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꾸눈 박 임권택, 1970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5-05-03조회 13,757
애꾸눈 박 스틸이미지

만주. 滿洲. 오늘날 중국의 동북지방,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내몽고자치구의 동부지역을 포괄해서 가리키는 말.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 두만강 천여 리에 이르는 이북지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네이버 지식대백과).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만주는 한국의 역사와 관련지어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가 걸쳐 있던 지역이었으며 또한 말갈족, 선비족,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 만주족이 공존했던 다양한 민족공동체의 지역이었다. 역사적인 복잡한 배경 속에서 중국은 이 지역을 청나라 태종이 황제로 오르면서 1636년 후금이었던 명칭을 만주로 개칭하였고, 그 후 다시 중화민국으로 바뀌면서 만주를 동삼성(東三省)으로 한 번 더 개칭하였다. 학자에 따라서는 여진족을 만주인이라 부르던 것을 이들이 살고 있는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1677년 이래 이 지역이 청조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封禁)정책에 따라 이주를 금해서 그 후 거의 사람이 살지 않았으나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따라 이 지역으로 남진하고 수많은 중국인들이 기근과 여러 가지 이유로 몰래 이주하는 빈민들이 늘어났고 조선 북방지역의 한인들도 비슷한 이유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주가 사실상 통제 불가능해지자 1870년 봉금령을 풀고 이민실변정책(移民實邊政策)을 실시하였다. 오늘날 연변으로 불리는 북간도 지역에는 주로 함경 남북도 사람들이, 서간도 지역에는 평안 남북도 사람들이 이주해 갔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 청조가 서구 열강의 위협 아래 놓인 가운데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를 놓고 다투었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만주의 남부를 차지하고 북부는 러시아가 지배하였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게 강점되자 이전까지의 이주와 달리 의병활동을 했거나 강점에 불만을 품고 있던 수많은 한인들이 ‘조국 독립’을 위해서 주로 정치적인 이유로 만주로 이주해 갔다. 만주의 조선독립 활동단체는 각자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따른 여러 이념 단체가 공존했는데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군이 서로 다른 조직을 거느리고 활동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붕괴되자 그 틈을 타 군벌세력이 나타나 만주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정권 다툼이 벌어졌고 한편으로는 일본과 러시아가 만주를 놓고 계속 신경전을 벌였다.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이듬해 3월 일본은 괴뢰 만주국을 수립하여 자신의 독점적인 식민지로 만들었다. 1930년대 이후 일본은 조선 인구의 분산정책에 따라 대량으로 일본인들과 함께 조선인을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만주를 향후 대륙침공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났고 그 다음은 다른 역사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그다음 만주웨스턴. 滿洲 西部劇. 만주웨스턴은 한국영화에만 일시적으로 나타난 변종(hybrid) 장르이다. 만주웨스턴이 처음 만들어졌던 1964년 혹은 그 주변부터 (첫 번째 만주웨스턴에 대해서는 서로 이견이 있다) 아마도 이 장르의 마지막 영화라고 할 <쇠사슬을 끊어라>가 만들어진 1972년에 이르기까지는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그저 무국적 서부극이라는 다소 조롱 섞인 표현을 썼다. 이 영화들을 하나의 장르로 개념화한 것은 2009년에 김소영의 논문 ‘지정학적 판타지와 상상의 공동체; 냉전 시기 대륙(만주) 활극영화’에서 이다. 제목에서도 있는 것처럼 만주웨스턴이란 표현 대신 대륙(만주) 활극영화라고 불렀고, 만주 웨스턴이라고 나중에 다시 (재)개념화시켰다. 웨스턴은 미국에서 발명한 이래 전 세계에서 서로 각자의 맥락 안에서 다시 변태하고 환골탈태하면서 각자의 지리적 영토 안에서 각자의 환경으로서의 웨스턴을 만들어냈고 다시 그것을 하위 장르로 한 번 더 (재)발명해나갔다. 미국영화라는 운동, 각자의 나라의 영화라는 리듬. 이를테면 웨스턴의 영향 아래서 만들어낸 사무라이 활극, 혹은 쨘바라(チャンバラ)영화들. 여기서 영향을 받은 홍콩 쇼브라더즈 무협영화, 혹은 무술영화. 만주웨스턴이란 표현은 물론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스파게티 웨스턴에서 재치 있게 용기를 내서 가져온 말이다. 하지만 만주웨스턴이 정말 서부극의 장르 컨벤션에 대한 다소 복잡하게 얽힌 친족 관계 안에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서부극은 영화라는 교환세계 안에서 성립될 수 있는 영웅 신화의 상징적인 교신이 될 수 있을까. 그건 레비-스트로스나 조르주 뒤메질, 혹은 쉬클로프스키가 대답할 차원의 질문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냥 잠시 동안 떠오르는 대로) 존 포드의 서부와 하워드 혹스의 서부, 세실 B 데밀의 서부, 프릿츠 랑의 서부, 킹 비더의 서부, 라울 월쉬의 서부, 윌리엄 와일러의 서부, 버드 보티커의 서부, 윌리엄 A 웰만의 서부, 안소니 만의 서부, 델마 데이비스의 서부, 로버트 알드리치의 서부, 샘 페킨파의 서부만으로도 얼마나 다른 서부가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물론 위대한 누군가를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바쟁이라면 좀 더 연대기적으로 설명했을 것이다. 고전적인 웨스턴. 수퍼 웨스턴, 바로크 웨스턴. 하지만 만주웨스턴이 자기 모델로 삼은 것은 완전히 그 바깥에 놓여있는 셀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서부이다. 이상하게도 만주웨스턴의 연구자들이 과감하다고 할 정도로 무시하고 있는 것은 이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동안 미국 웨스턴에서 뉴시네마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갑자기 미국 웨스턴들은 스스로 신화를 부정하고 남북전쟁의 시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그 영화들의 대부분이 거의 동시대에 수입되었다) 물론 직접적인 설명은 거기 베트남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둘 사이에 놓인 비동시적 동시대성. 그런데 베트남전에 용병으로 참전한 한국에서 만주웨스턴을 만들면서 베트남의 그림자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지 검열의 문제만으로 돌리는 것은 이 개념을 좀 더 히스테릭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닐까.
 
임권택이 만주웨스턴에 한동안 열중한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고작해야 그때 세 편의 만주웨스턴을 찍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세 편의 만주웨스턴을 찍는 동안 28편의 영화를 찍었다) 종종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여기에 포함시키기도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약간 설명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여기서 주인공 남녀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난 다음에도 결국 만주에 가지 못하고 두만강에서 일본군들과 결사적으로 싸우다가 국경선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아니, 차라리 죽음이라기보다는 전멸한다. 갈 수 없는 나라, 만주. 구태여 (만일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그래서 그렇게 해서라도) 신화의 삼각형 안에 넣고 싶다면 ‘미처 익히지 못한 것’으로서의 자리에서 이 영화를 아직 경계선을 넘지 못한 마이너스 쪽에 놓아야 할 것이다. 임권택이 이 시기에 ‘(존재하긴 했지만 동시에 실제로는 불가능한) 상상 속의 국가’ 만주를 무대로 찍은 만주웨스턴은 <황야의 독수리>와 <애꾸눈 박>, 그리고 <대추격>이 전부이다. (그런데 <대추격>은 현재 프린트가 유실되었다) 그런 다음 한참 뒤에, 거의 이십 년이 지난 다음 김두한은 종로통을 떠나 잠시 만주에 머문다. (<장군의 아들 3>) 만주를 여기서 그저 갈 수 없는 가상의 나라, 라는 은유적 설정으로 치환하면 상하이를 무대로 하거나 그곳으로 떠나는 이야기까지 포함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분류한다면 차라리 이 장르는 독립군웨스턴이라고 부르는 편이 훨씬 유용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문제는 좀 복잡해진다. (영화에 한정 지어서 말한다면) 독립군은 외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조선 반도 내에서도 활동했기 때문에 여기에 지정학적 판타지는 거세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르의 핵심은 그 영토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주인공들의 활동에 있는 것일까. 상황의 상태와 활동의 요구. 물론 이 영화들에는 법칙을 따르는 공동체가 있다. 다만 그 안에 선과 악이 각자의 목표를 따르면서 구획 지어져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영화들이 만주라고 설정하고 촬영한 장소들은 지명을 알 수 없는 (남한 안의) 그 어딘가 이다. 정말 내몽고에까지 가서 세트를 세우고 촬영한 만주웨스턴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뿐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과 제목을 제외하면 셀지오 레오네에게서 모델을 가져왔다기보다는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이편과 삼 편에서 빌려온 것처럼 보인다) 만주웨스턴을 찍으면서 만주에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임권택을 포함해서 그들은 모두 한국전쟁 이후에 이십대가 되었다) 그건 보는 쪽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이 장르에서 사실성의 여부를 문제 삼지 않았다. 차라리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사실성을 외면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가본 적이 없는 곳에 대한 향수. 어디든 상관없으니 나가보고 싶은 간절한 바람. 가져본 적이 없는 역사, 그런데 가볼 수도 없는 장소.
 
애꾸눈 박

애꾸눈 박
 
<애꾸눈 박>은 만주 하얼빈을 무대로 시작하고 거기서 끝난다. 영화가 시작하면 큰 글자로 ‘1920년 만주’라고 화면을 채운다.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진 다음, 그러나 아직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십 년 전. 역사에 관련된 그 어떤 사건이나 참조할만한 언급도 등장하지 않지만 하여튼 여기는 만주이다. 구체적인 도시 명을 지적하진 않았지만 대사에는 종종 이 하얼빈 거리에서, 라는 말을 등장인물들이 내뱉곤 하며 주인공 상하이 박과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자 그의 친구이며 처형이 된 한인 건달패의 보스 별명은 하루빈 김이다. (하얼빈은 하루빈으로 발음되기도 한다) 이 도시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한 일본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루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총으로 저격하여 사살한 사건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독립군이 등장하고 그가 운반하려는 금괴 때문에 벌어지는 소동임에도 아무도 안중근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역사 속에 세워진 가상의 지정학적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다음 <애꾸눈 박>은 필사적으로 어떤 역사적 흔적에 대해서도 말끔하게 청소해버렸다.
 
하루빈 김
하루빈 김

상하이 박
상하이 박

마천평
마천평

김승
김승
 
짧지만 다소 뒤섞인 줄거리. 하얼빈의 밤거리를 걸어오는 세 남자의 리드미컬한 발걸음. 그들은 상하이 박을 찾는데 어느 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돈을 내지 않아 주정뱅이 걸인처럼 종업원들에게 매를 맞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가 소문으로 듣던 상하이 박과는 너무 다른데요, 라고 그들의 큰 형에게 묻자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대답한다. “놈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기나 해? 놈은 싸움에 싫증을 느낀 것이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상하이 박이 그들을 피해 거리에 쓰러진다. (flash_back_in) 한때 이 거리의 가장 주먹이 센 자리를 놓고 하루빈 김과 겨루던 상하이 박은 그와 친구를 맺고 난 다음 그의 여동생 향숙을 보자마자 한눈에 사랑에 빠져 청혼을 한다. 하지만 동시에 향숙을 탐하던 악당인 동천의 마천평은 하루빈 김에게 거절을 당하자 앙심을 품고 “나는 원하는 것은 반드시 얻고 마는 놈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향숙은 상하이 박과 결혼을 하지만 오빠와 달리 건달 생활을 청산하고 멀리 떠나 작은 목장을 하면서 살지 않으면 절대로 잠자리를 함께할 수 없다고 칼을 들고 맹세한다. 새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한 상하이 박은 새 삶을 출발하려 하지만 목장을 살 큰돈이 없다. 그때 마침 독립군 자금을 위한 금괴를 운반해달라고 김승이란 인물이 하루빈 김을 찾아온다. 하루빈 김은 자기에게는 조국에 대한 애국심은 없지만 당신의 호기에 반했다, 라면서 그의 제안을 수락한다. 한편 상하이 박을 아편 장사 왕해림이란 자가 찾아와서 모일 모시에 일본군이 금괴를 운반하는데 그걸 훔치면 큰돈을 나눠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상하이 박은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만 일본군 복장을 하고 금괴를 운반하던 하루빈 박을 그의 뛰어난 표창 솜씨로 단번에 쓰러트리고 만다. 음모를 진행하던 마천평은 복면을 쓰고 무리들 사이에 숨어 있다가 하루빈 김이 쓰러지자마자 상하이 박의 한쪽 눈을 찔러 애꾸눈으로 만든다. 상하이 박은 자기가 쓰러트린 사람이 하루빈 김이라는 사실을 알고 친구이자 아내의 오빠를 죽인 죄책감에 술을 마시면서 폐인처럼 지낸다. (flash_back_out) 그런 그를 독립군 김승이 찾아와 마천평의 음모임을 알려준다. 게다가 그의 사랑하는 아내 향숙이 그 집에 잡혀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상하이 박은 혈혈단신으로 찾아가 마천평과 겨뤄 그를 쓰러트리고 김승은 금괴를 숨긴 지도를 찾아내어 함께 그 집을 떠난다.
 
플래시백: 하루빈 김과 상하이 박의 첫대면

플래시백: 하루빈 김과 상하이 박의 첫대면

플래시백: 하루빈 김과 상하이 박의 첫대면

플래시백: 하루빈 김과 상하이 박의 첫대면

플래시백: 하루빈 김과 상하이 박의 첫대면

플래시백: 하루빈 김과 상하이 박의 첫대면
플래시백: 하루빈 김과 상하이 박의 첫대면

 
당신이 눈치가 빠르다면 한눈에 간파해냈을 것이다. <애꾸눈 박>은 그날 밤, 그리고 다음 날 낮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미처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이야기가 시작해서 모두 끝난다. 우리는 기억 속에서가 아니라면 미처 해가 지는 저녁을 보지 못할 것이다. 상영시간 1시간 48분인 영화가 시작하면 삼 년 동안이나 쫓아다녔다는 삼인조를 피해 길거리 허름한 골목 구석에 쓰러지자마자 정신을 잃은 상하이 박이 시간 저편으로 갔다가 되돌아오는데 45분을 보낸다. 오로지 설명적인 기억의 실타래. 여기서 그가 잠시 동안 잃어버렸던 의식은 아무것도 억압에서 그를 풀어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과정은 그에게 이제 남겨진 의무가 무엇이었는지를 일깨우는 각성의 시간일 뿐이다. 기억에 의해 전개되는 장르의 기호들. 하지만 <애꾸눈 박>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영화는 셀지오 레오네가 아니라 장철의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일 것이다. 작품 목록에는 <애꾸눈 박>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그리고 영화에서 마주치는 제목 자막도 그렇게 올라온다)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신문광고에는 <의리의 사나이 애꾸눈 박>으로 되어있다. 잘린 오른 팔과 망막이 찢겨나간 오른쪽 눈. 외팔이와 애꾸눈. 제목 앞에 덧붙여진 부제. ‘의리의 사나이’. 두 영화 사이의 공통점은 단순하게 신체훼손에만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 <애꾸눈 박>의 대부분의 장면은 세트장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이 장면들은 어딘가 쇼브라더즈 영화에서 본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상해 무술영화들의 세트장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보인다. 가장 잘 알려진 예. 장철의 <복수>.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당시 적성국가로 분류되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성 만주에 로케를 갈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 영화는 상해에서 촬영을 할 수 없었다. 주인공들은 시종일관 폐쇄적인 세트 안을 떠돌았고 그들은 거기에 갇힌 것처럼 보였다. <애꾸눈 박>은 심지어 제한적인 세트를 감추기 위해서 길거리에서 촬영할 때 모두 밤거리여야만 했으며, (통행금지가 있었던 그 시절) 거리는 텅 비어서 몹시 스산해 보이기까지 한다. 세트는 대부분 단조롭고 거의 어떤 미술 미장센도 없어서 건물 내부는 황폐하기 짝이 없다. 몇 개의 가구와 허전한 벽으로만 이루어진 공간 안에서 그들은 망국의 시름을 달래고 있는 중이다. 마치 박스 안에 들어온 것만 같은 효과. 게다가 서울 거리에 하얼빈의 건축양식의 건물이 있을 리 없다. 오늘날에도 외곽 지역으로 빠져나가면 마주칠 수 있는 복잡한 골목과 조잡하기 짝이 없는 페인트로 칠해진 철제문들과 시멘트로 바른 벽들. 거기서 우리는 1960년대 말, 혹은 1970년대 초 한국영화 장르의 앙상한 판타지의 전시를 감상하게 된다. <애꾸눈 박>에는 <황야의 독수리>에서 볼 수 있었던 호쾌한 승마 장면도 없고 마치 기병대를 연상시키는 요새도 없다. 상하이박과 마천평 일당이 마지막에 총격전을 벌이긴 하지만 <황야의 결투>나 <서부의 사나이>, 혹은 <리오 브라보>에서 볼 수 있는 장면들과는 거리가 멀다. 웨스턴에서 총은 이 장르의 목록 중의 하나의 모드이자 가장 중요한 모드이다. 그때 총은 단지 기능이 아니라 동시에 매너이다. 우리는 이 장르에서 총이 어떻게 운동하는지 만을 가지고도 이야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애꾸눈 박>에서 총은 어떤 매너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애꾸눈 박>에서 진정한 대결은 총이 아니라 육체적인 결투, 주먹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상하이 박이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자마자 떠오른 첫 번째 기억의 시퀀스일 것이다. 상하이 박이 하루빈 김을 처음 만난 시간. 하루빈 김은 상하이 박에게 말한다. “하루빈 거리에 왕이 둘이다. 왕이 둘일 수는 없으니 하나가 죽어야지” 아마도 상하이 박의 가장 행복한 시간.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지나치게 마셔버린 술과 그를 뒤쫓는 청부살인업자들로부터 가까스로 도망쳐버렸다는 안도감이 그를 데려다준 시간. 몸이 거의 견디지 못할 때 그가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기억이 인도해 준 시간 속의 첫 번째 장소는 모래가 한없이 펼쳐진 강가 그 어딘가, 이다. 거기서 하루빈 김은 한 사람의 무덤을 판 다음 둘 중 하나가 여기에 묻힐 때까지 겨루자고 제안한다. 오직 주먹만으로,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이 우정을 나누는 방식. 별다른 대사도 없는 이 장면을 임권택을 할 수 있는 한 길게 찍는다. 여러 개의 쇼트, 하나의 이미지. 이상하리만큼 화창한 날씨. 내내 세트 안에서만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마치 이 장면은 꿈속의 비현실적인 순간처럼 보인다. 그리고 나면 상하이 박은 이제 추락의 계단을 차례로 밟으면서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남은 질문은 상하이 박이 어떻게 다시 원래의 자리로 비상할 것이냐, 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활의 순간. 이때 독립군 김승은 사건 안에서 매우 이상한 역할을 한다. 하나의 가정. 만일 김승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물론 상하이 박은 함정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며, 하루빈 김은 이 위험한 임무를 떠안지 않았을 것이며, 그래서 상하이 박이 그를 오해로 죽이지 않았을 것이며, 게다가 ‘애꾸눈’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폐인 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 아마도 이 모든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이상한 것은 오직 김승만이 여기가 지금 1920년 만주를 증명하는 유일한 지표라는 사실이다. 만일 그가 사라진다면 갑자기 <애꾸눈 박>은 만주웨스턴과 다찌마와리 액션활극 사이에서 거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 왜 이 영화가 만주웨스턴인 것이 그렇게 중요해진 것일까. 즉각적인 대답은 1970년을 무대로 하여 총을 사용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현행법과 치안 상황 때문에) 영화 안에서 설득하기 몹시 힘들어진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시대와 지정학적 위상. 상상의 무대. 그렇다면 김승은 이야기 안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일까. 그가 단지 순수한 겉치레, 그래서 거의 공허하게 텅 빈 기표의 상태로 머물면서 시대적 좌표 역할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김승은 이야기 안에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발명하고 있다.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볼 것. 매번 김승이 등장할 때마다 이야기는 갑자기 인과관계를 벗어나서 다른 방향으로 벗어난다. 매번의 이탈. 그가 이야기에 접근할 때마다 이야기는 마치 그 너머의 이야기에로 이행하는 것만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이때 우리는 이 문제를 반대로 질문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러니까 매번 이야기가 잘못 진행되고 있을 때마다 김승이 나타나 이야기를 교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이렇게 설명해보자. 다찌마와리 액션활극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 이야기를 다시 1920년 만주에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매번 독립군 김승의 개입이 요구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없다면 그들은 1970년 명동의 건달들, 부산 남포동의 건달들, 목포 항구의 건달들과 별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 종종 자기 시대를 잊어버리는 것만 같은 인물들에게 매번 던져진 장소를 일깨우기 위해서 그들에게 임무를 부여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 역할을 하는 인물이 독립군이라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적절한가. 물론 그때마다 그들은 대가라는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애꾸눈 박>의 거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상하이 박에게 부여하는 마지막 시련은 지나치게 가혹하고 그러면서도 이상한 유머가 있다.
 
등 뒤의 김승
등 뒤의 김승
 
약간의 디테일을 여기 더해야 할 것 같다. 상하이 박이 향숙을 구하기 위해 마천평의 집으로 쳐들어왔을 때 독립군 김승은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물론 상하이 박이 복수를 하는데 별 관심이 없다. 오로지 그의 목표는 독립군 자금을 위한 금괴를 되찾는 데 있다. 알겠다. 그런데 상하이 박이 거의 복수에 성공하는 순간 김승은 그의 등 뒤에 나타나 총을 빼앗으며 마천평의 편을 든다. (물론 그런 다음 금괴의 지도를 입수하자 다시 상하이 박의 편에 선다) 내 관심은 김승이 보이는 이중적인 태도에 있지 않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여기서 보여주는 일시적인 상실과 궁극적인 승리 사이에 놓인 잔인함은 단지 더 큰 기쁨을 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사이를 매개하는 추락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불길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애꾸눈 박>은 이 장면의 순간을 단지 시련이라고 정식화시키기에는 과도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오랫동안 멈춰 서서 지켜본다. 여기서 방점은 폭력이 아니라 고통에 있다. 이때 임권택은 언제나 먼저 기회를 준다. 그게 너무 손쉽게 얻어져서 마치 보상을 받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하지만 그런 다음 예기치 않은 방법을 동원해서 다시 그 기회를 뺏어간다. 이때의 상실은 단지 주인공에게 깊은 실망감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그걸 보고 있는 쪽도 그 쾌감을 빼앗아가 버린 다음 냉담한 태도를 취하는 영화 앞에서 순간적인 자신의 기쁨을 부정당한 것에 대해 약간 어리둥절해진다. 임권택은 그의 영화 전체에서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동일한 방식의 미끼를 사용한다.
 
“내 눈을 가려라. 내가 아무리 권총의 명수라지만 눈을 가리고는 별 수 없다는 걸 알테지.”

“내 눈을 가려라. 내가 아무리 권총의 명수라지만 눈을 가리고는 별 수 없다는 걸 알테지.”

“내 눈을 가려라. 내가 아무리 권총의 명수라지만 눈을 가리고는 별 수 없다는 걸 알테지.”

“내 눈을 가려라. 내가 아무리 권총의 명수라지만 눈을 가리고는 별 수 없다는 걸 알테지.”
“내 눈을 가려라. 내가 아무리 권총의 명수라지만 눈을 가리고는 별 수 없다는 걸 알테지.”

“어떠냐 몸을 허락할테냐 놈이 죽는 걸 볼테냐.”
“어떠냐 몸을 허락할테냐 놈이 죽는 걸 볼테냐.”

“허락하겠어요.”

“허락하겠어요.”

“허락하겠어요.”

“허락하겠어요.”

“허락하겠어요.”

“허락하겠어요.”
“허락하겠어요.”

 
여기서, 바로 여기서 아마도 임권택의 영화 중에서 가장 참혹한 시퀀스가 기다리고 있다. 약간의 부연설명. 영화에는 다른 예술에서 보기 힘들만큼 종종 고문에 심취해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어떤 시퀀스는 그 전체를 고문 장치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영화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고문을 오랜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한 오랜 시간 동안, 전시하면서 즐긴다. 그걸 보는 쪽도 동참한다고 간단하게 대답하긴 힘들다. 그렇다고 그걸 견뎌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고통과 즐거움 사이에서 구경이라는 다소 복잡한 자리가 문제가 된다. 영화에서 고문은 이차 세계대전의 발명이다. 그 이전에는 고문을 영화는 외설적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지나치게 실재에 다가간다고 여겼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이 시작된 <무방비도시>에서 로셀리니가 그렇게 공들여 고문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셀지오 레오네는 자신의 웨스턴에서 예외 없이 고문 장면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런데 존 포드의 웨스턴에서는 이따금 고문의 결과를 전시하긴 하지만 그 과정을 본 기억이 없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고문은 대부분 로마를 무대로 한 사극에서 벌어진다. 미국이 포함되지 않은 역사의 산물. 약간 산만하게 이야기하자면 일본영화에서는 닛카츠 고문 장르영화가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거의 경이에 가까운 본디지 기술. 한국영화사에서 기이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이상할 정도로 만주 웨스턴에는 고문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고문은 웨스턴 장르의 컨벤션이 아니다. 단지 그것을 육체의 시련이라거나 영웅의 신화적 부활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꺼림칙하게도 이야기의 요구에 따라서라기보다는 그 묘사에 심취한 것처럼 보일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혹은 21세기 영화에서 다큐멘터리들은 갑자기 고문에 끌리기 시작했다. 리티 판의 < S 21; 살인기계 >와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액트 오브 킬링>의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고문의 서로 다른 재연과 재현의 간극. 나는 서투르게 여기서 사드 혹은 마조흐를 끌어들이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라면 훨씬 잘 (어쩌면 가장 잘) 해낼 것이다. 블랑쇼와 푸코는 사드에게 이끌렸고 들뢰즈와 바르뜨는 마조흐에 더 매혹되었다. 나는 다만 한 가지 설명만을 빌려오고 싶다. (몹시 위험한 표현이지만) 고문은 리비도의 경제학과 아주 가깝게 있다는 것이다. 

먼저 고문 장치의 시퀀스에 관한 묘사. 잔인한 묘사. 마천평은 부하들에게 향숙을 끌고 오라고 명령한다. 그런 다음 네가 사랑하는 남자, 나를 거부하고 기다리고 있는 남자, 그래서 칼을 들고 “절개를 지키면서” 목숨을 기다리는 그 남자를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향숙이 끌려간 지하의 고문실에는 상하이 박에 붙잡혀 있다. 이때 상하이 박은 남은 눈마저 훼손당해서 오른 쪽 눈에서 흐르는 피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양쪽 팔을 밧줄로 묶어 마치 만세를 부르는 듯한 자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누구라도 이 전시 앞에서 얼어붙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학대와 고통으로 육체를 매다는 것. 거기 매달려있는 고기와 뼈와도 같은 상하이 박. 마천평은 향숙을 구석으로 몰아세워 놓은 다음 부하들의 호위 아래 호기롭게 의자에 앉는다. 상하이 박은 앞이 보이지 않긴 하지만 목소리만을 듣고도 지금 이 자리에 온 여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마천평도 이 상황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황을 즐기고 싶어 한다. 마천평은 마치 상하이 박의 처지를 조롱하기라도 하듯이, 그를 흉내 내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두 눈을 가리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한다. 그런 다음 스스로에게 천하의 명사수인 나도 두 눈을 가린다면 생명을 장담할 수 없지, 라고 말하고는 상하이 박을 향해서 총을 쏜다. 처음 한 발은 왼쪽 허벅지에 맞고, 두 번째는 옆구리에 맞고, 세 번째는 오른쪽 어깨를 관통한다. 흐르는 피. 가까스로 참는 신음소리. 여기에는 잔인한 박해와 어수선한 감정이 피와 리비도 사이에 뒤범벅이 되어간다. 향숙은 마천평의 눈먼 사격으로부터 사랑하는 남편 상하이 박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옷을 벗을 테니 제발 멈춰달라고 간청한다. 자발적인 항복. 마천평이 얻고 싶어 하는 유일한 승리. 그제서야 마천평은 총질을 멈추고 자기 눈을 가린 수건을 풀게 한 다음 향숙에게 옷을 하나씩 벗으라고 명령한다. 이제 마천평이 향숙에게 얻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사랑을 포기할 때 거기서 사드적인 냉혹함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이때 이상한 것은 그의 부하들이 주변에 늘어 있는데도 그들을 물리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천평은 향숙에게 모욕을 안겨주는 광경을 자기의 부하들 앞에서 상연하는 무대처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마천평은 앞을 보지 못하는 상하이 박을 위해서 향숙이 하나씩 옷을 벗는 모습을 마치 중계방송 하듯이 상세하게 설명한다. 
 





 
“향숙이가 옷을 벗는다. 나와의 향락을 위해서 옷을 벗고 있는 거야. 알몸이 드러나고 있구나. 상하이 박. 마지막 옷이 벗겨져 간다. 마지막 옷이 벗겨져 가고 있어. 저 아름다운 육체. 저 대리석같이 매끄러운 알몸이 드러나고 있구나. 저 육체” 

이 대사를 하는 동안 향숙은 하나씩 옷을 벗는다. 물론 이 장면에서 우리 시대의 관객들은 1970년의 단조롭고 갑자기 수줍어진 검열(과 대중들의 도덕적 기준)을 계산에 포함시켜야 한다. 검열과 도덕적 기준이 연대기적으로 점점 완화되거나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다. 1960년대 한국영화를 보면 명백히 십 년 후의 영화들보다 더 관대하고 노골적이며 개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종종 훨씬 음란하다. 우리는 영화에서 고문 장치에 동시대의 검열과 도덕이 포함되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에 더해 기술적인 약점 때문에 이 잔인한 가학성에 쉽게 몰입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남정임은 이 장면에서 옷을 벗는 연기를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으며 향숙이 옷을 벗는 장면은 그저 얼핏 보아도 대역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옷을 벗는 그녀를 카메라가 쳐다볼 때마다 화면이 흐릿해지는 것(out_of_focus)은 상하이 박의 눈이 훼손을 당한 (미학적인) 이유 때문인지(point_of_view_shot) 아니면 그녀가 남정임이라는 사실을 (실용적인 이유로) 하여튼 눈속임하기 위해서인지 설명하기 난처해진다. 하지만 이 장면의 장치가 만들어내는 효과마저 감추지는 못한다. 고문 장치의 시퀀스가 작동시키는 핵심은 그 장면이 얼마나 난잡하고 음란한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조잡한 포르노에서는 왜 그 장치가 거의 멈추거나 작동하지 않는가) 그 묘사를 성립시키는 지식의 기술에 놓여있는 것이다. 왜 욕망은 욕망 그 자체로 작동하지 않는가. 왜 쾌락은 쾌락 그 자체로 작동하지 않는가. 어디서 고통이 전이되기 시작하는가. 거기에 놓인 관계 사이의 권력은 이 모든 자리를 얼마나 일시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드는가.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효율성은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그 안에서 육체의 주권은 어떻게 양도되는가. 그 양도가 어떤 기쁨을 분배하는가, 혹은 독점하는가. 

약간의 배경. 장치(le dispositif)라는 말은 구조주의자들 사이에서 서로 겹치면서 또한 이질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다소 조심스럽다. (그리고 이 말은 메츠를 경유하여 장-루이 보드리와 장-루이 꼬몰리 사이에서 l’appareil와 다시 구분을 해서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논의는 우리의 설명과 다소 멀리 있다) 알튀세와 푸코, 들뢰즈, 리오타르, 보들리야르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 말을 사용하였다. 조르조 아감벤은 푸코가 이 말에 진정하고 고유한 의미를 부여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정의에 근접한 적이 있다면서 약간의 인용을 한다. “(푸코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감벤의 인용) 저는 장치가 본성상 전략적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만, 이것에 의해 전개되는 것은 장치가 힘 관계에 대한 합리적이고 계획적인 개입이라는 것입니다. (중략) 지식의 여러 유형을 지탱하고, 또 그것에 의해 지탱하는 힘 관계들의 전략들, 그것이 장치입니다” 나는 아감벤처럼 장치라는 말을 따라서 기독교 담론과 라틴어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여력이 없다. 다만 이 말을 빌려오고 싶다. 장치는 언제나 결합을 통해서 작동하며 그러므로 여기에는 몇 가지 그림이 항상 서로 겹쳐져 놓여있기 때문에 하나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여러 가지의 서로 다른 관계들 사이의 조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만일 이 시퀀스가 고문 장치라면 우리는 그 효과에 단순하게 개념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그것을 구성하는 방식들의 중층구조를 하나씩 잘라내서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이 시퀀스에는 몇 개의 장면이 겹쳐져 놓여있다. 여기서 무엇이 당신을 가장 먼저 불편하게 만드는지를 질문해보고 싶다. 첫째, 사랑하는 아내가 발가벗기고 있는데도 속수무책으로 사지가 묶여있는 상하이 박. 둘째, 게다가 그걸 볼 수도 없게 양쪽 눈 모두가 훼손된 상하이 박. 그 둘 위계질서를 세운다면 어느 쪽이 당신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가. 셋째, 그런 상하이 박에게 옷을 벗는 향숙의 모습을 하나씩 알려주는 마천평. 넷째, 그런 마천평의 목소리를 피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들어야 하는 상하이 박. 만일 상하이 박이 다른 방에 있었다면 동일한 상황이 더 불편했을까. 다섯째, 치욕스럽게도 사랑하는 남편을 앞에 두고 그녀의 오빠를 함정에 빠트리고 게다가 사랑하는 남편의 두 눈을 멀게 만든 마천평의 요구에 자발적으로 응할 수밖에 없는 향숙. 여섯째, 게다가 그걸 바라보고 있는 마천평의 부하들의 시선마저도 견뎌야 하는 향숙. 말하자면 세 개의 시선. 불구의 시선. 그 시선을 대리 보충하는 목소리의 시선. 그 곁에서 그걸 구경하는 시선. 나는 여기에 세 가지를 더하고 싶다. 아직도 남은 게 있나요. 물론이죠. 일곱째, 끝내 향숙의 사랑을 얻지 못해서 이런 고문의 방식으로 그녀의 육체를 구걸해야 하는 마천평. 여덟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향숙‘으로부터’ 우위에 서 있는 상하이 박에 대한 마천평. 여기서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는 세 번째와 완전히 반대의 자리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아홉째, 그리고 이런 장면을 참고 옆에 서서 지켜보고 서 있어야 하는 부하들. 당신은 마지막 지적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들은 이 장면이 연출되는 순간의 관객이자 덤으로 우연히 참관하게 된 구경꾼들이 아닌가요. 물론이죠. 하지만 그들이 반드시, 라고 할 만큼 정말 즐기고 있었던 것일까. 마지막 순간, 그러니까 향숙이 알몸을 가리고 있는 마지막 옷을 벗으려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김승이 보상금을 요구한다는 부하의 전갈이 도착한다. 제시간에 도착한 메시지. 그러자 마천평은 고문을 중단하고 그를 만나러 나간다. 이때 별다른 지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도 마천평이 나가자마자 그의 부하들은 발가벗은 향숙에게 마치 그런 당신을 보고 있는 게 불편합니다, 라고 말하듯이 옷을 건네준다. 지금 여기는 지하실이고, 이 영화 속의 가장 나쁜 악당의 소굴이며, 이들은 그 악당의 부하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예의 바른 태도는 몹시 기묘하게 보인다. 좀 더 실용적으로 설명하면 만일 그 제스처를 (정확하게 뒤에 서 있는 여러 명의 출연자들 중 그 배우에게 연출의 쪽에서) 지시하지 않았다면 촬영이 끝난 것도 아닌데 그런 동작을 취할 리가 없다. 이건 동선의 문제이며 이 시퀀스의 고문 장치의 일부이다.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여기에는 향숙의 시선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하나씩 옷을 벗는 그녀는 마천평(과 그의 부하들)의 시선과 목소리의 대상이 되고,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하이 박의 거의 희미해서 보이지 않는 남은 한쪽 눈의 시선의 대상이자 마천평의 목소리를 경유하여 청각적인 대상이 되지만 향숙 자신은 마치 묘사의 대상으로 던져진 모델처럼 어떤 반응도 없이 차분하게 옷을 하나씩 벗어나간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추가할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향숙이 발가벗기고 있는 동안 마천평의 부하들의 시선도 완전히 제거되어 있다. 물론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영화이론의 시선과 동일시에 관한 (따분할 뿐만 아니라 기계적인) 이론이 준비되어 있긴 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없다. 고문 장치로서 이 시퀀스가 작동하기 시작할 때 수많은 시선이 교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영화의 문법 안에서 향숙이 옷을 벗는 과정을 보는 시선은 단 하나, 마천평의 시선뿐이다. 심지어 이 시선의 수사학에는 미처 생각지 못하게도 우리들의 시선마저 차단당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상황과 시선 사이의 불일치가 있다. 공개적인 일종의 스트립쇼. 하지만 불가능한 시선, 사라진 시선, 외면한 시선 사이에서 가능한 유일한 시선. 그런데 우리들마저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오직 마천평만이 시선을 독점하게 된다. 그런 다음 마천평은 자신이 본 지식을 청각 기호로서의 언어로 바꾼다.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이때 마천평은 묶여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상하이 박을 괴롭히려는 것이 원래의 그의 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 과정 자체가 자기 자신에게도 고통스러운 자기 경멸의 과정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마천평은 향숙에게 청혼을 했었고, 그가 상하이 박에게 원한을 품게 된 것은 그녀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만일 마천평이 향숙에게 아무 감정이 없으며, 오직 상하이 박의 아내이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괴롭히는 것이라면, 그는 구태여 그럴 이유가 없다. 그는 즉각적으로 폭력을 동원했을 것이며 상하이 박의 다른 한쪽 눈을 멀게 만드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향숙에게 폭력적인 성행위를 시도하고 그걸 바라보게 만드는 편이 훨씬 손쉬울 것이다. 지금 마천평은 구태여 일종의 상연의 형식을 빌려 연출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때 질문은 이 연출의 가설을 뒤흔든다. 그런데 여기서 마천평의 진정한 목표는 상하이 박이 아니라 향숙을 향한 것이라고 말해야 옳은 것이 아닐까. 이 고문 장치 시퀀스의 괴상한 점은 가장 외곽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향숙이 사실은 이 모든 장치의 고정점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마천평이 상하이 박을 괴롭히기 위해 향숙이 옷을 벗는 과정을 서술하는 것은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내면의 욕망을 고백하는 형식을 취하기 시작한다. 아무도 그에게 그걸 요구한 적이 없으며, 게다가 그는 지금 두 사람, 상하이 박과 향숙의 생명에 대한 권리마저 쥐고 있다. 그런데도 정작 그가 하고 있는 행위는 그 세 명 중에서 가장 열등하게도 상하이 박과 향숙을 앞에 두고 자기 내면을 마치 자백하듯 설명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왜 이런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여기 이 장면의 괴이한 점이 있다. 원래 고백은 고문의 결과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작 고문의 가해자가 그 역할을 떠맡고 나선다. 가장 큰 오해는 자기를 고백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에서 자기 권력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고문 장치가 재현하는 외양에 속으면 안된다. 이 장면을 욕망에 관한 교환의 경제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좀 더 자명해진다. 여기서 마천평은 사실상 상하이 박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구태여 있다면 그가 얼마나 심정적으로 괴로운지를 표현해달라는 것이 그 전부이다. 그러므로 그가 상하이 박의 또 다른 눈마저 훼손시킨 것도 그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장면에 대한 이중의 결함을 안겨주기 위한 것이 고작 전부이다. 사지를 묶어놓는 것, 그리고 앞을 보지 못하는 것. 종종 영화에서 고문 장치들의 시퀀스는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사용된다. 거기 숨겨져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그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전술들. 혹은 함정들, 거짓말과 진실 사이의 교묘한 뒤섞임. 그 안에서 가해지는 고문. 그것을 견뎌내야 하는 육체. 하지만 육체 안의 신경조직들의 한계. 종종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는 고문의 강도. 그런데 그 고문은 그 진실을 위해서 효과적일까. 그때 이 모든 성가신 노력을 조금도 마다치 않고 기울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그 안에 진실을 끌어내는 과정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비밀이 없다. 자, 당신이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논하는 것은 고문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고문 장치의 퍼포먼스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크리스 버든
크리스 버든
 
다소 잔인하긴 하지만 이 고문 장면을 하나의 고문 장치 시퀀스로서 마치 인스톨레이션을 감상하듯이 바라본다고 가정해보자. 이미 우리는 수많은 고문 퍼포먼스를 알고 있다. 1963년 캐롤리 슈네만의 <아이 바디Eye Body>. 1965년 3월 21일 오노 요코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관객들에게 자기 옷을 잘라내라고 요구했다. 1974년 크리스 버든은 급기야 폭스바겐 차 위에 누워서 예수처럼 자기 손에 못을 박고 달리게 한 ‘악명 높은’ 퍼포먼스 <못 박힌Trans-fixed>을 실행했다. 나는 <애꾸눈 박>이 이런 퍼포먼스들과 어떤 직접적인 유대관계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민하고 때로 유행에 민감한)주변의 영화들은 작업들에 영향을 받았고, 그걸 본 관객들은 간접적으로 이 퍼포먼스를 경험하기 시작했으며, 거기서 다시 영화는 그순간을 시스템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런 다음 반복해서 만들어지는 장면들 사이의 변주. 우리는 장치가 네트워크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임권택은 그 누군가의 고문 장치를 보면서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고통과 이상한 쾌락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충분히 생략하거나 좀더 간소하게 만들거나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장면을 거의 장식 과잉이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킬 만큼 하나의 시퀀스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백히 여기에는 금기에 관한 심미적인 관점이 있다. 이 장면에서 마천평은 우리와 정확하게 동일한 태도를 (매우 역겹긴 하지만) 취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시간을 들여가며, 공을 들여서, 자신의 감흥을 묘사하면서, 그렇게 감상하고 있는 중이다. 그때 향숙의 제스처는 마치 미술품처럼 자기의 행위를 퍼포먼스 하는 것처럼 보인다. 향숙 자신이 몹시 굴욕적인 이 상황을 감내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건 전적으로 우리들의 (도덕적) 상상이다. 베일에 가려버린 반응. 향숙의 쪽에서는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러나 임권택은 그런 다음 향숙의 어떤 반응도 찍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묵묵하게, 어떤 저항도 없이, 그저 명령이 내려지자마자, 그래서 자신이 그걸 하겠다고 한 다음, 어떤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옷을 벗어나간다. 물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마천평에게 더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은 향숙이 옷을 하나 벗을 때마다 저항하는 것이며, 그럴 때마다 상하이 박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향숙은 더 큰마음의 죄의식을 갖고 속죄하듯이 명령에 굴복하고 옷을 벗는 굴욕을 감수하는 것이다. 고문 장치의 확대재생산. 

하지만 임권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때 가장 바보 같은 반문은 이유를 묻는 것이다. 우리는 그 효과에로 질문을 돌려야 한다. 임권택은 고문 장치를 사용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영화들처럼 그걸 확장하는 대신 여기서는 그걸 축소하는 쪽을 택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다른 판본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향숙이 이 과정에서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상하이 박의 무능력에 실망하고 갑자기 마천평의 편에 서서 함께 상하이 박을 조롱하며 마치 그에게 전시하듯이 (마천평의 표현을 빌리면) “향락을 즐기는 것”이다. 그런 다음 마천평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상하이 박을 처치하고 마천평과 향숙 둘이서 목장을 사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물론 여기 외전이 있을 수 있다. 그러자 마천평이 흥미를 잃고 둘 모두를 처치한 다음 그 장소를 떠나는 것이다) 다른 또 하나의 판본은 자기에게 부여된 치욕을 참지 못하고 향숙이 (방법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스트립을 중단하고 자살해버리는 것이다. 마지막 판본은 반대로 상하이 박이 자살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임권택은 이 세 가지 가능성을 갑자기 중단시키고 마천평을 김승에게로 보낸다. 만일 김승의 요구가 없었다면 우리는 고문 장치의 끝이 어떻게 종결되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마찬평 자신이 멈추지 않는 한 이 고문 장치는 중단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판본은 단지 상하이 박에게 절망적이라기보다는 영화를 보는 우리들을 당황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면에서 고문 장치가 작동한 것은 향숙의 불복종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하이 박과 마천평 사이를 오가면서 고통과 쾌락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향숙이 자기의 태도를 바꾸면 고문 장치에 남겨진 것은 상하이 박과 우리들뿐이며, 그런 다음 수순은 이제 더 이상 고문을 할 필요가 없어진 상하이 박을 괄호 치자 우리만 남게 된다. 우리만 남는다고요? 우리가 아니라면 누가 또 괴로워하겠는가. 그때 고문 장치는 영화 안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장치로 남아서 계속해서, 심지어 영화가 끝난 다음에조차, 멈추지 않고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두 번째 판본은 고문 장치를 멈추게는 하겠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마천평에게 상하이 박은 오로지 향숙 때문에 필요했기 때문에 그녀가 괄호를 치는 순간 첫 번째 판본과 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은 효과가 다르다. 적어도 우리에게 향숙은 상하이 박에 대한 사랑을 지킨 것이며 동시에 그녀 자신의 (마천평의 표현을 빌리면) “절개를 지킨” 것이다. 그때 고문 장치는 마천평의 기대와 달리 향숙과 상하이 박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활용된 것이다. 물론 복수가 남은 김승에게 떠넘겨지는 것이 불만스럽긴 하지만 이 판본은 고전적인 신파극의 감정에 충실해지기는 할 것이다. 세 번째는 단순히 두 번째 판본의 순서를 바꾼 반복이 아니다. 상하이 박이 자살을 선택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결정이 향숙에게 넘겨진다. 그녀는 이제 상하이 박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실상 “절개를 지켜야 할” 알리바이가 사라진다. 만일 지켜야 한다면 그건 일종의 의무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향숙은 그 의무감으로 뒤따라 자살을 할 것인지, 아니면 현실적인 선택에 따라 잠시 동안 상하이 박을 애도한 다음 마음을 바꿔 이제 마천평과 “향락을 즐길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상하이 박은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그 결정을 고스란히 향숙에게 떠넘기는 방식으로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를 주고 있다. 의무라는 자유와 의무 안의 자유 사이의 선택. 이때 이 둘 사이에 놓인 비대칭. 

세 가지 선택이 놓여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고문 장치를 멈춰 세울 때 내가 보는 것은 임권택이 이 장치를 다루는 기술이다. 요점은 명확하다. 거기서 한발만 더 나아가면 향숙의 마지막 옷이 벗겨진다. 임권택은 향숙이 도덕과 윤리 사이의 갈림길에 서는 순간에 갑자기 고문 장치를 멈춰 세운다. 말하자면 심미적 차원으로서의 고문 장치. 그러므로 고통(과 쾌락)은 그것을 즐기는 자리(의 끝)에서 멈춘다. 만일 그걸 더 밀고 나아가면 임권택은 단지 등장인물들의 곤궁이 아니라 고문 장치에 내재되어 있는 반격을 감당해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이 문제를 고문 장치에서 작동하는 두 남자 사이의 문제로 축소했다고 설명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반대로 임권택은 향숙을 설명할 수 없는 존재로 데려다 놓은 다음 필사적으로 그녀가 이 장치 안에서 작동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중인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서 고문 장치는 한편으로는 오작동을 일으키고 (마천평의 고백) 다른 한편으로는 도중에 중단된다. 혹은 향숙의 마지막 옷을 벗기는 데 실패한다. 고문 장치는 물론 권력의 상황에서 육체를 다루는 기술에 관한 심미적 수사학의 시선이다. 그러나 고문 장치에 이르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개입을 시작할 때 그걸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멈추느냐라는 문제가 다시 중심으로 다가서게 될 것이다. 그때 임권택은 차라리 장치를 중단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도덕과 윤리 사이의 갈림길로 들어서는 것을 막고 있다.

그가 이 중단을 논리적이거나 혹은 분석을 바탕으로 해서 결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문제가 몹시 불편하다는 것만은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애꾸눈 박>이 몹시 하찮게 보이는 만주웨스턴 영화의 한 편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이 장면에 이르렀을 때는 자신을 끌고 가고 있는 이 장치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문득 필사적이 된다, 는 것이 신기해 보일 정도이다. 그런 다음, 적어도 여기서 그런 다음, 임권택은 자기가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그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 과정은 몹시 느리고 때로 우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임권택은 계속해서 선택에 관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글은 임권택의 선택에 관한 기술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계속) 



1970년 100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신창흥업
각본  유동훈
촬영  서정민
조명  서병수
편집  김창순
음악  정윤주

박노식  상하이 박
남정임  김향숙
최봉     김승
독고성  마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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