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88/18, 2018

by.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2023-01-04조회 4,915

1984년 9월 23일 저녁, TV에 등장한 한 벽안(碧眼)의 남자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스라엘 출신의 마술사 유리 겔러는 KBS 1TV에서 방송한 ‘세기의 경이 초능력 유리 겔러 쇼’에 출연하여 숟가락을 구부리고, 시계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초능력을 부려 충격을 주었다. 방송을 본 원근각지의 시청자들 중에서는 숟가락 구부리기 기적에 동참한 사람들의 체험담이 답지했는데, 이 불가사의한 순간에 유리 겔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중요한 걸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숟가락을 구부린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보일 수도 있죠. 그러나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대관절 웬 헛소리인가? 숟가락 구부리기가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니. 유리 겔러의 초능력 쇼는 88 서울올림픽 30주년을 기념하여 KBS에서 제작한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88/18>에 삽입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간절히 염원하는 것은 이루어지고 만다, 는 의지를 칭송한 초능력자 혹은 사기꾼이 남긴 선문답은 이 혁신적인 다큐멘터리의 핵심을 향하는 메타포처럼 들린다.
 
  

방송 다큐멘터리의 영역을 개척했을 뿐 아니라 다큐멘터리 문법의 전형을 다시 생각하게 한 <88/18>는 2019년 ‘모던 코리아’ 연작으로 계승되어 올해 공개된 시즌3에 이르고 있다. 독립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이태웅이 기획, 연출한 <88/18>은 서울에서 하계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1988년과 2018년 사이에 놓인 30년의 시간차를 왕래하며 1980년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는지를 정의하려 한다. 과거와 미래, 파괴와 재건, 거짓과 환멸은 그 시대를 규정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일까? 서울올림픽을 앞둔 한국인들에게 혼연일치된 마음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초능력자, 진짜로 우리에겐 초능력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가 말한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과 세계평화 사이의 상관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관계를 조직하는 것’은 기록과 보존, 배열, 편찬, 재배치, 해석, 재맥락화 등 동시대 다큐멘터리의 주요 의제들을 관통하는 이 문제적 다큐멘터리의 에센스이다.

기록 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한 <88/18>는 공영 방송국 기록 보관실에 안장된 거대한 영상 아카이빙 자료들을 모아 현재 시점에서 연출된 인터뷰와 엮는다. 파운드 푸티지 또는 편찬 다큐멘터리의 관례들에 비추어 <88/18>의 참신함은 영상 아카이브 자료가 만들어진 시점의 문맥을 폐기처분하는 담대한 결정에서 나온다. 최초의 문맥을 폐기한다는 것은 새로운 문맥을 형성하겠다는 의지와 상통하는 바, 아카이브에 담긴 흔적을 모으고 이어 붙여서 재구성한 장면들은 본래 연결되지 않았던 푸티지들의 논리를 형성하여 원본에 속하지 않은 의미와 맥락을 창조한다. 환언하면, 이 다큐멘터리는 1980년대 영상 기록을 추출하여 2018년의 시점에 재배열한 뒤 시청자들에게 30년의 시간을 성찰하도록 종용하는 것이다. 가공과 재해석이라는 행위는 특정 시공간의 좌표에 놓인 기록에 부과된 고정적이고, 단일한 의미에 저항하면서 창조적 글쓰기를 실천한다. 재배열은 재해석을 요구하며 제3의 의미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대중들의 집단기억 또는 악몽을 초월하여 새로운 사유의 경로를 개척하는 활동이다. 아카이브를 매개로 한 과거와의 네트워킹이 역사, 자료, 사실에 기초한다는 가설을 이 다큐멘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가공과 변형, 재구성을 지향하면서 자료의 역사는 창조적인 의미에 자리를 기꺼이 내어줄 태세가 되어 있다. 냉전과 근대화, 도시 개발, 기술혁명, 계급 분화 등 시대의 풍경들이 경쾌하게 흘러가며 시청자들은 말과 이미지 사이의 거리, 틈새를 메워야 한다. 올림픽을 다루고 있지만 경기 중계화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올림픽이라는 이벤트의 내외, 전후를 규정하는 다양한 맥락들이 어지럽게 교차한다. 흡사 북한 방송을 보는 것 같은 어조로 말하는 사람들은 시간의 덧없음을, 그 위에 얹힌 그래픽 디자이너 김기조의 형형색색 타이포그라피는 충돌과 부조화의 파토스를 자아낸다.

<88/18>의 또 다른 특성은 전지적 나레이션의 부재이다. 나레이션을 통한 설명이나 정리를 회피하고 하나의 의미에 이미지를 정박시키는 틀에 박힌 배열을 경계하면서 다원적인 출처들을 드러내는 것이 플롯의 목적이다. 나레이션이 없는 대신 시청자가 최소한의 이야기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은 하나의 주제와 방사형으로 얽힌 이들의 인터뷰이다. 아카이브와 인터뷰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되지 않으며 독립적인 존재감을 가지며 투트랙으로 나란히 병치된다. 아카이브 이미지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말도 발화 시점의 의도를 배반하면서 다른 관점의 논평을 제공한다. 전체 서사를 주재하는 인물로 5공의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이었던 허화평, 건전가요 ‘아! 대한민국’을 부른 가수 정수라,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를 디자인한 디자이너 김현, 예술의 전당의 건축 설계를 맡은 건축가 김원,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정화의 명목으로 철거된 빈민촌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상계동 올림픽>(1988)을 만든 영화감독 김동원, 상계동 철거민 김진홍, 컴퓨터 엔지니어 이철수 등이 각자의 위치에서 증언자의 역할을 한다.
 
   

<88/18>은 잠자는 이미지를 깨어나게 하고 자료에 생명을 부여한다. 프로듀서 이태웅은 시청각 이미지를 통해 지적인 의미를 생산하는 아이디어를 탐구하고자 한다. 상호 독립적인 두 쇼트 사이에서 파생하는 아이디어를 추적하면서 관객의 마음에서 실제로 펼쳐지는 연상의 순서를 뒤집는다. 도입부에 1988년과 2018년을 평행하게 놓아 30년의 간극을 묘사하는 한 시퀀스를 사례로 들 수 있다. 1988년 ‘제5 공화국 언론통폐합 청문회’에서 국회의원 이철은 증인석에 앉은 허화평을 “5공의 핵심적인 인물”로 지목한다. 1988년의 허화평은 이철이 들려준 세평(世評)을 수긍한다. 이어지는 쇼트에서, 2018년의 카메라는 의자에 앉은 초로의 노인이 된 허화평의 깍지를 낀 채 모은 두 손을 시발로 하여 헤드를 살짝 들어 그의 몸통을 찍는다. 얼굴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화면 바깥에서는 또 다른 국회의원으로 추정되는 성명불상의 목소리가 “보안사의 실세”를 이야기한다. 다시 쇼트는 전환되어 1988년의 청문회에서 허화평이 보안사의 실세들이 누군지 설명을 요구한다. “삼 허씨(허화평, 허문도, 허삼수), 이학봉 씨, 이런 것이 실셉니다, 알았습니까? 알았지요”라고 추궁하는 화면 바깥 보이스오버에 대항하여 허화평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소립니다”라며 부인하는 취지의 답변을 한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1988년의 허화평과 2018년 허화평의 얼굴이 교차하면서, 2018년의 허화평은 “내 자신이 5공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을 해본 일은 없고, 다만 확실한 것은 5공을 이야기할 때 허화평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노라”고 말한다. 1988년의 허화평과 2018년 허화평의 나란한 배열은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이기도 한 ‘88/18’의 꼴을 제시하고 있다. “5공의 핵심적인 인물”과 “보안사의 실세”의 차이, 저 두 가지 수사와 “5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허화평”의 간극은 무엇인가?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과 “세계평화”사이의 거리만큼일까? 아카이브 자료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저 말들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다. 인과적 논리에 따라 조합되지 않는 요소들을 재구성하여 상상적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 것, 기록을 생산하는 시점의 맥락에서 벗어나 그것의 처리방식이 의미를 생성하는 전기(轉機)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인간의 마음을 조형하는 이 접근법은 의미를 생성하는, 관습적이고 자의적인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생성의 과정을 활력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생각의 대상을 제시하는 것과 생각의 과정을 탑재하는 것의 차이를 보여주는 아카이브 다큐멘터리의 수사학은 의미에 대한 세뇌를 넘어 미묘하고, 보는 사람이 알아채기조차 어려운 지적인 체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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