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탈날 탈, 2018

by.이도훈(영화평론가) 2022-05-31조회 3,837

서보형 감독의 <탈날 탈>은 한 남자가 겪는 지각의 오류, 시스템의 오류, 그리고 존재의 오류를 통해서 기이함과 으스스함을 불러일으킨다. 10분 남짓한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은 어느 아파트에 혼자 사는 한 남자가 야심한 밤중에 겪는 불가사의한 일들을 다룬다. 남자는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지만, 그가 현관문 바깥을 내다봤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전등 스위치를 누르자 텔레비전이 켜지고, 텔레비전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자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가 뜨면서 현관문 도어락의 조작음이 들린다. 기이한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남자가 도어락의 조작음을 듣고 현관문을 열면 잘못 배송된 소포가 놓여 있고, 그 소포를 들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현관문을 열면 소포를 받아야 할 이웃집 주민이 나타나고, 당황한 남자가 황급히 자기 집을 찾은 다음 현관문을 두드리면 묘령의 여자가 나타난다. 이 일련의 상황이 남자의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이건 남자의 집에 귀신이 들려 벌어지는 일이건 간에 이 작품 속 세계에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지각의 오류는 이 작품을 지탱하는 첫 번째 법칙이다. 우선 이 작품의 타이틀 시퀀스에 주목하자. 검정 화면 위로 영화의 제목이 서서히 등장하는 동안 외화면을 통해 단절적인 전자음이 들린다. 여기서 관객은 영화 제목 이외에는 아무런 시각적인 정보도 얻을 수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의 정체를 감지할 수 있는 청각적인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 검정 화면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지만, 외화면의 사운드는 무언가가 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한편으로 지시물이 지시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을 그린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영화 속에서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에 대응하는 사람의 부재, 도어락의 조작음에 대응하는 사람의 부재 또한 같은 논리가 적용된 경우로 볼 수 있다. 만약 관객인 우리가 이 작품에서 기이한 감각을 느낀다면 그것은 지시물의 불일치 또는 부재의 현존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관객은 이 영화 속 주인공 남자가 감지하지 못하는 이상한 시선 한 가지를 획득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그것은 남자의 시선과 무관한 듯이 자유롭게 아파트 내부를 움직이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통상적으로 극영화에서 샷-리버스 샷을 통해 관객이 특정 인물의 시선에 동기화될 수 있게 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의 일부 장면은 주인공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난 상태로 아파트 내부의 변화된 상황을 담는다. 만약 이 예외적인 장면이 주인공 남자의 시선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면, 이 작품 속에는 관객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가 부지불식간에 영화 속 현실로 틈입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보이지 않으나 그 존재만큼은 분명하게 감지되는 어떤 유령적인 대상들은 시스템의 오류를 통해 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탈날 탈>에서 일상 속 대상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스위치, 리모컨, 도어락의 기능을 통해서 암시된다. 전등과 스위치, 텔레비전과 리모컨, 현관문과 도어락은 각각 하나의 사물과 그것의 작동을 제어하는 장치 간의 연결을 통해서 하나의 시스템을 구성한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의 사물을 제어하는 장치들이 오작동을 일으킬 때 그 제어 장치들이 다른 사물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전등의 스위치가 텔레비전과 연결되고, 텔레비전 리모컨이 핸드폰과 연결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것은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배치가 어그러지면서 나타나는 시스템의 오류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작품 속에서 오작동을 일으키는 제어 장치들이 본래 하나의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의 리모컨은 저기 다른 곳에서 생산된 영상을 여기 이곳으로 전송하기 위한 창을 여는 역할을 하며, 도어락은 외부인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여는 역할을 한다. 만약 이러한 제어 장치들이 오류를 일으킨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 대신 예측할 수 없는 다른 세계를 맞닥뜨린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어떤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와 다른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가 서로 연결되면서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난 세계가 만들어지는 상황을 그린 것이다. 주인공 남자가 전등 스위치를 켰을 때 텔레비전 화면에 홈쇼핑 광고가 등장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어느 휴양지의 여행 상품을 판매하는 그 홈쇼핑 광고는 주인공 남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의 시선으로 새어 들어오고,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가 그 상품을 결제한 것처럼 만들어 놓는다. 이 장면은 주목 경제의 원리가 작동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대중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여러 시청각적인 정보에 노출되어 상품을 구매하는 상황을 연상케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오늘날 대중들이 자신이 원치 않는 시스템에 포섭된 가운데 자율적인 감각과 의지를 모두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상황을 우회적으로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지각의 오류에 대한 묘사로 시작해 시스템의 오류에 대한 묘사를 거친 이 작품의 이야기는 존재의 오류를 통해 화룡점정을 찍는다. 이 작품의 으스스한 감각은 그것을 느끼는 주인공 남자가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영화 후반부에 남자 주인공은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전자의 질문이 자아의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인 오류에서 빚어지는 것이라면, 후자의 질문은 타자의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인 오류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남자에게 잘못 배송된 택배 상자, 남자가 사는 집과 택배 상자의 주인이 사는 집의 위치가 바뀌는 상황, 남자의 집에서 나타나는 묘령의 여인 모두 남자가 속해 있는 현실의 시공간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서사적 장치들을 통해서 이 영화는 주인공 남자가 흡사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속 인물들처럼 입구는 있으나 출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서성이고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주인공 남자는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세계가 물샐틈없이 견고하고 안전하다고 믿었겠지만, 이미 그의 세계는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낯선 존재들이 장악한 상태였다. 관객인 우리는 이 모든 기이하고 으스스한 상황이 주인공 남자의 악몽이길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인공 남자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잠에서 깨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잠에서 깨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잠을 자고 싶어도 잠을 자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는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계속해서 유예되는 그 독특한 시공간적 구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유령이 지배하는 그 세계에서 인간은 잠을 잘 권리 그리고 꿈을 꿀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이 글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한 기이함과 으스스함은 마크 피셔의 책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구픽, 2019)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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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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