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3)의 몰락 성적표의 김민영, 2022

by.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2024-02-05조회 2,588

청주 – 대구 – 케임브리지로 그들 각자의 터전이 분리됨으로 말미암아 스카이프(Skype)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삼총사 정희(김주아), 민영(윤아정), 수산나(손다현)는 이 썰렁한 재회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저들 사이의 간극은 청주 – 대구 – 케임브리지로 분리된 세 장소의 지리적 거리감만큼이나 벌어져 있다. 여고 시절을 동고동락한 세 친구가 스무 살이 되면서 변화해가는 역동성을 묘사하는 <성적표의 김민영>(2022)은 물리적 거리감을 실재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으로 은유하는 이야기이다.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우정이라는 감정을 고요하고 섬세하게 담아내는 이 영화는 ‘김민영’을 평가 대상으로 집중하여 관찰하는 제3자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환상과 추억으로 일상을 확장하는 내러티브의 궤적은 청소년기의 종말에 대한 가볍고 우울한 자화상을 따라간다. 도입부는 임박한 시험을 앞두고 삼행시 동아리를 작파하기로 결정한 세 친구의 마지막 회합을 보여준다. 이날 이후 세 친구의 길은 갈라진다. 몽상가 기질의 정희는 수능을 보던 날 시계를 지참하지 않아 불안해하는 소년 정일(임종민)에게 손목시계를 주고 창밖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냄으로써 경쟁적인 교육 시스템과 작별한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도 태평해 보이는 정희는 우연히 정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청주 나달 테니스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데 누구도 가치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 이상한 상상을 소중히 여기면서 자신의 세계를 쌓아간다. 집과 테니스클럽 사이를 벗어나지 않은 좁은 활동반경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며 심지어 테니스클럽 홍보를 위해 자신의 그림 재능을 활용하기도 한다. 한편 여고 시절부터 모임 결성을 즐겼던 민영은 대구의 대학에 진학하여 교내 청자켓 동호회 대표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수산나는 모두가 탐내는 자리를 확보하여 옛 친구들과 연결되기 어려워진다. 여름방학 동안 민영이 머무는 서울 집을 방문한 정희는 친구를 초대한 뒤 그 자신의 일에만 몰두해있는 민영에게 어색함을 느낀다. 민영의 마음은 서울의 더 나은 대학으로 편입하는데 보탬이 될 성적(학점)에만 집중되어 있다. 성적에 집착하는 대학생이 된 민영과의 재회는 정희에게 명령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의 성공에 대해 조용한 자각을 준다. 뚜렷한 근거 없이 학점 교정을 탄원하는 시시한 대학생이 되어 친구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민영에게 성적표를 남기고 정희는 돌아선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스무 살을 지나갔거나 곧 지나갈 관객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우정이 서서히 해체되는 과정을 세심히 관찰한다. 느린 서사의 진행은 다소 우울한 분위기를 강조하지만, 곳곳에 뿌려진 건조한 유머는 안도감을 제공하면서 몽상가이자 예술가로서의 정희의 본성을 포착하는 것을 돕는다. 이재은, 임지선 공동감독은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던 두 친구의 나란했던 자리가 조금씩 이지러지는 순간들을 제시하면서 한동안 마음에 남는 애틋한 순간들을 보여준다. 보드게임, 햇반, 배드민턴 라켓이 담긴 캐리어를 끌고 상경한 정희의 재회에 대한 상상은 슬프게도 현실에 부응하지 못한다. 앉은뱅이 책상과 노트북을 떠나지 않는 민영은 정희가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져버렸다고 비난하지만 그 자신의 소홀했던 학업성취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보상하려 한다. 점차 한국적으로 변해가는 민영의 위선에 비해 정희의 상상의 나래는 실제 우정 장면과 상상의 우정 장면을 하나의 그림으로 엮는다. 홀로 남겨진 정희는 민영의 일기와 개인 영상을 발견하고 민영의 우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검토하게 된다. 이는 여고 시절의 친우(親友)가 멀어져가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도록 이끈다.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자아의 희생을 의미하는가? 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서울집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표면화되는 상황의 장면 연출은 탁월하다. 민영이 단 하루로 시한을 한정하였으나 정희의 목적은 옛 시절처럼 민영과 ‘룸메이트’가 되는 것이다. 여고 시절 기숙사 방과 군에 간 민영의 오빠 자취방은 미묘하게 대조된다. 여고 시절 기숙사에서 나란했던 정희와 민영의 침대는 일치된 이상을 향하고 있던 존재의 조건을 묘사한다. 민영은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정평이 난 도시인 대구가 너무 한국적이어서 지루하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편입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로 결정한 친구 정희에게는 냉담하다. 자취방에서 두 사람의 배치와 자세, 카메라 위치는 엇갈리는 두 친구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기술한다. 문과 거울, 방바닥을 어지럽히는 잡동사니들, 신체적 제스처 따위가 교착된 관계를 보여주면서 두 인물을 분리하는 촉매가 된다. 민영의 과업에 동참하여 교수에게 탄원 메일을 작성하는 것을 돕는 정희에겐 나의 친구가 좀 유치해진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한편, 민영은 정희의 선택을 무시하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더 현실적이 되어야함을 강조한다.
 
  

한국에서 청소년 성장 서사의 상투형은 경쟁적인 입시 제도로부터 비롯되어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지는 학위, 직업, 가족을 형성해야 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이다. 사회적 기준이 제시하는 표준적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인생의 고충은 성장 서사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이는 <성적표의 김민영>의 주제이기도 하나 이 영화는 관습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 저항하는 상상의 힘을 지지하며 성인이 되기까지의 험난한 길을 묘사하는 무미건조하고 유머러스한 스타일을 창안해냄으로써 통상의 성장담과 다른 길을 간다. 눈치조차 성공의 덕목으로 간주될 수 있는 한국에서 정희는 사회적 관습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삶을 사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바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는 민영과의 멀리 떨어진 거리에도 불구하고 공감은 피어날 수 있을까? 두 공동감독은 점차적으로 서로 분리되어가면서 세상을 헤쳐나가는 젊은 여성들의 내면적 삶을 유머와 솔직함, 연민으로 다룬다.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풍으로 상상된 제주 여행 삽화는 진부한 공간을 현실의 기억과 상상의 장면들로 채우는 정희의 기질을 잘 보여준다. 소원과 애정 사이를 오가는 순간들은 섬세한 연출력 덕분에 잘 다루어지고 있으며 스토리를 따라가는 캐릭터의 성장과 변화를 신뢰하게 한다. 정희에게서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관찰할 수 있고, 환상과 오류의 차이를 평가할 수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브랜드화하기보다 현실화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을 만난다. 학력 중심의 소비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인 평판에 기대지 않고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스무 살의 모습을 본다. 정희는 민영의 우월한 태도에 상처를 받지만 우정을 회복하여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 위해 민영이 그녀를 계속 무시하는 동안에도 온건한 태도를 유지한다. 정희를 혼자 남겨둔 채 떠나는 민영의 일기는 낮은 자존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암시하며, 친구에게 자신의 불안을 투사하는 소녀의 감정을 보여준다. 친절한 태도와 타인에 대한 관대함을 바탕으로 정희는 친구의 더 나은 자질을 칭찬하는 동시에 민영의 위선과 결점을 가감 없이 지적하는 성적표를 작성한다. 정희는 ‘한국인의 삶’에 F를 주면서, 좁은 땅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며, 남의 눈치를 보면서 안정된 삶을 쫓는 사람들보다 덜 한국적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녀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사회적으로 억압적인 문화에 대한 온건한 비판을 제시하는 이 사려 깊은 드라마는 일탈적인 공상의 강렬함을 소유한 자유로운 영혼의 정희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성숙한 인간이라고 설득한다.

완전했던 세계의 파괴, 우정의 몰락을 형상화하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이야기를 쌓아가는 공동 감독은 ‘삼(3)’이라는 숫자를 통해 이를 암시한다. 숫자 삼(3)의 논리는 무엇인가? 수비학(數秘學)에서 지혜와 이해, 창의의 수로 간주되었던 삼(3)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획된 시간의 세(3) 축, 탄생, 삶,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의 삼(3) 주기로 약호화된다. ‘조화’와 ‘일체감’, ‘통일성’을 상징하는 삼(3)은 세(3) 개의 꼭짓점을 연결한 삼(3)각형처럼 삼위일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생에서 호재와 악재는 세(3) 단계를 거쳐 온다고 하며, 가장 이상적인 스토리의 구성은 삼(3)막의 행위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내쳐 <성적표의 김민영>은 삼(3)의 해체, 몰락에 관한 스토리라고 할 수도 있다. 삼(3)행시 짓기 동아리로 하나가 되었던 세(3) 친구의 분리는 삼(3)행시 모임을 중단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삼(3)행시는 단어를 이루는 세(3) 음절을 모체로 하나의 문리(文理)를 조형해내는 행위인 바, 그 결과는 단어의 본래적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문맥을 창조하게 된다. 문학적 깊이마저 지니게 되는 저들의 삼행시는 그저 말을 지어내는 놀이를 넘어 진짜 ‘시’를 닮게 된다. 하나로 뭉쳐 삼(3)행시를 짓던 세(3) 친구는 세(3) 도시로 흩어지며 셋(3)으로 난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생은 따라야 할 목록, 결의안의 지침처럼 간단하다. 문제는 그렇게 살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정희가 관리하는 테니스 코트의 경기로 환원하자면 이재은, 임지선 감독은 완강한 완력으로 라인을 타고 공을 보내기 위해 공격적으로 라켓을 휘두르는 대신 담장 바깥에서 담장 안 가까운 곳으로 보내야 하는 테니스공들처럼 스핀이 많이 걸린 스트로크를 구사한다. 겸손하고 소박한 <성적표의 김민영>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 점진적으로 그 깊이를 체감하게 하는 감정을 드러내면서 조금씩 스며드는 환멸을 묘사한다. 감춰진 감정들이 많은 이 영화는 이별은 감상적일 수 없으며 매우 가혹하지만 필요하다는, 희소성 있는 주제를 다룬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런 곳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깊고 그윽한 숲속 어딘가, 정희가 그린 곳에서 살고 싶었던 마음처럼, 우리들의 친구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곳에 혼자 있으리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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