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e or Less 모어, 2021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22-12-09조회 4,622

<모어>는 무용수, 드랙퀸 예술가, 뮤지컬 배우, 에세이스트로 활동 중인 모지민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다큐멘터리이다. 영화의 제목 ‘모어’는 모지민의 예명으로 ‘more(조금 더)’와 ‘毛漁(털 난 물고기)’를 함의한다. ‘more’는 화려하고 과잉된 드랙퀸 미학을 지시할 수도 있지만, 트랜스젠더인 그를 향한 사회의 잔인한 편견에 의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꿈과 욕망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육지에서도 물에서도 이질적인 ‘털 난 물고기’처럼 관습적으로 주어진 자리를 넘어서 그 이상의 다른 자리를 찾아 나선 비규범적 존재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은 ‘털 난 물고기’에게 ‘털’이 살아가는 데 무슨 소용이냐고 존재 이유를 따져 물으며 괴롭히지만, 모지민은 오히려 그 털의 움직임과 방향, 그리고 길이와 색을 다양하게 만들며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실천해오고 있다.

영화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발레의 길에서 이탈한, 그럼에도 예술가로서 살아남은 모지민의 삶을 예찬한다. 발레 전공으로 예고를 나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발레리노가 아닌 발레리나가 되고 싶던 모지민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그 길에서 이탈한다. 여성성을 버리라고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무용계에서 모지민은 예술가로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발레리나라는 최선의 선택지가 있었지만 세상은 그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드랙퀸 공연은 그 대체제였다. 그래서 드랙퀸 공연은 그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그가 발레리나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비극, 그럼에도 춤과 공연이라는 예술적이고 신체적인 표현에 대한 갈망을 채워준 환희의 무대, 그리고 클럽에 놀러 온 관중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엔터테이너로서 감정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노고. 그에게 드랙퀸 공연은 복합적인 대상이다.
 

영화 <모어>는 드랙퀸으로서의 모지민에 대한 매혹을 숨기지 않는다. 클럽에서 드랙퀸 공연을 하고, 뮤지컬 오디션을 보고, 애인에 대한 애정과 소소한 갈등을 드러내고, 농촌지역에 사는 부모님을 방문하는 등 모지민의 일상이 스케치 되는 가운데 화려한 쇼가 계속된다. ‘쇼는 계속 된다’는 뮤지컬 장르의 정언명령에 의해서 말이다. 서울과 뉴욕 같은 대도시 한복판에서, 부모님의 살고 계시는 고향의 논밭 사이에서, 아버지가 운전하는 경운기 위에서, 황량한 항구에서, 눈 내리는 산 속에서 그는 화려한 분장과 의상을 더한 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드랙퀸은 기본적으로 과잉의 미학이다. 여성성의 인위적 과장은 기존 사회에서 규범화된 여성성이 원래 얼마나 과장되고 인위적인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정해진 자리와 규범을 초과하는 일탈의 쾌락을 공유하고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전시한다. 드랙퀸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무언가를 ‘더(more)’ 덧붙이는 방식으로 모지민을 보여준다. <모어>는 미국의 드랙 리얼리티 경연쇼 <루폴의 드랙 레이스>(2009~현재)나 드랙 문화를 소재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포즈>(2018~2021)에 나올 법한 프로페셔널하고 미학적인 드랙 공연을 삽입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과장되고 장식적인 아름다운 드랙쇼 만큼이나 집중할 것은 덧붙이기보다는 덜어냄을 통해 만들어내는 공연과 마음들이다. 영화는 자주 삽입되는 야외 공간에서의 드랙쇼 외에 실내의 어두운 무대에서 나체로 춤을 추는 모지민의 공연을 길게 보여준다. 이 공연에서 모지민은 어떤 분장이나 의상도 없이 춤을 춘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모지민이 큰 갈등과 어려움 없이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지냈다고 과거를 기억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어른들은 알 수 없거나 눈치 채도 크게 의미두지 않았던 따돌림과 폭력이 있었다. 나체로 춤을 추는 한 장면에서 모지민의 뒤로 중학교 시절 친구로 은유되는 댄서가 어둠 속에서 등장해 그의 목을 조른다. 그는 강렬한 분장을 하고 있다. 어른들이 아름답게 추억하는 이면에는 어린 모지민의 혼란, 고통, 분노, 좌절이 공존했다. 영화는 그가 감당했어야 할 어두운 이면이 무엇이었는지 깊고 상세하기 묘사하기 보다는 춤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사실 비수술 트랜스젠더로서 자신의 나체를 보여주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모지민은 자신의 신체가 표현하는 주체이자 오브제이기도한 예술가로서 자신과 세계와의 복잡한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표현과 장식을 덜어내고 어두운 이면을 보여줄 것을 선택한다. 더함과 덜어냄, 넘침과 모자람, 화려함과 단순함 모두 모지민이기 때문이다. 장난스럽고 인위적이고 과장된 독백의 내레이션과 대화하듯 자연스러운 내레이션이 교차해 나오지만 둘 모두 모지민의 목소리인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카메라는 분명 뮤지컬적인 드랙의 화려한 스펙터클에 매혹되어있고 그것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동기임을 숨기지 않는다. 동시에 모지민이라는 예술가가 표현하고 싶은 어둡고 미니멀한 춤과 침잠되어 있던 마음을 표현할 자유로운 무대를 펼쳐주기도 한다. 극단의 표현들은 대립적이지 않고 서로를 밀고 당긴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보여주어야 하는 스크린과 다 보여줄 수 없는 스크린 밖 현실이 그 경계를 끊임없이 이동시킨다. 감독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모지민은 예술가 대 예술가로서 끊임없이 협상을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큐멘터리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극영화보다 얇고 투과성도 높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거나, 완성된 다큐멘터리가 단순히 현실을 변화시키는 식의 일방향으로만 힘이 흐르지는 않는다. <모어>는 영화와 현실, 보고 싶은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 보여줄 만한 것과 끝끝내 보여주지 못한 것 사이의 얇은 경계막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파열되고 움직이고 있는 현장을 포착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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