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
혼자 사는 사람들>의 제목과 영화 전반부를 보면서 나는 이 영화가 1인 가구가 많아진 시대의 외로움과 소통의 어려움을 다룬 영화라고 판단했다. 홍보에서도 ‘저마다 짊어진 1인분의 외로움’이라는 문구를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하는 삶이나 진정한 소통을 강조하는 결론으로 향하게 될 것으로 어림짐작 했다. 그러나 나의 섣부른 추정은 들어맞지 않았다. 혼자 살기와 고독사가 주요 소재이긴 하나 이 영화가 보다 중점을 둔 질문과 답은 ‘우리는 어떻게 진실로 혼자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는 각자의 실존을 감당할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가’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거의 모든 인물이 혼자 살고, 혼자 일하고, 혼자 밥 먹고, 심지어는 혼자 죽는다. 그러나 영화는 혼자 무언가를 하는 것과 혼자 존재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혼자가 편한 주인공 진아(공승연)는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타인과의 교류를 거부하며 벽을 친다. 그런 그에게 원치 않게 자꾸 말을 거는 이들이 생겨난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혼자가 된 아버지는 엄마 휴대폰으로 자꾸 전화를 걸어오고, 옆집 남자는 아파트 복도에서 담배를 피며 쓸데없이 말을 걸어온다. 게다가 1:1 교육을 맡게 된 신입사원 수진(정다은)은 사수인 진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선물을 주고 밥까지 같이 먹으려 한다.
그러나 진아는 역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선 타자의 감정과 인격을 인정하는 것이 수반되어야함을 깨닫는다. 나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선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한다. 진아는 수진에게 전화를 걸어 사수로서, 같은 인간으로서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그리고 자신 역시 외로움을 타는 약한 존재이며 혼자 밥 먹고 혼자 지내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로만 들리던 수진이 그제야 화면에 역쇼트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존재의 역쇼트야말로 이 영화가 목표했던 것이다. 서로가 감정과 인격을 가진 인간임을 인정하고 그들은 모두 당연히 상처받고 약할 수 있음을 수용하고 그럼으로써 각자의 존재를 대면하게 된다. 약함은 존재를 위한 조건이다. 홀로 존재하기 위해선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여한다. 나만 이 세계에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아는 자신의 존재와 끊임없이 거리두기하고 분리해 내면서 스스로가 외로움을 타는 유령처럼 되어버렸다. 그래서 옆집 남자의 유령과 대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상처받은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수진을 한 독립된 존재로 지각하며 그에게 사과한 후 진아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이나 온라인 스트리밍 영상을 틀어놓지 않고 잠에 든다. 진아는 드디어 홀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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