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Db 칼럼 연재 제안에 ‘한국 여성영화의 정동들’이라는 주제를 떠올린 건 <
아워 바디> 때문이었다. <아워 바디>는 어떤 감정이나 의미로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 어려운 영화다. 처음 봤을 때 인물의 행동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어 답답함을 느끼게 했던 이 영화는 내게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자꾸 모순되어 보이는 말들을 연이어 덧붙이게 했다. <아워 바디>는 심신의 소진에 대해 말하는 가하면 함께 달리는 움직임 속에서 이상한 기운이 넘쳐나는 몸들을 전면화하고, 관습적인 이성애 섹스를 스크린에 반복 재현해 가시화하면서도 영화 전체는 퀴어한 섹슈얼리티를 관통한다. <아워 바디>는 영화와 관람자인 ‘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사이-공간에서 영향을 미치며 형질전환을 감행한다.
정동(affect)은 “몸과 몸(인간, 비인간, 부분-신체, 그리고 다른 것들)을 지나는 강도들에서 발견되며, 또 신체와 세계들 주위나 사이를 순환하거나 그것들에 달라붙어 있는 울림에서 발견된다. 의식화된 앎 아래나 옆에 있거나 또는 아예 그것과는 전체적으로 다른 내장의 힘들, 즉 정서 너머에 있기를 고집하는 생명력”에 부여하는 이름이다(<정동이론> 14쪽). 이러한 맥락에서 <아워 바디>는 스크린의 정동 개념을 적용하기에 적당한 사례로 보인다.
영화는 소진되지 않는 존재로 자영을 변신시키기 위해 급진적으로 방향을 튼다. 갑작스러운 현주의 죽음 이후 자영은 기이한 일을 겪는다. 방바닥에 누워 있는 자영 옆으로 나체인 현주가 눕는다. 균형이 잘 잡힌 현주의 탄탄한 뒷모습이 흡사 외계생물처럼 빛이 난다. 그리고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소리와 함께 현주는 사라진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환상적인 방식으로 연출된 이 장면은, 외계인이 지구침공을 위해 지구인의 마음과 신체에 침투해 구분불가능한 이질적인 신체들이 하나의 존재에 공존하게 되는 <신체강탈자의 침입> 같은 SF 호러를 연상시킨다. 자영은 현주를 삼킨 것일까, 현주가 자영을 차지한 것일까? 아니면 둘의 공존인가? 현주는 달리기를 힘들어하는 자영에게 자신의 ‘기(氣)’를 빨아먹으며 따라오라고 말한다. 함께 달리기에서 그녀들은 서로의 에너지와 리듬을 나누고, 신체의 경계가 무너지고 살‘들’이 구분되지 않는 체험을 한다. 마찬가지로 이 장면은 자아와 타자가 구분되지 않는 ‘아워 바디(our body)’가 생성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관습적인 성기 중심의 이성애 섹스에서 벗어나 생각해 보면, 매우 위험하고도 에로틱한 퀴어한 섹스 장면일 수 있다. 외계인과 지구인의 섹스 장면처럼 말이다. 만약 <아워 바디>에 이성애 섹스 장면들만 가시화 되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퀴어 에로틱한 순간들을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이 된다. 이 순간을 통해 자영은 하나의 존재에 다양한 욕망과 미결정된 (비)의미를 품는 다양체가 된다.
이후 영화 후반부에서 자영은 ‘자기 몸에 도취되지 않는 나이든 남자와 자고 싶다던’ 현주의 은밀한 욕망을 실천한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길이 아니라던 인턴과 정규직 되기도 시도해본다. 이렇게 타자의 욕망들을 실험하고 수행하며 욕망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경험하는 과정을 거친다. 동일한 행위라도 수행하는 주체가 달라지면 동일한 의미로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때때로 자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과 구분불가능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과 존재는 고정된 약호들 이상이다. 결국 자영은 현주의 질문을 경유해 끌어낸 자기의 성적 욕망을 실천한다. 고급 호텔에서 어떤 의미나 목표도 두지 않고 혼자 자위를 즐기는 자영은 이미 혼자가 아니며 둘 이상이다. 다양체로서의 자영은 고정된 범주와 이분법을 해체하며, ‘아워 바디’로서의 강도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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