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과 재난 벌새, 2018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21-10-22조회 7,691

2019년 8월 29일 개봉한 김보라 감독의 <벌새>가 얼마 전 개봉 2주년을 맞았다. 영화를 지지하는 관객들인 ‘벌새단’은 2주년을 기념해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에 기부 이벤트를 했다고 한다. 영화 관람과 유통의 주기가 지극히 짧아진 시대에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특정 영화와 관련 활동을 지속하는 건 드문 일이다. 관객들은 영화가,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이, 세계 내 다른 존재들처럼 살아간다고 느끼는 것 같다. 이러한 ‘존재의 보편성’이야말로 <벌새>가 갖고 있는 고유의 정동이다.

영화 포스터에 각인된 “1994년, 가장 보편적인 은희로부터”라는 태그라인은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를 잘 알려준다. ‘은희’라는 개별적인 이름과 ‘1994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간 사이에 붙은 ‘가장 보편적인’이라는 수사는 얼핏 모순처럼 보인다. 왜 은희는 가장 보편적일까? 질문을 고쳐 이어보자. 왜 은희는 보편적이면 안 되나? 누가 보편성을 대표하는가? 보편성은 대표될 수 있는가? 영화에서 보편성이 왜 중요한 화두인가?

영화는 시청각적 재현을 경유해 제공된다. 재현(representation)은 세계를 다시 표현하거나 어떤 대상이나 집단을 대표한다. 무언가의 재현은 당연히 전체를 보여줄 수 없다. 역량의 결핍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전체라는 것 자체가 실재하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문제는 재-현이나 대표의 과정에서 주류(mainstream), 대중(mass), 평균(average), 중위(median)를 떠내는 작업을 하면서, 즉 생략, 환원, 모순·우연·예외의 제거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그 이미지와 서사가 전체나 보편을 그려내고 있다고 주장할 때이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는 텍스트 내적으로 지나치게 인과적이고 그럴 듯해서 우리는 배제가 발생하거나 실재가 무시된다는 것을 종종 잊는다. <벌새>는 평균적이거나 주류적 인간상이야말로 보편과 가장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보편성이 세계의 전체에 관계되어 있는 공통성이라면, 그것은 존재이다. 즉 은희를 포함해 모든 존재는 누구든, 어느 시간에 있든 보편적이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보편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음에 대한 예민한 감각, 존재에 대한 의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벌새>는 즐거움이나 환희와 함께 실망, 절망, 단절, 고립, 상실 등 다양한 감정의 파고를 안겨주는 수많은 시간들이 독자적으로 표현될 때 존재의 보편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어떤 행위가 다른 행위의 그리고 어떤 시간이 다른 시간을 위한 원인이나 자원으로만 표현되면서 이전의 행위나 시간은 그 자체의 의미를 갖지 못한 채 끊임없이 지연된다면, 존재는 그저 최종적으로 의미가 결정되는 죽음을 향해 가는 양상으로만 설명될 것이다. <벌새>는 이러한 진보적 서사를 거부한다. 그런 면에서 <벌새>는 성장영화이면서 성장영화의 정형성을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날갯짓을 한다. 은희의 유년은 성인이 된 은희를 설명하는 근거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비교대상이 아니다. 1994년의 은희의 자기 존재와 사랑에 대한 탐색 그리고 재난과 상실의 경험은 물론 성인이 된 은희와 상관관계가 있지만 또한 독자적이다. 은희의 퀴어 섹슈얼리티 또한 이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통과의례나 지표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은희(박지후)는 자신의 존재 의미와 양상을 탐색한다. 아직은 많은 것이 처음인 은희는 서툴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프닝 씬은 그러한 은희의 상태를 표현한다. 은희는 복도식 아파트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고 엄마(이승연)를 소리쳐 부르지만 누구도 응답하지 않자 급격히 불안에 빠진다. 은희는 타자, 특히 신뢰하는 친밀한 타자의 반응이 없을 때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 옅어지고 초조해진다. 불안을 더 부추기는 건 잔인한 폭력과 차가운 무관심이 일상인 환경이다. 강남 대치동은 친구, 연인, 가족, 학교, 사회에서 끊임없이 줄 세우기를 한다. 사람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비교우위를 통해서만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 사회의 중요한 기준인 자산, 직업, 성적에서 상위권에 들지 못하면 그대로 무시당하고 존재 자체를 의심받는다. 이러한 폭력은 은희에게 일종의 재난이다. 은희가 학교 가는 길에 매일 지나치는 철거에 항의하고 생존권을 요구하는 문구가 적힌 벽들처럼 그렇게 일상은 감당하기 어려운 폭력으로 가득하다. 그 폭력 속에서 일상을 살아내다 보면 때때로 그것에 무감해지고, 무감은 다시 존재에 대한 감각을 옅게 만든다. 그렇다고 폭력으로 인한 상처나 상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잠복해 있다가 예기치 못하게 튀어나온다. 은희는 학교나 가족뿐 아니라 개인적 관계에서도 상실과 좌절을 경험한다. 은희를 좋아한다고 했던 지완(정윤서)과 유리(설혜인)로부터 일방적으로 단절되고, 유일하게 신뢰하던 친구 지숙(박서윤)은 위기의 순간에 배신을 한다.

한문학원의 영지 선생님(김새벽)은 그런 은희의 마음을 돌봐준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은희에게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저항하라고 말한다. 또한 지완의 엄마가 은희에게 ‘방앗간집 딸’이라며 계급적 낙인을 찍는 말을 듣고 자기혐오에 빠졌을 때 영지 선생님은 스스로의 마음과 존재를 먼저 돌아볼 것을 제안한다. 그가 수업시간에 알려줬던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라는 명심보감의 구절은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 마음을 돌보고 존재를 감각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이 장면에서 은희는 매일 지나가던 철거민들의 현수막을 보며 ‘불쌍하다’고 하지만 영지 선생님은 ‘함부로 동정하지 말라’고 한다. 동정 역시 비교 우위를 점하려는 태도이고 실제로 그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지 선생님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것을 강조한다. 손을 보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움직여서, 신비롭게도 자기가 존재함을 감각해보라고 제안한다.

손과 손가락은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한다. 영지 선생님은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린 은희와 지숙의 긴장을 풀어주려 노래 <잘린 손가락>(김호철)을 불러준다.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잔 마시는 밤/덜걱덜걱 기계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보았네/잘린 손가락 묻고 오는 밤 시린 눈물 흘리던 밤/(이하 생략)” 영지 선생님은 현재 있는 손가락뿐 아니라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고 감각라고 한다. 존재는 현재 있는 것뿐만 아니라 상실한 것을 포함한다. 은희가 침샘 수술을 하고 떼어낸 혹을 궁금해 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지 선생님과의 교류 이후 은희는 오프닝씬의 순간을 반복한다. 은희는 아파트에서 저 멀리 보이는 엄마를 여러 차례 부르지만 충분히 가까운 거리가 돼도 엄마는 응답하지 않는다. 엄마는 은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무에 쏟아지는 빛을 바라본다. 일상에 지쳐있던 엄마는 지금 ‘손가락’을 보고 신비를 느낀다. 그리고 결국은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첫 번째 장면에서는 은희가 아파트 층수를 헷갈려 다른 집을 두드린 해프닝이었음이 드러나지만, 두 번째 장면에선 엄마가 눈앞에 보이는데도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은희는 두 번째 장면에서는 첫 번째 장면처럼 불안정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은희는 다소 서운하지만 엄마의 세계가 자신과 독립되어 있음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의 마음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은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 한다. 그것은 마음을 속속들이 안다는 것과 다르다. 은희는 엄마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으며 그의 세계가 독자적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첫 번째와 달리 두 번째는 분리불안이라기보다는 세계의 독립이다.

성수대교 붕괴사고라는 끔찍한 재난이 일어난 후 은희는 언니 수희(박수연)를 잃을 뻔 하고 실제로 영지를 상실한다. 사고 이후 은희는 수희 그리고 수희의 남자친구와 함께 한강 둔치에서 사고현장을 목격한다. 이때 영화는 화면에서 주인공인 은희가 아니라 수희를 앞쪽에 배치하고 그의 감정에 몰입한다. 사고 당시 많은 피해자가 나왔던 학교에 다닌 수희의 마음을 돌보는 이 장면은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라는 구절을 확장한다.

은희는 자기를 알아주고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것에서 자기 스스로를 돌보는 것으로 그리고 다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는 것으로 옮겨간다. 영지 선생님은 “방학 끝나면 연락할게. 그때 만나면 모두 다 얘기해줄게”라고 말하지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은희는 재난을 응시하며 영지 선생님과 함께 잃어버린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려하고 그 마음을 기억하고 감각하려 한다. 그래서 존재는 현실이지만 동시에 판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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