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로 아뢰리다 춘향뎐, 2000

by.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2022-08-11조회 6,900

오페라 영화 <춘향뎐>(2000)은 한국의 예술적 유산인 판소리와 시네마의 형식을 병합하고자 한 거대한 야심의 소산이다. 임권택 영화 세계의 큰 성취 중 하나인 이 영화는 서구 오페라 영화의 표준 관행에서 벗어나 한국의 토착적 오페라인 판소리의 특징에 의해 그 독창성이 발현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판소리는 완전히 드라마틱한 장르가 아니라 사설이 포함된 내러티브와 배우들의 가상 연기로 구성된 드라마 장르의 경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판소리는 임권택의 다른 영화 <서편제>(1993)의 주제였으나 <춘향뎐>에서 그의 관심은 소리에 통달하기 위해 시력을 희생한 여인의 삶을 묘사하는 것과는 근원적으로 다르다. 판소리가 등장인물들의 연기를 통해 영화에 통합되는 <서편제>와 달리 <춘향뎐>에서는 판소리의 형식이 서사를 추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춘향뎐>의 서사는 영화 속 영화의 형식으로 미장 아빔의 구조를 형성한다. 임권택은 판소리 설화의 시각적 삽화에 의해 중단, 중첩, 교차하는 모의 무대 공연을 겹쳐둔다. 즉, 내러티브 공간은 단일화되지 않고 서로 다른 두 층위로 나뉘며 영화의 이미지는 판소리 공연 연출과 춘향 이야기의 시각화라는 이중적 기능을 갖는다. 구체적으로 그 양상을 살펴보자. 소리꾼 조상현의 노래와 사설은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의 기능을 하고 용의주도하게 계산된 배치에 따라 내레이션과 영화 속 배우들의 대사가 교차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무대 공연은 내러티브 전개의 중요한 길목에서 다섯 번 등장한다. 몽룡(조승우)과 춘향(이효정)이 만난 직후, 몽룡이 춘향을 떠난 이별 직후, 몽룡의 장원급제 직후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안과 바깥을 나누는 액자구조로 출발하여 액자의 프레임이 점점 그 경계를 지워버리는 구성은 이미지와 사운드라는 영화의 언어를 판소리의 언어와 병합하려는 예술적 작의의 산물이다. 다섯 개의 공연 장면 사이에 끼워 넣어진 삽화는 판소리의 서사 전개 방식과 영화적 어휘의 조화를 곳곳에서 연출한다. 특별히 임권택은 소리꾼의 입을 통한 구술 전개와 시각적 재현을 절묘하게 겹쳐놓음으로써 그 속성에 있어서 상이한 두 예술 매체(판소리와 영화)의 공감각적 합일을 이루고 있다. 소리꾼의 노래와 사설이 흘러갈 때의 리듬과 음율, 호흡의 고저/강약, 정서의 기복은 쇼트의 형태, 길이, 편집, 배우의 연기로 적확하게 번안된다.

<춘향뎐>의 정신분열적인 디제시스는 이 영화가 서양 오페라 영화의 전통과 변별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잉마르 베리만의 <마술피리>(1975)나 조셉 로지의 <돈 지오반니>(1976) 같은 오페라 영화들에 무대 공연과 오페라 서사의 영화적 시각화 사이에 위반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는 뚜렷이 대비된다. <춘향뎐>의 정신분열적 디제시스 구성에서 흥미로운 점은 연극 무대 가창자들의 목소리와 영화 속 영화에서 배우들의 목소리가 춘향 이야기 안에 공존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말하는 목소리는 그것이 속한 디제시스에 국한되는 반면 노래하는 목소리는 두 디제시스를 초월한다. 즉, 노래하는 목소리는 노래의 시각적 삽화를 동반하는 보이스오버로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어 판소리 연주자의 노래 내용이 이몽용과 춘향이 만나는 곳의 풍경을 묘사할 때, 이미지 트랙은 오페라 무대에서 그 풍경의 사실적인 영화적 이미지로 이동한다. 이때 노래하는 목소리는 보이스오버로 계속된다. 판소리 연주자들은 노래 하는 것이 아니라 가끔 말하는 목소리를 가진 화자가 된다는 점에서 서양 오페라 영화와 구별된다. 판소리에서 노래하는 부분을 ‘소리’로, 말하는 부분을 ‘아니리’로 구분하는데, 가창자가 등장인물과 화자의 이중 역할을 하는 것은 서양 오페라의 전통에 존재하지 않는 판소리만의 특징이다. 이러한 이중적 역할은 영화적 이미지와 오페라 가창의 상호작용 측면에서 판소리의 영화적 제작을 서양 오페라보다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창출한다. <춘향뎐>에서 이미지와 음악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러한 잠재력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춘향뎐>에서 판소리 가수가 연극 무대에서 공연하는 이미지는 영화의 메타 내러티브에서 따온 것이며, 이러한 다중 내러티브는 음악과 이미지의 관계를 보다 복잡하고 다양하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음악-이미지 관계는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장 단순한 형태는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판소리 가수의 공연이다. 즉, 이미지는 극장에서 노래를 부르든 말을 하든 판소리 공연을 보여준다. 둘째, 앞서 언급했듯이 판소리 가수의 내레이션이 노래를 부르든 말을 하든 그 내레이션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설명하는 보이스오버가 되는 것이다. 목소리는 메타 디제시스 세계에서, 이미지는 판소리 서사의 디제시스에서 유래하여 두 가지 차원의 디제시스가 결합되는 순간이다. 셋째, 이미지와 사운드 모두 판소리 무대의 메타 디제시스를 떠나 영화 속 춘향 이야기의 디제시스로 이동한다. 판소리 사설과 노래과 영화로 만들어진 것처럼 완전히 영화적이 되는 순간이다. 가장 흥미롭게도 네 번째 형태의 음악-이미지 구성에서는 영화에서 말하는 대사와 무대에서 판소리 가수가 부르는 가창이 동시에 제시되는, 일종의 ‘더블 보이싱’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이다.
 
  

변학도가 춘향을 고문하는 신은 이 네 가지 형태의 음악-이미지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공한다. 고문 신은 위에서 설명한 네 가지 유형 중 세 번째 유형인 판소리 내러티브의 영화적 시각화로 시작됩니다. 판소리 공연에서 고문 현장으로 이미지가 이동할 때 노래하는 목소리가 멈추고 판소리의 말하는 목소리로 대체된다. 변학도가 춘향을 고문할 준비를 지시한 후 변학도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무대에서의 가창이 보이스오버 사운드 트랙으로 돌아온다. 판소리 보이스오버는 집장사령이 고문을 위해 이동하는 거동과 움직임, 형장을 들고 와 땅바닥에 흩뿌리고 그중 하나의 형장을 선택하여 들어 올리는 행위를 설명한다. 음성과 이미지의 이러한 구성은 위에서 이야기한 음성-이미지 유형의 두 번째 범주를 보여준다. 다음은 세 번째 범주로 돌아가는 것인데, 이번에는 가창의 보이스오버가 아니라 집장사령의 말과 겹쳐지는 대사가 보이스오버 역할을 하여 고문당하는 춘향의 마음과 몸의 움직임을 사설로 묘사한다. 고문 장면의 극적이고 음악적인 클라이맥스에서 춘향은 일자 포악으로 변학도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단을 말로, 그 위에 겹쳐지는 판소리 가창은 노래로 분리된다. 일종의 아리아라고 볼 수 있는 이 장면에 대한 임권택의 영화적 표현은 ‘더블 보이싱’의 사례를 제공한다. 화면에서 춘향의 목소리와 보이지 않는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창자의 소리는 동일한 가사를 각각 말과 노래로 발음한다. 그리고 춘향의 고문 이미지 위에서 서로 다른 층위의 두 목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춘향의 저항과 변학도의 명령, 집장사령의 타격이 교차하는 매질 현장에서 무대의 메타 디제시스 세계로 이미지 트랙이 이동함에 따라 춘향의 말하는 목소리가 이중 보이스에서 빠져나간다. 그리고 판소리 가수의 목소리가 최종적인 형태로 구현된다. 즉, 위에서 언급한 첫 번째 유형, 극장에서 춘향을 공연하는 판소리 가수의 노래를 화면에서 듣고 본다. 고문 신은 원천 판소리처럼 음악적 정교함과 감정적 강렬함 면에서 가장 흥미롭다. 이 장면을 통해 임권택은 연극 무대에서 노래로 이야기를 표현한다는 넓은 의미의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영화적 연출을 완벽히 실현하였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