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주리 감독이 밉다. <
도희야> 같은 엄청난 데뷔작을 내놓고 아직도 차기작을 내놓지 않으니 말이다. 아니다, 말은 바로 해야 된다. <도희야>를 만든 감독이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차기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한국영화산업이 정말로 문제다. 이번 칼럼은 의심과 취약성의 정동이 영웅 서사를 변형하는 방식에 대한 것인 동시에, 정주리 감독의 차기작을 갈급하게 요청하는 사심 가득한 글이기도 하다.
<도희야>는 한국 스릴러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던 ‘섬에 들어온 외부인’ 설정을 따른다. 그 설정은 대체로 다음의 서사를 따른다. “자기들만의 도덕과 관행으로 똘똘 뭉친 시골 마을에 외부인이 들어와 공동체의 문제들을 들춰내기 시작하자, 착하고 순박하게만 보였던 사람들은 불쾌한 이면을 드러내며 외부인을 위협한다.” <도희야>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외부인이 레즈비언이라는 설정이 추가되면서 익숙한 관습의 궤도에서 벗어난다. 서울에서 온 엘리트 경찰 영남(배두나)은 바닷가 작은 마을의 파출소 소장으로 발령받는다. 동성애자인 그는 아우팅을 당한 피해자지만 경찰조직은 ‘말하지도 묻지도 말라’며 품위손상을 이유로 도리어 그에게 징계를 내린다. 간부와 선배들은 징계를 내리면서도 레즈비언이나 동성애자라는 단어가 병이라도 옮기는 듯 분명하게 입 밖으로 내뱉지도 않는다. 피해자인 영남은 그 자체로 잘못된 존재가 되어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히는 이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그는 저항하지 못하고 결국 문제는 경찰조직이 아니라 영남이 된다. 절대로 튀지 말라는 선배의 조언대로 애인까지 버리고 1년 정도 숨죽여 있으려 했던 영남은 그 동네에 도착하는 처음부터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다.
영웅은 여러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누가 지금 구원을 요청하고 취약한 상태에 있는지를 예민하게 인지하는 자질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약자가 언제나 크게 비명을 질러 자신의 피해사실을 명백하게 알려줄 수 있는 조건에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존재의 취약성에 대한 예민함은 타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까지 향해야 한다. 취약한 자는 취약한 자를 한눈에 알아본다. 따라서 강함만 있어서는 영웅이 되기 어렵다. 영남은 그러한 영웅의 자질을 갖고 있는 캐릭터이다. <
양들의 침묵>에서 클라리사 스털링(조디 포스터)이 어린 시절 양떼목장에서 죽어가던 양들의 울음소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여전히 들려와 구하지 못한 죄책감을 갖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 역시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을 갖고 있는 이 취약한 영웅들은 상처받고 약한 자들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 실제로 영남은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차로 인해 크게 물이 튀여 피해를 입었는데도 괜찮은지 확인하려 하자, 잽싸게 도망가 버리는 소녀 도희(김새론)를 발견한다. 그 이후 도희는 계속 영남의 눈과 귀에 뜨인다.
취약성에 대한 감각의 예민함을 표현하기 위해 <도희야>는 영화적이고 서사적인 층위 모두에서 소리를 강조한다. 욕하고 때리는 계부 용하와 할머니의 학대하는 소리, 계부인 용하와 할머니에게 맞아 비명 지르고 도움을 요청하는 도희의 소리,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자신의 피해를 말하지 못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침묵의 소리, 피해자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불면증인 영남이 술을 따르고 마시는 소리,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생수병에 소주를 옮겨 담는 소리, 소주가 담겨있던 빈 플라스틱 생수병이 부딪히고 구겨지는 소리, 영남과 도희가 목욕하는 소리, 도희가 영남이 목욕하고 있는 화장실에 들어와 소변보는 소리까지 영화적 사운드가 외화면과 내화면에서 지속적으로 도드라진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 소문과 험담의 소리는 다양한 존재들을 위축시키고 허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웅 외에도 취약한 자를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 이가 또 있다. 그는 착취와 학대를 가해도 자신에게 문제가 안 생길 정도로 취약한 이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타인의 치명적인 약점을 빠르게 알아챈다. 박용하(송새벽)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마을의 주요 생계인 가두리 양식장의 운영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처리해주는 용하는 동네의 유일한 젊은 사람으로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를 두둔한다. 마을 사람들은 직접 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험담과 소문으로 자신의 이익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려 한다. 동네 사람들은 “젊은 년이 계급장 달았다고 동네를 들쑤시고 다닌다”며 대놓고 욕을 하고, 용하는 첫 만남부터 “솔찬히 미인이어서 소장인줄 몰랐다”는 성희롱에 가까운 농담을 던지며 영남을 공격한다. 영남이 애인과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했던 용하는 영남이 이주노동자를 보호하려는 결정적 순간에 “서울서 내려온 여자하고 뭘 하는 걸 봤으면 하는데 어느 한 새끼라도 나한테 물어봤으면 좋겠네, 입이 근질근질하네”라고 협박하기도 한다. ‘젊은’ ‘여자’ ‘동성애자’는 모두 영남의 다층적인 취약점이 된다.
영남이 동성애자인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 용하는 ‘성적 대상’으로 영남을 지시하며 그가 가진 권력을 약화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그러나 영남이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자 오히려 그는 성적 착취자가 된다. 도희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그의 모든 행동은 성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여기서 정주리 감독은 관객들에게 미묘한 질문을 던진다. 관객들이 영남이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시점에 도희와 영남이 함께 욕조에서 목욕하는 장면, 영남이 목욕을 하고 있는 와중에 외화면에서 도희가 소변을 보고 물을 내리는 장면, 용하와 할머니에게 맞은 도희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영남을 보여주며 둘만의 내밀한 순간들을 공들여 연출한다. 그리고 이 장면들은 지나칠 정도로 반복된다. 사실 용하와 형사들이 영남에게 소아성애자라는 혐의를 씌우기 전에 관객들은 여기서 이미 이상한 긴장감을 느낀다. 게다가 영남의 스타일을 따라하고 그의 애인을 질투하며 집착하는 도희의 모습도 평범해 보이진 않는다. 이 긴장감과 불편함의 근거는 무엇일까? 어떤 면에서 정주리 감독은 연출적으로 소위 ‘오해의 여지’를 점점이 뿌린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정말로 이 행동들이 그렇게 설명 불가능한 것인가? 심지어 영남은 경찰로서, 즉 폭력 피해자를 상대해본 전문가로서, 도희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영남은 도희가 “폭력에 길들여진 위험한 상태여서 특별한 보호가 필요”했고, “아이가 나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경찰 제복을 입고 있고 나쁜 짓 하는 남자들 혼내줄 수 있는 힘이 있어 보여 그러는 것이라고” 매우 타당성 있는 전문적인 해석을 내린다. 영남은 도희의 애착이 버려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자기 보호와 생존의 욕망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더불어 영남 스스로도 도희와 지나친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관계의 거리를 의식적으로 성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장면들에서 일말의 불편함과 긴장감이 흐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남은 곧 성인 여성으로서 그리고 경찰로서 보호자로서의 정체성을 충분히 인식하며 도희의 상처를 어루만지기 전에 멈칫하다가도 그를 품어준다. 그렇다면 그 긴장과 불편함을 성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누구인가? 레즈비언인 것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행동들이 갑자기 어떻게 성착취의 증거가 되는가? 관객들은 정말로 경찰과 마을 사람들의 생각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가? 존재에 자체에 대한 의심과 혐오의 씨앗은, 그것이 막연한 긴장감과 불편함에 불과할지라도 질문하지 않고 놓아두면 언젠가 그 존재의 모든 행동을 오염시킨다.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 혹은 동성애자가 영웅이 되기 위해선 소문과 낙인, 존재 그 자체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그래서 소수자가 영웅이 되는 것은 더 어렵다. 소수자 영웅은 타자를 구원해 더 크고 강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존재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는 취약성을 드러내게 되고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영남은 도희에게는 ‘맞지 말고 저항하라’고 했지만, 오히려 자신은 경찰조직의 억압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말하지 않고 묻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피해자임을 부인하고 거부해 왔다. 그리고 그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은 어떤 면에선 더 많은 고통을 불러왔다. 자신뿐 아니라 애인에게도. 그러나 끝까지 도희를 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영남은 다시 가해자의 외피를 쓴 피해자가 된다. 여기서 영남은 도희의 구원을 받는다. 도희는 ‘순수한’ 피해자와는 거리가 멀다. 도희는 더 이상 맞지 않기 위해 할머니가 추락한 것을 보고도 구하지 않고 계부를 함정에 빠뜨려 감옥에 보내 자신과 영남을 구한다. 여기서도 전화의 사운드가 이용된다. 도희는 추문을 추문으로 막는다. 도희는 자신이 약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취약성은 때로 존재를 단단하게 만든다.
영남은 도희를 두고 혼자 떠나려다가 도희가 “어린 괴물” 같다는 후배 경찰의 소리에 차를 돌려 도희를 데려간다. 존재에 대한 의심과 오염이 얼마나 그 존재를 갉아먹는지를 잘 알고 있는 영남은 도희를 버려둘 수 없다. 이 선택은 그녀의 경력을 무너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의 정체성과 존재 자체도 오염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존재를 걸고 자신의 취약성을 받아들이며 영웅이 되기를 선택한다. 어떤 면에서는 영남과 도희 모두 서로의 취약성을 발견하고 나서야 서로를 구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취약성을 통해 영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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