늦게까지 하는 리듬이라. 물론 현장에서는 감독님께 맞춰지지만. 그건 좀 힘든 거 같애. 

정성일_ <안개마을>은 이문열 작가의 작품인데, 원작소설이 있는 경우 먼저 영화를 찍기 전에 원작소설을 꼼꼼하게 읽으시는 건지, 아니면 감독을 믿고 시나리오로 각색된 얘기를 중심으로 인물에 다가가고 원작은 그냥 참고도서 정도로 보시는 건지요?

안성기_ 원작소설은 참고만 해요. 어떤 감독하고도 마찬가지예요. 그건 소설이지 그게 바로 영화화될 것은 아니잖아요. 문학적으로도 소설은 시나리오나 대본과는 구별되는 거니까.

정성일_ <안개마을>은 임권택 감독님도 따로 기억하실 만큼 촬영기간이 정말 짧았던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쫓기게 되면 감독과 달리 배우 입장에서는 그 인물 안에 들어갔다 나올 시간 자체가 몹시 부족하지 않습니까?

안성기_ 쫓긴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어요. 그 좁은 마을 거기서 시작하고 끝났기 때문에 굉장히 느릿느릿한 느낌이었어. 오히려. 여기 갔다 저기 이동하는 것이 사람 호흡을 급하게 만드는 거지. 일어나면 거기, 그다음에 또 거기, 거기 지나다니면서 “밥 도” 이러고, 어슬렁어슬렁 다니고 그러니까 굉장히 빨리 찍었다는 느낌은 전혀 안 들었어요.
 
<안개마을>(1982)의 깨철
<안개마을>(1982)의 깨철

정성일_ <안개마을>에서 깨철은 대사가 거의 없습니다. 배우에게서 대사가 사라졌을 때는 비유적으로만 말하면 아리아 없이 노래해야 하는 오페라 가수와 같은 심정이 되지 않습니까? 이때 육신만으로 깨철이라는 미스터리한 인물을 표현해야 하는데, 사실 깨철은 영화를 보고 나서도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마을의 수수께끼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이런 인물 안에 들어서기 위해서 어떻게 연기 플랜을 설정합니까? 이 작품의 경우에는 시간적으로 짧아서 감독님과 이 인물에 대해서 길게 토론할 시간도 없었을 것 같은데...

안성기_ 그건 배우의 능력이라기보다는 그런 능력을 있게끔 만드는 작품의 성격인 거 같아요. 그 사람이 대사가 없어도 작품이 잘 표현하고 그 사람을 도와주게 되어있지. 연출도 마찬가지고, 그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분위기를 만들어주니까 연기를 잘할 수 있는 거같이 보이는 거지. 자기의 능력 이상의 것을 받는다고 보면 돼요. 난 요즘에 조연을 많이 하다 보니까 대사가 너무 많아져요. 주연들은 대사가 별로 없어요. 그게 정답이야 그게. 대사 없는 것이 너무 좋아 사실. 나는 예전부터 그게 좋았지만, 진짜 필요한 것만 딱딱할 때가 좋지, 그걸 설명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보통 배우들은 대사를 챙기려고 애쓰는데 나는 어떡하면 대사를 줄일까 했어요. 꼭 필요한 것만 하는 것이 훨씬 영화적으로, 개인의 연기나 연출에서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해요.

정성일_ 영화를 찍을 때 안성기 선배께서는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 사이즈를 염두에 두고 연기를 하십니까? 말하자면 자신을 클로즈업으로 찍는지 미디엄으로 찍는지 염두에 두시나요, 아니면 그런 사이즈는 생각 안 하고 인물의 연기에만 집중하십니까?

안성기_ 그건 본능적으로 느껴져요. 어려서부터 작업을 해서. 가끔가다 촬영 조수에게 이건 몇 미리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몇 미리다, 얘기하면 그에 따라 표현이 섬세해지고, 작아지고 이런 건 있는 거 같애. 그건 배우의 매커니즘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거 같아요. 잘못 움직이면 깨지니까 그건 알아야 할 거 같애. 풀 쇼트를 좋아하는 이광모 감독 같은 경우 연극적인 표현을 무지무지 해줘야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클로즈업이 자주 들어오는 콘티 같으면 염두에 둬야 해요. 

정성일_ 한편으로는 안성기 선배 경우에는 감독이나 장르에 따라서 좀 다른 연기를 보여준다는 생각도 있겠네요?

안성기_ 다른 연기가 아니라 캐릭터로 가면 자연히 변화가 되는 거죠. 예를 들어 양복을 입으면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져요. 청바지를 입으면 약간 껄렁해지고 임금 옷을 입으면 팔자걸음으로 가게 돼요. 일자로 가지지가 않아요. 팔자로 가야 임금 움직임이 나거든. 이건 본능적으로 나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의상을 무지무지 중요하게 생각해요. 배우에게 있어서 의상이 주는 것이 그 연기에 얼마나 보탬이 되고 마이너스가 되는지 몰라요.

정성일_ 안성기 선배께서 인물에 접근할 때, 영화 안에서 인물을 해석해나가나요, 인물을 중심에 놓고 작품을 해석해나가는 쪽이세요?

안성기_ 전체를 놓고 인물을 해석해요. 그래서 감독들이 나를 좋아해요. 그런 경우가 있어요, 내가 여기선 좀 더 죽어야 되겠구나, 그러니까 자기감정으로 가면 자기는 계속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전체로 보면 부드럽지 않아요. 시나리오에 따라서 죽어야 할 때는 철저히 죽어야 하고, 작품의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가는 게 반드시 맞다고 생각해요.

정성일_ 국내외 영화를 가리지 않고 안성기 선배께서 연기를 할 때 롤 모델로 삼고 있는 배우가 있나요? 

안성기_ 예전에 로버트 드니로 너무 좋아했죠. 초창기 영화는 대부분 좋았어요. <택시 드라이버>에서부터 <킹 오브 코미디>까지 약간 좀 과장되지만 표현이 인간적인 매력도 있고, 캐릭터로서의 매력도 있어요. <대부 2> 같은 건 얼마나 좋아요? (웃음)

정성일_ 배우라는 건 어떤 경우에도 혼자 하는 연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상대배우라는 까다로운 질문이 있습니다. 이때 상대배우의 캐스팅이 자기 의지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항상 상대배우가 앙상블을 이루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안성기_ 어떻게 해서든 맞춰요. 그건 어떡할 수 없다, 생각하는 거죠. 상대 배우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나는 못 하겠어 그런 적은 없었어요. 상대와 어떻게든 호흡을 맞춰서 해야 되는 건 아닌가... 뭐든지 사줄 만한 데가 있다고 생각해요. 서로 노력하면 되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정성일_ 많은 영화에 출연하셨습니다. 이때 항상 모든 영화가 만족스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염된 자식들>은 임권택 감독님이 먼저 저에게 인터뷰를 할 때, 그 영화 그냥 넘어가면 안 돼요, 라고 말씀 하시더라구요. (웃음) 어떤 순간에 안성기 선배께서도 이 영화는 훌륭하지 않겠구나, 이런 느낌을 영화를 찍으면서 받는 적이 있으실 거 같습니다. 임권택 감독님께 같은 질문을 드리니까, 그건 시나리오를 볼 때 그런 느낌을 받는 순간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데 문제는 여기까지 오면 연출자는 이미 물러설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포기할 수 있는 단계를 지났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 딴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영화의 산업적인 측면의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성기 선배께서도 백여 편 넘게 출연하시면서 그런 느낌을 언제 받으시는지요? 

안성기_ 완벽한 시나리오를 만나기는 거의 드물다고 봐야 해요. 문제는 그런 애매모호함이 어느 정도 애매모호함이냐 차이가 있는데... 요즘 같으면 최근에 조역이 많고, 신인 감독들이 같이했으면 좋겠다는 이런 말들이 오가요. 주변에서 이 친구 괜찮다 권유가 많은데, 이걸 해도 좋을까, 예전에는 이걸 할지 말지 굉장히 철저했었는데, 어느 순간에 내가 완전히 주(主)가 되면 나 자신이 굉장히 중요한 결정을 해야 되는 건데, 조역으로 가다 보면 해도 되고 빠져도 되고 그런 거거든. 주변 사람이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더 애매해, 결정하는 것이. 그 애매함을 갖고 그래도 열심히 하면 되겠지 했는데 현장에서 촬영할 때, 첫날의 느낌들, 거기서 이미 뺄 수 없는 상태를 느끼는데, 이거 굉장히 힘들겠구나 싶어요. 현장 분위기도 그렇고. (잠시 생각) 그런데 결국 중요한 거는 연출자지 뭐. 전체를 감독하고 관리하는 감독에서 나오는 느낌이지. 힘들겠다, 그러면 어떻게 방법이 없잖아요. 나름 열심히 하자고는 하는데 근데 그게 한다고 해서 잘 안되지. 마음은 최선을 다하자 하지만 몸은 최선이 안 되는 그런 거지. 그 부분이 참 힘든 부분이에요, 사실. 하지만 그렇다고 맛있는 것만 따먹을 수는 없잖아. 이것도 어떻게 힘이 되가지고 잘 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힘 합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요런 것 때문에 같이 하게 되는데...

정성일_ 좀 이상한 질문이기는 합니다만 영화를 찍고 있는 동안보다 결과적으로 나온 후 훨씬 좋았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안성기_ 애초에 영화는 뭘 남기겠다고 하는 것보다 근본적인 자세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계속 한다는 거에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거거든. 결과가 안 좋아도 내가 최선을 다했으면 좋고 그런 문제이지. <부러진 화살> 이거 보너스 많이 받았나.(웃음) 이런 것 때문에 하는 건 아닌 거 같애. 그것보다 오랜만에 정지영 감독과 같이 간다는 설렘. 전우같이 <남부군>, <하얀 전쟁> 두 큰 작품을 힘들게 같이 했는데. 그동안 잘 안되다가 이십년 만에 레디고 부르는 벅찬 감정. 와이프가 내가 시상식에 상 받으러 간다고 하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 사실 상 받는 게 좋지가 않았어. 아예 안 받는 게 나았어. 못 받는 사람도 많고 그걸 보는 것도 그러고. 나는 사실 그게 부담스럽고 그랬어. 상 몹시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눈물도 많이 흘리는데 나는 잘 모르겠어. 그런 감정을. 내가 많이 받아서 그러나 (웃음) 하여튼 제일 중요한 거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게 나는 가장 행복한 거예요. 그리고 이왕이면 결과도 좋고 마음 맞는 사람과 계속 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죠.

정성일_ <안개마을>과 <오염된 자식들>을 찍고 나서 12년 만에 다시 임권택 감독님을 만나서 <태백산맥>을 찍었습니다. <안개마을>부터 <태백산맥>을 찍을 때까지가 임권택 감독님을 미학적으로만 설명하면 가장 많은 것들이 변화했고, 자신의 영화에 관한 철학적 질문을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안성기 선배도 그 사이에 80년대 한국영화의 ‘국민’ 배우가 되었고, 또 많은 감독들과 작업을 했습니다. 다시 만났을 때 가장 새로운 기분은 무엇이었습니까? 

안성기_ 일단 같이 하게 되서 굉장히 기뻤고, 여태까지 나를 왜 이렇게 버리셨지, 같이 할 게 그렇게 없었나, 그런 생각도 했었고.(웃음) 내 생각인지 몰라도 감독님은 끊임없이 내가 보여 드린 성실함이라든가, 작품만 맞았으면 같이 하자고 그러셨을 거 같애. 근데 그때 필모그래피를 보면 나랑 조금씩 안 맞아서 그런 게 아니었나. 그래서 공백이 생긴 게 아닌가 싶고. <태백산맥>에서 제대로 만났고. 같이 하자고 그래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

정성일_ <태백산맥> 이전의 임권택 감독님의 작품들을 계속 보셨을 텐데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무엇이었습니까? (<안개마을> 이후) <불의 딸>,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길소뜸>, <티켓>, <씨받이>, <아다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세 편의 <장군의 아들>, 그리고 <서편제>. 

안성기_ 전부 좋았던 거 같애. <티켓>같은 것도 그렇고, <장군의 아들>도 이태원 사장님하고 그 세 분의 조합이 좋았어요. 감독님만의 기운으로 거기에 가기는 좀 힘든, 다찌마와리를 좋아하는 이태원 사장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크지 않았나. 임권택 감독님만의 힘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지금은 헤어지긴 했지만 그때 그 조합이 감독님 영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시너지 효과를 냈다고 봐요. 

<태백산맥>(1994)의 김범우
<태백산맥>(1994)의 김범우

정성일_ <태백산맥>에서 안성기 선배께서 연기한 김범우는 모든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가장 소극적이고 가장 조용하고 방관자적인 인물입니다. <태백산맥>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은 염상진, 염상구형제로 각각 김명곤 씨와 김갑수 씨가 연기했습니다. 이 말뜻은 이 영화에서 김범우가 가장 차가운 인물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태백산맥>에서 김범우가 가장 돋보이지는 않지만 반대로 이 인물이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면 이야기가 산만하게 가지가지로 흩어질 수밖에 없어서 김범우는 이 인물들 사이에서 감독 같은 역할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이 큰 이야기 안에서 김범우를 풀어내는 것은 안성기 선배께도 몹시 특별한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안성기_ 일단 생각나는 게 대사가 굉장히 설명적이고 문어체적인 대사여서 거기에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감독님께 아 이거 정말 방법이 없네, 이러면서 찍었던 기억이 나요. 일편이 소극적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원래 이편을 찍으려고 했어요. 이편에서는 홍길동처럼 나와서 액션 영화처럼 등장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일편에서는 굉장히 차분하게 가야겠다, 생각을 한 거지. 만약 이편이 없었다, 그러면 좀 더 열을 내지 않았나 싶어요. 그건 아마 감독님도 마찬가지였을 거 같아요.

정성일_ <태백산맥>은 원래 이부작으로 만들려고 했던 이야기가 중간에 갑자기 계획이 바뀌면서 여러 가지 정치적인 여건 때문에 못 찍게 되었습니다. 배우 입장에서도 연기 플랜을 짜놓았다가 완전히 바뀌게 된 경우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찍어놓은 분량이 이미 있는 상황에서 중간에 바뀌게 된 경우인데, 이런 경우 중간까지 연기해놓은 자신의 인물을 이제 수습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물론 연출의 몫도 있겠지만 남은 장면으로 찍지 않은 분량까지 마무리하면서 김범우를 연기해야하는 연기자의 몫도 고스란히 떠맡게 되는 셈인데 그런 상황에선 어떻게 하셨나요?

안성기_ (잠시 생각) 그건 할 수 없다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 거지 뭐. 방법을 찾는다거나 그럴 수 없는 거 같애. 아 안됐네, 하고 끝내야지, 문제를 제기하거나 해결하려고 그건 어려운 거 같애. 

정성일_ 저는 임권택 감독님이 시나리오 리딩(reading, 讀會)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많은 다른 감독들은 리딩을 하지 않습니까. 리딩이 없는 과정이 편하세요, 아니면 리딩이 있는 게 편하세요?

안성기_ 리딩은 신인감독이거나 작품 편수가 몇 편 안 되는 사람들이 하는 경우가 많아요. 서로를 잘 모르니까, 서로를 아는 시간을 갖는 거예요. 리딩은 캐릭터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서로 알고 인사하고 미리 친해지는 시간이에요. 임권택 감독님 경우에는 전부 아는 분들이 많고, 그리고 그 전에 만나서 충분히 얘기를 했다고 생각을 하시니까 그런 과정을 생략하시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정성일_ 일정상의 이유나 다른 이유로 임권택 감독님 작품 출연을 거절하거나 못하신 작품이 있으세요?

안성기_ (한참 생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개벽>이었나... 확실치가 않네요.

정성일_ <태백산맥>은 워낙 많은 배우들이 출연했고 중간 변수가 많아서 오히려 <축제>를 하면서 두 분 사이에서 서로 내면적인 만남의 시간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만다라>와 <축제> 사이에는 16년이 있었습니다. 크게는 연출의 방법이, 디테일하게는 연기지도라는 점에서 어떤 변화를 느끼셨는지요? 

안성기_ 작품의 성격에 따라 변하신 게 아닌가 싶어요. <만다라>의 삶의 구도에 대한 치열함 같은 것이 그 당시 감독님의 마음속에 꽉 차 있었다면, <축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서 세상을 관조하는 느낌, 죽음을 축제로 승화시키는 마음의 편안함이 있는 것 같아요. 감독님도 작품의 성격만큼 변하신 게 아닌가 싶어요.

정성일_ <축제> 인터뷰를 할 때 임권택 감독님이 굉장히 인상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안성기 선배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안성기 선배를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여쭤보았는데, 안성기 씨가 아니면 아무도 안 되는 그런 인물을 영화를 하다 보면 마주칠 때가 있다, 는 이상한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축제>의 이준섭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사실 저는 이 대답이 약간 수수께끼처럼 들렸습니다. 이건 비평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연출자와 연기자 사이의 교감에서만 느껴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수수께끼를 안성기 선배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안성기 씨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단순한 칭찬을 훨씬 넘어서는 느낌이었거든요.

<축제>(1996)의 이준섭
<축제>(1996)의 이준섭
 
안성기_ 감독님이 그 현장에서 가끔 좋아서 입을 벌리고 ‘허~’ 하시는 때가 몇 번 있었어요. 그 인물 자체가 변화라던가 큰 표현은 없는데, 작가로서의 인간적인 성격의 하자도 있는 것 같고, 특히 제일 공감되었던 게 (이준섭 작가를 존경하면서 한편으로 취재를 위해 작가의 모친상 장례식까지 내려온 기자인) 정경순을 만나서 약간 이상한 감정도 들어가는 것 같은 이런 느낌의 표현들을 감독님이 굉장히 좋게 받아들이신 것 같아요. 의도하지 않고 연기하는데, 별거 아닌데 그 인물과 착 달라붙는 그런 느낌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 영화에서 특히 그랬어요. 연기를 한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축제>는 그런 영화였어요.

정성일_ <축제>는 이청준 작가님의 어머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청준 작가께서도 촬영장에 계속 내려와 계셨습니다. ‘이준섭’이라는 인물은 이청준 작가님이기도 한 셈인데, 이런 경우엔 이청준 작가님과 얼마나 교감을 하셨나요, 아니면 그건 완전히 별개의 인물이니까 오직 임권택 감독님과 소통할 문제인가요?

안성기_ 이청준 작가님은 선배로서 일상적인 이야기만 하고, 촬영 들어가서는 전혀 그런 게 없었어요. 감독이 작가와 얘기할 순 있어도, 배우는 감독과 소통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정성일_ <축제>는 드라마가 거의 없는 영화입니다. 감독이야 그 인물을 짜나갈 수는 있지만,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에게는 기승전결이 없지 않습니까? 드라마가 기복이 없으니까 배우가 리듬을 타는 게 몹시 힘든 영화이기도 하고, 게다가 <축제>는 두 가지 이야기가 평행하게 진행되는 이야기입니다. 장례식과 동화. 두 가지 이야기가 별개로 교차편집으로 진행되는데, 그것은 감독의 머릿속에서 교차편집이 되는 거죠. 연기를 해야 되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어떤 식으로 교차편집이 될지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 보이는 거지, 게다가 영화현장을 배우 자신이 컨트롤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안성기_ 근본적으로 이청준 작가의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라는 이야기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단순한 동화지만 너무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 자체가 작품 속에 녹아있다고 생각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았어요. 그 작품에 아쉬움이 있다면 감독님이 현장에서 너무 이해하고 관대하신 것이에요. 예전처럼 세트의 허술함에 좀 더 엄격하셨으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런 느낌은 받았어요.

정성일_ <축제>에 출연하던 무렵이 다른 시기와 달랐던 점은, 이전에는 이장호 감독님이나 배창호, 이명세, 박광수, 강우석처럼 몇몇 감독들의 영화에 번갈아 출연해서 어떤 면에서는 잘 아는 감독들과 작업을 반복해서 했었던 시절인데, <축제> 때서부터는 한 편 이상 같이 작업하지 않은 많은 감독들의 영화에 많이 출연했습니다. <아름다운 시절>의 이광모 감독이나, <박봉곤 가출사건>의 김태균 감독, <헤어 드레서>의 최진수 감독, <퇴마록> 박광춘 감독, <이방인>의 문승욱 감독, <미술관 옆 동물원>의 이정향 감독, <무사>의 김성수 감독, <진실게임>의 김기영 감독, <킬리만자로>의 오승욱 감독처럼 한 편만 출연한 감독들이 많은데, 이렇게 작업하면 배우로서 새로운 기분을 가져볼 수도 있지만, 반면에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과 계속 호흡을 맞춰야 되니까 상대방의 장단점을 알기 힘들다는 점도 있지 않나요? 

안성기_ 아마 그 시기부터 주인공의 모습을 하는 시기가 지나서 그런 것 같아요. 계속 주연을 할 시나리오도 없고 나이 들어가면서 젊은 사람이 주연을 많이 하다 보니까, 그러다 보니까 한 번하고 빠지고, 한 번하고 빠지고 이런 경우인 것 같아요. 나야 계속 같이 작업했던 감독들과 같이 가고 싶지만.. (웃음)

정성일_ <축제> 이후에 <취화선>에서 임권택 감독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여기서는 장승업을 평생 동안 지켜보는 김병문 선생으로 나오셨습니다. 안성기 선배께서 임권택 감독님 영화에 나온 영화들을 쭉 보면 일관성이 있는 것 같아요. 임권택 감독님은 안성기 선배의 이미지가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안개마을>과 <오염된 자식들>을 예외로 하면 <만다라>에서부터 <태백산맥>, <축제>, <취화선>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항상 지식인의 역할을 했었습니다. 인물들은 마치 임권택 감독님이 입혀주는 옷 같은데, 그런 역할을 연기할 때 느낌이 어떠신가요? 어떤 경우에는 본인의 이미지와 달라도 입어야 하는 경우가 있고, 반면에 어떤 경우에는 이 옷 자체가 딱 붙어서 편안한 경우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안성기_ 편안한 편이에요. 편안한 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때그때 맡은 역할들이 참 편안했어요. 내가 고뇌 안 해도 되는 스타일의 역할이었어요. 사실 힘들긴 해도 고뇌해야 하는 쪽도 좋은 것 같긴 해요.

정성일_ 임권택 감독님과의 작업이 항상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출연한 작품 중에서 기억에 남을 정도로 리테이크(retake) 촬영을 한 영화의 장면이 있나요? 저는 임권택 감독님의 현장에서 밤을 새워서 한 장면을 32 테이크를 다시 찍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안성기_ (잠시 생각) 나는 금방 끝났는데... 항상 금방 끝난 것 같아요.

정성일_ <안개마을>이 그렇게 빨리 끝난 이유가 있군요.(웃음)

안성기_ 그때 울었죠, 그래서...(웃음)

정성일_ 안성기 선배의 영화 편수 전체를 놓고 말한다면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두 분 모두에게나 한국영화사에서 그 영화들은 매우 중요한 걸작들이었습니다. 1980년 <만다라>부터 지금까지 안성기 선배에게 임권택 감독님은 한 사람의 감독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안성기_ 굉장히 어른으로서 마음과 모습을 가지신 분이에요. 만다라 때 사진을 보면 굉장히 젊구나 싶어요. 그때 ‘임노인~, 정노인~’라며 농담을 했는데 40대 중반이었어요. (임권택 감독은 그때 46살이었고, 정일성 촬영감독은 51살이었다) 지금 보기에는 어린데, 그 당시는 굉장히 나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셨어요. 그때는 의지가 밖으로 강하게 표현이 되셨어요. 지금은 그것들이 쌓여서 득도를 하신 단계가 아닌가 생각해요. 웬만한 돌을 던져서 파문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신 게 아닌가 생각해요. 편안함이 있으시고, 작품도 그렇게 변한 게 아닌가 싶어요. <취화선>이란 영화를 통해서 큰 부담이었던 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그 당시에는 수상에 대한 부담이 컸었어요. 내가 상 받아서 다행이라고 하셨죠. <천년학>이 너무 외면받았다는 것이 참 안타까웠어요. 지금 감독님을 평가하기보다, 감독님이 하시고 싶었던 작품을 하셨다는게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정성일_ 안성기 선배가 출연하지 않은 임권택 감독님 영화 중 가장 좋아하시는 작품이 어느 영화인가요?

안성기_ <짝코>가 좋았어요. 인물들이 매력이 있고,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비극을 그 두 사람을 통해서 잘 표현했어요. 재미있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해서 참 좋았던 것 같아요. 배우로서.

정성일_ 지금은 손사래를 치시지만 아주 오래전 임권택 감독님이 다시 만들고 싶은 영화로 <짝코>를 말씀하셨어요. 쫓는 자, 쫓기는 자, 그 두 인물 중에서 안성기 선배가 캐스팅된다면 둘 중에 누구를 맡고 싶으세요?

안성기_ 김희라 씨가 워낙에 튀고, 최윤석 씨가 상대적으로 약했는데, 약하게 나온 역할을 한번 맡아보고 싶어요.

인터뷰: 배우 안성기에서 감독 임권택에로
 
정성일_ 감사합니다. 제가 준비한 질문은 여기까지입니다. 홈페이지에 보내온 유저들의 질문을 대신 드리겠습니다. 이경준(babapapa)님의 질문입니다. 그냥 읽겠습니다. 예전부터 운동을 해 오셨던 건가요? 사실 저에게 안성기 배우란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병태,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영민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어수룩하거나 아니라도 그냥 젠틀맨의 느낌. 그러다 <실미도> 스틸에서 웃통 벗으신 거 보고 깜놀 했는데요, 배용준이 몸 만들었다고 사진 돌렸을 때보다 더 놀랐음. 생각해보면 <남부군> 때도 운동을 하셨던 몸인 거 같기도 하고. 암튼 운동과 안성기라는 이미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무사에서의 캐릭터가 여전히 각인되어 있어요. 아주 예전부터 꾸준히 몸 관리를 해오신 건가요? 아니면 어떤 계기로 운동을 시작하신 걸까요? 그 계기는 특별한 영화였던 건지요? 

안성기_ 배우로서 기본적으로 몸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몸을 예쁘게 만든다는 게 아니라 체력으로써, 에너지를 갖춰야 하니까 지금까지 끊임없이 운동을 해온 거죠.

정성일_ 이소진(sbear6)님의 질문입니다. 80년대 당시 TV가 보편화 되면서 영화계의 불황과 전환기를 맞이했다고 하는데요. 주인공으로서 조그마나 심리적 부담은 없으셨는지, 또한 80년대의 영화사의 모습을 이야기해주셨으면 합니다. 텔레비전에 특별하게 출연하지 않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안성기_ 당시 TBC에 전인권 씨의 형, 전세권 피디가 있었어요. 원래 배우 지망이었고 같이 출연도 했어요. 배우가 안 돼서 피디로 갔는데, 형사 단막극에서 범인으로 하루만 나와 달라고 해서, 나는 영화만 한다고 했는데 하도 끈질겨서 나갔어요. 일주일에 스튜디오 녹화, 야외 녹화, 더빙 녹화를 해서 50분짜리를 만드는 거예요. 영화에서는 50분짜리를 만들려면 두 달이 걸리잖아요. 나는 그 스피드와 호흡이 감당이 안 됐어요. 그리고 무성의했어요. 배우 얼굴과 대사만 나오는 거예요. 공중전화를 하는 씬이 있는데, 계속 얼굴만 찍었어요. 그래서 카메라도 위치를 바꾸면서 돌리고 뭐 그렇게 해야 하지 않냐 했더니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이건 나하고 안 맞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경험이 한번 있어서 그 이후로는 거절을 했어요.

정성일_ 정혜경(jhkgr)님의 질문입니다. 예전에 시나리오를 쓰셨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요즘 박중훈 씨, 유지태 씨, 하정우 씨 등 배우들의 감독데뷔가 많이 이뤄지고 있는데, 영화 출연 경험으로 보면 안성기 선배가 연출을 못 하실 이유가 없는데, 연출에 대한 계획이나 희망, 꿈이 있으신지요?

안성기_ 없어요. 힘들어서(웃음) 옆에서 너무 힘든 걸 봤어요.

정성일_ 어떤 시나리오나 어떤 원작을 보면 이거 내가 하면 정말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신 적은 없나요?

안성기_ 위험한 생각이에요. 나도 한번 해볼까, 이런 치고 빠지는 생각은 위험하고, 난 감독이야, 이런 생각이면 해야겠죠. 완전히 감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감독을 해야 되는 거죠.

정성일_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영화와 인생을 감당할 만큼 산 다음에 갖는 경험과 세상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을 때, 제안이 오면 다른 영화에 출연도 하시면서 연출을 같이 하는 것은 생각해 보신 적 없나요? 

안성기_ 예전부터 감독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고통이 아니라고 느껴지는 상태가 내게 오면 해야 되겠죠. 그런데 그런 것은 없는 거죠. 내가 생각하는 장면과 생각은 너무 건조해서 상업적이지 않은 거 같아요.

정성일_ 트위터로 온 질문입니다. ‘이 구역의 작은 손’님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용기를 내서 드리겠습니다. (웃음) 안성기 선배께 인생의 의미란 무엇입니까?

안성기_ (한참 망설인 후)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 뭔가 남는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고, 하루하루 행복하게, 열심히 사는 게 인생 아닌가 싶어요.

정성일_ 이어지는 질문입니다. 국민배우라고 불릴 만큼, 배우로서 많은 것을 이뤘다고 생각되는데, 앞으로 배우로서 더 이루고 싶은 것이 계십니까?

안성기_ 이룬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좋아하는 영화를 힘이 있는 데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할 때까지 열심히 즐기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정성일_ 많은 감독들과 작업을 해보았는데, 함께 작업하고 싶은 감독이 있으십니까?

안성기_ 많지요. 요새 대부분 많이 안 해봤어요. 이창동 감독, 박찬욱 감독, 봉준호 감독, 김지운 감독.

정성일_ 출연작 중에서 먼 훗날에 이게 내 대표작이야, 라고 생각하는 어떤 영화가 언급되어지길 바라시나요?

안성기_ <바람 불어 좋은 날>, <만다라>, <하얀 전쟁>, <기쁜 우리 젊은 날>, <고래사냥>, 개인적으로 <개그맨>도 좋아하고, 오승욱의 <킬리만자로>도 좋아해요. 내가 나중에 그런 걸로 영화제 한번 하고 싶어요. 관객들이 ‘오! 이런 영화도 있어?’라고 할 만한 <킬리만자로>, <축제>, <남자는 괴로워>, 그리고 일반 사람들은 못 봤던 <개그맨>, <안녕하세요 하느님>, 이런 걸 하면 재밌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목은 ‘관객들이 손을 안 들어준 영화’ (웃음)

정성일_ 출연작 중에서 단지 숫자상으로가 아니라 기대했던 것보다 정말 관객이 안 들었던 영화가 있나요?

안성기_ <영원한 제국>. 그 당시에 관객 선호도 조사를 했는데, 그 해 가장 보고 싶은 영화 1위를 했었고, 원작도 베스트셀러였고, 열심히 나름 잘 만들었는데, 뚜껑 열어보니까 생각보다 관객이 안 들었어요. 보고 싶은 영화로만 끝난 게 아쉬웠어요. 그 영화제에 <영원한 제국>도 들어가야겠네요. (웃음) 

정성일_ 만일 그 영화제를 한다면 저는 거기서 오구리 고헤이의 <잠자는 남자>도 보고 싶습니다. 이 영화는 안성기 선배의 걸작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임권택 감독님과의 다음 영화에서 어서 다시 뵙고 싶습니다. 

인터뷰: 배우 안성기에서 감독 임권택에로

인터뷰_ 2013년 5월 24일 날씨 맑고 참 더웠음. 
정리_ 이지영
진행_ 유성관, 이지영
사진_ 유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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