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홍콩 쇼브라더스의 <대취협>(호금전)이 한국 시장에 처음 등장했을 때 이 새로운 ‘장르’ 영화가 이후 한국에 미칠 막강한 영향력을 예상했던 자는 거의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이 낯선 장르영화는 당시 한국 영화시장의 강력한 흥행 장르인 마카로니 웨스턴 풍의 제목을 빌려서야 이 시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셀지오 레오네의 A Fistful of Dollars(1964)가 ‘황야의 무법자’로 개봉, 대히트를 기록하며 불붙기 시작한 이 이탈리안 웨스턴들의 제목은 거개가 원제와 상관없이 황야, 석양, 결투, 무법자를 선호하곤 했다). 그리고 이 영화 <대취협>=<
방랑의 결투>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파상적 흥행기록’을 세웠다. 곧이어 쇼브라더스산 무협영화 세 편이 이 시장을 강타했다. 1968년 신필름이 수입한 <독비도>(장철, 한국 개봉제목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변성삼협>(장철, 한국 개봉제목 <
삼인의 협객>), <금연자>(장철, 한국 개봉제목 <
심야의 결투>)의 총 관객수는 무려 65만 명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 단연 압권은 <독비도>였다. 홍콩영화 최초로 백만 달러의 수익을 거둬낸 이 영화는 1960년대 중반 ‘무협 신세기’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새로이 무협영화를 일신함으로써(모더나이제이션) 시장을 확대하고자 한(글로벌라이제이션) 쇼브라더스 ‘신파 무협영화’ 전략의 혁혁한 성과이자 1960, 70년대를 풍미한 한국의 수많은 신체상해 히어로의 액션활극이라고 할만한 것들에 강력한 영감의 기원이 되었다.(아마도 이 중 가장 ‘급진적’인 실천의 사례를 들자면 1969년에 발빠르게 만들어진 <
팔없는 검객>(임원식)이 될 것이다. <독비도>의 내러티브를 고스란히 차용한 이 영화는 한쪽 팔이 아닌 양팔을 모두 잃고 입과 발가락으로 검을 휘두르는 주인공을 선보인다!) 또한 <독비도>의 외팔이 왕우는 한국 관객들을 열광시킨 최초의 홍콩 스타가 되었으며,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과 소비의 방식을 보여주는 첫 번째 이름이 되었다(그리고 알다시피 이 스타를 향한 열광은 홍콩영화의 장르 변천 속에서 이소룡, 성룡, 주윤발 등으로 이어질 터이다).
이 새로운 열광을 자국 내 영화로 흡수하고자 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게다가 당시 ‘중국검객영화’ 혹은 ‘검객활극’이라고 불려졌던 이 장르영화는 자국 시장을 넘어서는 가능성으로 충만한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이 영화들은 어떤 계층, 어떤 젠더, 어떤 세대, 즉 도시의 젊은 하위계층 남성들에게 강력히 어필하는 것이자 이 지역 공통의 산업화 속에서 발생한 이 관객들은 국경을 넘어 이곳과 저곳에 모두 존재하고 있었다. 곧이어 어떤 한국영화들이 일시에 ‘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여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
쌍용검>, <
비호>, <
대검객>, <
유랑의 검호>, <신룡검객>, <
무정검>, <
3인의 여겸객>, <
괴도의 검>, <
단장의 검>, <
필살의 검> <
팔도검객>...... 리스트는 끝없이 이어진다. 임권택은 <
뢰검>, <
월하의 검>, <
비검>, <
요검>을 만들었다. 어떤 영화들은 단독으로 만들어졌고, 어떤 영화들은 홍콩 혹은 대만과 합작으로 만들어졌으며, 어떤 영화들은 한국 국적의 감독이나 배우를 빌미로 합작을 주장하였다. 어떤 영화들은 재편집과 한국어 더빙을 거쳐 합작영화라고 주장되었다. 이를테면 장철의 <
철수무정>과 <십삼태보>(한국어 개봉제목 <
13인의 무사>)는 한국어로 더빙되어 한국-홍콩 합작영화로 공개되었다. 당시 쇼브라더스 전속 감독이었던 정창화가 만든 <
아랑곡의 혈투>는 그의 국적을 이유로 합작영화라고 소개되었다.
식자들은 근심과 탄식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누군가는 “한결같이 잔혹성에 의한 쇼킹도”로 극장 가를 석권한 이 “국적도 고증도 없는 검객물”의 홍수를 한탄했으며, 누군가는 “관객들의 양식을 뒤집어 보게끔” 할만한 것이라고 아연실색했다. 누군가는 “한국 배우가 중국식 칼장난이나 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며 “우리의 얼을 모독하는 무의미한 상행위”에 불과하다고 분노하였다. 요컨대 이 영화들은 도저한 내셔널 시네마의 담론 내에서 긍정되기 쉽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너무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었다.(덧붙이자면 홍콩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이 식자들의 우환은 1990년대 초까지 줄기차게 반복될 터이다.)
1968년의 영화 <쌍용검>은 이 영화의 원작인 『정협지』까지를 포함하여 말하자면 ‘무협’이 어떻게 한국의 남성 하위문화에 기입되고 있는지, 한국영화에 도착한 트랜스내셔널한 실천의 양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례이다. 먼저 김광주의 『정협지』. 김광주가 대만 작가 위지문(尉遲文)의 동시기 소설 『검해고홍 劍海孤鴻』을 번안한 이 소설은 1961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이래 이 신문의 지가를 올렸으며 1963년 신태양사에서 출판되어 당대의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소설가이자 루쉰의 한국어 번역자였던 김광주가 어떻게 무협소설을 번안해오고 있는지 그 구체적 경위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무협 장르가 가지고 있는 대중적 파급력에 그 누구보다 민감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김광주는 1920년대 중후반 상하이 문예비평계의 주류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 상하이는 지난 글에서 다뤘던 바, 무협이 대중문화의 자원으로서 등장한 바로 그 시공간이기도 하다. 쇼브라더스가 그러한 것처럼(이 영화사의 전신인 천일영화사는 1920년대 후반 무협영화를 양산했던 상하이의 주요 프로덕션 중 하나였다) 김광주 또한 이 시기 무협에 대한 대중의 열광, 그 매혹의 한 가운데를 통과해갔다. 즉, 그는 이 장르의 효용성을 그 누구보다도 실감했던 자이다.
『정협지』가 누린 인기를 염두에 둔다면 무협영화의 저 붐 속에서 이 텍스트가 재빨리 불려져 나온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실제로 『정협지』의 영화화를 둘러싼 영화사들 간의 치열한 경합이 벌어졌다. 한국영화사의 이재명과 제일영화사의 홍성칠이 영화화 판권을 둘러싼 공방을 벌였는데, 한국의 김광주와 대만의 위지문, 한국 내 에이전트, 친우 등이 복잡하게 얽힌 이 공방은 흐지부지되었지만 그 와중에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제일영화사였다. 이 영화사는 홍콩의 옥련영화사와 손을 잡고 <쌍용검>과 또 한편의 김광주의 번안 무협소설 『비호』의 동명영화를 동시제작하였다. 이 영화들은 검술영화 열풍으로 달아오른 자국 시장 뿐 아니라 동남아 시장에도 예상대로 어필 가능하였다. 제일영화사는 1969년 한해에만 네 편의 합작 무협영화를 만들었으며, 이 해에 이 영화사의 수출액은 30만불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다. 1968년의 전체 한국영화 수출액이 8만불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숫자의 크기가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 짐작 가능하리라.(1969년의 한 영화잡지 기사는 대종상에 올해의 수출상이 있다면 이 영화사가 받아야 할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 사례는 1970년대 횡행하게 될 한국과 홍콩과 대만과 여타 동남아시아 영세 영화제작자들의 합종연횡이라고 할만한 소위 ‘합작’의 계기들이 어떤 식으로 등장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외화수입 쿼터라는 정책이 마련해놓은 구조, 정기적으로 가해지는 홍콩산 무협영화의 수입규제 하에서 자국 영화로 카운트될 수 있는 합작은 충분히 선호될 만한 것이었다. 종종 그것이 소위 ‘위장합작’의 형태였다고 하더라도. 어쨌건 이제 막 이런 영화들에 호응하는 관객집단이 발견되었으며, 변두리 싸구려 극장에서 환호하는 이들을 통해 무협은 한국 대중문화의 이디엄으로 화려하게 등극할 수 있었다.
무협이란 그리 오래된 단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단어는 동아시아 근대의 산물이다. 무(武)에 협(俠)이라는 오래된 개념을 조합시킨 최초의 인물은 일본의 초기 모험소설가인 오시카와 슌로로 알려져 있다. 오시카와 슌로는 1903년 『무협의 일본』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였고, 『무협세계』라는 소년잡지를 만들었다. 이 열렬한 ‘군인칙유’의 신봉자는 무(武)와 이미 무를 포함하고 있는 협(俠)을 겹쳐놓음으로써 근대 일본의 무력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일본 내에서 정착되지 못했으며, 일본의 중국인 유학생들에 의해 중국으로 전파되어간 이래 전술한 것처럼 1920년대 중반 상하이라는 장소에서 드디어 강력한 대중문화의 이디엄으로 기입되었다. 일본에서 이 단어는 1970년대 이전까지 거의 쓰이지 않았다.
왜 이 조어는 일본이 아닌 근대 중국에서 정착할 수 있었는가? 무가 말 그대로 무력을 뜻하는 것이라면, 협은 이보다 좀더 복잡한 정의를 필요로 한다. 이 오래된 개념은 한비자에 의해 가장 처음 정식화되었다. 그에 따르면 협(俠)은 무로써 禁(法)을 범하는 것이다(俠以武犯禁). 법가 한비자에게 이 개념은 두 가지 점에서 부정적인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협객이란 현존하는 법질서를 깨고 자신들만의 룰로 움직이는 도당의 무리이기 때문에 그렇다(『수호지』의 양산박을 떠올려보라). 이 개념에 의(義)를 개입시킴으로써 정치적 의제로 이동시켜온 것은 사마천이었다. 사마천은 「유협열전」에서 “무로써 법을 범하고 권위를 무시하지만 언신행과(言信行果)의 행동규범에 입각하여 약자와 액곤(厄困)한 자를 도와줌에 있어서는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는’ 자의 속성으로 이를 정의내림으로써 협을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개념으로 전화시키고자 했다.(『사기』) 그러나 유협의 유(游)와 자객의 객(客)이라는 명칭이 이미 보여주듯 시스템 바깥의 행위자들에 의한 시스템의 파괴라는 의미에서 여전히 협은 잠재적으로 위험한 개념이다. 즉, 현존 법질서를 초과하는 폭력으로서 협에는 언제나 법정립적 폭력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제국의 패권적 질서를 위한 강력한 무력을 상정하는 일본이 아닌 반(半)식민지 중국에서 힘(武)을 통해 이 상황을 깰 수 있는 협에 대한 상상은 보다 적극적으로 개진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무협의 핵심 공간은 현실 세계의 법과 무관한 강호-무림의 세계이다. 이 상상적 세계란 1920년대 근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중국에서 발견된 판타지 공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아마도 협이 내포하고 있는 어떠 시스템의 파괴, 폭력의 가능성이야말로 무협영화가 1960년대 홍콩에서 홍콩영화 최초의 영컬처로서 재등장하고, 나아가 한국과 같은 장소에서 이제 막 하나의 관객층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젊은 하위계층 남성들에게 그토록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또한 이 지점이야말로 이 영화들에 쏟아졌던 저 식자들의 우환의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 홍콩에서 무협영화는 그 장르적 후신으로 1970년대 초 맨몸의 싸우는 영화, 이후 ‘쿵푸영화’로 이름붙여질 영화로 옮겨갔다. 홍콩영화의 장르 변동과 민감하게 연루되어 있던 한국의 어떤 영화들은 검술영화에서 권격영화, 당시 용어로는 ‘태권도 영화’로 이름붙여질 장르로 넘어갔다. 이제 유신 시대 한국의 변두리 극장에서는 정책과 장사꾼들과 특정 관객들의 욕망이 단단하게 엉킨 채로 소위 위장합작의 복마전이 펼쳐질 터이다. 다음에는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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