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누에치던 방, 2018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22-11-04조회 3,807

이완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사랑의 고고학>(2022)에서 주인공 영실(옥자연)은 고고학을 공부하고 30대에도 여전히 현장에서 흙을 털어내고 고르며 유물을 찾아내는 연구원을 하고 있다. 지도교수를 비롯해 같이 공부한 사람들이 이제 아카데미로 들어와 일을 찾으라고 해도 영실은 시간을 직접 만질 수 있는 현장이 좋다. 유적 안에 있는 옛 건물과 주거지가 변경되었음을 알려주는 지표인 유구선(遺構線)을 직접 붓으로 하나하나 흙을 털어내며 만지는 것은 시간의 과거와 접촉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영실이 자기의 삶 자체를 멀리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지층처럼 중첩된 과거, 현재, 미래가 발굴된 유적 현장처럼 그 시간들과 시간들 사이에 켜켜이 쌓여 있는 마음들의 유구선을 끈질기고 집요하게 털어내고 고른다. 그것이 무엇이고, 언제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마음으로 변해갔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해갈지 지켜보면서 말이다. 때로는 그러한 고고학적 실천이 영실 스스로를 상처 내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영실은 모두가, 심지어 함께 사랑을 확인하고 미래를 약속했던 연인이 떠나고 그 남자가 야기한 폭력으로 폐허만 남은 후에도 그 감정의 결과, 약속의 의미와, 폭력의 메커니즘의 유물을 섬세하게 손끝으로 감각하며 끝끝내 자신의 삶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시간을 응시하는 자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뒤늦음’의 시간이나 ‘후회’라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고학 현장에서 ‘이후의 시간’은 뒤늦지 않고 언제나 적당한 때이기 때문이다.

이완민 감독의 첫 번째 장편 <누에치던 방>도 두 번째 작품처럼 시간과 마음의 지층들을 보살핀다. <사랑의 고고학>이 40대에 다다른 여성이 30대의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발굴하는 데 집중하는 영화라면, <누에치던 방>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할 만큼 큰 상처가 각인된 청소년기의 시간의 방에 갇혀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힘든 이들이 서로를 지켜봐주고 증언하고 그 지층의 실들을 발굴하는 영화다. 그렇게 교차적으로 목격된 시간들은 사회를 만든다. 독립된 인간이란 사회에 참여하면서 사는 인간이다. 이 영화는 30대, 40대가 된 성인들이 서로의 청소년기를 목격하고 상대에게서 우연히 자신의 흔적을 찾아내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10년 째 고시공부를 하다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실패한 미희(이상희)는 남자친구와도 헤어진다. 고등학교 때부터 오로지 공부를 목적으로 친구 관계도 모두 끊어내고 고립되어 살아온 미희는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미희는 고치에서 나오지 못한 애벌레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지하철에서 볼펜과 메모지를 나눠주며 자기한테 하고 싶은 말을 그게 뭐든지 적어달라고 호소하는 고등학생 유영(김새벽)을 만난다. 유영 역시 이 사회 속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이 있지만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키는 데 서툴다. 유영을 쫓아간 미희는 아파트 문을 두드리고 성숙(홍승이)을 만나게 된다. 미희는 충동적으로 한 번도 본적 없는 성숙에게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단짝친구라고 한다. 성숙은 그런 미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느끼면서도 집안으로 들여 다독여준다.
 

이 영화에서 성숙은 유일하게 사회에 참여하는 이다. 성숙은 미희에게서 자신과 자신의 진짜 어린 시절 단짝친구인 유영의 흔적을 읽어낸다. 미희는 부모의 만족을 위해 평생을 자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단절해온 상처를 갖고 있고, 성숙과 성숙의 남자친구 익주(임형국)는 단짝친구 유영을 잃은 상처를 안고 산다. 성숙과 익주는 유영이 죽은 이유를 알 수 없다. 유영은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말을 하고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유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성숙은 이제 겨우 고치에서 탈출해 사회로 나오려고 하는 미희에게서 그런 유영의 흔적을 처음부터 본다. 그리고 진짜 단짝 친구였던 것처럼 관계를 맺는다. <누에치던 방>은 30대인 성인도 뒤늦게 고치에서 나올 수 있다고 다독여진다. 그럴 때 아무 말 없이, 이유도 묻지 않고 친구로 받아들여주는 성숙 같은 주변인이 있다면 실패하고, 늦었더라도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연극배우인 성숙은 거리에서 어떠한 인위적인 무대장치나 소품도 없이 돈키호테를 연극하는 실험적인 공연을 한다. 관객도 지나가는 거리의 행인들이다. 그럼에도 성숙이 칼을 들고 풍차를 향해 달리는 연기를 하자 사람은 말이 되고, 지저분하고 무미건조한 회색도시의 풍경은 초원이 된다. 성숙은 사회에 참여하는 동시에 자기 주변의 사회를 바꾸는 사람이다.
 

미희는 과거에 자신이 모질게 굴어 단절했던 고등학교 친구와 대학교 선배를 찾아가 시간과 관계를 회복해 보려 한다. 그러나 선배와의 만남은 다소 허무하고 고등학교 친구는 만나주지 않는다. 결국 자살까지 시도하려던 미희는 수술을 하게 됐으니 보호자가 되어줄 수 있느냐는 성숙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자살을 포기한다. 늘 보호와 관심을 요청하던 미희는 돌봄의 요청을 받는 자가 된다. 독립적으로 사회 속에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성숙은 사실 미희만큼은 아니지만 유영이라는 상처와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미희는 그런 성숙을 알아봐준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유영을 알지 못했던 미희는 유령처럼 다른 시간대에 출현한 유영을 알아보지만, 성인이 된 성숙과 익주는 유영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한다. 아마도 미희가 만난 유영은 진짜 유영이기 보다는 유영과 같은 상처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등학생일 수도 있다. 그리고 미희가 그녀에게서 유영의 흔적을 읽어낸 것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있는 이들이 교차하면서 서로의 이야기의 흔적을 찾아주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서사 속에서 그래도 미희와 성숙은 살아남아 미희의 고등학교 친구 근경을 찾아간다. 그러나 근경은 미희에게 ‘그만 스토킹을 하라’며 화를 낸다. 근경은 ‘이제 와서 무엇을 함께 할 수 있겠냐?’며 반문한다. 과거, 현재, 미래가 얽인 실타래처럼 혼재되어 살아가는 미희, 성숙과 달리 근경은 이미 오롯이 현재의 시간을 산다. 근경은 미희에게서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없다. 그리고 영화는 그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미희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끝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르게 흘러가고 그 시간이 언제나 맞아떨어질 수 있으리란 염원은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낙관을 말하기보다는 성숙이란 존재가 고대유물처럼 얼마나 희귀한 존재인지를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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