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생충>(2019)은 작가의 기질과 세계관, 스타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대다수의 표현 요소들, 카메라와 조명, 세트, 미술, 음악 등이 탁월하게 조정된 영화이다. 특별히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것은 데뷔작 <
플란다스의 개>(2000)에서부터 꾸준하게 발전되어 온 봉준호의 내러티브 기술 테크닉이다. 봉준호의 서사는 언제나 실종, 살인의 모티프를 타고 움직이는데, 제한된 러닝타임 안에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서사의 국면들을 지속적으로 전환하기 위해 자신만의 시각 양식을 개발하였다. 이 양식을 ‘가속기술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가속기술법이라 함은, 내러티브 정보의 효율적 제공과 장면 전환의 가속화를 위해 가장 적은 수의 쇼트를 사용하여 빠른 속도와 리듬으로 한 장면이 이동해야 할 목표 지점에 매끄럽게 도달하도록 하는 시각화 전략이다.
<기생충>에서 봉준호의 가속기술법은 음악가 정재일이 작곡한 테마 음악 ‘믿음의 벨트’가 깔리는 기나긴 장면들의 연쇄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박 사장의 부인 연교(조여정)는 기정(박소담)에게 집안의 운전기사를 추천받는다. “믿는 사람 소개로 연결연결, 이게 베스트인 것 같아요. 일종의 뭐랄까... 믿음의 벨트?”라는 연교의 말을 신호탄으로 컨베이어 벨트 위를 이동하는 사물들처럼 유기적으로 배열된 쇼트들의 연속 진행으로 구성된 시퀀스가 이어진다. 물경 8분 동안 진행되는 이 시퀀스는 봉준호 식(式) 가속기술법의 강력한 효과를 입증한다. 음악과 나레이션이 병합된 사운드는 다양한 행위들의 계열이 이어지는 시퀀스를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바로크풍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작곡된 스코어 ‘믿음의 벨트’는 극중 기택(송강호)의 가족이 박 사장(이선균)의 집사 문광(이정은)을 내쫓기 위해 치밀한 협동 작전을 실행하는 시퀀스를 시청각적 스토리텔링의 백미로 만든다. 이 큰 사기를 계획하는 가족들에 관한 플래시백은 시퀀스 전체에 걸쳐 산재되어 있으며 한 번에 모두 완료되지 않는다. 마치 강도 계획의 모의를 촬영하는 영화 스태프들처럼 기택의 가족은 그들이 짠 플롯을 시나리오화하고 재연한다. 이 시퀀스에서 내러티브, 시각 이미지들과 대위법적으로 얽혀가는 음악의 효과는 기택 일가의 작전이 진행되는 경로와 정교하게 조응하면서 하나의 사건 단위를 도입하고 완결한다. 하나의 질감을 드러내는 스코어가 바탕을 제공하고, 이야기와 연기, 상황은 분리된 채로 연결되어 있는 열차 칸들처럼 유기적인 사슬로 묶여 있다. 이전 쇼트들이 이후에 올 것에 반향을 일으키고 하나의 요소는 다른 요소에 작용하여 흡사 오케스트라처럼 진행된다.
이 시퀀스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두 번째 요소는 교차편집을 통한 공간을 초월한 연속성의 창조이다. 분리된 두 시공간의 교차편집을 제공하는 것은 반 지하방에서 이루어지는 기택과 기우의 역할극과 마트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기택과 연교가 나누는 대화이다. 교차편집 국면은 두 시공간에서 티키타카를 이루는 대화로 연결된다. 기택의 “제가 들으려고 한 게 아닌데,...”라는 눙치는 대사와 연교의 “요즘도 결핵환자가 있어요?”, 다시 기택의 “집에 다솜이 같은 어린애도 있는데...”와 같은 대화가 반 지하방과 자동차 안에서 교차를 이루며 반복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틀에서 시퀀스의 통일성을 창조하는 것은 컬러이다. 컬러의 통일성은 초입부, 기우와 박 사장의 맏딸 다혜(정지소)의 과외 수업에서 간식으로 등장하는 피자 위에 뿌려지는 핫 소스와 이 시퀀스의 대단원에서 기택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휴지를 들어 올릴 때 그 위에 발라진 피로 위장된 핫 소스의 시각적 조응으로 이루어진다. 붉은색 컬러의 조응으로 세팅된 가속의 리듬은 거대한 계획의 단계별 진행을 연속적으로 이어줌으로써 강화된다. 핫 소스에서 비롯된 컬러 모티프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거대한 학살극이 벌어질 때 흩뿌려지는 피로 이어진다.
<기생충>의 ‘믿음의 벨트’ 시퀀스는 가난한 가족에서 부유한 가족으로의 이동, 분리되어 있던 그들의 병합을 단단한 시청각 이미지의 벨트로 묶는다. 이처럼 봉준호 식 가속기술의 전략은 집중과 통일성을 가지고 내러티브 기술(記述)의 효과와 스타일의 합일을 창조하는 탁월한 전략을 보여준다. 상술한 <기생충> 외에도, <
살인의 추억>(2003)에서 시골 형사 박두만(송강호)의 애인 설영(전미선)이 지체장애인 백광호(박노식)의 별명 ‘덮쳐라 백광호’에 대해 설명하고, 두만이 그를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하여 지하 취조실로 데려오는 일련의 쇼트 연결, <
마더>(2006)에서 살인사건 희생자 문아정의 됨됨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네 아낙들, 소년들의 증언을 연속적으로 이어붙인 ‘미인박명 문아정’ 시퀀스 등이 가속기술법의 또 다른 사례에 해당한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