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햇볕을 볼 시간, 2022

by.이도훈(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2022-11-21조회 2,751

<햇볕을 볼 시간>을 연출한 이다영 감독은 제작일지를 통해 이 작품이 “2021년 여름, 6명의 동료와 함께 찍은 단편영화”라고 적었다. 이보다 더 간결하고 명징한 작품 소개가 있을까. 감독은 작품의 이야기를 포장할 수 있는 미사여구를 쓰는 대신 작업 과정을 사실적으로 압축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 제작일지에는 제작 동기를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있다. “한 달 동안 시간에 쫓기지 않고 우리끼리 즐기면서 영화 찍으면 재밌겠다.” 제작일지에 적힌 이 두 문장은 영화 만들기가 어떤 목적을 위해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닌 영화 만들기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햇볕을 볼 시간>은 영화 만들기에 빠져든 영화인들을 위한 그리고 그들이 만든 세계에 빠져들 관객을 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것은 불완전한 상태를 가진 사물 또는 사람이다. 여주인공 재경은 독립영화에 출연하는 배우이다. 그녀는 출연이 예정된 작품의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외바퀴 자전거를 타는 연습에 몰두한다. 영화 속 주요 소품 중 하나인 외바퀴 자전거는 재경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그녀의 자질과 가능성을 두루 비추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외바퀴 자전거는 바퀴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로 인해서 그것을 운전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를 불안하게 만든다. 재경은 미숙하게나마 외바퀴 자전거를 탈 수 있지만, 그녀가 연기해야 할 캐릭터는 그녀보다 더 능숙하게 외바퀴 자전거를 탈 수 있어야 한다. 배우와 캐릭터의 불일치 그리고 배우의 현재와 배우가 꿈꾸는 미래의 불일치. 이러한 이유로 재경에 대한 문자적 묘사는 ‘아직’이라는 부사와 어떤 사실을 부정하는 ‘아니다’ 혹은 어떤 상태를 부정하는 ‘없다’라는 형용사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예컨대, 그녀는 아직 그녀가 꿈꾸는 배역이 갖추어야 할 어떤 자질이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재경과 동거하고 있는 현수 또한 불안한 현재를 사는 것으로 묘사된다. 현수는 일상 곳곳에서 소리를 수집하여 음악을 만드는 일을 즐겨 하고 있지만, 정작 그가 생계유지를 위해 하는 일은 사운드 엔지니어이다. 만약 현수가 음악가로서의 꿈을 꾸고 있다면 그가 소망하는 미래는 현재 그의 직업적인 일로 인해서 지연될 가능성이 크다. 재경은 현수의 음악과 그의 재능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에게 유튜브를 해보라고 권하지만, 그런 재경의 제안에 현수는 “모르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현수는 자신의 현재가 불안정하다고 해서 자신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내기를 걸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한편, 현수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그것은 현수가 사는 집의 계약 기간이 만료될 시점이 가까워지자 집주인이 월세를 올리겠다고 통보하면서부터 시작되는 불안이다. 이 일로 현수와 재경의 삶에는 잔잔한 파문이 일어난다. 두 사람은 가까운 미래에 정든 공간을 떠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과거와 미래는 현재 안으로 스며들고 있다.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 또한 재경과 현수의 일상에서 불현듯이 감지되는 과거의 어느 순간 또는 미래의 어느 순간과 마주할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영화는 어떻게 현재를 묘사할 수 있을까? 영화는 어떻게 현재라는 시간이 과거나 미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햇볕을 볼 시간>은 일상을 지배하는 시간의 기묘함을 드러내기 위해 신체에 습관의 형태로 각인된 감각을 시각화하는 방식과 함께 특정 대상이 시간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을 두루 활용하고 있다. 먼저 전자의 경우로는 신체와 몸짓을 통해 시간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장면들이 있다. 재경이 출근, 퇴근, 외출 등을 할 때 외바퀴 자전거를 타는 모습, 현수가 녹음실에서 자판을 보지도 않고 키보드를 다루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재경과 현수가 의례적인 몸짓으로 가벼운 신체 접촉과 함께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온 재경과 현수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께 분리수거를 하는 모습 등이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이 장면들 모두 재경과 현수가 직업적으로나 일상적으로나 반복된 행동 양식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장면에서 배우들의 몸짓은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과거, 즉 영화가 애써 다 보여주지 않은 캐릭터의 과거의 누적된 경험을 관객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다음으로 후자의 경우로는 특정 대상이 시간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장면들이 있다. 이 장면들은 대체로 가까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의 상태를 의식적으로 개선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재경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의 배역을 따내기 위해 외바퀴 자전거를 타는 연습을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또 다른 예로는 재경이 문화센터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로 구연동화를 하는 장면들을 거론할 수 있다. 재경은 아이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그리고 아이들이 즐거워하기를 바라면서 구연동화의 시연 방식을 조금씩 바꾼다. 재경은 자신의 구연동화를 듣고 바라보는 아이들의 미래, 즉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여러 시도를 한 것이다. 또한, 이사를 앞두고 재경과 현수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사소한 언쟁을 벌이는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작품에는 반복과 습관을 통해 과거가 현재로 지속되고, 기대와 예측을 통해 현재가 미래로 연장되는 순간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두 개의 시간, 즉 과거가 새어 들어오는 현재와 미래가 새어 들어오는 현재는 질적으로 달라 보이지만, 실상 두 경우 모두 시간의 속성이 인간이 의식적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에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썼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시간이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는 그런 상태를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분명 뒤엉킨 시간의 질서는 우리를 조급하고 불안하게 만들겠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시간의 기묘한 성격으로부터 도리어 위안을 찾으려고 한다. 만약 우리가 시간을 의식적으로 다스릴 수 없다면 우리는 무기력해질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나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불안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좌절, 무기력, 패배,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경험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고 난 뒤에 따사한 햇살과 말간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삶은 우리에게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뜻하지 않은 행복과 위로를 전해주기도 한다. <햇볕을 볼 시간>에서 그런 우연은 재경이 산 중고 캠코더 안에서 발견된 누군가가 찍어 놓은 동네 풍경 또는 재경과 현수가 함께 하는 여러 소소한 일상들 안에서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일상을 구성하는 여러 다른 시간적 경험이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그것이 다시 하나의 리듬을 구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삶의 흐름이 만들어낸 하나의 교항곡과 같다. 음악의 리듬을 듣고 느끼는 것이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듯이 누군가의 삶의 리듬을 보고 느끼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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