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에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주제와 그것을 다루는 태도가 다채로워진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와 노동투쟁에의 집중에서 ‘일본군 위안부’(<낮은 목소리> 3부작), 비전향 장기수와 탈식민적 현대사(<
송환>, <
할매꽃>), 가족에 대한 페미니즘적 성찰(<
가족 프로젝트-아버지의 집>, <
고추 말리기>, <엄마...>, <
쇼킹 패밀리>), 성소수자 정체성과 수행(<
Out: 이반검열 두번째 이야기>, <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 <
3xFTM>), 여성 노동자의 역사와 투쟁(<
얼굴들>, <
밥꽃양>, <
평행선>, <
우리들은 정의파다>, <
외박>) 등 주제의 확장과 교차가 이루어졌다. 더불어 감독 스스로가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성찰적인 태도 자체를 주제로 삼거나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흐리는 트랜스-장르적 연출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정치적 참여의 장이 다변화된 동시에 독립 다큐멘터리 상영이 비교적 동질적인 집단의 공동체 상영에서 무작위적인 관객이 있는 극장으로 확장된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
장애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
팬지와 담쟁이>(계운경, 2000)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했다. 이 시기에 장애여성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들이 몇 편 더 제작되었는데 〈
여성장애인 김진옥씨의 결혼이야기〉(김진열, 1999), <
거북이 시스터즈>(이영, 2002), <
진옥 언니, 학교 가다>(김진열, 2007)가 바로 그 작품들이다. 장애여성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세 영화는 초점이 다르다. <
거북이 시스터즈>는 장애인권을 위해 헌신해온 여성 장애인 활동가 세 명이 한 집에서 가족 대안 공동체로 살아가는 일상을 다룬다면, 연작인 <여성장애인 김진옥씨의 결혼이야기>와 <진옥 언니, 학교 가다>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김진옥이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아 키우는 과정을 쫓는다. <팬지와 담쟁이>는 부산에 사는 수정과 윤정 자매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이상과 현실을 관통한다.
30대 중후반의 저신장 장애인인 수정과 윤정은 부산에서 부모형제와 함께 살고 있다. 영화는 언니인 수정이 친구들에게 소개받은 성주라는 남자와 ‘썸’을 타고 연애와 결혼을 꿈꾸는 로맨스를 서사의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나 수정의 연애는 결코 달콤하지만은 않다. 겨울에 소개 받은 후 설렘을 느끼며 봄을 지나지만 매미가 거세게 울어대던 늦여름의 어느 날 그 모든 감정과 기대들은 씁쓸하게 끝나고 만다. <팬지와 담쟁이>는 겨울에서 봄 그리고 여름의 세월을 지나며 뜨거운 여름의 열기와 아이러니하게 대비되는 상실의 쓸쓸한 정취를 그린 계절영화이고, 호프집, 미장원, 사진관, 산부인과 병원, 지하철, 공원, 바닷가, 오래된 아파트 등 1990년대 말 부산 구석구석의 풍경을 보여주는 로컬 영화이기도 하다. 로맨스, 계절, 부산이라는 세 키워드를 품은 영화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7개의 시퀀스로 구성된다. 각 시퀀스는 다음과 같은 제목이 붙어있다. ‘웨딩드레스 제작 중 1 - 야학 선생님 결혼식 - 웨딩드레스 제작 중 2- 엄마 기념사진 – 노래자랑 – 여름바다 - 웨딩드레스 제작 중 3.’
오프닝씬은 호프집에서 술 게임을 하며 성주가 수정의 흑기사를 자처하고 노래방에서 함께 <19살이에요>를 부르며 ‘썸’을 타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시퀀스의 제목은 놀랍게도 ‘웨딩드레스 제작 중 1’이다. 본격적인 연애가 시작되어 상호 감정을 나누는 단계를 모두 건너뛰고 결혼을 가정한 채 성관계와 임신 및 출산을 고민하는 단계로 돌입한다. 실제 성주의 관점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성주가 어떤 마음과 의향을 갖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썸-연애-결혼’이 압축된 시간성은 당시 부산에 거주하는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 담론과 연관되어 있다. 수정은 성주가 노래방 ‘블루스 타임’에 키가 작은 자신을 안아 들어 올려 춤을 췄을 때 활동지원사들한테 안겼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고 수줍게 털어놓는다. 그러나 연애경험이 없는 수정은 성주의 마음을 확신하기 어렵다. 동생 윤정과 연애상담을 해주는 친한 친구인 수견 언니는 수정에게 “내숭 떨지 말고” 성주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라며 다그친다. 그리고 그들은 좋아하는 마음의 확인에서 결혼의 가능성으로 곧바로 넘어간다. 설렘과 연애의 낭만은 생략되다시피 재빨리 처리되고 결혼 이후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서 안전한 성관계 그리고 임신과 출산 대한 현실적인 고민까지 급속도로 일이 진척된다. 첫 만남의 설렘은 곧 연애가 되고, 연애는 곧 결혼이 된다.
이러한 성급한 ‘웨딩드레스 제작’은 분명하게 발화되지 않지만 암묵적인 몇 가지 가정을 전제로 한다. 첫째, 수정은 성관계와 재생산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이 기회를 삼아 성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둘째, 수정은 이성애 결혼을 원한다. 셋째, 30대 후반이라는 나이와 장애를 고려할 때 수정에게 연애의 기회는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그래서 조금의 호감도 곧 결혼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넷째, 수정의 성격과 장애를 고려할 때 의지할 가족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첫 번째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가정은 모두 당연한 현실도 타당한 진실도 아니다. 오히려 수정이 정말로 결혼을 (사실은 연애도) 하고 싶은지 그리고 왜 결혼을 원하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다른 관계와 섹슈얼리티를 탐색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의 기회’를 잡는다는 건 오히려 다른 기회, 결혼이 아닌 방식으로 독립된 가구를 꾸릴 가능성을 제거하는 실천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수정이 성주와의 연애에 소극적인 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수정은 연애가 처음이고 주위에서 부추기는 분위기와는 달리 자신과 성주의 마음 모두에 확신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수정은 성주의 진심을 불안해한다. 그리고 기저에 잠재해있던 수정의 불안은 영화의 결말에서 현실화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왜 갑자기 호감 정도의 감정을 급작스럽게 결혼으로 이끌고 갈까? 여기서 <팬지와 담쟁이>는 다큐멘터리가 제작자에 의해 ‘창의적으로 구성되고 설정된 것’임을 인식하게 한다. 여러 시퀀스의 제목에 사용된 “웨딩드레스 제작 중”이라는 언어적 프레임은 장애여성이 연애와 결혼을 고려하는 데 있어 어떠한 (차별적이고 자원이 한정된)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지를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연출된 호들갑이자 인위적 과장이다. 그래서 “제작 중”이라는 현재형 표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이들은 정말로 성주와의 결혼만을 염두에 두고 이 모든 일상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인가? 영화는 규범적인 이성애중심성이라는 비판의 위험을 기어이 감수하면서도 이 프레임에 두 주인공을 넣는다. 이 프레임 속에서 수정과 윤정은 함께 성인영화 비디오를 보며 키스, 애무, 체위잡기 등과 같은 성적 행위에 대해 기혼인 수견 언니에게 교육을 받고, 각자의 장애 유형과 정도에 따라 안전한 성행위는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부끄러움 속에서 낄낄대며 대화를 나눈다. 이것이 사실상 주거의 독립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은 집에 함께 사는 친오빠 때문에 수견 언니 집에서 비디오를 보게 된 사연을 이야기할 때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자매는 수견 언니의 조언을 들어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산부인과 의사는 장애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해 얕은 지식과 희미한 편견을 드러낼 뿐이다. 욕망은 구성되기도 전에 제한된다. 나이, 장애, 성별의 교차 속에서 정보를 비롯한 자원의 부족과 차별적 편견 때문에 그들의 욕망은 끊임없이 제동에 걸리고 한정된다. 그래서 자신들의 욕망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탐색할 여유가 만들어지지 않고 규범 속에서 상상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들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욕망이 허구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실제로 수정은 성주의 관심에 설레어 하고 윤정은 그런 수정을 부러워한다. 두 자매는 야학 교사의 결혼식에 참석해 자신들도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 욕망을 특별한 사건으로 만들기보다는 일상의 환경을 구성하는 조건,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 여러 뉘앙스와 제스처의 수행으로 구성됨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가시성(visibility)이다. 소수자의 영화적 가시성은 단순히 출연 그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두 자매가 정성스럽게 화장을 하고 드라이로 앞머리를 산처럼 올리는 행동들의 클로즈업, 성인 비디오를 보면서 부끄러워하며 손으로 눈을 가리는 수정과 침착하게 표정관리를 하고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는 윤정, 장애가 있는 아버지와 연애 결혼한 비장애인인 어머니를 일종의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미장원 원장의 이야기를 듣는 윤정의 표정, 해수욕장에서 선크림을 서로 발라주고 모래장난을 하는 수영복을 입은 자매의 모습을 사운드 없이 응시하는 카메라, 성주가 수정에게 ‘썸’의 끝을 알릴 때 당황한 수정이 손톱을 튕기는 제스처 등이 모두 ‘웨딩드레스’가 만들어지고 있는 시간, 즉 욕망이 실천되고 구성되는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과 제스처에는 하나로 의미를 결정할 수 없는 수많은 현실의 일상과 감정들이 섞여 있다.
또한 해수욕장에, 노래자랑 예선에, 보도에, 지하철에 장애인이 존재하고 그 공간을 이용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도 자연스럽게 가시화한다. 일상을 쫓는 카메라는 두 자매와 함께 이동하며 관념적 상상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구체성을 전달한다. 걷는 것이 힘든 윤정은 자신의 체격과 신장에 맞는 탈 것으로 아동용 플라스틱 장난감 차를 사용한다. 윤정이 선택한 이동수단은 목발이나 휠체어가 아닌 다른 탈 것의 가능성을 가시화한다. 또한 이 이동수단은 장애인이 자신의 경험적 지식을 활용해 다양한 신체에 딱 맞게 개조한 크립 테크(criptech, 그리고 하이데거가 말한 도구가 아닌 예술로서의 테크네)의 훌륭한 사례가 된다. 그녀가 노래자랑 예선 무대 위에서 장난감 차 위에 앉아 이정현의 <와>를 춤과 함께 부를 때, 예선에서 떨어지고 벚꽃이 흩날리는 보도를 지나갈 때 노랗고 빨간 원색의 장난감은 시선을 잡아 끈다. 지하철에서 저신장인 수정과 윤정의 아이레벨에 맞춰 카메라가 낮아지자 자매를 응시하고 있는 어린 아이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은 복잡한 레이어를 만든다. 성인의 신장은 매우 다양하고 그렇기 때문에 성인의 아이레벨 역시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위치가 낮은 아이레벨을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만 동일시할 수 없다. 동시에 실제 어린아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때때로 저신장 장애인을 아이처럼 대해온 사회적 고정관념의 시선을 환기하며 성찰을 유도한다. 그리고 타인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윤정은 자신의 체격에 잘 맞는 장난감 차를 자신의 탈 것으로 선택하며, 이러한 선택은 윤정의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격을 잘 드러낸다.
지하철로 이동하는 다른 장면에서는 높은 지하철 계단에서 장애인용 승강기로 내려가는 과정을 길게 보여준다. 자매는 능숙하게 승강기를 이용하지만 자매와 함께 탄 승강기 위의 카메라 시점은 그 승강기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는 동안 영화 <
접속>(1997)의 OST로 유명한 <러버스 콘체르토>의 단조로운 경음악이 경고음으로 계속 울려 퍼지자 행인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지하철 계단의 장애인용 승강기의 아슬아슬함, 무심하고 단조로운 <러버스 콘체르토> 경음악, 행인들의 무례한 시선은 이동을 환기하는 정동이자 ‘웨딩드레스 제작’의 조건이다. 그리고 자매는 반복되어 무뎌진 그 일상을 무심하게 받아들인다.
이 영화가 강조하는 또 다른 가시화는 장애의 서로 다른 유형과 정도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적 위계이다. 모든 연애관계에는 다층적이고 미묘한 권력이 작동한다. 수정과 성주의 관계에서 가장 지배적인 권력은 장애의 정도가 된다. 성주는 겉보기에는 장애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경증 장애인이다. 신체적으로 장애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권력이 된다. 늦여름 한낮의 공원에서 성주는 내내 담배를 피우고 주저하며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어머니가 자신이 장남에 외동이어서 손자를 보길 원한다, 자신과 비슷한 장애가 있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나이가 있는 수정의 결혼까지 걱정해주는 조심스러운 그의 말들은 날카롭게 상처를 낸다. 듣는 내내 말이 없는 수정은 찡그린 얼굴에 어색하고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애꿎은 손톱을 튕긴다. 성주의 “여름이 다갔나”라는 말과 함께 그렇게 그들의 연애도 끝을 맺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별 시퀀스의 제목은 여전히 현재형인 ‘웨딩드레스 제작 중 3’이다. 이번 연애는 실패했지만 자매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꿈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일까?
인공적으로 연출된 에필로그 시퀀스는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바다 한가운데 쪽배를 탄 수정과 윤정을 보여준다. 둘은 영화 내내 염원하던 하얀 면사포와 웨딩드레스를 입고 빨간 입술의 화장을 하고 있다. 갈매기 울음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 가운데 수정이 부르는 <나는 19살이에요>가 울려 퍼진다. 소프트 포커스 효과로 꿈처럼 연출된 환상성과 대비되게 둘의 표정은 지나치게 덤덤하다. 이 허구적 스펙터클은 극적 사건이나 분명한 감정의 표출과 거리가 멀다. 공들여 만든 이 장면은 결혼의 은유로 사용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다’는 문자그대로의 소원성취인가, 동네 미장원 원장의 말처럼 자매가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면 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모두 헛된 꿈이었다는 냉소적 자각인가. 그것도 아니면 수정이나 윤정 같은 저신장 장애 여성이 연애와 결혼을 하기 위한 환경과 조건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실재의 대면인가. 이 장면은 그 모든 욕망과 감정이 중첩된 이미지이다. 이 장면은 그들의 과거의 상실과 실패, 현재의 바람과 희망, 욕망을 탐색하고 실현되기 위한 미래의 조건을 질문한다. 이 허구의 연출된 장면은 그래서 실재적 환상이다. 이 시퀀스의 환상성과 쓸쓸한 정취, 원하던 웨딩드레스를 입었지만 웃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무심한 표정은 목적이 뚜렷한 실패나 성공의 서사를 지지하지 않는다. ‘웨딩드레스’는 그래서 단순히 ‘성공으로서의 결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여성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 그 선택의 자유, 그 길의 이동성을 뜻한다. 그래서 여전히 ‘제작 중’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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