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현재 시점에서 <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까? <82년생 김지영>은 조남주 작가의 소설로 2016년 민음사에서 처음 출간되어 온라인과 오프라인, 대중과 지식인 담론을 가리지 않고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국내에선 2년 만에 100만부 판매를 돌파했으며 10개 언어권에 번역되어 30만부 이상 판매되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2018년 출간 이후 20만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하며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 2019년에는 영화로 제작되어 관객 수 367만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더 나아가 <82년생 김지영>은 수적인 측면에서뿐 아니라 2015년 이후 이뤄진 페미니즘의 대중화와 매체 환경변화의 측면에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이나 영화 어느 하나를 선택해 집중적으로 텍스트 분석하는 방식을 본격적으로 거부하며, 어떻게 하나의 작품 혹은 텍스트가 분리되지 않고 여러 경계를 넘나들며 매체(개)적 역할을 하는지를 관찰할 수 있게 한다. 이 글 역시 어떤 텍스트를 하나의 현상, 심지어는 매체(개)로 보고 비평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과정 중에 나왔다.
<82년생 김지영>은 영화와 소설 모두 진부함과 새로움이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는 양식을 취한다. 우선 소설의 작법을 보자. <82년생 김지영>은 디지털 시대의 대중적 페미니즘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을 부추긴다. 이 소설은 관심(attention) 받은 정보를 수집하고 가공해 한국사회의 평균값 혹은 대표값을 재현하려 한다. 중산층 가족에서 태어나 대학교육을 받고 사무직으로 직장을 다니다가 결혼하고 육아를 하며 전업주부가 된 30대의 여성이 주인공이다. 이 소설이 수집한 주목의 정보는 누구나 쉽게 접근 가능한 뉴스 기사나 그 기사들에서 인용된 통계자료다. 소설은 종종 유엔과 한국정부의 통계 및 정책 보고서, 법과 제도의 변화를 각주로 달아 숫자와 공문서에 근거해 객관성과 대표성을 획득하려 한다. 여아낙태가 급증하던 1980년대를 대표하는 ‘82년생’과 그 당시 가장 흔한 여아의 이름인 ‘김지영’, 스토킹과 성희롱, 집안의 남아선호, 직장 성차별과 경력단절, 독박육아와 여성혐오 등의 뉴스가 주인공의 연대기 안으로 들어와 에피소드를 구성한다. 그러한 정보를 모아 만들어진 주인공 김지영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재확인시키는 익숙함으로 버무려진 개성 없는 캐릭터이다. 김지영은 기존의 익숙한 세계와 대립하며 자기 고유의 세계를 고집스럽게 구축해 나가려는 근대문학의 주인공과 완전히 정반대에 있다.
어떤 면에선 김지영은 마치 1인칭 슈팅게임의 블랭크 캐릭터처럼 텅 빈 인물이다. 일본과 미국 번역본 표지에 그려진 이목구비가 비어있는 여자는 내용과 형식 모두를 지칭하며, 빙의는 그러한 양식을 극대화하기 위한 설정이 된다. 또한 한국사회의 오래된 그리고 겉으로는 많이 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전한 성차별, 즉 여성들의 ‘몫 없음’을 은유하기도 한다. 김지영이라는 텅 빈 기호는 독자들을 기다리고 초대하며 누구든 그 자리에 들어가 볼 수 있게 한다. 독자들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사가 진행되며 인물의 심리에 점진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김지영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해 몰입한다. 주목 받은 정보를 모은 인물의 구성과 거리감 없는 몰입은 새로운 수용양식이다. 이것은 회귀, 빙의(특정 서사의 주인공이 되는 빙의), 환생이 주요 장르가 된 웹소설의 경향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독자들은 회귀, 빙의, 환생의 설정 속에서 정보를 독점할 수 있기에, 비판적이고 메타적인 동시에 ‘안전’하게 상황을 통제한다. 이것이 <82년생 김지영>의 진부한 새로움이다.
육아로 경력단절 된 여성 연극배우의 오디션 과정을 다룬 단편 <
자유연기>(2018)로 주목 받은 신인 김도영 감독이 연출하고 정유미와 공유가 주연한 <82년생 김지영>은 내용적으로는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수용과 형식의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김지영이 상담 받는 정신과 의사의 보고서 형식으로 쓰인 소설과 달리 영화는 의사의 성별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꾸고 그의 역할을 축소시킨다. 소설에서 남자 정신과 의사는 김지영에 대한 묘사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동시에 에필로그에서 한국사회의 성차별에 분노하던 언사와는 달리 자기 병원의 임신한 간호사를 차별하는 위선을 드러내며 전체 형식의 틀을 잡는 역할을 하지만, 영화에서는 여자 의사로 성별이 바뀌며 김지영과 남편 정대현의 고통을 들어주고 공감하는 역할로 축소된다. 이러한 변화는 영화가 소설과 매체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텍스트로만 드러나기에 빈 기호로 작동할 수 있었던 소설의 인물들과 달리, 영화는 구체적인 배우의 얼굴이 전면적으로 스펙터클화 된다. 특히 정유미와 공유라는 스타들의 얼굴은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지영을 연기한 배우 정유미의 우울한 얼굴의 잦은 클로즈업은 내면성과 주관성을 표현하는 창구가 된다. 또한 소설에서 정신과 의사나 남편 같은 제 3자에 의해 관찰되고 기술되던 빙의나 과거 성차별/성폭력의 사건들은 영화에서 종종 지영의 주관적 시점으로 처리된다. 과거 성차별/성폭력의 사건들은 영화에서 지영의 플래시백으로 처리되고 빙의의 순간은 미세하게 흔들리는 카메라와 함께 주관적인 트라우마처럼 느닷없이 다가온다. 시청각적 구체화와 주관성의 물질화는 추상적인 구조보다 개체를 앞서 내세우며 이때 묘사된 개인의 경험은 더 쉽게 수용된다.
상업영화라는 제작조건과 멜로드라마라는 장르적 특징들이 소설이 의도했던 ‘진부한 새로움’ 즉 그 자리에의 몰입효과를 약화시키고 전통적인 심리적 동일시를 강화시켜 더 대중적으로 수용가능하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덜 논쟁적일 수 있다. 심지어 영화는 지영이 프리랜서 작가로 성공해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가족과 개인의 갈등을 잠재울 것이라는 꽉 닫힌 해피엔딩을 선사한다. 이러한 결말은 조남주 작가와 김도영 감독의 실제 상황을 참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잉여로 남아있는 불안한 순간들이 있다. 그 하나는 가족들이 모인 다인 쇼트를 촬영할 때 제 자리를 못 잡고 주춤주춤 구석으로 물러나 앉아있는 카메라이다. 구석에 숨어있는 것 같은 카메라는 접근 불가능하고 말하지 못한 것이 남아있는 느낌을 준다. 두 번째 순간은 엔딩이다. 갈등이 모두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엔딩에서 지영은 오프닝처럼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노을 지는 시간에 베란다에 나와 있다. 노을빛을 받고 있는 지영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카메라와 지나치게 인공적인 노을빛은 마치 <
트루먼 쇼>의 세트장 같은 느낌을 준다. 지영은 여전히 고립되어 있고 영화의 해피엔딩은 임시적일 수밖에 없다.
소설은 재현/대표(representation)를 함에 있어 개성, 독자성, 구체성을 제거해 대푯값을 만들어 그 자리에의 몰입을 시도한다. 이 방식은 주인공이 대표하는 집단 내부의 동질성과 각 집단들 간의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내도록 부추기고 논쟁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설명되지 않거나 잉여로 남아있는 것들은 거의 없다. 텍스트와 컨텍스트, 가상과 현실, 매체들, 장르들의 경계를 넘어서고 그 범주들을 무화하는 오늘날의 문화수용자들의 요구에 들어맞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경계들을 넘나들며 비판과 성찰을 야기하기 위해서는 정보에 대한 선명성과 양식적 안전함이 필요하다. 영화는 오히려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고전적인 심리적 동일시를 추구한다. 소설이 ‘진부한 새로움’을 추구한다면, 영화는 ‘진부함의 반복’이다. 멜로드라마라는 고전 장르의 충실한 반복은 여전히 말해지지 못한 것들,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의 잉여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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