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by.이영재(영화연구가) 2021-05-31조회 9,040
1920년대 후반 일군의 조선인 영화인들이 상하이에서 그들의 영화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한국영화사에서 상해파 영화인이라고 명명될 정기탁, 김일송(상하이 활동 당시 이름은 정일송), 이경손, 전창근 등이 그들인데, 특히 그 중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정기탁은 필모그래피만 보더라도 놀랍도록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28년 상하이의 주요 영화사 중 하나였던 대중화백합(大中華百合影片公司)에서 연출한 <애국혼 愛國魂>을 통해 성공적으로 상하이 영화계에 데뷔했으며(이 영화에는 김일송이 주요 배역 중 하나를 맡고 있으고 전창근 또한 출연 및 각본에 참여하고 있다), 같은 해에만 <삼웅탈미 三雄奪美>, <화굴강도 火窟鋼刀>까지 세 편의 영화에 감독이자 출연자로 이름을 올렸다. 1929년에는 대중화백합에서 만든 9편의 영화에 감독 겸 배우로 관여하였고, 대중화백합을 포함한 영화사들의 트러스트로 이루어진 연화영화사(聯華影業公司)가 제작한 영화 <출로 出路>(1933)를 감독했으며, 1934년에 마찬가지로 연화에서 완성한 완령옥 주연의 <상해여 잘 있거라! 再會吧, 上海!>를 끝으로 상하이 영화계를 떠났다.(이 시기 만들어진 영화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상해여 잘 있거라!>는 영상자료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정기탁은 1934년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1937년에 죽었다.)

그런데 이 이름을 한국영화사 안에서 호명해오는 데에는 적잖은 난감함이 따라붙는 게 사실이다. 정기탁은 상하이 영화계의 주류에서 활동하였다. 1928년의 <애국혼>부터 1934년의 <상해여 잘 있거라!>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를 채우는 영화들은 이 영화들이 제작된 대중화백합이나 연화가 중국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주류적 위치만큼이나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의 상해영화사의 전형적인 조류와 일치하고 있다. 즉, 1928-1929년의 그의 영화들은 1920년대 후반 상하이라는 도시에서 형성된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장르영화의 모색과 함께 하고 있으며, 이후 연화에서 완성한 두 편의 영화 <출로>와 <상해여 잘 있거라>는 1930년대 좌익 멜로드라마들을 통해 ‘중국영화의 첫 번째 황금기’를 이끌었던 이 영화사의 전형적인 영화 패턴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실천들은 중국영화사의 한 장 속에 자리매김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내셔널 시네마적 귀속이란, 그 네이션의 성립의 전후까지를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얼마나 사후적인 것인가? 월경자들의 실천이 ‘경계’의 이쪽과 저쪽에서 형성되는 사후적 담론 내로 수렴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후적 귀속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실천이 이루어졌던 바로 그 시간대 안에서 사유해본다면 어떨까?

정기탁이 대중화백합에서 출연작까지 포함하여 무려 12편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1928-29년, 상하이라는 시공간은 특별히 흥미롭다. 1919년 9월 이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포된 장소, 3.1운동과 5.4운동 이후 반제의 기치 아래 한중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미만했었던 시간. 나아가 열강들의 조계지이자 1차대전 이후 이 지역 일대에서 가장 활발한 산업과 무역의 거점지로서 1925년의 5.30 운동에서 시작된 반제 계급투쟁으로서의 ‘혁명’의 열기가 뜨거웠던 장소, 1927년 국민당의 우경화와 장제스의 4.12 쿠데타로 이 ‘혁명’이 폭력적으로 좌절된 시간. 또한 1928년은 이후 이 지역 일대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대중문화적 자원으로 기능할 어떤 장르영화가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이해 <불타는 홍련사 火燒紅蓮寺>(명성영화사)의 성공으로 불붙은 무협영화 붐은 거의 이상 현상이라고 할만한 사태를 불러일으켰으며, 관객들은 홀린듯 이 새로운 장르영화가 보여주는 운동과 시각적 쾌감에 사로잡혔다. 붐이 피크에 달한 1929년 한해에만 85편이 제작된 무협영화는 1928년에서 1931년 사이 무려 250여 편이 만들어졌다. 이 조류의 한복판을 통과해갔던 동시대인의 증언처럼 말 그대로 ‘미친 물결(狂濤)’가 같았던 이 흐름에서 자유로운 곳은 거의 없었으나 정기탁이 몸담고 있던 대중화백합역시 여기에 매우 적극적으로 호응하던 영화사였다. 1928년에서 29년까지 약 1년 반 동안 이 영화사에서 만들어진 30편의 영화 중 거의 절반이 무협영화였으며, 같은 기간 정기탁이 대중화백합에서 감독 혹은 배우로서 관여했던 11편의 영화 중 다수가 이 장르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 영화들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해왔던 자들은 상하이와 남양 일대의 공장과 농장의 노동자들, ‘농공(農工) 군중’이라고 불려졌던 자들이었다. 말하자면 무협영화는 이제 막 형성된 대규모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지역 최초의 액션영화였다.

1920년대 후반의 상하이, ‘농공 군중’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끌어모은 최초의 액션영화 장르로서의 무협영화, 이 장르와 연계되어 있는 조선인 망명자의 영화적 실천. 다시 한번 언급컨대, 이 점들을 잇는 첫 장면에 들어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애국혼>이다. 상하이 영화계에서의 정기탁의 성공적인 안착을 가능하게 한 이 영화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거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협영화 장르가 이 지역 일대에서, 나아가 화교 문화권과 상관없는 장소(이를테면 1960년대 후반 이후의 한국과 같은 지역을 상기해보자)에 끼친 광범위한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이 순간은 어떤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원형이 당도한 기원의 시간이라고 할만하다. 그 첫머리에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라는 행위에 집중한 안중근 서사가 동시도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전통적인 문의 강조로부터 무로의 이동이 20세기 초 이 지역에서 사유되었던 근대적 국가 성립에의 열정과 이를 떠받치는 근대적 신체의 문제와 관련있다면(근대국가라는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는 ‘상무(尙武)’) ‘법을 범하는 무’로서의 협은 반식민지 상태의 중국과 식민지 조선에서 상상되었던 아나키한 힘에의 열정과 관련있다. 동시에 수중의 폭력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자, 협객은 <애국혼>에서 국가 간 교전이라는 주권적 행위를 수행하는 자와 겹쳐진다.

먼저 안중근에 대해 말하자면, 중국에서 안중근은 1909년의 그의 거사 직후부터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었다. 일찍이 량치차오가 이 거사 직후 쓰여진 「추풍단등곡 秋風斷藤曲」(1909)에서 그를 형가와 예양에 비견한 이래, 그에 관한 시문과 평전이 꾸준히 등장했으며 1919년 5.4운동 시기에 안중근 의거를 소재로 다룬 극은 반제반봉건 투쟁의 중요한 수단으로서 중국 각지의 학생연합회에서 빈번히 상연되었던 레파토리 중 하나였다.(안중근의 서사는 1937년의 중일전쟁 발발 이후의 항일 선전대에서도 중요한 레파토리 중 하나였다.) 이 이름이 지닌 반제 항일의 아이콘적 지위를 생각한다면 정기탁이 대중화백합에서의 그의 첫 번째 영화 프로젝트로 안중근 스토리를 선택한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정기탁의 이 상하이에서의 첫 영화는 가히 성공적이라고 할만했다. “군사를 날줄로 삼고, 로맨스를 씨줄로 삼았으며, 의기 충만한 격앙감”이 있는 “고상한 스토리”로 소개된 <애국혼>은 근래 ‘국산영화’ 중 사상적으로 가장 충만한 영화(《申报》 1928.11.11.)라는 극찬을 이끌어냈다. 이 영화의 필름은 남아있지 않지만, 공개 당시 쓰여진 동명의 영희(影戲)소설 碧梧, 《爱國魂》(《電影月報》1928年 第7期). 이 자료는 영상자료원에 소장되어 있다.
을 통해 면모를 확인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위국(魏國)의 정치가 등박문(縢溥文)은 여국(黎國)의 간신 여용(黎庸)을 매수하여 이 나라를 침탈하고자 한다. 어느날 이들의 음모를 알게 된 샤딩춘(夏鼎醇)이 안영진(晏永鎭)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영진은 등박문을 암살하기 위해 그에게 폭탄을 던지나 실패하고 등박문의 수하에 의해 횃불로 불태워져 죽임을 당한다. 한편 영진의 아들 안중권(晏仲權)은 누이동생을 괴롭히는 위국 병사를 때려죽이고 도망치던 중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다. 몰래 상하이로 건너간 중권은 그곳에서 ‘중국인 혁명가’ 주한룽(朱漢龍)을 만나 의기투합하고 한룽의 누이동생 아이란(愛蘭)과 사랑에 빠진다. 중권과 한룽은 서울로 잠입하여 거사를 치루려고 하나, 호텔에서 등박문을 향해 겨눈 중권의 총구는 빗나가고 만다. 중권과 한룽, 샤딩춘과 박재명은 다시 등박문의 암살계획을 세우지만, 여관 하인의 밀고로 들이닥친 위국 병사들에 의해 중권은 체포되고 샤딩춘은 죽음을 맞는다. 하인의 회개로 힘을 합쳐 중권을 감옥에서 구출해내는 한룽과 박재명. 그 와중에 하인은 죽지만 중권은 무사히 탈출한다. 중권, 한룽, 박재명은 두만강을 건너 장일성(張一成)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여기에 중권의 동생 옥실 또한 합류한다. 뒤따라온 위국 군대와의 전투에서 장일성이 죽고 자신의 어린 아들을 중권에게 부탁한다. 남은 자들은 홍콩으로 떠나 류동샤(劉冬夏)의 집에서 후일을 도모하고, 와중에 옥실과 한룽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한편 중권을 그리워하던 아이란은 그리움으로 병들어 죽는다. 두만강 근처의 의용군에 합류한 중권, 한룽, 재명, 옥실. 어느날 적의 상황을 정탐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한룽과 재명이 위군 병사에게 체포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재명은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으로 목숨을 잃고, 고문으로 양쪽 눈을 잃은 한룽은 중권에 의해 구출된다. 류동샤로부터 등박문이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중권은 한룽에게 옥실을 부탁하고, 홀몸으로 하얼빈으로 떠난다. 드디어 등박문의 저격은 성공하고, 체포된 중권은 늠름한 모습으로 사형당한다.

등박문(縢溥文), 여용(黎庸), 안중권(晏仲權) 등 한자음의 종족성을 통해 희자(戲字)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 고유명사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이야기는 1920년대 상하이라는 장소에서 가능했던, 피식민지인과 반(半)식민지인이 항일과 구국이라는 공통의 가치로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에 관한 가장 강렬한 상상태를 보여준다. 한국 혁명가와 중국 혁명가는 거듭되는 전투와 체포, 탈출, 다시 전투를 통해 피를 나누고, 급기야 한국 혁명가가 중국 혁명가에게 자신의 동생을 부탁할 때 실제로 ‘형제’가 된다.
 
<애국혼>은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일단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라는 사건을 제외하고는 안중근의 실제 이야기와 그다지 상관없어 보인다. 정기탁은 안중근 스토리를 제재로 삼았지만 그의 전기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이 이야기를 오직 암살 시도, 실패, 탈출, 추적, 전투로 이루어진 활극영화로서 다루었다. 이 이야기가 지극히 흥미로워지는 것은 영화가 시작되는 저 순간이 어떤 전사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국혼>은 명백히 한국영화의 기원적 장면이라고 할만한 것을 반복하고 있다. 이 순간 정기탁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분명 1927년 조선영화 최대의 히트작 <아리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을 염두에 놓고 보자면, <애국혼>은 마치 <아리랑> 이후, 혹은 <아리랑>의 저 출구 없는 결말 너머를 상상하는 소망처럼 보인다. <아리랑>의 영진처럼 <애국혼>의 중권 역시 여동생을 폭행하려는 자를 때려죽인다. 그러나 영진이 일본 순사에게 묶여 고개를 넘어가며 그저 아리랑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면 일본 ‘군인’을 때려죽인 중권은 국경을 넘어 상하이로 건너간다. <애국혼>이 반복하고 있는 <아리랑>의 이 장면은 왜 그토록 강렬한 것인가? 이 장면이 보여주는 바는 세 가지이다. 먼저 ‘그’는 자신의 수중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만큼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낫을 들어 죽인다) 둘째, 그러나 그 폭력이 발현되는 순간 그는 법에 포박당한다.(순사에게 잡혀간다) 셋째, 이 법은 당연한 말이지만 식민지 권력이 이곳에 강제한 것이다. 조선이라는 내부가 아닌 상하이라는 외부의 장소로 탈주한 <애국혼>은 바로 이 장면을 반복하면서 사적 폭력을 공적 폭력으로 옮겨온다. 즉 결투는 이제 전투로 옮겨갈 것이다. 식민과 수난의 땅으로서의 조선과 주권과 주권의 교전이 일어나는 장소로의 중국 혹은 상하이.

동시에 <애국혼>의 시작 지점이 구축해놓은 등박문을 죽이려다가 죽임을 당한 아버지 안영진의 죽음이라는 사건(이것은 안중근의 전기적 사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은 등박문 암살이라는 중권의 행위를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동시에 아버지의 복수라는 사적인 원념과 나라를 구한다는 공적인 가치를 일체화시키는(게다가 이 아버지 스스로가 ‘구국’을 위해 일어섰다가 죽임을 당한 자임을 상기해보라) 한편 이 영화를 동시기의 유행장르, 무협영화의 장르적 특성으로 밀어넣는다. 무협 장르의 내러티브적 핵심은 젊은 남자(혹은 여자)가 행하는 복수에 있다. 그 혹은 그녀는 스승, 아버지, 주군의 원한을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다. 복수는 행위의 근본적 추동 요인이다. 그런데 복수는 최선의 경우라 하더라도 (종종 이들은 충과 효라는 이 세계의 ‘보편적’ 윤리를 끌어들이지만) 개인의 개인에 대한 응징, 사적 폭력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애국혼>은 항일과 구국이라는 대의를 아버지의 복수라는 사적 원념과 일치시킴으로써 한편으로 흥행 장르의 규약을 공유하면서 이를 넘어서고자 한다.

안중근의 실제 이야기로부터 영감 정도를 받아 자유로운 각색이 구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중권이 의용군에 합류한 이후 등박문의 암살에 성공한다는 사실에 부합하는 설정을 고수하고 있는 지점은 새삼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 설정은 중권의 행위가 도당적 행위가 아닌 군사적 행위임을 역설하는 것으로 보인다. “군사를 날줄로 삼고, 로맨스를 씨줄로 삼았”다는 이 영화의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영화는 이 순간 군사영화, 다시 말해 전쟁영화이다. <애국혼>은 아버지의 복수를 행하는 아들이라는 무협영화와 구국의 항전이라는 전쟁영화를 겹쳐놓음으로써 식민지/반식민지의 경험 위에서 형성된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하나의 원형적 틀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이제 막 시작된 무협영화의 컨벤션과 전쟁영화를 뒤섞고 있는 <애국혼>을 좀더 적극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애국혼>은 안중근이라는 실제 인물의 표상, 반제와 항일이라는 반(半)식민지 중국과 식민지 한국의 공통적 이념 하에 협과 의리에 기반한 복수 서사를 전개해나간다. 그럼으로 이 반제 ‘액션영화’에는 무림 혹은 강호라는 판타지 공간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근대 국제 정치의 교전/전쟁의 문제와 혁명 혹은 반란의 상상인 ‘협’의 문제가 교직된 <애국혼>은 소위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대표 장르로서의 ‘무협영화’를 통해 3.1운동과 5.4 운동 후의 한중연대의 정치적 움직임과 계급투쟁으로서의 5.30 운동과 동아시아적 액션이라는 문화적 과제가 어떻게 교직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투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애국혼>이 절반쯤 기대고 있던 무협영화는 1931년 이후 적어도 상하이의 주류 영화 산업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국민당 정부는 상하이를 비롯해 전국적 규모로 이 장르의 제작을 전면 금지하였다. 이후 중국 본토에서 거의 상영될 수 없었던 무협영화의 제2차 붐이라고 할만한 것은 1960년대 중반 홍콩에서, 정확히 첫번째의 붐을 이끌고 목격했던 자들에 의해 가능해졌다. 1920년대 말 무협영화붐의 중요 에이전시였던 천일(天一)영화사의 후신인 쇼브라더스는 1965년 <강호기협 江湖奇俠>(서증굉)을 시작으로 ‘무협신세기’를 선언하며 이 장르를 ‘모던’하게 환골탈태시키고자 하였다. 쇼브라더스의 기획은 호금전의 <대취협 大醉俠>(1966)과 홍콩 영화 최초의 백만달러(홍콩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인 장철의 <독비도 獨臂刀>(1967)로 성공적으로 안착하였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 영화들은 이제 남한으로 구획된 대한민국의 영화시장에 적극적으로 어필한 최초의 무협영화가 되었으며, 이후 이곳의 남성 하위문화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는 대중문화의 자원으로 기입되었다. 다음 시간에는 바로 이 기입의 순간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글의 내용 일부는 필자의 「협(俠)과 액션,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역사적 기원 - 정기탁의 〈애국혼〉과 상하이 무협영화」(홍지영 공저)를 가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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