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률은 새로운 척도로 국경의 의미를 재창조하여 인간의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장소의 중요성을 형상화해 온 초국적 영화작가이다. 그의 작품 중 상당수가 특정 지명과 관련 있다는 것(<
중경>(2007), <
이리>(2008), <
두만강>(2011), <
경주>(2014), <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 <
후쿠오카>(2020))은 그냥 우연이 아니다. 중국의 독립영화와 한국의 디아스포라 영화를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는 장률의 작품 목록 안에서 첫 번째에 해당하는 다큐멘터리이자 한꺼번에 여러 장소들이 등장하는 희귀한 사례가 <
풍경>(2013)이다. 전주국제영화제의 지원을 받아 단편영화로 기획되었다가 장편으로 확장된 이 영화는 아시아 전역에서 한국으로 와 이주노동자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외국인들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이다. 아시아 지역 출신으로 한국으로 이주하였다는 것 외에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그들은 모두 다른 나라에서 하눆으로 이주하였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으며,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런 이유로 영화에는 중국어, 타갈로그어, 베트남어 등 다양한 언어가 등장한다. 장률 그 자신도 조선족 출신으로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주 예술가’의 처지라는 점에서 저들과 상통한다.
<풍경>은 이 노동자들의 개인사, 처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소재로부터 연상되는 르포르타주적인 접근법 대신 장률이 선택한 것은 저들의 꾸는 꿈의 내용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다. 꿈은 다큐멘터리 서사의 통례들을 초월한 독특한 서사의 영역으로 이 영화를 데려간다. 영화의 도입부는 꿈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야심한 밤 영종대교를 달려 우리가 당도하는 곳은 인천공항이다. 사람들이 떠나고 떠나오는 장소인 공항에서 질문은 시작된다. 한국에서 꾼, 가장 기억에 남는 꿈은 무엇입니까?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을 떠나 동티모르로 돌아가게 된 아우구스티노 씨는 한국에서 밤마다 어머니의 얼굴이 나오는 꿈을 꾸었노라고 고백한다. 장면은 전환되어 꿈을 꿀 때 하얗게 꺼져 가는 의식 마냥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의 숲을 이룬 영종대교 위를 미끄러져 가는 초현실적 광경이 펼쳐진다. 시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의 오프닝은 꿈의 입구를 지나 꿈의 세계로 깊어져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후부터 혼몽(昏懜)의 세계를 거니는 것 같은 로드무비가 시작된다. 무의식의 극장으로 해석되는 꿈은 희망(길몽)과 공포(흉몽)의 상반된 양태를 띄고 우리 앞에 나타나곤 한다. 대부분은 사라지지만 기억에 남는 꿈에는 현실과의 특별한 연결이 존재한다. 기억하는 꿈에 대해 물었을 때 누군가는 사장님, 사모님, 직장 동료와 함께 고향 스리랑카의 아름다운 사원을 여행하는 광경을 떠올리고, 다른 누군가는 아내와 제주도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한국에서 로또에 맞을 날을 상상한다. 반면 20년 동안 시름시름 앓은 아버지에게 회초리로 맞는 꿈을 꾸었다는 베트남 여인, 떨쳐지지 않는 유령의 악몽에 시달리는 태국 남자, 자신을 악독하게 다루었던 한국인 사장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반추하는 가구 기술자도 있다. 간질 치료를 위해 한국에 온 조선족 소녀는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이라고 포교를 일삼는 사진사 앞에서 여자 경찰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풍경>은 삶과 꿈의 아름다운 공생을 상상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동시에 그 공생의 사회적, 정치적 조건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장률은 꿈과 현실이 조화롭게 합치되는 삶이 이 땅에서 불가능한 소망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영화에는 안과 바깥, 이산과 귀향, 방랑과 정주(定住) 같은 극단적 풍경이 기록되어 있다. 이주민들이 꾸는 미몽과 현실, 실재와 상상 사이의 부조화, 균열의 찢김은 한국 사회의 패배이고 무능의 자인이다. 한 맥락에서 영화의 오프닝과 클로징은 공명한다. 서두에 이야기했듯이 오프닝은 떠나려는 자의 이미지로 열리고, 클로징은 무언가를 맹렬하게 좇다가 하늘을 응시하는 익명의 시선으로 닫힌다. 헐떡거리는 카메라의 격렬한 움직임 위에 비행기의 굉음이 입혀진다. 그러니까 떠나는 장소(공항)에서 시작하여 떠나는 행위(비행기 소리)로 끝이 나는 셈이다. 아마도 향수병에 시달리던 동티모르인 아우구스티노 씨는 한국을 떠났을 것이다. 꿈에 그리던 어머님을 만나게 될 아우구스티노 씨에게 그것은 떠남이 아닌 귀향이다. 그러나 떠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몸이 놓인 장소와 정신이 열망하는 장소의 괴리는 자본주의적인 체제가 만들어낸 소외의 풍경이기도 하다. <풍경>에는 다시 꿰어맞추기에는 희미해진 삶의 흔적과 이방인들의 꿈, 그 소망을 배신하는 풍경이 한 프레임 안에 응축되어 있다. 이 충돌은 어느 곳에도 머무를 수 없는 영혼의 쓸쓸한 표류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스케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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