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한 밤의 주유소, 프레임 오른쪽에 도열한 급유기들과 바닥에 무질서하게 그려진 흰색의 사각형, 후경의 도로 뒤편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프레임을 수직으로 가르며 달려와 카메라 앞에서 멈춘다. 프레임 왼쪽에서 주유원이 프레임 인하여 주유구를 열고 기름을 주입하기 시작한다. 이 깊은 공간의 가장 앞쪽에서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리라는 예감을 주는 긴 쇼트가 지속되는 동안 주유가 끝나고 오토바이의 라이더가 시동을 걸자 카메라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선다. 넓어진 화각의 카메라는 축축하고 어두운 도로, 전반적으로 컴컴하고 듬성듬성 불이 켜진 건물들, 황녹색 신호등 사이를 달려가는 오토바이를 인도하는 것 같다. 하나의 쇼트로 서술되는 이 신에서 영화의 주인공 태훈(서준영)이 막 도착했고 관객들은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게 될 것임을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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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 바람>(2009)은 기대감을 형성하는 설정의 기능을 통해 서사의 심부(深部)로 관객을 끌고 가는 인상적인 프롤로그를 제시한다. 플롯을 주재하는 모티프는 전형적인 ‘소년 소녀를 만나다’ 구조이다. 태훈과 그의 동급생 여자 친구 미정(이민지)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속초여행을 다녀오는데, 이 일탈적 여행이 초래한 여파, 악화하는 관계의 추이가 내러티브의 골간을 이룬다. 서로에 대한 깊은 애착을 실현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한 소년 소녀에 관한 이 로맨스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변주라고도 할 수 있는 익숙한 스토리이다. 이와 같은 유서 깊은 스토리 유형의 장점은 그 익숙함으로 인해 내러티브를 파악하는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그 너머를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마음을 사로잡는 순간들은 모두 그런 장면들이다. 장건재 감독의 성취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부유하며, 때로는 격렬하게 요동하는 존재의 상태를 시청각적인 기술(記述)을 통해 서술해낸 것이다. 이를테면 프롤로그 이후 ‘3개월 전, 고2 겨울방학’으로 시간이 점핑하여 속초여행의 끄트머리로 향하는 플롯은 저들의 존재와 앞날을 암시하는 한 신을 제시한다.
<회오리 바람>의 특이점은 소년, 소녀가 그해 겨울의 체험을 겪어야 했던 이전의 상황이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 자체에 내재해 있는 회귀적인 지향성에 근거하여 그들을 둘러싼 주변이나 세계와의 접점을 공유하지 못한 상태로 표랑하는 열여덟의 특성을 형상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외 상황, 캐릭터, 서사를 전달하는 연출의 스타일 전략, 디테일은 잘 조율되어 있으며 디지털 영화 제작의 가능성이 만개하던 시절 DV 캠으로 촬영한 이미지의 생생함, 시간과 주의를 낭비하지 않는 촬영, 섬세한 연기의 세트피스를 보여준다. 빈번한 롱테이크는 나른하고 우울한 분위기에 기여하고 상당한 현실감을 불러일으키는 세부 묘사는 반항심에 찌든 십대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디지털 비디오로 촬영한 바람의 이미지, 텍스처는 거칠지만 아련한 느낌을 자아내기 때문에 미성숙한 시절에 관한 이 가슴 아픈 이야기의 무드와 잘 어울린다. 중국 음식을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태훈의 오토바이가 행인을 친 뒤 급격히 암울해지는 분위기는 텅 빈 겨울 바다를 무대로 들려오는 태훈과 미정의 화면 바깥 대화와 대비를 이룬다.
지나 버린 시절의 격정 안에 영화가 포괄하고자 했던 것은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에서 확실해진다. 험준한 산길과 사막을 걷는 태훈이 모습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방황이 오래 지속될 것임을 말한다. 시간이 다시 점핑하여 ‘3개월 후, 열아홉’이 된 미정은 진즉에 상실을 받아들인 것 같지만, 체육관 벤치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목엔 태훈이 준 목걸이가 매달려 있다. 얼마 후 부드러운 파도 소리가 들리더니 바닷바람을 맞은 듯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두 사람의 미래가 완전히 암울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시간은 겨울 바닷가 여행이 시작했던 순간으로 돌아간다. 바람의 이미지는 백사장을 덮은 눈밭 위에 발자국을 내며 태훈이 움직일 때 매섭게 부는 바람의 사운드로 이어진다. 미정 역시 태훈과 마찬가지로 잘 억누르고 있었을 뿐이다. 주유소, 터미널, 미정의 집, 바닷가 눈밭에서의 움직임과 정지, 동요는 영화가 묘사하고자 한 ‘바람’의 다양한 층위를 드러낸다. 바람은 마음을 설레게 하고, 광기를 부리고, 차분하고, 들떠 있고, 안정을 주고, 불안하고, 차갑고, 따스하다. 정제되지 않은 시간과 존재를 흔드는 바람의 색깔은 열여덟의 고뇌와 황홀경, 삶의 혹독함을 이기는 기억을 생생하게 회상하는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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