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란희 감독의 첫 장편영화 <
휴가>(2020)의 주인공은 집단정리해고 무효소송을 진행하며 5년째 천막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노조원 재복(이봉하)이다. 해고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많은 영화들이 갈등이 극적으로 폭발하는 투쟁 현장이나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의 지난한 시간에 집중해 온 것과 달리, <휴가>는 5년을 끌며 진행된 재판에서 결국 패소하고 난 이후의 시간을 담는다. 재복과 함께 노조를 만들고 농성장을 지켜왔던 영석(서광택) 그리고 만용(황정용)은 허망, 좌절, 분노, 원망, 야속, 피로, 무력을 겪는다. 이미 고공투쟁까지 하며 극한의 상황까지 가봤던 이들은 눈에 보이는 뚜렷한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법적 절차가 끝난 상황에서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황망해 한다. 그래서 천막에 모여 앉아 밥을 먹던 그들은 서로를 탓하기 시작한다. 이란희 감독은 무력한 분란의 대화 속에서 오히려 복직투쟁의 노동을 일일이 드러낸다. 노조를 만들고, 전단지를 뿌리고, 연대투쟁을 하고, 여러 결정을 내리기 위해 무수한 회의를 하고, 문서작업을 하고, 고공투쟁을 하고, 재판을 준비하고, 천막을 지키고, 밥을 하는 등 투쟁에는 무수한 노동이 있다. 특히 재복은 앞에 나서는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알뜰살뜰한 성격에 맞게 매일 식사를 준비하고 동료들의 건강을 챙기는 등 농성장의 살림을 맡아왔다. 투쟁현장에서의 재복의 돌봄노동은 반복적으로 묘사되던 중년 남성 해고노동자의 전형성을 깨트리는 것이기도 하다.
서로 다툰 후에도 여전히 무얼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셋은 투쟁 5년 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갖기로 한다. 그들은 ‘휴가의 시간’을 만듦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들이 했던 투쟁이 고된 노동이었음을 그리고 그 안에서 각자가 맡아온 고유의 역할이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휴가의 시간은 이후의 시간도 이전의 시간도 아니다. 어쨌든 패소로 한 단락이 만들어진 ‘선인가구’ 투쟁의 역사에서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것처럼 “옛 것은 죽는데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는” 위기의 시간이고 그렇기에 마침내 사유가 가능한 시간이기도 하다. 투쟁을 계속 이어나갈지 아니면 접을지, 이어나간다면 무엇을 이루기 위해 투쟁을 하는지, 투쟁에서 그동안 해온 수많은 노고는 무엇을 변화시켰는지, 재복에게 함께 해온 동료들은 어떤 의미인지, 일과 노동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가족들의 생계와 일상은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그동안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멈춰놨던 질문들이 틈새의 시간에서 한꺼번에 쏟아진다.
재복은 ‘휴가’의 시간에 복직투쟁을 통해 그렇게 돌아가고 싶었던 일상, 즉 일터로 돌아오지만, 그는 거꾸로 일상에서 노동착취와 투쟁의 현장을 목격한다. 영화는 2층에 있는 공방 창문에서 건너편 1층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준영을 내려다보는 재복을 보여준다. ‘어디 가냐?’는 재복의 말에 대답도 없이 나가던 준영이 겨우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장면은 이후 다시 동일한 시점으로 반복된다. 준영이 다치고 현장실습을 나온 직업계 고등학교 학생 민재(박재형) 역시 준영과 마찬가지로 점심시간에 혼자 슬쩍 나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먹는다. 카메라는 재복의 시점으로 준영을 바라보던 것과 마찬가지 각도로 그런 민재를 2층 창문에서 바라본다. 무선 이어폰과 편의점 컵라면으로 압축되는 젊은 세대의 노동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재복의 큰 딸 현희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복직투쟁을 하는 노동자로서 당사자인 재복은 휴가를 통해 일상에서 오늘날의 노동현장을 목격한다.
재복은 휴가를 통해 일상과 투쟁현장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는 또한 농성장에서 하던 돌봄 노동을 일상에서 반복한다. 자신의 집과 준영의 집 모두에서 냉장고를 청소하고, 음식물을 채우고, 반찬을 하고, 밥을 차려 같이 나눠 먹는다. 투쟁은 한편으로 주위를 살피는 목격이고 돌봄이다. 그의 일상은 투쟁의 노동으로 채워진다. 재복은 휴가 기간 동안 만용의 전화를 받지 않으며 농성장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암시를 주기도 하지만, 결국 우진의 취직 제안을 물리치고 농성장으로 돌아간다. 열흘의 휴가가 끝난 후 그는 갖가지 반찬을 해서 반은 딸들을 위한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반은 농성장에 들고 갈 가방에 싼다. 영화는 재복이 집의 문을 닫고 나가 농성장으로 돌아오는 길을 정성들여 보여준다. 준영은 재복의 설득에 회사에서 치료비를 받게 되었지만, 재복이 민재까지 돌볼 수는 없다. 재복은 대신 자신의 농성장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투쟁은 다른 노동현장의 투쟁으로 이어져 있다. 재복은 자신만 잘 살기보다는 함께 잘 살기를 선택한다. 그 길은 어둡고 불안할 수 있지만 그는 돌봐야할 동료가 있다. 그의 농성장에도 그가 목격해야 할 이들이 있다. 재복은 농성장에 걸린 투쟁기간을 알리는 표지판 ‘1893일째’에서 3을 4로 바꿔 놓으며 투쟁의 일상을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고공투쟁에 들어간 영석에게 그가 좋아하는 소시지 볶음과 반찬을 올려 보낸다. 위를 올려다보는 재복의 시점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던 아이들을 내려다보던 시점과 중첩된다. 영화는 묵묵하고 담담하게 재복의 목격과 성찰의 시간을 지켜보고, 그가 돌아오는 길, 즉 함께 살기를 선택하는 그 길이 오히려 현실이고 사실성에 근거한 것이라 말하며, 해고노동자의 존엄과 품위를 보여준다. 재복은 그렇게 농성장에 돌아와 ‘휴가’라는 시간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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