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연 감독이 연출한 <
햄스터 죽이기>의 주인공 효정은 존재감이 없는 아이다. 그녀는 15살 동갑내기 수정과 일란성 쌍둥이로 맺어진 관계이지만, 두 사람의 삶은 극명하게 구분된다. 수정이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사춘기에 접어든 학생으로 그려지는 것과 달리 효정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불분명한 상태로 그려진다. 수정은 신분과 소속이 분명하지만, 효정은 신분과 소속이 불분명하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효정을 수정으로 착각하는 일이 잦을 정도로 효정의 존재론적인 지위는 불분명하다. 영화 초반, 효정은 내레이션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5년 전 엄마는 쌍둥이를 임신한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이건 마지막으로 내가 김효정이었던 때의 이야기이다.” 이 독백이 암시하는 것처럼, <햄스터 죽이기>는 타자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비교적 덤덤하게 그리는 작품이다.
도플갱어는 오랜 시간 동안 문학과 영화의 주요 소재로 쓰였다. 사전적으로 도플갱어는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을 뜻하며, 그것은 자아의 증식, 복제, 분할, 분열 등과 같은 함축적 의미를 포함한다. 도플갱어가 자아의 증식에 가까운 경우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욕망의 발현과 관련이 있으며, 도플갱어가 자아의 분열에 가까운 경우 그것은 이성에 의한 억압과 관련이 있다. 일찍이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도플갱어의 의미를 자아의 분할, 구분, 교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억압된 대상이 회귀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도플갱어는 억압된 주관성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합리적인 이성에 대한 반발을 표현하고자 했던 낭만주의 문학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전후의 혼란한 사회상을 다룬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영화에서 자주 나타났다. <
프라하의 학생>(1913),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 <
노스페라투>(1922), <
마부제 박사>(1922)가 도플갱어를 영화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작품들은 거울 이미지, 괴물, 광인 등으로 도플갱어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인물과 그것의 유령적인 대응물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도플갱어는 누군가의 조력자이거나 반대로 누군가의 장애물일 수 있다. 도플갱어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 자아와 타자는 서로 운명 공동체를 형성한다. <햄스터 죽이기>의 효정과 수정 또한 하나의 세계를 공유한다. 두 사람은 모종의 협상을 맺고서 서로의 분신이 되기로 약속한다. 수정은 효정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를 수 있는지 묻는다. 파우스트적인 거래에 가까운 이 협상이 맺어진 결과 수정은 효정을 대신해 집을 지키고 그동안 효정은 수정을 대신해 학교에 간다. 영화는 효정의 변화된 삶에 주목한다. 그녀는 수정의 명찰이 붙은 교복을 입고, 수정이 다니는 학교에 가서, 수정의 친구들과 어울리고, 수정을 대신해서 시험을 본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효정은 자신을 수정이라고 믿는 사람들 앞에서 수정을 연기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효정의 억압된 욕구가 현실로 회귀하고, 그녀가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효정의 욕망은 그녀가 수정의 분신이 되었을 때만 달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연적인 한계를 갖는다. 또한, 효정이 수정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그녀의 소원 성취는 일시적으로 혹은 무기한 유예된다.
이것은 타자의 도플갱어가 된 한 인간의 비극적 결말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모든 도플갱어는 누군가의 분신이라는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서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 <햄스터 죽이기>는 우화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의미로 읽힐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삽입한다. 이 영화는 한 쌍의 햄스터가 있을 때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도플갱어로 맺어진 효정과 수정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 초반, 수정은 학교 앞에서 사 온 것이라면서 한 쌍의 햄스터를 집에 들인다. 수정이 햄스터에 대해서 비교적 무심한 것과 달리 효정은 케이지 안에 들어 있는 한 쌍의 햄스터를 유심히 관찰한다. 햄스터를 관찰하는 효정의 모습은 이 영화 전체의 구조와 어우러져 관객인 우리가 그림 속의 그림을 바라보는 듯한 착시를 경험하게 만든다. 관객이 효정과 수정 사이에 나타나는 도플갱어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효정은 한 쌍의 햄스터 사이에서 나타나는 도플갱어의 관계를 바라본다. 이 미장아빔(mise en abyme)의 구조에 의해서 영화의 안과 밖 모두 도플갱어가 관계의 중심을 이루는 세계처럼 지각된다. 그리고 이 액자식 구조 속에서 관찰자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문자 그대로 잡아먹는 잔인한 모습을 목격한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욕망이 도착적인 행위로 나타난 것인 동시에 먹는 행위를 통해서 정령, 타자, 초월적 존재가 현현(incarnation)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타자의 그림자에 갇힌 도플갱어를 넘어서 타자를 집어삼킨 도플갱어의 모습에서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햄스터 죽이기> 후반부의 일부 장면은 너와 나의 구분이 무너진 도플갱어의 관계를 암시한다. 효정이 두 마리 햄스터 중 한 마리의 사체를 화단에 묻고 난 직후 그녀는 교복을 입은 수정과 마주한다. 여기서 영화는 효정과 수정의 모습을 각각 풀 샷, 바스트 샷, 클로즈업 샷으로 담은 이미지를 쇼트와 역-쇼트 구조 속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이 쇼트들의 교환 속에서 효정의 얼굴과 수정의 얼굴은 서로 대칭을 이루고, 그 교환의 구조 속에서 두 사람의 얼굴은 증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더불어, 영화의 마지막 장면 또한 효정과 수정을 구분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명찰이 없는 교복을 입었기에 효정인지 수정인지가 구분이 되지 않는 누군가가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근데 쥐새끼도 제 자식은 알아보는 게 아닌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그것은 분명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 영화 속 누군가의 자조 섞인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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