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임권택과 영화비평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3-01-16조회 22,145

금지된 질문. 영화감독에게 영화비평이란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보는 것은 황당무계할 뿐만 아니라 사실 매우 무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간절하게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나는 오랜간 종종 궁금하게 생각해왔다. 영화에 관한 개념의 활용. 비평이라는 거리. 하지만 우리들은 제대로 윤곽을 파악한 것일까. 항상 우리들을 사로잡은 불안. 혹시나 그저 뇌라는 스크린의 가장자리만을 맴돈 것을 아닐까. 물론 우리들은 쇼트와 씬을 이용해서만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때로 난공불락이라고 여겨지는 요새. 어떤 힘 앞에서 느끼는 경이적인 감탄. 어떤 미로 앞에서 난처하게 길을 잃은 다음 이리저리 헤맬 때마다 느끼는 불안. 나는 내 동료들에게 걱정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가까스로 숨을 쉬듯이 질문하곤 했다. 혹시 당신은 표류하는 듯한 기분을 지금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화를 볼 때 우리는 그렇게 물결에 흘러가듯이, 조수에 밀려가듯이, 항로를 잃은 것처럼, 두리번거리면서, 흘러가는 이미지를 본다. 어쩌면 최악의 순간을 맛볼 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경우. 자꾸만 밀려나서 어느 순간 해안가로 밀려온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보지 않은 비평가가 있을까. 하지만 영화는 멈추지 않고 일단 시작하면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제발 잠시만이라도 멈추어주세요. 아니요, 그건 영화가 아니랍니다. 그러니 그저 영화를 따라오세요. 어느 순간에 마주칠 지도 모르는 번개 같은 깨달음. 그걸 믿어야합니다. 이때 우리들은 정말 멈추어 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힐 것이다. 영화가 무엇보다도 물리적이며 기계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신경조직 안에서 활동한다는 점에서 생물학적이긴 하지만 그러나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는가. 영혼과의 마주침. 달리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걸 기다리고 있다. 영화라는 기계적인 운동은 우리를 둘로 나누어 놓았다. 영화라는 스크린과 그것을 보는 우리들. 그 사이에 수많은 이론들이 걸쳐서 있다. 라캉을 경유한 봉합(suture). 장-피엘 우다르가 발견한 로베르 브레송의 <잔다르크의 재판>의 시선에서 잘려나간 쇼트들. 벨라스케스를 인용한 푸코로부터 영감을 얻은 표상과 재현의 변증법들. 파스칼 보니체는 더 밀고 나가길 원했다. 프레임의 변형들 속에서 관객들은 어디에 있을까. 장 루이 코몰리와 장 나르보니의 기계적인 해석. 이때 이 논쟁이 1968년 5월 파리를 통과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거리로 내려온 구조. 행동개시. 고다르는 과격하게 영화를 부수고 있었다. 안토니오니는 유럽의 모던한 시간을 잠시 등지고 중국의 혁명적 시간을 방문하였다. 상영시간 4시간 27분의 <중국>. 베르히만은 베트남의 사이공에서 분신자살하는 승려의 이미지를 자기의 영화 안에서 다시 한 번 더 불태웠다. <페르소나>. 글라우베 로샤의 축제와 제사. 오시마 나기사의 정치적 실험. 그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논쟁. 장-루이 보드리와 장-루이 쉬페르는 여기에 새로운 해석을 더했다. 물론 이론들을 시네필의 행동에 따라 재번역한 세르주 다네를 잊으면 안 된다. 미국식으로 번역된 교육의 코드(tutor code). 그건 모두 남자들의 이론일 뿐이에요. 여자 관객들의 자리를 생각해야만 해요. 롤라 멀베이는 조셉 폰 스턴버그와 알프레드 힛치콕의 이야기의 눈길 속으로 들어가 ‘남자가 되어버린’ 시선의 쾌락을 공격하였다. 정말 그런가요? 스티븐 히스는 회의에 차서 반문하였다. 그럼요, 우리는 시선뿐만 아니라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해요. 카자 실버만이 가세하였다. 모두 좋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라캉을 오해한 것은 아닌가요. 지젝은 익살맞게 논쟁을 무효화 시키고 싶어 했다. 나는 여기에 조안 콥젝을 더하고 싶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관객들은 거기 그렇게 ‘상상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데이빗 보드웰은 근엄하게 반문했다. 그런데 참, 거기 영화라는 이미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극장을 쏘다녔던 철학자 질 들뢰즈는 다소 장황하게 다시 한 번 시네필의 질문을 던진다. 수많은 분류들. 감각들. 액션들. 정감들. 그리고 시간. 무심한 결론. 영화의 이론이라는 건 없어요, 영화의 개념들이 있을 뿐이지요.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영화를 철학에 복종시키려는 위험한 함정이다. 나는 영화가 영화이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영화는 모험을 계속 하였다. 21세기의 영화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이미지의 질료. 먼 여행. 질문의 포물선. 우리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원래의 자리? 그렇다. 앙드레 바쟁이 했던 질문. 우리들은 영화라는 상형문자를 독해하기 위한 주석을 달고 있는 것이랍니다. 만드는 쪽과 보는 쪽. 그 절대적인 차이. 단지 공간적으로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차이지어지고 지연된 이미 거기와 지금 여기. 나는 영화에서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말의 공허함을 느낀다. 다시 둘로 나뉘어진 우리. 때로는 멀어지고 가끔은 가까워지지만 서로 겹칠지언정 하나로 통일될 수 없는 우리.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절대적인 거리. 이론적으로 아무리 시도해도 결국 내 앞에서 무효가 되어버린 통일. 그건 둘로 나뉘어진 셈이다. 먼저 이걸 받아들여야만 한다. 물론 수없이 그 둘 사이의 통로를 찾았다. 감추어진 질서인 ‘누군가’. 그래서 나는 이 지식(들)을 껴안고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만났다. 하지만 감독님과 나는 인터뷰를 하면서 한 번도 그 개념들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종종 흐려진 언어들. 이따금씩 멈추어선 말. 그 사이의 행간들. 나는 그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어야만 했다. 종종 그건 매우 위험했고, 나는 모든 힘을 다해서 점핑을 해야만 했다. 나는 내가 질문하려는 영화의 모든 쇼트를 셈할 수 있었으며, 그 순서를 따라 복기할 수 있었으며, 가끔 남들이 느껴보지 못한 미세한 움직임을 발견했으며, 반대로 때로는 남들이 모두 본 결정적인 순간을 놓쳤으며, 그러면서도 동선과 상상선을 필사적으로 따라갔다. 하지만 나는 매번 놓쳤다. 처음에는 세상이 있었다. 그런 다음 창조가 거기 개입하였다. 그리고 생산이 이루어진다. 생산된 접속들. 하지만 물리적인 이접효과. 나는 다른 인터뷰를 읽어보았으며, 배우들에게 질문을 했으며, 마찬가지로 기술 스텝들에게 질문을 했으며, 결국 현장에 가서 그 순간을 지켜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소로 좁힌 거리. 하지만 영화에서의 뇌의 고유한 위치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단상들. 초안에 관한 이야기. 연대기적 대응. 그 영화는 어디서부터 나타난 것일까. 얼핏 산만해보이면서도 결국에는 작품이라는 형식으로 하나로 통일되는 과정. 나는 이럴 때 어디서부터 작품이라고 간주해야 하는 것일까.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던 나는 어디서 멈추어야하는 것일까. 조형적인 힘이 언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본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할 때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은 저기에 있다. 그건 영화의 운명이다. 여기에 있음과 저기에 있음. 그 사이의 벽. 나는 여기서 영화를 본 다음 내가 본 것에 대해서 쓴다. 그때 나는 영화에 대해서 쓴다기보다는 영화를 본 나에 대해서 쓰는 것이다. 영화를 본 나와 영화를 쓰는 나. 그 사이에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있다. 이 이상한 숨바꼭질. 블랑쇼라면 그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 속에서 중얼거림이 전해져올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작가의 죽음이라는 (바르뜨의) 선언, 그런 다음 작가는 누구십니까, 라는 (푸코의) 질문. 두 개의 포스트. 우리들은 포스트구조주의를 통과한 다음 포스트모더니즘의 작가주의에 대한 살해를 지켜보았다. 위대한 말라르메. 아마도 거기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비인칭으로 만들기 위한 싸움. 그는 말했다. 전대미문의 순수함에 이를 때까지 거울을 희박하게 만들어라. 희미해진 거울. 나도 잘 알고 있다. 주체의 문학적 죽음. 혹은 주체에 관한 임상실험. 그러나 나는 그럴수록 선명하게 말라르메의 그림자를 본다. 라캉이라면 좀 더 단호하게 말했을 것이다. 거울 앞에 선 당신. 당신이 말하는 그 곳에 당신이 있지 않습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몇 번이고 멀리 간 다음 나는 이 자리로 돌아왔다.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여기에는 환원 불가능한 역할을 하고 있는 그 스스로의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과 만나야 한다. 누가? 내가. 영원한 되풀이. 거의 순환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의 매번의 반복. 물론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이 반복의 기회가 동일한 순간의 약속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차라리 이 약속의 상실이라고 불러야 할 기회. 중단 없는 중얼거림. 그때 내가 본 영화에 대해서 쓴다는 문제를 생각한다. 그건 한 번의 주사위를 던지는 내기이다. 다음번에 던지면 다른 패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패가 동시에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내기를 필사적으로 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임권택 감독님의 많은 영화에 대해서 글을 썼다. 매번의 주사위 던지기. 그리고 지금 두 번째 주사위를 던진다. 아마도 언젠가 세 번째 주사위를 던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두 번째 내기를 하는 중이다. 이번에 나올 새로운 패. 내가 던질 때마다, 우리들이 던질 때마다, 영화에 대한 글은 영화 앞에 도래한 그 순간의 모든 것, 도래하는 모든 것, 언젠가 도래할 모든 것에 대한 하나의 기호이다. 영원히 되풀이 되어야 할 한 순간을 잠시 멈출 때 오는 불안함. 달리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앞에서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가. 말이 아닌 것, 영화 안에 있는 그 무언가, 그저 중얼거림, 세계 안에서의 영화의 자리, 그저 떨림, 영화 안에서의 세계의 존재, 부분집합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운동들, 내가 보려는 것은 무엇인가, 침묵보다 덜한 것, 그렇다, 텅 빈 심연보다 덜한 것, 그럼으로써 영화를 본 나를 일깨우는 순간들과의 접촉, 그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내내 우리 앞에 펼쳐진 그 무언가의 가득함, 그것이 무엇일까, 우리들로 하여금 침묵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엇, 다양한 표현, 매번 느껴야 하는 새로운 감각, 그 안에서 이루어진 인상들, 그 앞에서 마주친 형상들, 생각을 멈출 수도 없고, 중단할 수도 없는 떨림, 그리고 이미 중얼거림, 영화 안에서 중얼거리는 이미지들, 청각적 신호들, 수많은 영화의 기호들의 다발들의 웅성거림, 거기서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분명한 중얼거림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토록 가득 찬 비어있음을 쓰고 또 쓴다. 가득 찬 비어있음. 결코 그 역으로 사용할 수 없는 말. 영화 비평의 글쓰기는 매번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내가 쓴 글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어진다. 혹시 이 글은 텅 빈 말이 아닌가요. 물론 나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레비나스의 비유. 침묵의 소리, 존재의 중얼거림, 그건 우리가 귀에 조개껍질을 대고 있을 때 들리는 소리와 비슷할 것입니다. 그것은 가득 찬 비어있음과 같고 소리가 된 침묵일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글을 쓰다 말고 잠시 중단한 다음 임권택 감독님을 만나서 당신에게 영화비평이란 무엇인가요, 라고 질문을 하는 것은 대답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일시적으로 그리고 강제적으로 두 개의 나뉘어진 자리 사이를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듯이 가깝게 만들어보고 싶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침묵의 행간에 귀를 기울이기. 잠시 동안 머뭇거림에 있을 지도 모르는 배움. 당신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영화에 대한 생각을 멈추면 안 된다. 그 순간, 영화는 죽는 것이다. 영화의 죽음에 관한 (맹렬한 저항의) 사유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 모든 영화는 그 어떤 분류의 정답에 귀속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더 나아가 끝낼 수 없게 영원히 다시, 또 다시, 또 다시, 그렇게 되풀이해서 생각할 때, 그 자리에서 영화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영화라는 삶. 영화의 생명. 

당신께서는 이 만남 속에서 사용된 말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혹은 영화에 대한 도구처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쓴 글에 대해서 사용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에 대해서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관해서, 라고 쓰지 않고 대해서, 라고 썼다. 물론 용법은 각자의 몫이다. 말하자면 도구상자로서의 말. 나는 지금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서 <달빛 길어 올리기>까지의 최종 책임자로서의 주인을 만나기 위하여 이 이야기를 청해 듣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인의 자리를 둘러싼 이론적 수수께끼들, 차라리 주인을 둘러싼 그 어떤 이야기. 우리가 항상 되찾으려 했던 영화적 사건. 무엇을 무엇과 짝짓는다는 문제. 우리들은 수 없이 많은 모델들을 만들어왔다. 기호학적 모델. 정신분석학적 모델. 신화적 모델, 형식적 모델, 철학적 모델, 현상적 모델. 그 사이의 관계와 격리. 서로 각자의 취사선택. 수업시간에 한 한생이 내게 물었다. 이 모든 모델(들)을 통일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없는 것일까요. 그럴 때 마다 나는 자문자답하였다. 어떤 모델도 사용하지 않을 방법이란 결국 없는 것일까. 나는 모델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 단지 영화라는, 내가 지금 막 보고 난 그 고유의 대상으로서의 그 영화가 궁금한 것이다. 질문들. 항상 그것만이 영화 앞에서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임권택 감독님을 만났다. 차라리 나는 영화를 만든 감독과 이야기를 시작할 때마다 번번이 무언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플라톤의 동굴. 종종 거기서 나는 길을 잃었다.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의 웅성거리는 듯한 메아리를 듣는다. 두 개의 이미지. 내 질문(속의 영화들)과 임권택 감독님의 대답(속의 영화). 두 개의 울림. 좀 더 단순하게 질문과 대답. 아주 가끔씩 이루어지는 사고와 세계 사이의 우연한 접촉. 어디로 나갈 지 알 수 없는 길. 동굴에서 표지판을 찾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수천 갈래로 갈라진 길. 여기에 지름길 따위란 없다. 그러니 여기서 그런 행운을 기대하지는 말아야 한다. 갑작스러운 낭떠러지. 이 길을 따라가면서 여기서는 오로지 자기의 감각을 믿어야 한다. 그런 다음 언젠가 여기 온 것일 지도 모른다는 기억을 더듬어야만 한다. 이미 본 영화, 이미 만든 영화. 양쪽의 (서로 다른) 경험. 어쩌면 영화 앞에서 느껴보는 덧없음으로 인한 자신의 어둠에 잠긴 사고를 향해 던져질지 모르는 섬광 같은 배움의 순간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이 자리를 청한 것일 지도 모른다. 나는 그 거리를 좁혀보고 싶을 뿐이다. 물론 마지막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만남은 항상 이렇게 시작한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시작하였다. 그렇게 내 질문은 시작한다. 

정성일_ 이렇게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1987년 감독님과 첫 번째 인터뷰를 진행할 때 감독님의 영화에서 무엇을 배우면 됩니까, 라고 질문하자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의 얼굴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얼굴에서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총체를 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두 번째 인터뷰, 그러니까 2003년에 인터뷰를 마치면서 같은 질문을 드렸습니다. 감독님은 내 영화의 빛을 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그 질문을 드린 지 10년이 막 지나가고 있습니다. 같은 질문을 세 번째 드리고 싶습니다. 

임권택_ 나이를 봐라. 나이를 들여다보면서 임권택 영화에 대해서 보라는 대답을 하고 싶어요. (잠시 생각) 내 영화를 본다면 임권택의 나이를 들여다보면서 영화를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가령 <축제>라는 영화를 가지고 예를 든다면, 이 영화를 1998년도에 찍었고 그걸 가지고 출연자들과 그때 이미 다 함께 본 영화에요. 거기서부터 15년 정도가 지났는데, 지난 명절 무렵에 텔레비전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여준 모양이에요. 거기 출연한 연기자가 전화를 해 와서, 나한테 그때는 전혀 안 보였던 것이 지금 나이에 와서야 보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분은 연기자는 아니고 변호사고, 그때만 해도 이미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에요. 그래도 십여 년 후에 그때 안 보이던 것이 많이 보였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얼마 전 (칸 영화제 코디네이터인) 피에르 리시앙이 지금 <만다라>를 세계에 배급하면 어떻겠냐고 물어오는 거예요. 자기도 30년 전에 그 영화를 봤는데, 그때는 안 보였던 것이 지금은 참 많이 보이는 영화라는 거예요. 아마도 일정한 세월을 살아내면서, 그렇게 삶의 누적이 주는 그런 체험의 세계가 영화에 많이 박힐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그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읽히는 그런 영화를 내가 만들 필요가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요. 왜냐면 같이 작업하면서도 안보였다니까, 그렇게 긴 세월 영화를 보아온 사람들조차 이제는 보인다니까 하는 소리잖아요. 그러니까 나이만큼, 나는 나이 이상도 이하도 찍은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해요. 나는 나이만큼, 살아온 삶만큼 영화를 찍은 거예요. 그 안에서 영화를 같이 찍은 사람조차도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영화에서 그 감독의 나이를 읽어줬으면 좋겠고 그걸 보려고 노력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하고 싶어요.

정성일_ 오늘 들어야할 얘기를 다 들은 것 같습니다.(웃음) 오늘은 제 동료들이 감히 감독님께 물어보지 못한 질문을 제가 대표해서 드리겠습니다. 저는 영화비평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나름대로 영화를 본다는 문제에 관해서 자기 방식으로 훈련을 받은 직업적인 관객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영화를 옹호하기도 하고 방어하고 또 공격하기도 합니다. 때로 감독님께 도움이 되기도 하고 또 불편한 사람이기도 할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감독님에게 영화비평이란 무엇입니까?

임권택_ 이를테면 영화비평은 늘 나를 불편하게 해요. 좋은 쪽도 나쁜 쪽도 다. 그 어디서 오는 불편이냐, 그것은 연출자가 작품을 해내는 과정에서 그 안에 담고 싶은 것들을 충분히 읽어내지 못하고 하는 비평, 또 아니면 해낸 것보다도 도가 지나친 칭찬이 있다든가, 그런 것에 대한 어리둥절, 그래서 늘 불편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정성일_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이 도움이 되었던 순간은 있습니까?

임권택_ 늘 도움을 받죠, 늘. 어떤 거냐면 어떤 비평도 내가 비평하는 사람들한테 실제 영화에 담아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 잘 전달되지 않았구나하는 자성 같은 것이 생기게 되요. 그런 비평을 만나면 비평가들에게 내 생각이 좀 더 명료하게 잘 짚이도록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성일_ 좀 더 부정적으로 비평가들이 감독님의 영화와 불화를 겪는다, 혹은 더 나아가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구나,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임권택_ 뭔가 자기들 틀을 미리 가지고 내 영화가 자기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비평한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나 그 틀 안에 들어갔든, 안 들어갔든 간에 사소한 의견이라도 굉장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정성일_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쓰면서 당시 감독님 영화에 관한 비평을 열심히 찾아 읽어봤습니다. ‘젊은 감독 임권택 군은...’ 이런 표현도 있었어요(웃음) 처음 감독님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뉴스로 실린 신작 소식 이외에 어떤 비평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임권택_ 그 만큼 내 영화가 주목받지 않았고, 심층적으로 평을 할 만큼 잘 만든 영화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도 되지요.


(좌측상단부터) <족보>(1978), <깃발없는 기수>(1979), <짝코>(1980), <만다라>(1981)
 
정성일_ 하지만 저는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영화비평이 대중영화에 무관심한 것은 영화비평의 게으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1987년은 이미 감독님이 <만다라> 혹은 <길소뜸>, <티켓>을 만든 다음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도 좋습니다. 이미 1964년 <망부석>은 그해 한국영화 중에 가장 좋은 영화중의 한 편이었습니다. 한국영화 비평사를 돌아보면 이미 1960년대에 영화비평의 활동이 활발했고, 많은 영화비평가들이 있었습니다. 만일 이 시기에 감독님의 영화가 좀 더 본격적으로 다루어졌다면 저는 1970년대에 <족보>가 훨씬 더 빨리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권택_ 그랬겠죠. 만약 내 영화에 대해 비평가들이 많은 평을 해주었다면 나 자신도 비평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봤을 테고, 그 사람들은 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예민하게 관심을 갖고 있었을 텐데, 그런데 전혀 없었어요. 그 사람들이 내 영화에 대해 무관심하게 봤던 것처럼 십여 년 동안 50여 편을 찍으면서 나도 비평가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정성일_ 본격적인 비평이 나온 것은 <만다라>가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거의 유일하게 진지하게 영화를 다룬 (영화진흥공사에서 나오던)「월간 영화」를 비롯해서 영화 비평가들의 <만다라>에 대한 상찬과 호의가 있었습니다. 사실상 그 이전에는 감독님 영화에 관한 그렇게 진지하거나 집중적인 비평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만다라> 이전에 <짝코>나 <족보>같은 걸작이 이미 있었고, 비평의 관심도 있었을 법한데, 신기할 정도로 무관심했습니다. 왜 비평가들이 <만다라>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영화의 무엇이 비평적 시선을 끌었을까요? 

임권택_ (잠시 생각)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나도 열심히 만들었고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영화들이 <짝코>, <깃발 없는 기수> 정도 부터였던 거 같은데, 아마도 정성일 평론가와 그 무렵을 같이했던 사람들이 시작이었어요. 서강대학교에서 내 영화를 놓고 비디오로 회고전을 하고 글을 발표하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서부터 내 영화에 대한 어떤 진지한 주목이 생긴 거 같아요. 그 전에는 전혀, 전혀 없었지요. <족보>같은 영화에 대해서는 영화평이 아니고 ‘지평선’과 같이 신문에서 논설했던 쪽 사람들의 영화 감상이나 단상을 써낸 거 외에는 거의 본격적인 영화비평은 없었어요. 

정성일_ 감독님 영화의 진가를 공식적으로 처음 발견한 것은 한국이 아니라 외국에서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토 다다오(佐藤忠男)선생님의 <만다라>에 대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때 사토 다다오 선생님은 마닐라 영화제에서 감독님의 작품을 처음 보신 것 같습니다. 마닐라 영화제에서 <만다라>에 대한 보고서를 쓰면서 “걸작을 만났다”고 썼는데, 저에게 무척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국에서 온 걸작이란 표현 없이, 그냥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임권택이라는 감독을 발견했다는 흥분이 거기 있었습니다. 이 비평가는 영화를 국적에 대한 호기심으로 보는 대신 작가의 발견에 주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사토 다다오 선생님은 2000년 『한국영화의 정신』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영화사가 아니라 사실은 감독님의 영화를 통해서 한국영화를 생각하는 ‘임권택 연구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감독님이 영화비평가와 첫 번째 우정을 만든 사토 다다오 선생님과의 인연을 듣고 싶습니다. 

임권택_ 사토 다다오 선생을 만난 것은 아마도 일본에서 <길소뜸>과 함께 한때 왕성하게 한국영화들을 초대할 때에요. 처음은 못가고 두 번째 초청받아 일본에 갔을 때, 만나서 얘기하는 자리에서 사토 다다오 선생이 끼어 있었어요.

정성일_ 몇 년도로 기억하십니까?

임권택_ 80년대 초반이나 될까. 이런 저런 질문이 몇 가지 있었는데 첫 느낌은 저 평론가는 나를 보호하려는 쪽에 서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어요. 그때 사토 다다오 선생은 한국영화가 대부분 지나치게 감상에 치우쳐서 절제의 측면을 잃고 있다고 말하면서 내 영화의 절제에 대해서 칭찬을 했어요. 이런 비평을 들으면서 절제라는 것, 이것이 영화가 가져야하는 미덕중에서 굉장히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전까지는 내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도, 하여튼 뭔가 절제를 많이 잃고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노파심 같은 게 있는 거요. 절제 때문에 자칫 설명 부족이랄지, 관객들에게 충분히 이해를 시켜야하는 부분을 그렇게 건너뛰면서, 자칫 잘못된 비약, 이런 게 오히려 설명 부족이 되고, 오히려 폐단의 우려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설명도 장황하고 그랬는데, 그런 비평의 소리를 일본 쪽에서 들으면서 내가 지나치게 장황한 노파심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극을 주신 분이 사토 다다오 선생이지요.

 
정성일_ 사토 다다오 선생님은 영국에서 발행되는 영화잡지「사이트 앤 사운드(Sight & Sound)」에서 10년마다 한 번씩 전 세계 영화비평가들의 앙케이트를 받아 집계를 내서 영화사상 10편을 선정하는 자리에서 2002년에는 <춘향뎐>을, 그리고 2012년에는 <만다라>를 열편 중의 하나로 선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비평의 관습 중의 하나이기도 한데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면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세계 영화사의 계보 안에 하여튼 위치 짓고 싶어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토 다다오 선생님은 감독님의 영화를 미조구치 겐지의 계보 안에 위치 지은 첫 번째 비평가이기도 합니다. 

임권택_ 일본에 갔을 때 내 작품이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작품과 비슷하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일본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내 영화가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와 닮은 점이 많다는데 사실 그때까지 나는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나는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었고, 일본영화는 한국에 수입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일본에 방문했을 때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데 떠나기 전날, 일본 국제교류 기금에서 <우게쓰 이야기>와 <서학일대녀> 두 작품을 16밀리 프린트로 보여줬어요. 그때 시간이 없어 두 작품밖에 못 봤어요. 12월인 건 기억이 나는데, 아마 1980년대 거의 끝 무렵이었을 거예요. 그 쪽에서는 좀 더 시간을 내면 갖고 있는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를 모두 보여주겠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두 작품을 본 이후에 그 분의 영화를 다 보기위해 더 머무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말았어요. 그 이후 왜 내 영화들이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와 닮았는가 보니까 정말 영화를 끌고 가는 정서적인 어떤 것들이 비슷한 데가 있었어요.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미조구치 감독의 영화는 무인사회가 갖는 정서에 바탕을 두는 것이고 나는 문인사회가 갖는 바탕에서 영화의 운행이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해요. 언젠가 사토 다다오 선생을 만나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선생도 동양인에게 정서적으로 비슷한 성향의 어떤 것이 있어서이지 거기에 무슨 표절을 했겠냐고 그런 얘기를 했어요.

정성일_ 한편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로 다른 사람의 영화를 보시면서, 정서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일본영화 중에서, 이 사람은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었구나, 하는 친근함이 드신 감독이나 영화가 있으신가요? 그게 동시대이건, 아니면 고전적인 영화이건 관계없이.


<아! 노무기 고개>(1979), <행복의 노란 손수건>(1977)
 
임권택_ 나는 어렸을 때 짧은 무성영화 몇 편을 본 거 외에는 일본 영화를 본 적이 없어요. 지금 그냥 문득 떠오르는 영화들은 1979년에 영화진흥공사에서 여행을 시켜주었는데 미국에서 귀국하는 마당에 도쿄를 들려서 일본 영화 몇 편을 본거요. 그때 내가 이것은 참 괜찮다싶은 영화는 <아! 노무기 고개>라는 견사공(絹紗公)들에 대한 얘기요. 일정시대 시골여자들이 끌려가서는 물레 돌리는 직조공장에서 근무하는 영화였어요. 그 영화를 만든 야마모토 사츠오라는 감독이 상당히 괜찮은 감독인거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재미있는 영화로는 야마다 요지의 <행복의 노란 손수건>이란 영화를 재밌게 본 기억이 나고, 그 감독의 시리즈로 주욱 나왔던 <남자는 괴로워>도 세편 정도 봤어요. 그거 말고는 일본 영화는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어요. 왜냐면 이승만 정권은 일본과 전혀 교류가 없었고. 시나리오 같은 거는 책으로 보고 많이 베끼고 했다는데, 하지만 나는 국민학교에서 어설프게 일본어를 배웠고 또 그런 걸 그때 구하기도 힘들었어요. 지금처럼 DVD나 그런 것도 없었어요. 필름이 들어와서 영사기에 걸려야 일본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시절이죠. 그래서 일본 영화의 영향을 받을 수 없었어요. 완전히 단절되었으니까.

정성일_ <만다라> 직후에 런던에서 다섯 편의 한국영화를 초대해서 상영을 한 기획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때 초대받은 영화 중 한편이 <안개마을>이었습니다. 이때 유럽 영화저널에서 <안개마을>에 대한 평가가 있었고, 여기서 다섯 편을 소개한 행사는 이후 유렵에 한국영화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지금까지 말해지고 있습니다. 

임권택_ 그때 나도 영화와 함께 런던을 방문했었어요. 하지만 직접 거기서 마주친 느낌은, 글쎄, 어떤 평가가 나왔는지는 몰랐고, 영국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이 영화제가 진행되고 있구나, 하는 별로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돌아왔어요.

정성일_ 아마도 비평적 성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안개마을>에 대한 이해는 미지의 감독이 만든 이 영화를 처음 마주친 비평의 난처함이 고스란히 담겨있었습니다. 종종 안토니오니를 인용하면서 이 영화를 테시가하라 히로시의 <모래의 여자>의 계보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처음 감독님의 영화가 유럽과 만났을 때, 호의는 충분히 느껴지지만 오해되고 있을 때의 난처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임권택_ 질문이 들어오는 걸 보면 이 사람이 내 영화를 제대로 봤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난처함 정도가 아니고. 피에르 리시앙의 말에 따르면 임 감독 초기의 영화는 때려 죽여도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고까지 했어요. (웃음) 문화의 벽이었던 거죠. 하지만 계속 당신의 영화를 보고 있으니까 한국 사람이나 한국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 이해에 도움을 주는 정보가 당신 영화 도처에 있다. 아마도 당신 다음 세대의 한국영화들은 당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라고 말하더군요. 

정성일_ 한국 영화가 런던에서 상영된 이후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독일을 경유해서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독일 영화비평가인 클라우스 에더는 감독님의 영화를 방어했고, 더 나아가 뮌헨 영화제에서 대대적인 회고전을 기획할 정도로 지지하였습니다. 유럽의 영화비평가들, 영화 저널들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_ 클라우스 에더는 비교적 정서적으로 동양 사람에 가깝다고 느낄 정도였어요. 서양인들이 갖는, 어떤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것이 많이 없는 평론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뮌헨 영화제 이후로는 별로 만난 적이 없어요. 사실 만나도 언어가 안 통하니까 많은 이야기를 하기 힘들기도 하고요. 그 다음에 토니 레인즈랄지 프랑스 평론가들은 자주 만났어요. 


 
정성일_ 감독님 영화가 서방에서 결정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씨받이>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을 때부터입니다. 이제는 시간이 충분히 흘러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라쇼몽>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을 때 “상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점에서 내게 그 상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였다. 그 상은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영화에 신념을 갖게 해주었다”라고 말했습니다. 1987년 <씨받이>로 상을 받았을 때 감독님에게 그 상의 의미는 개인적으로, 아주 개인적으로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_ 그쪽을 얘기하려면 난 참 난처한 게 많은데 진흥공사에 장영목이라는 사람과 둘이 베니스 영화제에 갔어요. 닷새인가 호텔 숙소를 내주고 그 기간이 지나면 우리가 경비를 대야한다고 하더라구요. 거 참. 닷새가 지나니까 경비가 없다고 둘이 머무는데 하루에 80불 받는 상 마르코성당 뒤에 아주 낡은 호텔로 옮겼어요. 폐막식이 가까워지면서 <씨받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고 프랑스에서도 호의적으로 쓰고, 그냥 막연하게 그런 소리만 듣고 있었어요. 마침 ZDF 독일 제2 방송이 인터뷰 요청을 해서 가는데 내 앞서 인터뷰를 한 여자가 심사위원장이라고 하더군요. 그 사람이 인터뷰 끝나고 스쳐 지나가다가 내가 <씨받이> 감독이라는 소리를 듣자 “나는 심사위원장이긴 하지만 내가 상을 줄 권리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나는 <씨받이>를 굉장히 좋은 영화로 봤다”고 얘기하고 갔어요. 그러고 며칠 뒤 시상식 날인데 그때 분위기는 아주 작은 거라도 탈 수 있지 않겠나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어요. 일 년 전에 일본에 그 날짜에 들어가겠다고 약속을 해놔서 나는 수상식까지 있을 수 없었던 거요. 그래서 영진공 사람만 남았어요. 일본으로 들어가려고 잠시 들린 서울에 가서야 수상 소식을 알았어요. 나중에 일본 사람들이 이 약속을 좀 어기면 어떠냐, 그 중대한 시상식을 놔두고, 참 답답한 인간이다. 저건 한 번 약속을 하면 틀림없이 지키는 놈 그랬을 거예요. (웃음) 한국 신문들이 수상결과를 아주 작은 지면으로 보도하니까 일본 사람들이 이렇게 큰 상을 작게 보도하다니 이상하다고 했어요. 그때 이게 큰 상이었구나 생각했고, 사실 내 영화에 기대한 게 없으니까 본선에 오른 것만으로도 보람 아니냐, 그런 식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상을 탔을 때는 아주 우물우물 지나간 거예요. 그 다음 <아다다>, 또 그 다음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이렇게 매해 계속 상을 받으니까 이거 별것도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가 또 <춘향뎐>에서 칸 영화제 경쟁본선에 들면서 세계 배급이 되고, 그러면서 수상이란 게 정말 필요한 것이구나. 그때서부터 큰 영화제 수상이라는 게 내 개인뿐 아니라 한국 영화의 위상과도 관계 되어있고 그 때문에 전 세계로 배급도 되고 하니까. 그때부터 수상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게 그냥 그런 정도인 거지요. 

정성일_ <씨받이>가 상을 받은 이후로, 말하자면 한국 관객들로부터 우리와 다른 문화의 관객들을 향해서, 영화가 받아들여진다는 면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이 바뀐 부분이 있습니까? 

임권택_ 모스크바에 갔을 때는 인터뷰할 때 내가 1분 얘기하면 10초도 번역이 안 되는 이상한 인터뷰를 하면서도, 어쨌거나 그 영화가 통하는 거요. 내가 제일 관심이 컸던 게 뭐였냐면 내 영화가 어디까지 통하고 있는가. 영어를 모르니까 내가 점검해 볼 통로가 없었어요. 평론가나 기자들 시사 끝나고 보면, <씨받이> 경우 굉장히 엉뚱한 질문만 나오고. 너희 영화 검열은 어떠냐, 그런 질문만 했어요. 때로는 질문이 아주 기초적이어서 쟤들이 우리를 놀리고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하지만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통해서 이런 페이스로 가면 누가 의심하고 말고도 없이 내 생각으로 찍으면 유럽이고 어디고 통하는 영화가 되겠다는 자신을 가졌어요. 

정성일_ 감독님의 전면적인 회고전으로 1989년 낭뜨 영화제에서 10편을 상영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칸 영화제 경쟁 초대까지 1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프랑스 비평을 처음 만났을 때 인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_ 프랑스에서는 처음부터 굉장히 호의적이었어요. 샤를 테송도 그랬고 장 미셸 프로동도 그렇고. 

정성일_ 프랑스 비평가들이 특히 좋아했던 영화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마도 나라마다 감독님의 영화중에서 선호하는 영화가 조금씩 다를 것 같습니다. 

임권택_ <춘향뎐>도 좋아했고, 그때 경쟁에 갔을 때 심사위원 중에 한 명이었던 <인도차이나>를 찍은 감독 레지스 바르니에는 올해 자기가 칸에서 본 영화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고 얘기를 하더라구요, <취화선>으로 칸에 갔을 때는 심사위원장이었던 데이빗 린치는 파티를 하는데 내게 다가와서 전체로서나 지엽적으로나 모두 완벽하다면서 당신은 완벽주의자로 영화를 만든다, 라고 하더라구요, 고마운 이야기지요. (웃음) 

정성일_ 프랑스 영화 비평가를 만났을 때 특별히 관심을 갖고 질문을 던졌던 부분들이 있습니까?

임권택_ 많이 공감이 가는 소리를 하는 게, 르몽드에 있던 장 미셀 프로동은 <천년학>을 본 다음 <서편제>와 <춘향뎐>을 통해서 판소리를 익히지 않았다면 자신이 어떻게 <천년학>의 그런 영화적 수준을 이해할 수 있었겠느냐, 면서 메일을 보내주었어요. 

정성일_ 감독님 영화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기까지는 다소 시차가 걸렸습니다. 1996년 USC에서 데이비드 제임스 교수웰옥令돈?대대적인 회고전과 학술발표가 있었고, 그런 다음 영어로 된 첫 번째 감독님 연구 서적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었다) 

임권택_ 그리고 뉴욕영화제에서 거푸 두 번을 임권택 특별전을 했을 정도로 성원이 있었고 데이비드 제임스 교수가 아주 전적으로 내 영화에 대해서 지지를 보냈고, 그런데 그 배경을 보니까 스탠 브래카쥬 같은 사람이 열심히 옹호를 해줬어요.

정성일_ 비평의 전통이 미국과 유럽이 크게 다른 편인데, 유럽 비평가를 만났을 때와 미국 비평가를 만났을 때의 차이를 어떻게 느끼셨는지요?


<안거>(1997)
 
임권택_ 글쎄, 뭔가 문화적 벽을 갖고 서로 만나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 때문에... (잠시 생각) 상해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간 적이 있어요. 거기에 경쟁으로 온 영화중의 하나로 (후빙 리우가 연출한) 중국 영화 <안거(安倨)>를 심사하게 된 거요. 그때 심사위원으로 함께 한 사람 중에 헝가리의 이스트반 자보, <황금연못>을 찍은 미국 감독 마크 라이델, (러시아 감독) 엘렘 클리모프, 일본 여배우인 마츠자카 케이코, 이런 사람들과 같이 있었어요. <안거>라는 영화는 내가 보기에 아주 잘 찍은 거요. 무슨 얘기냐면, 광동 쪽 어딘 거 같은 데, 중국이 막 개방하고 열렸을 때 주인공이 자기 처와 둘이 열심히 살면서 인테리어 하는 가게를 차려서 돈을 잘 벌고 하는데, 어머니는 굉장히 나이가 들어가지고 따로 집을 얻어서 살게 해요. TV, 냉장고, 전화기. 없는 거 없이 살게 해요. 그런데 남편이 효자여서 매일 어머니를 찾아가 뵈니 여편네가 짜증을 내는 거요. 덮어 씌워서 아들한테서 온 전화를 받고 해요. 아주 잘 찍은 영화라고 나는 봤어요. 경쟁영화 중에 다른 중국 영화로 굉장히 스케일이 큰 놈이 있었어요. 영국군이 침공해왔던 아편전쟁 무렵이었던 거 같아요. 그걸 티베트 국민들과 같이 막아낸 대작 영화가 있어요. 뒤에 가서보면 전투 씬이고 뭐고 엉망인데, 중국 친구들, 러시아에서 온 감독은 이 전쟁영화를 막 칭찬을 하는 거요. 그래서 내가 뭐 이게 칭찬할 만한 영화냐, 전투 씬이고 다 엉성한 영화이고 군대 갔다 온 사람은 웃을 수밖에 없는 그런 영화인데 막 좋다고 우기는 거요. 왜냐하면 이게 티베트 국민들과 힘을 합쳐 싸운 영화이고 중국 정부에서 돈을 댄 영환데 나는 눈치도 모르고 어쩐지 얘기를 하다 보니 싸늘한 거요. (웃음) 집행부 사람도 다 있고 그러는데. 하지만 내친김에 그만 둘 수도 없더라고. 근데 다른 감독도 가만히 있더라고. 좀 나서서 아니면 아니라는 얘기를 해줘야 되는데, 거 참. 그래도 내가 주장을 해서 <안거>라는 영화가 상을 받았어요, 결정을 하기 전에 자보가 나한테 자기는 그 작품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그러는 거요. 왜 어머니가 이 전화에다 천을 씌어놓은 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더 좋은 가구도 많은데. 그러면 중국 쪽 누가 해명을 해야 하는데 시나리오협회 회장이란 친구도 그렇고 홍콩에서 온 감독도 그렇고, 그쪽은 아주 가만히 있는 거예요. 전쟁 영화도 떨어지고, 아마 그래서 그랬나 봐, 그래서 내가 설명했어요. 이 할머니의 나머지 생은 오직 아들과의 소통에서 보람을 찾는 얘기다, 근데 아들과 소통의 기구인 소중한 전화에 보자기를 씌운 것은 둘의 소통이 얼마나 소중한 지 보여주는 건데 납득 못할 게 뭐있냐, 효심에 대한 얘기인데. 그렇게 말하고 나서, 투표에 들어갔는데 자보도 그 작품에 표를 줬어요. 그러고 나서 당신이 하도 우겨서 찬성을 했지만 나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하는 거요. 그래서 어떤 점이 이해가 안 되냐 물어보니까 왜 이 할머니는 아들과 소통을 위해서 멍청하게 남은 인생을 사냐, 왜 자기 인생은 안 살고, 라고 그러더라고. 그때 동과 서 사이에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있구나, 라는 걸 알았어요. 그런 벽들이 도처에 있는 거예요. 

정성일_ <씨받이>이후 이 시기까지 오면서 한국에서도 비평이 감독님의 작품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그 절정은 대중적 성공과 함께 <서편제>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세대의 비평적 관심 속에서 한국어로 쓰여진 비평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임권택_ 그러니까 옛날에 내 영화에 대한 외면이 지지로 돌아섰던 거 아니요. 그거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였는데, 그런 지지가 사실상 영화를 바로 보고 하는 지에 대한 의구심 같은 게 없는 것은 아니었어요. 내가 한국적인 정서나 한국 사람들의 삶이나. 가장 큰 영향을 줬던 미국 영화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것에서 같이 만나고 있는 건데, 지금까지. 지금의 평가 중에는 내가 해냈으면서도 여전히 미처 알아주지 않는 대목들이 남아있고, 또 내가 연출을 하면서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도 저렇게 영화에서 읽어내기도 하고, 내 자신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을 얘기들을 해내기도 하고. 그러면서 자꾸 생각하는 기회를 주는 거요. 하여튼 많은 사람들의 관심, 각기 자기들이 종사하고 있는 직업이나 이런 걸 따라서 영화를 달리 보는 사사로운 평가, 그런 것들을 많이 만나는 거죠.

정성일_ 많은 비평이 쓰여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님의 영화중에서 가장 오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영화가 있습니까, 혹은 다시 이해받고 싶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랄까, 왜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못 받아들이는 걸까, 의아스러운 순간들, 그런 영화들이 있습니까? 

임권택_ 최근에 비로소 한 얘기지만 <족보>는, (잠시 생각) 나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에요. 아무도 얘기 안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족보>를 만들면서 내가 미국 영화의 영향으로부터 비로소 많이 빠져나온 결과물이고, 한국 사람이 가질법한 삶에서 우러나오는 정서. 이런 것들을 내 영화에서 윤곽을 찾아냈구나하는 굉장한 성취감을 가졌었는데. 그때는 전혀 이해를 안 해주고 완전히 외면을 당했어요. 내가 제일 기분이 좋았던 것은 정성일 평론가가 내 영화를 <만다라>에서 볼 게 아니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 봐야한다는 얘기를 해줄 때였어요.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정말 <족보>나 이런 영화를 깊이 들여다 봐 줬으면 <만다라>로부터만 내 영화를 얘기해준다는 게 얼마나 잘못된 건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정성일_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저로서는 정말 기쁩니다. 그런데 꼭 과거에로 거슬러 올라가서만이 아니라 현재진행중인데도 감독님 영화중에는 이상하게 얘기가 잘 되지 않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근작에서 <축제>와 <하류인생>이 그렇습니다. 두 편에 관해서는 한국에서도 그렇고 외국에서도 그렇습니다. 비평가들은 소통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인데 이 영화들과 뭔가 친화성을 느끼지 못함으로써 이들이 영화에 다가가는 걸 몹시 힘들어 한다는 거죠. 그 중에는 <개벽>도 있습니다. 그런 불편함을 만났을 때 감독님의 심정은 어떻습니까?

임권택_ 정말 불편하죠. (부산영화제 유럽 코디네이터인) 임안자씨가 전해준 말이 (베를린 영화제 포럼 집행위원장 이었던) 울리히 그레고어 부부가 러시아에서 지금 영화 관계 일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하는 행사 중의 하나로 자기가 그 동안 본 영화 중 세계에서 가장 볼 만한 영화 10편을 꼽았는데 그 중에 <축제>가 들어갔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그 영화를 통해 어떻게 그런 감흥을 받았으며 우리는 거기서 멀리 떨어져있으니 그 선정의 이유를 알 수가 없잖아요. 한국의 장례를 다뤘는데 여기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기서는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하류인생> 찍을 무렵 뉴욕 MoMA에서도 내 작품 몇 편을 가지고 회고전을 했을 때 <축제>를 틀었어요. 그러면서 거기서 가장 좋은 영화로 <축제>를 꼽았어요. 그런데 국내에선 안 닿고 있더라구요. <축제>를 만들고 이청준 씨랑 시사를 본 후에 어떻게 봤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서편제>보다 훨씬 좋은 영화인 거 같다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는데 개봉을 하고 보니 둘이 헛소리 하고 있었던 거요. 대중이건 비평이건 한국에서는 관심밖에 내 놨던 거요. 어떤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닿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판 그렇지 않고 나 자신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이럴 때마다 나 자신이 너무 어리둥절한 거요. 하지만 그런 불편한 심사를 얘기할 수가 없잖아요, 자기 작품이 잘 안 받아들여진다고.

정성일_ 영화를 만들면서 이 영화는 결국 잘 안 받아들여지겠구나, 라고 만드는 중에 느낀 적이 있습니까?

임권택_ <개벽>이 그랬어요. (잠시 생각) <축제>도 그랬고. 왜냐하면 <축제>의 구조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그 영화는 얘기 가닥이 가족사를 따라서 워낙 여러 가닥이기 때문에, 그 복잡한 가닥을 어떻게 정리해서 복잡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내느냐 힘을 쏟았는데, 하면서도 내 소신을 갖고 있는 거지, 영화에 대한 결과가 내 뜻대로 되리라고 생각할 순 없었죠. 그래도 그 작업을 해내면서 어느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짝코>도 그 복잡한 구조를 어찌 보면 굉장히 정밀한 조직을 통해서 해내고 있는데 그런 거를 잘 모르는 거요 사람들이. 그런 영화는 그 영화를 볼 사람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는 거죠, 그런 거 같아요, 영화는. 

정성일_ 영화평론가뿐 아니라 문학평론가. 혹은 철학자들, 인문사화학자들, 같은 많은 영화의 친구들의 영화에 관한 글이 있습니다. 철학자 김용옥 선생의 글도 그런 비평 중의 하나입니다. 감독님에 관한 많은 글들이 영화 비평 바깥에서 오고 있는데 그들은 영화문법에 미숙하지만 각자의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부분을 집어내고 건드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글이 도움이 되는 적이 있습니까? 

임권택_ (한참 생각한 다음) 도움이 된 부분도 있는데 잘 기억은 나지 않아요. 도움이 안 되었을 리가 없죠.

정성일_ 반대로 영화적으로 미숙한 것을 한편으로는 거의 소설에 가까운 비평으로 그것을 메우면서 영화를 오해하거나 불편하게 만든 적도 있지 않습니까? 사실 저는 이런 글을 읽을 때 몹시 불편해집니다. 

임권택_ 나는 그런 것도 여러 번 만났기 때문에 완전히 이력이 붙은 거요. 그런 소리, 그런 견해 얼마든지 좋다. 뭐, 얘기할 수 있는 거지. 

정성일_ 평론가들이 비평하면서 영화에 접근할 때 자기들이 사용하는 개념적인 용어가 있습니다. 현장에서 여러 가지의 수없는 경우의 수 안에서 수많은 잠재적 가능성 중의 선택으로 만든 영화 앞에서 평론가들이 오로지 개념적 용어들로만 영화에 접근해올 때 그 영화적 개념들이 어떻게 읽히십니까?

임권택_ 비평가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남의 영화를 자기 틀 안에 가두어서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요. 하지만 이제는 하도 많이 들어서 개의치 않아요. 어떻게 봐도 무슨 상관이냐 해요. 왜 그러냐면 한 두 작품에서 그런 게 아니고 끊임없이 만나는 평가니까요. 내가 한 가닥만을 쫓아서 그들 기호에 맞는 영화를 만들 수는 없지 않나, 나도 내 기호가 있는데 생각해요. (웃음)

정성일_ 제 나쁜 습관 중의 하나는 남의 집을 방문하면 꼭 서가에 있는 책의 목록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웃음) 감독님 서가에 많은 책이 꽂혀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소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서가에 영화에 관한 책은 단 한 권도 없다는 점입니다.

임권택_ 영화를 하면서 나는 영화를 잘 보지 않아요. 조수시절 정신없이 영화를 봤어요. 쫓아다니면서 영화를 열심히 보고난 이후 두려워진 것은 내가 부지불식간에 그 영화의 잘 된 부분을 모방할 우려가 있다는 거예요. 아예 모르고 살면 죽으나 사나 자기 능력으로 창의적인 발상을 해내서 그 미숙한 것이든 어떤 것이든 해내고 그래야 되는 건데. 그 뒤로부터는 그런 걸 두려워하고 잘 안 보게 되었어요. 아마 그것과 비슷한 이유일 거예요. 영화하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세계가 너무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는 지향하는 폭이 넓었나 몰라도 나이 들면서부터는 그게 점점 좁아졌어요. 내가 대중소설을 손에 닿는 대로 읽은 적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때 얼마나 속독이었냐면 『청춘극장』몇 권을 아침에 빌려서 읽고 책방에 갖다 주면 주인이 다 읽고 갖다 주냐고 물어볼 정도였어요. 내가 18살 그때 집에서 가출해서 부산에서 떠돌던 시절 잘 데가 없어서 노숙을 했어요. 밤에 빈 좌판에 누워서 내가 거기 누운 다른 노동자들한테『수호지』같은 걸 얘기해줘요. 그런데 다 해버리고 밑천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적당히 끊고, 그러면서 밤마다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놓았어요. 그래서 그들이 나를 굉장히 호의적으로 대해줬어요. 그때만 해도 나는 굉장히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어요. 별별 얘기들을 바로 읽어내듯이 촘촘하게 풀어내먹고 그랬어요. 노동판에 들어가면 지게 지는 일꾼들이 무리지어 가야하는 일들이 있어요. 그 열 명 무리 속에 나만 꼬투리로 떨어지곤 했는데도, 내가 해본 적이 없는 일이니까, 그래도 나를 붙여줄 정도였어요. 그때는 대중소설 읽을 것을 복기할 정도로 얘기를 잘 했어요. 그 당시는 시나리오 질이 형편없을 때여서 손으로 봐가면서 찍었을 텐데 뭘로 찍었냐고 어떤 교수가 물어봤어요. 하지만 그걸 그대로 옮겨서 찍은 일은 없었어요. 내가 그때 읽었던 숱한 대중 소설들을 복기할 수 있는 능력은 있었지만, 대신 아주 멀리 돌아서 응용을 했겠죠. 

정성일_ 영화를 찍어오면서 어떤 시점에서 생각을 정리해보기 위해서 영화 개론서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습니까?

임권택_ 읽을 시간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어요. 대신 시나리오 작법은 봤죠.

정성일_ 오랜 시간 전력을 다해서 영화를 찍어온 감독으로써 여러 세대의 비평가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글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영화비평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임권택_ 비평가들은 내가 찍어놓은 영화, 이 안에는 내가 하고 싶은 영화, 내가 영상으로 담아낸 게 있을 텐데 통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편으로 비평가 입장에서는 뭐 그렇게 깊이 보고 천착할 만한 영화도 아닌데 무얼 그렇게 읽어내라고 하나 싶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내가 비평가들에게 무슨 얘기를 해도 소용없는 거요. 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갈 테니까 그러니 누가 묻는다면, 이를테면 사토 다다오 선생이 한국에 영화 비평이 있냐, 묻는다면 더러 있죠, 나로서는 이렇게 애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말은 이런 뜻인 거예요. 

정성일_ 21세기 영화 대중의 새로운 현상은 1인 미디어 시대가 되어서 모든 관객들은 비평의 자리에서 자기의 가치에 따라 자기 블로그에 영화평을 올리고 평점도 줍니다. 비평가들을 특별한 관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대중관객도 특별한 비평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대마다 영화관객들은 계속해서 변했고, 또 그렇게 변할 것입니다. 2012년의 대중들은 어떤 영화 관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임권택_ 나는 영화를 만들면서 흥행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생각을 늘 해요. 그래서 관객의 기호를 어떻게든 알아내고 따라가야지 하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하지만 한 번도 그것을 따라가 본 적이 없어요. 늘 내 멋대로 찍었어요. 

정성일_ 감독님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임권택 x 101」댓글을 통해서 네티즌들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박준휘님(kinop)의 질문입니다. 감독님께서는 <춘향뎐>처럼 전편이 판소리인 영화를 다시 한 번 만들어보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임권택_ 깊이 생각 안 해봤는데 예전에 (전 영상자료원 원장이었던 소설가) 조선희씨가 <춘향뎐>을 본 뒤 우리 판소리 다섯 마당을 영화의 두 시간에 끝내는 게 아니라 다섯 마당 다 찍어보면 어떻겠냐는 소리를 했어요. 생략 전혀 없이. 그런 제의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내가 나이가 너무 들었어요. 나이가 너무 들어 힘들어요. 그건 내가 생각해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지 않나요. 원본이 갖는 맛과 흥이 있어요. 그 자신이 갖는 위대한 것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가 있고, 그 안에 나도 살아서 들어가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정성일_ 이인영님(jyunjyong)의 질문입니다. <장군의 아들>같은 액션 활극을 한 번 더 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임권택_ 글쎄, 그것도 생각해 봐야겠어요. 태흥영화사에서 <장군의 아들>을 찍자는 제안이 처음 왔을 때 일언지하에 거절했어요. 몇 번을 단호하게 거절했는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걸 승낙하면서 내 뼛속에 흐르는 저속한 액션 드라마를 찍는 것에 대한 매력이 끊을 수 없이 흐르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못하겠어요. 그것도 아마 내가 늙어서 그렇습니다.

정성일_ 이선화님(2011corso)의 질문입니다. 영화를 만들면서 주제에 대한 선정과 그 시대의 연관성이 서로 어떤 영향 아래 놓이는지요? 이 두 가지 문제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어떤 감독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반면 어떤 감독은 몹시 민감하게 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임권택_ 내 영화 이력을 보면 60년대에는 저질 액션 영화를 했고 70년대는 반공영화를 했어요. 그러면서 체질적으로 미국 영화 흉내 내기를 내 영화에서 빼내고자 했고 <족보>서부터는 미국영화로부터 덜미 잡힌 것에서 빠져나왔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다음 80년대는 이렇게 <만다라>랄까, 그런 영화 무렵부터 총체적으로 보면 인본(人本)을 다룬 거지요, 사람답게 살아야한다는 주제와 한국전쟁을 겪은 자가 직업으로 영화감독을 가진 다음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의 총체적인 느낌을 담았어요. 90년대에는 <장군의 아들>, <서편제>, <태백산맥>도 있고, 그 전에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소재로 했어요. 그리고 <춘향뎐>으로 넘어가요. 하지만 지금도 시류와 관계가 없는 영화들만 한 게 아니고 지금 현대에 이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맞지 않는 작품일지라도 잘해낸 소재가 판소리에요. 이춘희씨의 ‘이별가’라는 노래가 있어요. <취화선>에서 장승업이 걸어가는 장면, 그 영화를 준비하느라 어수선할 때 차를 몰고 가면서 라디오에서 그 노래를 들었어요. 그래서 방송국에서 그 노래를 가져와라 해서 연출부를 모아놓고 들었어요. 내가 이 노래를 <취화선>에 쓰겠다고 하니 아무도 대답을 안 해요. 한참을 지나더니 연출부 한 명이 나서서 감독님 우리 모두 의견을 모았는데 이 노래를 쓰면 젊은 애들이 다 웃습니다, 라고 강경하게 나왔어요. 하지만 녹음하면서 다시 노래를 넣었죠. 그 장면에서 영상과 붙여놓으니 다들 깜짝 놀라는 거예요. 이춘희씨가 부른 그 민요를 오래되었다고 듣고 있으면 안돼요. 그 일은 현대에 그걸 생생하게 갖고 올 수 있다는 신념이 갖고 온 개가에요. 어떤 시점에 맞춘다기보다는 내가 영화를 만드는 시점이 늘 현대에요. 아주 옛날 거라 해도 그걸 현대에 갖고 와 통용될 수 있도록 만든 놈이 임자죠.

정성일_ 박상미님(iamfiction)의 질문입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감독님 작품에서 ‘그 무엇’을 받아들이기 원하십니까?

임권택_ 작품마다 달라요. 이를테면 <서편제>는 판소리가 우리 마음 안에 생동감 있게 감흥을 지니고 살아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였어요. <개벽>은 한 종교를 통해서 이 민중적 사고를 깨우침을 관객들이 같이 가져주기를 바라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영화냐에 따라서, 소재나 주제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어요.

정성일_ ‘그 무엇’을 영화 찍으러 가기 전에 결정하시나요, 아니면 계속 그걸 찾아가면서 촬영이 모두 끝난 다음 편집을 시작할 즈음 그걸 깨닫게 되는 건가요? 

임권택_ 후자는 너무 늦어요. 작품을 선택할 때 그게 정해져야 하는 거예요. 물론 정해졌다고 해서 구체적으로 생각이 서는 건 아니에요. 끝날 때까지 그 자신의 소신을 영상으로 드러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쥐어짜야 해요. 그렇게 그걸 찾아가는 거지요.

정성일_ 감사합니다. 감독님의 답변이 저에게 앞으로 남은 글을 써나가면서 매번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 더 많이 배울 것입니다. 더 많이 생각할 것입니다. 102번째 영화 촬영현장에서 다음 인터뷰를 계속 하겠습니다. 

인터뷰_2012년 12월 8일 날씨 맑음
정리_ 이지영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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