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안나 감독판, 2022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23-01-09조회 5,558

쿠팡플레이가 야심차게 제작한 <안나>(이주영, 2022)는 공개되자마자 호평을 받았다. 빠른 호흡의 서사 전개, 단독 주연으로 조용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배수지의 강렬한 연기, 계급성을 드러내는 미술과 의상은 구독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갑작스럽게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 상실한 사람들의 시점을 밀도 있게 그려낸 데뷔작 <싱글라이더>(2017)의 이주영 감독을 연출로 선택한 것이 적중한 듯 했다. 그러나 공개된 지 얼마 안 돼 감독을 비롯한 주요 창작자들이 <안나> 6부작(러닝타임 304분)의 크레디트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빼달라는 이례적인 요구를 했다. 감독은 쿠팡플레이가 최종 편집권을 약탈해 갔다고 주장했다. 쿠팡플레이는 감독의 8부작 판본(러닝타임 429분)에 불만이 있었고 100분에 가까운 분량을 감독의 동의 없이 편집해 공개했다. 이주영 감독은 <씨네21>(배동미, 2022.8.11)에서 “(쿠팡 플레이는) 뭐든 돈으로 사면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인터뷰했다.

2021년 서비스를 시작한 쿠팡플레이는 국내 OTT 중에서도 후발주자이다. 모회사인 쿠팡과 쿠팡플레이의 관계는 아마존과 아마존 프라임이 갖는 사업전략과 유사하다. 영화 스튜디오나 비디오 유통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다른 플랫폼과 차이가 있다. 쿠팡은 아마존처럼 온갖 소비재를 판매하는 인터넷 유통 플랫폼이고, 콘텐츠 구독권과 쇼핑 회원멤버십을 결합한 상품을 제공하고 있다. 오리지널 콘텐츠가 충분치 않고 주로 스포츠 중계와 예능 콘텐츠에 집중하던 쿠팡플레이는 <안나> 같은 서사와 영상미학 모두에 있어 완성도 있는 화제작을 제공해 기존 OTT의 영상문법에 익숙한 구독자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 같다. 그러나 쿠팡플레이는 자신들이 투자하고 배급하기 때문에 창작의 최종 권한을 살 수 있다고 믿었고, 이는 돈과 사회적 지위가 서로를 판단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 동시대 한국 사회를 비판한 <안나>의 메시지에 완전히 반하는 일이었다. 이 사건은 영상창작물을 포함해 성격이 다른 모든 것들이 하나의 플랫폼에서 ‘상품’으로서 경계 없이 유통되고 판매되는 시대에 창작권을 질문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영상연출의 역할을 고민하게 한다.
 

결국 협상이 이뤄지고 <안나> 감독판이 함께 공개되었다. 그리고 구독자들은 <안나>의 두 가지 판본, 쿠팡플레이의 6부작과 감독의 8부작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안나>는 정밀아 소설가의 <친밀한 이방인>(2017)을 각색한 작품이기에 비교할 대상, 즉 콘텐츠가 늘어나는 현상이 발생한다. 언론은 추가된 2부작이 만든 차이를 논평하기 시작했다. 일부 언론은 두 버전이 “대동소이”하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한경> 김지원, 2022.8.14). 서사의 줄기는 크게 다르지 않고 어차피 이유미를 연기한 배수지의 스타성에 기댄 시리즈이기 때문에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다는 논리였다. 쿠팡 플레이의 6부작이 빠른 전개로 몰입을 높여준 반면, 감독의 8부작은 장황한 인물 배경 및 심리 묘사로 늘어진다는 논평도 있었다. 짧은 시간 내에 서로 다른 두 판본이 공개되면서 벌어진 논란들은 OTT 플랫폼에서의 관람 경험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고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를 준다.

플랫폼에서 유통되는 시리즈는 한 번에 몰아보기를 유도하거나 구독유지를 독려하기 위해 첫 화에서 자극적이고 속도감 있고 선명하게 캐릭터와 서사를 설명하는 것을 선호한다. 다시 말하면, 복잡하고 모호한 심리 묘사나 정보성 서사와 상관없이 뉘앙스를 만들어 주는 장면들은 특히 시리즈 초반에서는 자제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안나> 감독판과 쿠팡플레이 판본의 차이도 비슷한 곳에서 발생한다. 유미의 선택과 욕망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좀 더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장면들, 그리고 출신대학, 사회적 지위, 경제적 자산 등에 따라 나눠진 계층사회와 허위의식에 대한 비판적 묘사들이 많이 삭제되었다. 초반 에피소드에 배치되어 있던 유미의 열망과 파국을 암시하는 ‘라 에스메랄다’의 발레 무대, 고등학생 시절 어린 유미의 감정을 이용하고 배신한 남교사의 비겁한 행태,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시작했던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과정, 자신의 거짓말로 모든 것을 잃고 열심히 살려고 하는 와중에 일어나는 폭력(고시원 총무의 성추행)과 차별(현주 가족의 무시)의 장면 등이 삭제되었다.
 

유미의 ‘허영’은 어떤가? 분명 유미는 자기 욕망을 드러내고 충족하고자 하는 의지에 있어 남다르다. 피아노, 발레, 그림 등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유미는 부모의 경제력을 볼 때 지나친 욕심으로 보인다. 하지만 왜 어떤 아이의 꿈은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성이 되는 반면, 다른 아이의 꿈은 자기 분수를 모르는 허영이 되는가. 욕망과 허영 사이의 선은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특히 허영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최대 악행으로 그려진 역사를 고려해볼 때 더욱 그 선은 분명치 않다. 감독판과 달리 쿠팡플레이 6부작에서는 이 모호한 경계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남교사와의 연애도 마찬가지다. 쿠팡플레이 6부작만 보면 유미는 교사와 연애한다는 것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허영심에 가득 찬 아이로만 묘사된다. 그러나 감독판에서는 유미의 감정이 어설프긴 하지만 진심이었을 수 있고 오히려 그 진심을 남교사가 이용한 것이었음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남교사는 유미와의 관계에 대해 거짓말을 하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서사를 구성한다. 상호적이라고 믿었던 그녀의 어설픈 사랑의 감정은 여자아이의 간교한 유혹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유미는 과잉처벌로 학교에서 쫓겨난다. 첫 시작에서 유미는 타인의 거짓말로 뿌리 뽑히고 낙인찍힌다.

삭제된 장면 중 갤러리에서 일하던 유미가 인격적 모멸을 느끼고 갤러리 창밖에 내리는 눈을 공허하게 바라보는 장면은 감독판과 쿠팡플레이 판본의 차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서사적 정보와는 상관없다. 계급적 취향을 전시하는 하얗고 깔끔한 갤러리 실내,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에도 휴가를 받지 못하는 유미의 현실, 갤러리 오너인 현주(정은채) 가족이 남긴 와인을 마시며 즐거워하는 동료 직원들에게 느끼는 혐오감, 큰 유리창 밖으로 아름답게 떨어지는 눈은 아이러니를 만든다. 이 장면은 대사 한 줄 없이 현주의 여권과 증빙서류를 훔쳐 도망치려는 유미의 결심을 충분히 이해하게 만든다. 부당함과 기만에도 묵묵히 일해 온 유미는 자신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게으르고 부도덕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현주 가족의 공격에 자기 정체성과 존재가 텅 비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유미는 더 이상 자신을 알 수 없게 되며 자기 정체성을 계속 유지할 힘과 의지가 사라진다. 이 장면은 시청각적인 연출을 통해 관람자들이 유미의 복잡한 심정과 존재의 상태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결정적 장면이다. 또한 영상연출을 하는 감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증명한 장면이기도 하다.
 

쿠팡플레이 판본에서 정작 감독과 원작이 의도한 질문은 사라진다. 사실 유미뿐 아니라 대다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금수저로 태어난 현주, 정치인 남편, 선배 교수와 학장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타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인생이다. 거짓말을 한다 해도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체계 내에서 그것을 진실처럼 믿게 만들 수 있다. 그들은 자기의 속물적이고 악랄한 속성을 뻔뻔하게 드러내도 피해가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눈치를 보지 않는다. 반면 감독판에서 묘사된 유미는 대학 불합격이라는 한번의 ‘실패’를 겪은 후 계속 눈치를 봐야 하는 삶을 산다. 그에게 두 번째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선을 넘을 수 없다. 오히려 안나의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유미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성찰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유미가 안나로 살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사기를 칠 때 정말로 노력하고 좋은 성과를 냈다는 것이다. 유미가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유학을 잘 보내고 대학원에서 좋은 강의를 했다는 것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학위, 명문대, 명품 의상이다. 어쩌면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사회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학력과 입고 있는 옷, 머릿결 같은 외양에 집착하는 것일 수도 있다. 원작인 <친밀한 이방인>의 정한아 작가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드라마는 원작보다 유미의 회복능력과 주체성을 강조한다. 유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용기가 있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속죄하려 시도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사실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결말에서 유미는 자신의 거짓말로 죽음에 이른 현주의 아이를 거둔다. 추운 캐나다 어딘가에서 유미는 이름 없는 사람으로 그래도 살아남으며 그제야 자신을 되찾는다. 6부작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지우며 창작권을 되찾아 온 이주영 감독과 제잔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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