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관의 소설 『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이소룡 세대에게 바치는 절절한 송가이다. 서자로 태어난 집안의 천덕꾸러기 ‘삼촌’은 그 시절의 무수한 사내들이 그러한 것처럼 이소룡을 지극히 흠모했고, ‘그가 간 모든 길을 뒤따르고 싶어 했’다. ‘삼촌’은 이소룡을 따라 무술을 연마하고 몸을 단련한다. 심지어 이소룡은 마치 벼락처럼, 계시처럼 그의 앞에 나타나 삶의 향방을 몸소 손짓으로 가리키는데, 먼 남쪽 하늘을 가리키는 그 손가락 끝을 따라 중국집 배달부인 ‘삼촌’은 홍콩으로 가는 밀항선에 몸을 싣는다. 같은 형태의, 같은 크기의 열망을 품은 무수한 이소룡을 꿈꾸는 자들과 함께. 이소룡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홍콩의 골든하베스트와 워너브러더스는 그의 죽음으로 중단된 영화 <
사망유희>를 완성하기 위해 이소룡 대역을 찾고 있었다. 영화 속 이소룡의 육체를 대신하는 것. 그건, 이소룡에게 매료된 수많은 아시아의 젊은 남자들의 꿈이었다. 그러나 배는 난파하고, 삼촌과 함께 꿈꿨던 자들은 홍콩 땅은 밟지도 못한 채 피로와 굶주림에 지쳐 가까스로 한국으로 돌아온다.
비록 소설 속 ‘삼촌’의 밀항선은 난파되었지만 우리는 이 꿈과 같은 일이 실제로 누군가에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안다. 본명 김태정, 예명 당룡(이 이름은 <
맹룡과강>에서 이소룡이 분했던 바로 그 역의 이름이기도 하다)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부산 출신의 사내는 마치 삼촌이 그러한 것처럼, 혹은 같은 꿈을 꿨던 저 무수한 젊은 남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연히 <
정무문>을 보고 이소룡과 같은 배우가 되기를 꿈꾸며 그의 모든 동작을 따라하기 위해 부단한 연마를 거듭하였다. 김태정은 다른 수많은 아시아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사망유희>의 대역으로 발탁되었다(이 영화의 또 한 명의 이소룡 대역은 1980년대 홍콩영화의 스타 중 하나가 될 원표였다). <사망유희> 이후 다시 한번 이소룡의 필름 푸티지를 알뜰히 활용한 영화 <사망탑>에서 이소룡의 동생으로 분한 그는 장 클로드 반담의 데뷔작이기도 했던 <
특명 어벤저 No Retreat, No Surrender>에서 이소룡의 유령 역을 맡은 것을 끝으로 ‘세계’ 영화계를 떠났다.(이 ‘국제적’ 영화인이 마지막으로 준비했던 프로젝트는 한국과 일본, 홍콩, 미국의 합작으로 이루어질 <야쿠자>라는 영화였다. 『무비스트』, 2009.6)
1970년대의 전세계적이고 지역적이었던 이소룡 붐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다고 해도, 단 한번도 부산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나이가, 단 한마디의 중국어도 하지 못했던 자가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홍콩으로 건너가 비록 한순간이나마 꿈꾸었던 바로 그 신체가 되는 이 이야기에는 여전히 기묘한 울림이 있다. 그것은 단지 이 이야기가 지독한 행운처럼 보여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 기묘함은 『나의 삼촌 브루스 리』가 보여주는 밀항선에 올라타 난파된 저 무수한 꿈들의 강도 때문에 그렇다. 그것은 부산에서 홍콩까지의 거리를 단숨에 압축시켜버릴만큼 강렬하다. 한 시기 한국의, 아시아의 젊은 남성들을 사로잡았던 이 열망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을까?
그런데 다시 말하건데 이들이 꿈꿨던 것은 배우가 아니라, 정확히 ‘이소룡 같은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이소룡 영화에서 진정 매혹적인 것(혹은 모방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의 신체 자체이자 그 몸의 운동이다. 매끈한 근육질의 몸, 그것이 만들어내는 동작의 디테일은 끊임없는 복기와 수련으로 가능해질 터, 이소룡 영화가 상영되는 동시상영관이야말로 이 모든 수업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그곳은 아침에 극장에 들어가면 ‘머리가 아플 지경’이 될 때까지 하루 종일 똑같은 영화를 반복 학습하고 저녁에 되어서야 나왔던 진정 학습의 장이라 할만한 곳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이소룡이라는 이 중화권 최초의 국제 스타가 남긴 단 네 편의 영화를 어떤 일관성 속에서 포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홍콩의 골든 하베스트, 이소룡 자신의 제작사인 콩코드 픽쳐스, 할리우드의 워너브러더스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관여한 그의 영화는 초국적 시장에 대한 고려 위에서 만들어졌으며 크리스 베리의 언급처럼 “인종적이며 민족적인 동맹의 광범위함”을 특징으로 하는 이 영화들을 유일하게 하나의 일관성으로 묶고 있는 것은 이소룡이라는 강력한 페르소나이다. 공장주와 싸우는 이주 노동자(<
당산대형>), 스승의 복수를 위해 일본인에 맞서는 수제자(<정무문>), 로마에 도착한 동양인 촌뜨기(<맹룡과강>), 국제 첩보조직과 협력하는 소림사 수제자(<
용쟁호투>). 인종과 민족과 계급에 관한 이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이소룡이라는 유려하고 아크로바틱한 근육질의 신체를 가로지른다. 게다가 웃통을 벗고 맨몸의 상체를 드러낸 채 적과 맞서는 이 몸은 그 이전의 무협영화가 견지하고 있던 문화적 의장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즉, 이 맨몸은 그 어떤 의장 없이, 오직 아시안, 젊음, 남성이라는 기호만을 남겨두고 있다. 그럼으로 이 몸은 기술과 신체의 연마를 통해 ‘무한히’ 모방 가능한 것이 된다.
“로저 무어가 나오는 <007> 영화를 보면 우리가 집에 가서 흉내를 내겠어요? 그건 상상의 나라인 거고. 근데 이소룡이 발을 차는 걸 보면 내가 운동하면 저게 가능하겠구나 싶었던 거지.”
1)
김태정의 이 언급은 저 모방 가능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보여준다. 이소룡은 당연한 말이지만 동양인 남성이다. 그는 ‘내가 운동하며 저게 가능하겠구나’ 싶은 맨몸의 격투 혹은 단순하지만 숙련이 필요한 오래된 기구(이를테면 쌍절곤)을 쓴다. 이소룡과 제임스 본드. 이는 단지 유행하는 액션 장르영화의 두 히어로를 불러온 것 이상으로 꽤나 흥미로운 대비를 보여준다. <007> 시리즈에서 당신이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시리즈가 이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당대 최고의 미녀들이 분하는 본드걸과 매번 새롭게 선보이는 최첨단 기구들이야말로 이 시리즈가 유지하는 매혹의 기본값이 아닐까. 본드걸을 동반한 이 백인 남성이 헤테로섹슈얼한 남성성을 과시하며 최첨단 기구를 능숙하게 다루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다면, 이소룡(과 한국, 홍콩, 대만, 태국, 필리핀 등등에서 유행했던 ‘권격영화’)은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다. 그럼으로 이 동성사회적(homosocial) 영화들은 노골적으로 젊은 남성관객들에게 어필하고자 한다. 동시에 이소룡 영화와 권격영화의 몸들이 보여주는 능력은 단련된 신체를 통해서 발현된다. 요컨대, 이소룡(과 권격영화의 주인공들)은 영국 첩보원이 구사하는 세계 전략과 테크놀로지와 신사다움과 지능이 아닌 맨몸과 오래된 기구를 이용하여 다수를 상대한다.
요절한 이소룡을 둘러싼 저 열망들, 이 지역 일대의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공통의 감각이 발생시킨 트랜스내셔널한 아시아적 동일성이라 할만한 것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시아적 열망이라고 할만한 저 열망들은 백인 남성에 대한 동양남성의 오랜 좌절과 이 좌절에 대한 상상적 극복, 남성성의 재활성화와 연결되어 있다. 미국 패권하의 아시아 남성들, 계급적 하위자들이 미국에서 온 강한 동양인 이소룡에게 매혹당한 것은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이리라. 동시에 최첨단 기구가 장착된 신체와 수련을 거친 맨몸의 능력이라는 이 차이야말로 세계 자본주의 내에서 제1세계와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에 부과된 역할 분담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소룡 붐이 시작된 1973년, 한국은 유신 체제에 접어들었고 그해 8월 경제기획원은 「우리 경제의 장기 전망(1972~1981)」을 발표하며 경공업 중심 산업에서 중화학공업화 정책으로의 전환을 알렸다. 1979년 박정희의 죽음으로 끝나게 될 이 개발근대화 하이모던 철권통치 기간이 홍콩-한국-대만의 권격영화들이 유행하던 시기와 겹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시기 맨몸으로 상경한 산업 노동자(혹은 예비 인력들)들은 맨몸의 저 싸우는 영화들 속에서야말로 진정 신체의 어떤 이상(idea)을 발견한 것인지 모른다.
***
1) 김태정 인터뷰, 『무비스트』, 2009.6.(http://www.movist.com/star3d/read.asp?type=32&id=1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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