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내가 죽던 날, 2019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21-07-16조회 10,215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가 죽던 날>(박지완)은 메타영화, 즉 ‘영화에 대한 영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성서사의 구축과 동일시의 과정을 탐색하는 ‘여성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물론 이 영화는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체를 찾을 수 없는 세진(노정의)의 진실을 찾고자 탐문수사를 벌이는 경찰 현수(김혜수)를 중심으로 한 추리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메타영화가 갖는 현학적 모호함이나 전위적인 표현 양식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내가 죽던 날>은 분명 탐정느와르 장르영화이면서, 또한 여성의 ‘서사’를 발견하려고 하는 어느 한 여성의 여정에 대한 영화이다.

이 영화가 왜 ‘(여성)영화에 대한 영화’인지를 본격적으로 해명하기 전에, 잠시 에둘러 여성영화라는 용어부터 짚고 넘어가 보자. 최근 한국에서 전문 비평가뿐만 아니라 관객과 마케팅도 자연스레 사용할 만큼 대중화되고 있는 이 용어는, 씨네-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정의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자자하다. 그 이유가 학문적 혹은 비평적 난해함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어느 목적을 위해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층적 차원에서 경합하며 내용과 범주가 역동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마케팅을 위한 알트 장르(멜로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 같은 여성 관객을 주요 타겟으로 한 장르)처럼 이용되거나, 여성 창작자나 여성 주도 서사에의 주목을 이끌어내기 위한 산업·정책적 용어로 지칭되고, 페미니스트 미학이나 담론을 강조하기 위한 폭 넓은 개념이 되기도 하며, 큐레이팅을 위한 실천적 범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영화학자 테레사 드 로레티스가 「여성영화를 재사유하기: 미학 및 페미니즘 이론」(1985)에서 논의했던 개념에 기대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가부장제 이성애중심적인) 기존 주류 서사에 대항하면서도 서사 자체를 포기하지 않고 페미니스트 환상성을 길어내는 말 걸기(address)의 미학이다.

말 걸기의 미학은 송신자 및 수신자의 위치성과 신체성을 드러낸다. 보편자나 표준적 정체성을 가정하지 않으면서, 동일시의 욕망과 차이 속에서 타자를 인식하는 현실을 동시에 각인한다. 여성 정체성의 재현 역시 마찬가지로 접근한다. 여성의 동일성만을 강조하면 남성과의 대립적 이분법에 고착되고 의도치 않게 남성이라는 기준을 계속 상정하게 되는 효과를 낳는다. 그래서 드 로레티스는 여성영화(women’s cinema)는 추상적인 대문자 여성(Women)이 아니라 복수적인 여성들 간의 그리고 한 여성 내의 교차적 정체성을 표현하며 다양한 관객들에게 말을 건넨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드 로레티스는 이러한 여성의 서사는 기존 재현에서 탈각되고 배제되어온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미 스크린 위에 보이는 것(space-on)뿐 아니라 프레임 바깥에 비가시화되어 있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리고 (카메라의 운동을 통해) 곧 도래할 이미지와 서사의 공간인 ‘스페이스-오프(space-off)’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내가 죽던 날, 눈을 감고 바람을 쐬는 노정의

<내가 죽던 날>에서 현수는 세진의 죽음을 쉽게 확정짓지 않는다. 현수는 세진이 남긴 흔적에서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지를 읽어내고 말을 건넨다. 당신은 정말로 죽었는가, 이렇게 살려고 애썼으면서도 왜 죽었는가? 현수는 세진에게서 행동의 이유, 즉 서사를 발견하려 한다. 더 나아가 현수는 세진이 살아있기를 바란다. 이는 자기 경험과 욕망의 투사다. 현수와 세진의 관계는 형사와 실종자인 동시에, 여성인물과 여성관객 간의 동일시 과정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차이와 간극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희박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과 마음을 읽어내려는 의지 속에서 동일시가 발생한다. 심지어 현수는 섬에 도착해 자신을 낯설어 하는 섬 여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거꾸로 이 과정을 이용한다. 남편의 불륜이라는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내며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섬 여자들의 공감대를 얻어 세진을 이해할 정보를 수집한다. 이러한 과정은 (여성)영화적으로 말하면 스페이스-오프에 눈길을 주는 것이고, 문학적으로 말하면 ‘결을 거슬러 읽는(reading against the grain)’ 방식이다. 현수는 수사를 진행할수록 누구 하나 세진의 마음을 돌보고 이해하려 하는 이가 없었음을 알게 되면서 더욱 세진에게 빠져든다. 현수/관객은 세진의 서사를 발견할 마지막 보루가 된다.

현수는 출동 중 접촉사고를 내고 팔에 자해를 해 징계위에 회부된 상태다. 게다가 몰래 바람을 피운 남편은 이혼재판을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 현수 회사에 악성 소문을 퍼트렸다. 완벽해 보였던 현수의 삶은 사생활과 경력 모두에서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한편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며 부족한 것 없어 보였던 세진은 아빠가 죽고 그의 범죄사실이 밝혀지면서 자기가 살던 삶이 완전히 거짓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떻게든 삶을 회복하려 하지만 한번 추락한 삶은 원상복귀 되지 않고 악화될 뿐이다.
 
내가 죽던 날, 제복을 입고 있는 김혜수

흥미롭게도 현수와 세진은 모두 남편의 불륜과 아빠의 범죄 사실 그 자체보다 자신이 그들의 부도덕함을 ‘몰랐다’는 사실을 가장 괴로워하고 자책한다. 가장 친밀한 이들에게 배신을 당한 피해자인 그녀들에게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모를 수 있었냐’고 힐난한다. 현수는 단순히 사생활에 대한 비난을 넘어서 경찰로서의 직업적 수행능력까지 의심 받는다. 새엄마가 있어도 집안 살림을 책임져왔던, 똑 부러지고 어른스러운 세진은 갑자기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이가 된다. 그녀들은 자신이 보지 못한 사각지대에서 타인이 그린 ‘그림’에 갇혀 일순간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잃게 된 것이다. 자신이 속해있던 그림이 허상이라는 사실은 그 자신의 정체성마저 빼앗기는 일이 된다. 그래서 세진은 유서에서 자신의 가장 큰 죄는 ‘바보처럼 아무 것도 알지 못한 것’이라며 아빠와 오빠의 죄까지 대속하려 한다. 그것만이 다시 주도권을 되찾을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말이다. ‘무지의 죄’는 도덕이 아니라 파워의 문제이다.

현수도 유사한 고통을 겪고 있기에, 세진이 애써 살아보려는 흔적을 발견하고 성긴 증거들을 연결해 서사를 구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흔적들 사이의 구멍을 채우는 것은 현수의 삶과 경험이다. 누구의 시점에서 누구를 위해 그리고 누구에게 가닿기 위해 그린 그림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현수도 깨닫는다. ‘개연성’과 그럴듯한 그림에 대해 우리는 끈질기게 질문해야 한다. 그것은 다분히 편향된 것일 수 있다. 풍경조차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포착된 것이다. 현수는 마침내 경찰조직이 보기에 좋은 ‘그림’에 다시 자신을 넣는 것을 거부하고, 세진과 순천댁(이정은)이 그린 진실의 그림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죽던 날, 취조실에서 대치 중인 노정의와 이상엽

현수 덕택에 세진의 얼굴은 더 이상 미스터리로 남지 않는다. 남성중심적 서사, 특히 느아르나 스릴러 장르에서 여자의 얼굴과 표정은 미스터리이기 때문에 매혹적이다. 그 미스터리는 모호한 욕망의 대상으로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처럼 남성영웅이 풀어야하는 문젯거리이자 남성중심의 서사를 추동시키는 동기가 된다. 남성 관점에서 만든 서사와 그림을 위해, 남성들이 해결할 때까지 여성들은 계속 미스터리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남성중심적 그림에서 여성의 서사는 희박하거나 행동의 근거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 잘 납득되지 않는 그녀의 행동은 손쉽게 ‘민폐’ 캐릭터로 낙인찍힌다.

경찰이 설치한 CCTV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분노에 찬 얼굴을 하고 카메라를 움직여 사각지대를 만드는 세진의 행동은 기존의 ‘그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이다. 현수 역시 이러한 세진의 얼굴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 얼굴은 해결해야할 문젯거리나 매혹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이해하고 공감하며 서사를 불어넣어줄 동일시의 대상이다. 순천댁과 세진은 CCTV의 사각지대, 즉 스페이스-오프에서 교류하고 그들만의 서사를 쌓아간다. 순천댁이 세진의 죽음을 위장하고 그녀를 빼돌렸다는 진실은, 동시대 한국 장르영화에서 점점 더 핵심적인 장치로 사용되는 충격적인 반전효과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순천댁의 계략과 세진의 생사 그 자체가 장르적으로만 소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죽음 이후 원한을 풀어주는 멜로드라마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박지완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너무 커서든, 너무 작아서든 누구나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자신만의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누군가 보이는 걸 봤다고 얘기해 주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라고 밝혔듯, 중요한 것은 행동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세진의 ‘내일’이다.
 
내가 죽던 날, 종이에 무언가를 가리키는 이정은과 확인하는 김혜수

영국 감독 샐리 포터의 영화 <스릴러>(1979)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을 재해석하며 ‘낭만적인 희생자’로서의 재봉사 미미가 정말로 병으로 죽은 것인지, 아니면 남성 예술가의 시적 소재와 동기가 되기 위해 살해당한 것인지를 묻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미미는 ‘나는 왜 죽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남성 예술사 내에서의 여성살해를 비판하고 <라 보엠>에서 악녀로 그려진 또 다른 여성 무제트와 남성이 제외된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둘은 결말에서 남성이 그린 그림에서 문자 그대로 창문을 통해 탈출하며 여성의 서사를 발견하고 써내려갈 가능성을 맞는다. 마찬가지로 현수도 세진의 죽음의 이유를 질문하며, 순천댁과 세진이 그린 새로운 그림을 만나게 된다.

현수는 순천댁이 세진을 빼돌렸을 것이라 거의 확신한 후 기존의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굳이’ 세진의 안녕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이미 현수와 관객 모두 진실을 알아냈기 때문에 이러한 꽉 닫힌 엔딩은 재확인에 불과한 군더더기처럼 보일 수 있다. 왜 진상이 거의 드러나 장르적 완결성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안녕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 통쾌한 반전과 자기충족적인 문제해결을 넘어서 이 영화가 정말로 궁금해 하는 것은 세진의 서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지, 그녀가 정말로 안녕한지, 그녀가 원하던 ‘해가 지는 그림’ 속에 자신을 놓고 있는지 이기 때문이다. 여성영화가 관심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것은 진부한 군더더기가 아니라 오히려 페미니스트 환상성을 길어내는 장면, 기존 서사에 대항하면서 서사와 함께 가는 양상이다. 그래서 클리셰 같은 이 해지는 이국적 풍경은 고착되고 고정된 그림이 아닌 앞으로 더 다양하게 그려질 ‘여성서사’의 시작이다. 그런 이유로 카메라는 그 그림 속에 현수와 세진을 남겨두고 멀어진다. 그것은 여성들의 해방적 공간의 그림을 끝까지 그리고 시각해보고자 하는 마음, 그녀들의 서사를 발견하고 그 서사 속에 ‘너’가 있고 ‘너’의 내일이 있기를 바라는 순천댁의 마음이기도 하다. 순천댁이 쓴 것처럼 말이다. “니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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