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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없다>와 <
마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국 장르 영화에서 모성은 오랫동안 여성인물의 주요한 서사적 동기로 사용되어 왔다. 전통적으로 남성인물이 이끄는 서사에서 자원쟁탈, 권력투쟁, 우정, 가족, 직업적 소명, 공동체의 대의 등 다양한 동기가 제시되어 온 것과 대비된다. 현실에서 가부장제가 여타의 활동공간, 역할, 관계를 허용하지 않고 모성의 자리에만 여성적 가치를 할당하며 제약해온 탓일 것이다. 역으로 주류의 허구적 서사는 자식을 위해 무조건적인 희생을 보여주는 모성성을 강화하는 신화가 되었다. 등장인물이 서사의 방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행동을 할 때는 설득력 있는 그럴듯한 동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여성인물에게는 모성이나 이성애 로맨스 이외의 상상력이 잘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잘 알다시피 그럴듯함, 핍진성, 개연성이라고 거론하는 서사적 약호들을 현실의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인과관계와 등치시켜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핍진성은 오랜 기간에 걸쳐 누적된 그래서 이제는 지나치게 당연하게 여기는 장르적 관습에 의해 상당부분 정립된다. 즉 익숙한 설정은 알고 있는 정보로서 쉽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별다른 근거제시 없이도 설득력을 높인다. 하지만 핍진성은 또한 역사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만들어내는 요소와 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고, 더 중요하게는 적극적으로 개입해 변화시킬 수 도 있다.
그렇다고 기존의 것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다. 여성인물의 주요한 서사적 동기로 모성이 아닌 완전히 다른 소재를 찾을 수 있지만, 기존의 모성서사를 구부리고 늘리고 비틀면서 스스로 균열을 내는 방법도 있다. <비밀은 없다>나 <마더>(봉준호, 2009)가 후자의 경우다. 두 영화는 자식을 잃거나 잃을 위험에 처한 엄마를 탐정으로 내세운 느와르 장르를 전유한다. 이 영화들은 자식을 위해 복수를 감행하는 폭력적 액션의 쾌감에 초점을 맞춘 일련의 모성복수극과는 다르다(<
오로라 공주>, <
돈 크라이 마미>, <
공정사회> 등). 그보다는 자식을 위해 진실을 찾아 나선 탐정-엄마들이 자신이 근거해 있던 세계를 뒤집어엎을 돌이킬 수 없는 진실을 대면했을 때의 윤리적 태도를 시험하는 데 맞춰져 있다. 일반적 탐정과 달리 그들은 피해자라고 생각되는 자식과 거리를 둘 수 없으며 그 때문에 때때로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 영화들에서 의도적으로 과장되게 그려진 격한 모성과 탐정의 진실추적의 욕망은 문자 그대로 ‘-(하이픈)’이 필요한 마찰 있는 조합이다. 두 장르적 도상의 조합은 서로를 낯설게 만들면서 의문을 품게 만든다. 두 영화의 주인공인 연홍(손예진)과 엄마(김혜자) 모두 자식을 잃거나 잃을 위험에 처하면서 모성을 발판으로 그들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거기에는 진실에 대한 욕망도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들에서 모성은 최종적 목표나 결과물이 아니라 서사의 시작점이자 욕망을 발현할 발판 정도가 된다. 여성이 강력한 욕망을 드러내고자 할 때 지배 이데올로기가 모성 내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틀 지웠던 것을 역이용한다. 한번 시동을 걸자 멈출 줄 모르는 그녀들의 폭발적인 욕망은 기반하고 있는 모성서사의 프레임을 뒤흔들어 버린다.
1970년대 활동했던 영국의 페미니스트 영화이론가 클레어 존스톤은 당대에 함께 활동했던 로라 멀비와 달리 스스로 서사에 균열을 내고 의문을 품게 만드는 진부한 도상의 사용과 여성의 집단적 판타지의 역량을 믿었다. 당시 멀비는 「시각적 쾌락과 서사영화」(1975)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에서 주류 서사영화가 이성애 남성의 성적 응시를 통해 여성을 대상화하고 서사적 쾌락을 만들어내는 영화구조를 비판하며 장르적 도상과 서사로부터 열정적으로 거리를 두는 아방가르드 영화를 옹호했다. 반면 클레어 존스톤은 스테레오타입을 반복하는, 말하자면 관습이 굳을 대로 굳어져 사유가 제거된 이미지는 스스로 균열을 만들어 내고 의심을 품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존슨톤은 멀비와 달리 대중장르영화를 옹호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화에서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것에 반대하기 위하여, 우리의 집단 판타지들은 공개되어야 한다. 여성영화는 욕망의 작용을 구체화해야 하며, 그 목적을 위해 오락영화를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오락영화의 아이디어들은 정치적인 영화를 풍요롭게 해야 하며, 정치적 아이디어들은 오락영화를 풍요롭게 해야 한다. 즉 상호소통의 과정이 필요하다.”(「대항영화로서의 여성영화」, 1973)
흥미롭게도 <그녀의 이름은 베트남>을 만든 실험영화 감독 트린 민하도 진부한 도상, 즉 스테레오타입과 관련해 유사하게 말한다. “스트레오타입은 거짓된 재현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하는 현실의 포획된 재현”(「근처에서 말하기」, 1992)이기에 시적 언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스트레오타입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해체과정, 균열, 위치바꿈, 미끄러짐, 멈춤 그 자체를 포착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러한 태도 속에서 창작자는 번역가의 위치를 자처하며 의미의 종착지를 만들지 않고 스테레오타입과 아직 말해지지 않은 실재 사이에 무언가 있음을 지시할 수 있다.
<비밀은 없다>와 <마더>는 존스톤이나 트린이 말한 낡고 낡은 도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럼에도 두 영화가 동일한 도착점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모성의 도상과 관련해 <비밀은 없다>가 궤도를 뚫고 이질적인 공간으로 튕겨져 나간다면, <마더>는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회귀해 심연에 재침잠하는 운동을 보여준다.
<비밀은 없다>의 오프닝 씬에서 연홍은 관습적으로 장르영화가 그려온 모성의 과잉된 양상을 연기한다. 그녀는 기존 사회가 원하는 모성의 텅 빈 기표를 말 그대로 뒤집어쓴다. 연홍은 그 기표가 자신이 욕망하는 곳에 데려다줄 운반체라고 믿는다. 연홍은 유력한 지역 정치인 종찬(김주혁)의 아내로 남편을 성공시켜 영부인이 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연홍은 집을 아름답게 꾸미고 남편 선거를 도우며 내조를 한다. 딸 민진도 그 기표가 얼마나 텅 비어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비밀이 아니다. 민진은 너무 비밀이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엄마를 가엾게 여기고 자신의 가상친구 ‘자혜’를 연홍의 어린 시절 정보를 모아 몽타주한다.
또한 어떤 비밀들은 연홍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감춰야 하는 어두운 비밀이 되고 폭력으로 변질된다. 모두가 거리낌 없이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지역에서 연홍 혼자만 표준어를 사용한다. 광주출신인 그녀가 자신의 출신지를 말하지 않고 사투리를 쓰지 않는 방식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더러운 것을 감추고 숨기는 비밀이 된다. 차이는 차별과 혐오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상대방 후보뿐 아니라 종찬의 선거운동원들도 연홍의 지역출신이 당연히 혐오해도 괜찮은 것처럼 말한다.
실상은 혐오의 낙인인 공공연한 비밀과 텅 빈 모성의 기표가 덕지덕지 붙어있던 연홍은 민진의 죽음 이후 달라진다. 선거가 우선인 종찬과 달리 민진을 죽인 자를 찾아내려는 연홍은 스스로 혹은 타인에 의해 덮인 기표들을 벗어낸다. 그 자리에는 각성하는 모성이 있다. 각성하고 진실을 찾아가는 연홍의 모습은 집착과 광기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푸라기 잡듯 굿을 하고, 자신의 손등을 찔러 자해하고, 민진의 이메일 비밀번호와 노트에 적힌 암호를 풀기 위해 몇날 며칠 밤을 샌다. 그러나 모두 민진의 실종과 죽음에 눈 감으려할 때 연홍은 고립되어 유일하게 진실을 찾으려는 자다. 그녀의 광기와 집착은 오히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연홍은 남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딸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비밀을 폭로한다. 자신의 애초의 욕망이 얼마나 스스로와 딸을 해하는 기반에 근거했는지를 연홍은 깨닫는다.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들은 기존 사회로부터 더러운 비밀이 있는 자들로 분류되어 왔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그들을 배제하고 주변화하기 위해 ‘더러운 비밀’을 폭로해 ‘추문’을 만드는 방식을 자주 사용해왔다. 연홍은 남편 종찬에게 동일한 방식을 돌려준다. 연홍은 딸의 복수를 위해 종찬이 선거에서 이겨 목적을 달성한 순간 비밀을 폭로하고 추문에 휩싸이게 만든다.
첫 유세가 있는 남편과 친구 자혜와 함께 과제를 하다 늦게 들어오겠다고 하는 딸 민진(신지훈)을 알뜰살뜰 보살피는 첫 장면 바로 직전에 충혈되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연홍의 얼굴 클로즈업이 붙는다. 이 쇼트는 <마더>에서 석양이 내리쬐는 갈대밭에서 정신을 놓은 듯 춤을 추는 엄마의 첫 쇼트와 상응한다. 기존의 많은 영화들에서 충격을 받아 초점을 잃은 여자의 얼굴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녀의 존재와 이미지는 그 자체로 그 충격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야 할 미스터리가 된다. 그러나 연홍과 엄마는 모두 스스로 미스터리이자 사회의 미스터리를 푸는 탐정이 된다. 미스터리로서의 모성을 만들어낸 사회적 구조는 자신 스스로를 포함하고 있기에 미스터리를 풀고 진실을 대면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세계를 뒤집어엎을 각성이 수반한다. 연홍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남편이 딸을 죽였다는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신이 추구해왔던 것이 다 무너지더라도 그녀의 모성은 그 진실을 뚫고 지나간다. 스스로가 그 비루한 체제의 일부였기 때문에 기존의 자신도 해체된다. 그렇게 연홍은 무지한 자에서 깨달은 자로 변모해 나간다.
가족을 해체시킬 비밀의 폭로와 진실의 대면에서 <마더>의 엄마는 자신이 아들 도준(원빈)을 죽이려했다는 사실을 도준이 알고 있다는 진실과 도준이 살인범이라는 진실 두 가지를 모두 몰랐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에 침을 찌르고 정신없이 춤을 춘다. 한편 <
올드보이>(박찬욱, 2003)에서 아버지 오대수(최민식)는 미도(강혜정)가 딸이라는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본인만 고통스럽게 진실을 품은 채 미도에게 최면을 걸어 그녀를 무지의 상태로 돌리려 한다. 여기서 미도는 알지 못한 채 근친상간을 저지른 오이디푸스, 비극의 주체인 오대수와 비교해, 진실을 모두 알고도 타인에 대한 애도를 포기하지 않는 안티고네가 될 수 있었음에도 아버지 오대수는 미도에게 아예 그러한 기회를 주지 않는다. <마더>의 모자서사와 <올드보이>의 부녀서사에서 여성들은 진실에 대면했을 때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감당하거나 이용하려는 남성들과 달리 무지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반면 <비밀은 없다>는 죽은 딸을 대체한 미옥과 함께 아직도 풀어야 할 암호가 가득 찬 ‘와일드 로즈 힐’에서 대항적 판타지의 세계를 구성하며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튕겨져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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