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르고 붙이기(cut and paste)는 예술 분야에서 전통적인 제작 방식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오늘날 사회, 문화, 경제 전 분야에서 나타나는 우리 삶의 주요 양식이기도 하다. 영화의 몽타주, 예술의 콜라주, 대중문화의 리믹스는 모두 자르고 붙이기의 전략을 따라 하나의 대상을 본래의 맥락으로부터 떨어뜨리고 그것을 새로운 자리에 위치시켜 의미의 전복을 꾀한다. 한편, 자르고 붙이기는 동시대의 삶의 양식이기도 하다. 가속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공간은 잘게 쪼개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의 신체 또한 하나의 사물처럼 조각난다. 예를 들어, 노동 현장은 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파트타임 노동자로 채워지고, 주거 공간은 대부분 성냥갑처럼 만들어진 구조물을 켜켜이 쌓아 올려 완성된다. 만약 우리 삶이 자르고 붙이기를 하나의 양식으로 채택하여 따르고 있다면, 그런 삶은 분명 누더기처럼 기운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그런 불완전한 것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김효준 감독의 <
자르고 붙이기>는 경제적으로 파산의 상태에 이른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린다. 이 작품의 소재는 1990년대 후반의 IMF 시기와 2000년대 후반의 금융위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빚의 굴레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할 때 자주 쓰이던 신용불량자, 카드빚, 고시원과 같은 것들이다. 정호는 수산 시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는 고시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정호와 그의 어머니는 카드빚을 두고 심한 갈등을 빚는다. 어머니는 아들 몰래 신용카드를 발급받고 그것으로 빚을 갚으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정호는 빛 한 줄기 새어 들어오지 않지만 모든 소리는 새어 나가는 고시원 방에서 어머니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낸다. 정호와 어머니의 갈등은 우발적인 사고에 의한 비극으로 이어진다. 정호는 어머니가 숨기고 있던 카드를 빼앗아 그것을 가위로 자르려고 하고, 어머니는 그런 정호를 말리다가 손가락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신용카드를 놓고 분열된 모자의 관계는 두 동강이 난 신용카드와 상처 입은 어머니의 손가락을 통해서 형상화된다. 대다수의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이 스스로 비극을 초래하는 것처럼, 주인공 정호의 우발적인 행동이 그의 비극을 낳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크게 ‘자르기’에 해당하는 부분과 ‘붙이기’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구분된다. 신용카드를 자르다가 어머니의 손가락을 다치게 한 정호의 이야기가 있다면 그런 정호의 행동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정호의 어머니가 손가락을 다쳐 응급실에서 간단한 봉합 수술을 받는 이야기와 어머니의 치료비를 내기 위해 자신이 가위로 잘랐던 신용카드를 접착용 셀로판테이프로 붙이는 이야기는 구조적으로 대구를 이룬다. 잘린 사물이 다시 붙고, 잘린 신체가 다시 붙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전반부의 위기는 일시적으로 해소된다. 흥미로운 것은 ‘붙이기’에 해당하는 이 영화 후반부의 내용이 갈등과 위기의 완벽한 해소가 아닌 비극의 심화를 의미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손가락은 수술을 끝낸 것이지 치료가 끝난 것이 아니며, 셀로판테이프로 붙인 신용카드는 정호가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용카드라는 소재를 중심에 놓고 보자면, 정호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채무자의 신세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부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감행했던 행동이 그를 다시 부채의 늪으로 빠뜨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르고 붙이기>는 빚이 또 다른 빚을 낳고, 비극이 또 다른 비극을 낳는 아이러니를 통해서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호의 행동, 즉 그가 무언가를 자르고 붙이기를 행할 때 그의 손은 두려움에 떨고 있음에 주목하자. 그의 손은 가위를 들고 신용카드를 자를 때 또는 셀로판테이프로 잘린 카드를 다시 붙일 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린다. 물론 각각의 상황과 의미는 사뭇 다르다. 신용카드를 자를 때 정호는 분노, 짜증, 흥분 속에서 반대로 신용카드를 붙일 때 정호는 불안, 초조, 긴장 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 정호의 신체적 떨림은 한편으로는 해체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겪는 고통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체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고통으로 볼 여지가 있다. 정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정호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큰 빚을 남기고 떠난 것으로 보인다. 정호는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빚과 그의 부재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인 동시에 어머니, 아내, 딸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이다. 정호가 겪고 있는 이 이중의 고통은 고시원 고유의 독특한 건축적 공간 구성에 따라서 시각적으로 형상화된다. 이 영화의 주요 배경으로 쓰인 고시원을 하나의 소우주로 본다면, 그것은 전체를 작은 부분들로 자르고 이어붙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건축적 공간에서 정호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로 대물림되는 가족의 해체를 겪으면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받는 것이다.
영화는 정호에게 가혹한 시련을 주거나 반대로 그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끝맺지 않는다. 정호가 어머니의 손을 다치게 만든 그날은 하필 그의 딸의 생일이었다. 어머니를 걱정하면서 딸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그 기묘한 상황은 앞으로 정호가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자신의 가족을 위해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를 되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정호의 미래에 대해서 그 어떤 판단도 그리고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정호의 삶이 누군가의 무차별한 가위질로 난도질당하여 찢김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면서 이제 정호에게 과거를 박차고 일어서야 할 시간이 도래했다는 하나의 신호를 준다. 열린 결말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호는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면서 연신 헛구역질을 한다. 만약 정호의 헛구역질이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는 구토의 전조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를 떨쳐 낼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의 제스처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경제적 파산이 초래한 찢김의 고통을 다룬 이 작품은 어딘가에서 비슷한 경험을 할지도 모를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극약처방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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