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by.이영재(영화연구가) 2022-02-24조회 6,024

1. 이 연재에서 이야기한 적 있는 <팔도사나이>(1969)는 김두한이라는 한국 남성 대중문화의 강력한 형상만을 만들어낸 데 그치지 않았다. 종로의 주먹 김두한이 지역으로부터 올라온 도전자들에게 판판이 승리를 거두며 서울을 정점으로 한 전국토의 위계화라고 할만한 것을 이루어냈다면, 대동강, 무등산, 영도다리 출신임을 내세우며(이 노골적이고 단일한 지역적 상징물들은 일종의 지역의 인덱스화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냈다는 점을 지적해두자) 도전장을 내미는 팔도의 ‘쎈’ 사나이들 중에서도 단연 가장 막강한 대중적 소구력을 지녔던 것은 박노식이 분한 광주 용팔이일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박노식은 한국영화에 처음으로 언어를 통한 지역적 질감이라는 것을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5인의 해병>(1961)에서 시골 출신 병사역을 맡은 박노식은 이 캐릭터 ‘촌놈’이 전라도 사투리를 써야 잘 살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는 전라도 순천 출신이다) 감독 김기덕은 그의 군대생활을 떠올리며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 영화의 성공은 방언 사용에 대한 한국영화의 금기를 깨트렸다.

1967년의 기념비적 국책영화 <팔도강산>에서 다시 한번 광주 사위로 전라도 사투리를 리드미컬하게 구사해냈던 박노식이 “나가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온 용팔이인데 말시!”라는 일성과 함께 용팔이로 도착하고 있는 것은 거의 필연적으로 보인다. 곧 이 캐릭터는 <팔도사나이> 시리즈의 주역으로 발돋움한 데(<돌아온 팔도사나이>) 이어 ‘용팔이’ 시리즈 뿐만 아니라(<남대문 출신 용팔이> <역전 출신 용팔이> <운전수 용팔이> <신입사원 용팔이> <방범대원 용팔이> 등) 여타의 무수한 영화들에 진한 자취를 남겼다.(<맨발로 올라왔다> <맨주먹으로 올라왔다>) 1970년대 스스로 감독을 겸하기 시작한 박노식의 필모그래피를 채운 역할의 절반은 용팔이였다. 싸구려 액션영화들에서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 캐릭터를 보고 있으면, 용팔이야말로 이 시기 한국영화가 담아내었던 동시대성의 핵심 표상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너무 과장이 아니냐고? 아니 정말로 그렇다. 용팔이는 그 자체로 급격한 이촌향도와 확장일로의 도시가 요구하는 염가의 노동력의 구상화라고 해도 무방해보인다.

1970년대 도시 변두리와 읍내의 열악한 재개봉관을 채운 액션영화는 홍콩식 권격영화와 더불어 ‘김두한’과 용팔이가 채우고 있었다. 전자가 합작이든 위장합작이든 아시아 시장의 공통성(‘아시아’라는 말이 불러일으킬 혹시 모를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이 공통성은 소위 아시아적 ‘가치’와는 별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 시장의 공통성이란 이 지역 일대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마련해둔 계급적, 젠더적 공통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일종의 국제성에 어필하고자 한 것이었다면, 후자는 철저하게 내수용으로 기획되었다. 아마도 이 시장과 관객의 문제야말로 왜 유독 이 후자의 영화들이 그토록 지배 이데올로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는가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이 영화들의 거의 대부분은 반공영화, 새마을영화 등 70년대 ‘우수영화’의 포맷을 기꺼이 빌려오고자 했다. 무엇보다 김두한과 용팔이가 횡행하는 소위 70년대 협객영화의 가장 큰 특징을 꼽자면 이들 모두가 과거를 청산하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를테면 <김두한 속 4부>에서 김두한이 그의 부하들에게 이제 폭력배의 시대는 갔고 새 시대가 왔으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변할 때, 이것은 얼마나 유신(維新)의 이념에 근사하게 합치되는 것인가.
 

2. <돌아온 팔도사나이>는 용팔이가 과연 누구였는지, 무엇을 대변하는지, 그리고 이 존재의 열망과 취약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텍스트일 것이다. 이미 영화의 시작 전에 형님 호는 조직을 해산했고, 부하들에게 깡패의 세계에서 손을 씻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용팔이(박노식)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역시 한때 수중의 폭력을 즐겨 과시하였으나 이제 과거와 손을 끊고 새 사람이 되어 건실한 일꾼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짐꾼이 되어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던 용팔이는 어느날 사업가로 성공한 옛 동료에게 아내 옥희(사미자)를 뺏긴다. 분노한 용팔이는 이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돈에 혈안이 되어 우정까지 저버린 용팔이 앞에 호의 장성한 아들 철용이 나타나 결투를 신청한다. 용팔이는 이 결투로 자신의 잘못을 깊게 뉘우친다.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이 영화는 돈 때문에 아내를 잃은 자가 한때 잘못된 길로 빠져들었으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물론 이 과정이 심히 급작스러워서 그다지 설득력이 있지는 않지만) 개과천선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런데 이 영화를 진정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이 인물이 자신의 무력을 과시하려고 할 때마다 그것이 매번 좌절된다는 데에 있다. 간단히 말해 용팔이가 주먹을 쓰려는 순간 그럴 수 없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때마다 형사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형사는 말 그대로 ‘불쑥’ 등장한다.

어느날 용팔이는 자신을 자처하는 가짜 용팔이를 만난다. 이 가짜에게 주먹을 들어 응징하려는 순간 홀연히 등장한 형사가 용팔이의 팔을 잡으며 말한다. “우리는 법치국가의 민주시민입니다. 억울한 일이 있으실 때는 법에 호소하면 정당한 판결을 내려줍니다.” 용팔이가 가짜 용팔이와 대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거울을 통해서 마치 환영처럼 모습을 드러낸 형사는 다음 숏에서 용팔의 팔을 잡음으로써 이 상황에 개입한다. 이 형사의 등장은 거의 초현실적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의 등장을 예고하는 어떤 단서도 앞의 장면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거울을 통한 이 맥락없는 등장은 이 형사를 전지적 존재로 보이게 만든다. 그는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있고, 어디서나 용팔이를 보고 있다. 형사의 말에 용팔이 박노식이 그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로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아이고 내가 공부를 좀 했으면 그 법인지 뭔지 알 거인데 말입니다잉 미치겠네라우, 아이구 요 새끼가 말입니다잉 남의 이름을 빌려서 용팔이 행세를 했는데 그것이 사기로 들어갑니까, 강도로 들어갑니꺼? 내가 참 대갈통이 나빠가지고.” 용팔이는 형사의 말대로 결국 주먹을 쓰지 않지만, 눈을 부라리며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는 박노식의 제스처는 희극적이면서 또 도발적이다. 이 제스처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당신은 법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나는 머리가 나빠서 법에 대해 잘 모르겠소.

용팔이(와 더불어 도시 변두리와 읍내의 열악한 재개봉관을 채우고 있는 관객)에게 마련된 자리란 최대치로서 치안과 노골적인 국가 시책이 가닿는 것에 불과해 보인다. 순치(馴致)의 대상으로서 그는 법과 가까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 존재는 법이 범/법을 지적하고 포획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법으로서 성립, 유지시킨다는 명제, ‘범죄의 식민화’(푸코)의 더할나위 없이 적합한 사례이다. 용팔이는 감옥을 들락날락한다. ‘성격적 결함’이 종종 그를 잘못된 길로 이끌지만, 그는 매순간 갱생의 의지를 불태운다. 무엇보다 ‘경찰’이 그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눈을 부라리며 머리를 툭툭치는 저 제스처로 돌아가보자. 이것이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전적으로 박노식이 분출하는 과장되고 기묘한 에너지 때문이다. 힘이 세고, 다혈질이며, 우직하면서 비굴하고, 때때로 우스꽝스러운 잔인함을 발산하는 박노식의 용팔이는 종종 체제순응적인 내러티브의 층위와 상관없이, 과시적인 제스처를 통해 가진 자와 배운자에 대한 은밀한 희롱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팔도사나이>에서 용팔이는 민족의식의 고취를 역설하는 ‘점잖은’ 역사 교수에게 억지로 바보춤을 추게 한다. 식자들에 대한 조롱에서 비롯되는 이 ‘난감한’ 활력이야말로 이후 박노식이 수행한 용팔이 캐릭터의 핵심 정서라고 할 만한 것이다. 한편으로 하층 계급 남성들의 노골적인 판타지를 고스란히 체현해내고 있는 이 캐릭터는 아직 그 어떤 정향적인 긍정성도 내포하지 않았지만(이를테면 1980년대의 ‘건강한’ 민중성에 관한 담론들과 용팔이 사이에는 아직 얼마나 먼 거리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 배우고 못 가진 자의 분노를 우스꽝스럽게 분출시키며 지배담론과의 거리를 미묘하게 확보해나간다. 물론 치안의 대상이라는 저 근본적 취약함을 간직한 채 말이다. 요컨대, 도시로 이주한 저학력 남성 노동자들의 적절한 반영물로서 박노식 용팔이는 1970년대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민중’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단위에 미처 끼지 못한 선(先) ‘민중’적 존재, 혹은 잉여화된 바로 그 존재들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3. 1971년 박노식은 그의 첫 번째 연출작인 <인간 사표를 써라>를 찍었다.(일설에 의하면 이 영화는 폭력사건으로 유치장 출입이 잦았던 이 스타가 “이게 뭔가? 나는 왜 이렇게 사고를 저지르는가?” 대오각성(?)하여 만들었다고 한다.1))그로부터 박노식은 1976년의 <방범대원 용팔이>와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까지 5년 동안 무려 13편의 영화의 연출과 주연을 맡는 놀라운 창조성을 보여주었다.(참고로 그의 마지막 연출작은 미국 이민에서 돌아온 1983년의 영화 <돌아온 용팔이>이다.)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호화로운’ 파괴를 보여주는 이 영화들은 아마도 한국영화사 내에서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독자적 계보를 찾을 때 첫 번째로 불려져나와야 할 목록들일 것이다. 악취미에 가까운 스타일의 과잉, 폭력과 섹스가 낳을 수 있는 극단적인 이미지들에 대한 열렬한 탐닉, 넘쳐나는 신체훼손과 넘실거리는 자기 과시. 박노식은 그 속에서 사연많은 킬러와 용팔이 사이를 오가며 거의 박노식 유니버스라고 할만한 것을 창조해내었다. 이 영화들은 박노식이라는 배우-감독의 유니크한 개성의 유감없는 발현이자, 무엇보다 이 영화들이 소구했던 바로 그 관객들의 취향, 소망, 판타지의 가장 적나라한 형상들이라는 점에서 더할나위 없이 흥미롭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이 중에서도 박노식이 잔학한 조총련계 야쿠자이자 도쿄로 건너간 촌뜨기 용팔이의 1인 2역을 맡고 있는 <왜?>(1974)는 정말로 필견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라!

1) 오승욱, 「전라도 촌사나이의 야망과 몰락 박노식」, 『신동아』, 2011.4.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102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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