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후쿠오카, 2019

by.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2023-08-24조회 4,141

중국 태생의 조선족 감독 장률은 문화적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뤄왔다. <경주>(2014)와 <춘몽>(2016)의 경쾌한 비트에 이어 장률은 <후쿠오카>에서 다시 한번 이국의 풍경 속으로 들어간 타자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온다. <후쿠오카>의 주인공들은 다른 장률 영화의 인물들처럼 경계에 선 사람들이다.

서울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제문(윤제문)은 헌책방의 거의 유일한 단골인 당돌한 괴짜 소녀 소담(박소담)의 제안으로 함께 후쿠오카로 떠난다. 사실 후쿠오카로 간 제문의 목적은 대학 시절 막역한 선후배 사이였지만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했던 탓에 28년간 연락을 끊었던 선배 해효(권해효)를 만나기 위해서다. 후쿠오카에서 작은 술집을 경영하고 있는 해효와의 만남, 그리고 후쿠오카 시내를 배회하며 먹고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세 사람을 둘러싼 이야기가 표면적인 줄거리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이러한 줄거리만으로 이해되지 않는 트릭들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다. 이러한 트릭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서사는 여러 갈래로 재해석이 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사랑’이라는 주제 아래 놓여있으며,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의 시간’이라는 규칙을 따르는 이야기의 전개 구조와 캐릭터들은 때로 휘어지고 뒤틀리며, 합쳐졌다, 갈라진다.
 

<후쿠오카>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꿈의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영화이다. 도입부에서 제문은 헌책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홀연히 나타난 소담은 그에게 뜬금없이 후쿠오카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그녀의 제안에 어처구니없어하던 제문은 환청처럼 선배 해효의 타박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지인에게 전화해 해효가 후쿠오카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함께 지하의 어두컴컴한 책방을 나오고, 서사의 무대는 곧바로 후쿠오카의 거리로 건너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생뚱맞은 캐릭터 소담, 현실에서는 들릴 리 없는 해효의 목소리가 제문을 후쿠오카로 이끌었고, 이후 영화의 전개 속에서 세 사람 모두에게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난다. 판타지와 현실, 혹은 꿈과 현실을 오가는 이야기의 속성은 후쿠오카에 두 사람이 도착하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후쿠오카는 어떤 곳인가? 영화감독 장률은 후쿠오카아시아영화제의 의뢰를 받아 이 도시를 무대로 한 영화를 연출하게 되었지만 후쿠오카는 이곳의 지역성과는 큰 상관성이 없다. 이성의 논리로 접수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는 공간으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후쿠오카에서 세 사람, 특히 소담은 어찌된 영문인지 언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그녀의 존재는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듯 보인다. 소담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나고, 후쿠오카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 중국인과 각자의 언어를 쓰면서도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한 상황을 제문과 해효는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소담은 적대감을 씻어내지 못하고 서먹서먹한 제문과 해효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면서, 두 사람을 어떤 방향으로 계속해서 이끄는 현실 세계 바깥의 초월적 존재처럼 보인다(제문은 소담을 한마디로 또라이라고 정의 내리면서도 신기가 있다고 말한다). 영화 속 한 에피소드에서 해효의 가게 단골손님인, 10년간 단한번도 말을 하지 않았던 남자가 곧 한국어로 말을 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 같은 말이 현실로 이루어지면서, 소담의 말은 두 사람에게 미래의 일을 예언하고 진실을 알려주는 힘을 지니게 된다. 소담은 제문과 해효에게 할 것과 갈 곳을 제안하고, 두 사람에게 그녀의 제안이 어떤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임을 암시하며 그들의 여정을 앞서 인도한다. 그리고 소담은 그 여정 속에서 제문과 해효가 처음부터 매우 닮은 한 쌍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소담은 두 사람이 끊임없이 서로에게 다가서게 만들며, 종래는 한 쌍의 데칼코마니처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두 사람은 이토록 서로 닮아있는 것일까. 처음에는 한 여인을 사이에 둔 연적으로, 사랑의 아픔 탓에 무려 28년간 서로 왕래 없이 지내는 선후배로 묘사되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두 사람은 영원한 진공상태에 놓인 사랑의 시간에 갇힌 동일한 영혼처럼 보인다. 무려 28년이 지났음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동시에 사귀었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린 순이라는 여인에게 몰입해있다. 두 사람이 각각 머물고 있는 헌책방과 후쿠오카는 모두 한때 순이가 머물던 공간이었고, 두 사람은 30년 가까운 물리적 시간에 아랑곳없이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윤동주의 시 두 편 ‘자화상’과 ‘사랑의 전당’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자화상’에서 제 3자로 묘사한 그 사나이가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제문과 해효는 마치 거울처럼 서로의 모습을 비추고 있으며, 엄혹한 세상 속에서 윤동주 시인이 떠올렸던, 찰나이자 영겁처럼 느껴지는 사랑의 시간 속에 머물러 있다. 사랑의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은 현실의 시공간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어린아이 같은 상태로 후쿠오카를 배회한다. 두 사람, 어쩌면 한 사람의 의식 속에 존재할 사랑의 전당은 앞과 뒤가 이어진 띠처럼 모든 것이 되돌아오고, 사라졌던 것이 홀연히 다시 나타나는 그런 꿈과 같은 곳이다. 현실의 시간과 공간이 의미를 잃고, 모든 것이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되는 곳. 영화의 전개에 따라 후쿠오카는 현실의 지리적 공간이 아닌 모두의 의식 속에 데자뷔처럼 존재하는 공간이 된다.
 

<후쿠오카>는 인물 중심의 긴 테이크에 집중하는 표류하는 내러티브와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과거에 대한 느린 폭로라는 점에서 장률의 전작들과 유사하다. 장률의 모든 영화는 장소가 주는 영감, 인상에 기초하고 있고 장소의 성질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는 그의 접근방식을 구체화한 인물이 소담이다. 소담은 자신이 다국어를 구사하지 못한다고 아쉬워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중국의 고전 소설 ‘금병매’를 들먹인다. 후쿠오카의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는 에펠탑을 닮은 소담의 가방을 비롯해 곳곳에서 상징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낯선 장소의 맥락 속에서 인물들의 자연스러운 상호작용과 기승전결을 통해 과거에 대한 실마리가 서서히 드러난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 곁에 있는 존재들, 기원과 역사를 추정하기 힘든 저 존재들의 현신인 소담은 유령이다. 유령적 존재들의 만남을 서사화한 영화의 마지막 신은 다시 헌책방으로 돌아온다. 홀로 낮잠을 자던 제문에게 소담이 말을 걸었던 그 어둑한 책방은 영화의 시작을 열었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후쿠오카에서 소담이 건 전화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책방에는 제문과 해효가 각기 따로 떨어져 구석 자리에 앉아있다. 이제 그 책방에서 소담은 사라지고, 남겨진 사람은 제문과 해효다. 두 사람이자 한 사람인 이 어리석은 사랑의 포로는 인간의 뇌를 닮은 듯 구불구불하고 미로 같은 책방, 마치 달처럼 보이는 둥근 조명 불빛 속에 어슴프레 남겨져 있다.

<후쿠오카>는 장률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종종 드러났던 꿈의 시공간을 본격적으로 유영하는 작품이며, 어쩔 수 없이 과거 지향적인, 관념 속에 존재하는 ‘사랑’이라는 주제가 왜 수많은 예술 작품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지 탐색한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돌아갈 수 없지만 결코 벗어날 수도 없는 ‘사랑’ 이야기는 인간사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자 예술 작품의 영혼이라는 사실을 <후쿠오카>는 순수하게 돌아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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