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바람의 색깔 회오리 바람, 2009

by.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2023-11-20조회 2,485

야심한 밤의 주유소, 프레임 오른쪽에 도열한 급유기들과 바닥에 무질서하게 그려진 흰색의 사각형, 후경의 도로 뒤편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프레임을 수직으로 가르며 달려와 카메라 앞에서 멈춘다. 프레임 왼쪽에서 주유원이 프레임 인하여 주유구를 열고 기름을 주입하기 시작한다. 이 깊은 공간의 가장 앞쪽에서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리라는 예감을 주는 긴 쇼트가 지속되는 동안 주유가 끝나고 오토바이의 라이더가 시동을 걸자 카메라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선다. 넓어진 화각의 카메라는 축축하고 어두운 도로, 전반적으로 컴컴하고 듬성듬성 불이 켜진 건물들, 황녹색 신호등 사이를 달려가는 오토바이를 인도하는 것 같다. 하나의 쇼트로 서술되는 이 신에서 영화의 주인공 태훈(서준영)이 막 도착했고 관객들은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게 될 것임을 짐작한다.

<회오리 바람>(2009)은 기대감을 형성하는 설정의 기능을 통해 서사의 심부(深部)로 관객을 끌고 가는 인상적인 프롤로그를 제시한다. 플롯을 주재하는 모티프는 전형적인 ‘소년 소녀를 만나다’ 구조이다. 태훈과 그의 동급생 여자 친구 미정(이민지)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속초여행을 다녀오는데, 이 일탈적 여행이 초래한 여파, 악화하는 관계의 추이가 내러티브의 골간을 이룬다. 서로에 대한 깊은 애착을 실현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한 소년 소녀에 관한 이 로맨스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변주라고도 할 수 있는 익숙한 스토리이다. 이와 같은 유서 깊은 스토리 유형의 장점은 그 익숙함으로 인해 내러티브를 파악하는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그 너머를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마음을 사로잡는 순간들은 모두 그런 장면들이다. 장건재 감독의 성취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부유하며, 때로는 격렬하게 요동하는 존재의 상태를 시청각적인 기술(記述)을 통해 서술해낸 것이다. 이를테면 프롤로그 이후 ‘3개월 전, 고2 겨울방학’으로 시간이 점핑하여 속초여행의 끄트머리로 향하는 플롯은 저들의 존재와 앞날을 암시하는 한 신을 제시한다.
 
  

속초고속버스터미널, 태훈과 미정은 각각 흰색 콘크리트 기둥과 쇠기둥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다. 쓰레기통에 담배를 비벼 끄고 프레임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태훈을 카메라가 따르는 동안 미정은 고개를 푹 숙이고 그를 외면하는 자세로 선다. 짙은 그림자가 잠식한 프레임 뒤편에서, 숨겨져 있던 쇠기둥들을 걸치고 태훈은 한 사내에게 “서울에서 올라왔는데 돌아갈 차비가 없다”며 여비를 구걸한다. 태훈은 서울로 돌아가 계좌로 빌린 돈을 붙여드리겠다고 청하지만 예상할 수 있는 그대로 사내는 돈이 없다며 거절한다. 곤란한 표정의 태훈이 대합실 입구에서 안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고개를 돌려 바라보던 미정은 그가 다음 상대를 골라 프레임 왼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다시 바닥으로 고개를 떨군다. 태훈은 일군의 젊은 여행자들에게 같은 요청을 하지만 용건이 끝나기도 전에 냉랭한 거절의 답을 듣는다. 다시 프레임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대합실에서 나오는 중년의 여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할 때 상황이 반전된다. 태훈의 기색을 살피던 여인은 “얼굴이 아주 심각하구만”이라고 관심을 보이더니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었다는 듯, “붙여준단 소리 하는 학생은 또 처음 보네, 인상이 좋아서 꿔주는 거야”라며 지갑을 연다. 구제의 가능성이 보이자 “도착하는 대로 꼭 붙여드릴게요”라고 다짐하듯 말하는 태훈에게 이 구원자는 “믿어보는 거지 뭐, 진짜 줄래나 안 줄래나”라고 혼잣말을 한다. 태훈의 이동 경로를 따라 프레임 앞으로 슬그머니 이동한 미정은 콘크리트 기둥 뒤에서 태훈과 여인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관객의 관점을 공유한다.

물경 2분 20여 초 간 지속하는 기나긴 이동 쇼트는 불안한 구도와 기우뚱한 자세로 선 소년 소녀의 현재와 앞날에 대한 적확한 묘사이다. 호의를 보인 구원자의 바람과 달리 태훈이 빌린 돈을 돌려주었을 가능성은 없다. 태훈에게는 서울로 돌아가기에 충분한 여비가 있었으나 다만 초코바와 우동을 사 먹을 돈이 필요했을 뿐이다. 이 가벼운 배신의 삽화는 다소간 약삭빠른 태훈의 성격을 암시하는데, 이와 같은 캐릭터의 일관성은 PC방에서 마주친 건달들을 속이려다 숨겨둔 돈과 신발을 모두 빼앗기고 린치까지 당하는 장면(이 신은 마치 선의의 구원자를 배신한 이전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보인다)에서 섬세하게 유지된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곳저곳을 이동하는 태훈의 움직임과 그를 완전히 외면하지도 가담하지도 못하는 미정의 제스처를 한 호흡으로 담아낸 롱테이크 쇼트는 이후에 진행될 서사의 궤적을 지시한다. 저들은 이 즉흥적인 바다 여행을 빌미로 강제로 이별하게 될 운명이다. 소년은 변덕이 있고, 즉흥적이며, 괴팍스러운 구석이 있는데 비해 소녀는 주변을 의식하는 소심한 성격이다. 소년은 둘의 관계가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착을 보이지만 소녀는 이미 결단을 내리고 그를 외면한다. 태훈은 새로운 관계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불통으로 미정의 침실 창문을 두드리거나 은밀하게 뒤를 밟아 알아둔 학원을 찾아가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진다. 태훈의 불쾌한 행동과 그를 더 보고 싶지 않다는 미정의 절교 선언은 겨울 바다 여행의 끄트머리에서 이미 예견된 바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두 사람의 선택은 미세하게 갈라지게 된다.

표면적인 이야기 너머를 향하면서 영화의 의미맥락을 풍부하게 하는 영화적 묘사의 힘은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를 보여주는 후속 신에서도 드러난다. 자식들의 일탈을 눈치챈 미정의 부모가 태훈과 그의 가족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는 장면이다. 얼마간 거들먹거리는 성격을 가진 미정의 아버지(최효상)는 위스키를 마시면서 두 아이에게 각자의 행적을 적게 하고 서로 불일치하는 부분이 있는가를 확인하려 한다. 범죄 조서를 꾸미듯 하는 조사가 이루어지고 저들이 이치에 맞지 않는 스토리를 적어 냈을 때 미정의 아버지가 갑자기 이성을 잃고 발목에서 칼을 꺼내 나무 탁자 위에 꽂는다. 핸드헬드 쇼트는 극도의 혼란을 전달하고, 점프 컷은 미정의 뺨을 때리고 골프채로 장식장 유리를 부수는 아버지의 광란의 퍼포먼스를 단속적으로 보여준다. 태훈을 향한 아버지의 욕지기는 별안간 텔레비전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괴성으로 전환되는데 이는 텔레비전 영화 정보 프로그램에서 소개되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으로 연결된 것임이 밝혀진다. 상이한 타임 라인을 잇는 사운드의 연결 패턴은 이후에도 반복될 것이다.
 
    

<회오리 바람>의 특이점은 소년, 소녀가 그해 겨울의 체험을 겪어야 했던 이전의 상황이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 자체에 내재해 있는 회귀적인 지향성에 근거하여 그들을 둘러싼 주변이나 세계와의 접점을 공유하지 못한 상태로 표랑하는 열여덟의 특성을 형상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외 상황, 캐릭터, 서사를 전달하는 연출의 스타일 전략, 디테일은 잘 조율되어 있으며 디지털 영화 제작의 가능성이 만개하던 시절 DV 캠으로 촬영한 이미지의 생생함, 시간과 주의를 낭비하지 않는 촬영, 섬세한 연기의 세트피스를 보여준다. 빈번한 롱테이크는 나른하고 우울한 분위기에 기여하고 상당한 현실감을 불러일으키는 세부 묘사는 반항심에 찌든 십대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디지털 비디오로 촬영한 바람의 이미지, 텍스처는 거칠지만 아련한 느낌을 자아내기 때문에 미성숙한 시절에 관한 이 가슴 아픈 이야기의 무드와 잘 어울린다. 중국 음식을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태훈의 오토바이가 행인을 친 뒤 급격히 암울해지는 분위기는 텅 빈 겨울 바다를 무대로 들려오는 태훈과 미정의 화면 바깥 대화와 대비를 이룬다.

지나 버린 시절의 격정 안에 영화가 포괄하고자 했던 것은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에서 확실해진다. 험준한 산길과 사막을 걷는 태훈이 모습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방황이 오래 지속될 것임을 말한다. 시간이 다시 점핑하여 ‘3개월 후, 열아홉’이 된 미정은 진즉에 상실을 받아들인 것 같지만, 체육관 벤치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목엔 태훈이 준 목걸이가 매달려 있다. 얼마 후 부드러운 파도 소리가 들리더니 바닷바람을 맞은 듯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두 사람의 미래가 완전히 암울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시간은 겨울 바닷가 여행이 시작했던 순간으로 돌아간다. 바람의 이미지는 백사장을 덮은 눈밭 위에 발자국을 내며 태훈이 움직일 때 매섭게 부는 바람의 사운드로 이어진다. 미정 역시 태훈과 마찬가지로 잘 억누르고 있었을 뿐이다. 주유소, 터미널, 미정의 집, 바닷가 눈밭에서의 움직임과 정지, 동요는 영화가 묘사하고자 한 ‘바람’의 다양한 층위를 드러낸다. 바람은 마음을 설레게 하고, 광기를 부리고, 차분하고, 들떠 있고, 안정을 주고, 불안하고, 차갑고, 따스하다. 정제되지 않은 시간과 존재를 흔드는 바람의 색깔은 열여덟의 고뇌와 황홀경, 삶의 혹독함을 이기는 기억을 생생하게 회상하는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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