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극장전, 2005

by.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2022-03-08조회 9,113

<극장전>(2005)은 타임라인의 재구성을 혼란에 빠트리는 홍상수의 평판작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선택적 경로의 내러티브를 보여준다. 서사는 두 개의 분리된 라인을 따르는데 플로팅은 그들을 교차커팅하지 않고 나란히 배열한다. 두 개의 내러티브 가닥은 서로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두 부분의 왜곡된 대칭은 추상적 사고를 독려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형식적으로 격정적이고 유머러스한 톤을 가진 이 영화는 젊은 청년의 이야기와 그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하루를 보내는 영화감독의 스토리를 병치시키는데 둘은 영화 속 영화, 내지는 영화에 대한 구조로 엮인다.

전상원(이기우)의 스토리 A와 김동수(김상경)를 주인공으로 한 스토리 B는 명확하게 규정된 대조 또는 편집된 병치 안에서가 아니라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서로를 가리킨다. 서로를 희롱하는 앞과 뒤를 쫓는 두 개의 단락의 잇는 것은 여주인공 최영실(엄지원)이다. 서사적으로 A와 B는 각자 생명이 위중한 영화감독 이형수가 만든 단편영화 스토리와 영화를 보고 나온 그의 후배 동수의 허허로운 여정으로 설정된다. 느슨한 구조는 캐릭터와 플롯에 새로운 차원을 덧붙일 뿐 아니라 두 단락의 절정부에 놓은 죽음의 그림자처럼 장난기가 묻은 거울구조가 작동한다. A에서 B로 이행하면서 인물들은 말과 제스처, 대사 또는 감정의 경련을 반복하거나 부인하면서 행위의 동기와 결정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조금씩 말해준다. ‘극장전’이라는 제목은 극장(영화)에 관한 이야기라는 표층적 의미의 단순함 아래 이 영화가 홍상수의 가장 급진적이고 복합적인, 전환기적 문제작 중 하나라는 사실을 숨긴다. 그의 초기작들과 구별되는 특성으로 거론되었던 줌과 보이스오버가 최초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대다수의 장면 안에서 이 둘은 병합되어 등장한다. 이러한 계시적 형식을 초월하여 각 장면들은 활성화된 카메라 워킹을 구사한다. 한편으로 미장센은 바깥 이야기의 시선이라는 상대적인 외부성으로부터 뻣뻣하고 신속한 좁은 범위의 팬을 통해 신중한 프레임 구성과 분석적인 카메라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는 관계의 체계를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빈번하고 폭력적이며 갑작스러운 줌의 확대/축소를 사용함으로써 보이스오버와 운을 맞춘다.
 
극장전 사진  극장전 사진

스타일의 변절이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장치들을 만나는 것은 후속작들에서는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제까지 홍상수 영화의 엄격한 형식미에 비추어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전반부에 보이스오버의 상대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극장전>의 라스트 신은 홍상수 영화에서 첫 번째로 나타난 논-디제틱(Non-Digetic) 보이스오버로 꼽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모든 여정을 마친 후 거리를 걷는 동수의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은 다음과 같다. ”인제 생각을 해야겠다. 정말 생각이 중요한 거 같애. 끝까지 생각하면 뭐든지 고칠 수 있어. 담배도 끊을 수 있어. 생각을 더 해야 돼.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도록.” 이 장면의 재현 방식은 동수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스토리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말해 인물의 실제 생각이 아니라 인물에 대한 하나의 메모로서 읽힌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동수의 보이스오버는 스토리 A에서 빈번하게 나타난 상원의 그것과 구별된다. “돌아다닐 맘이 꽉 차서 처음으로 돈을 막 쓸 생각이었다”거나 “괜히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담배 한 갑을 샀다”는 말, “이러다 우리 사고내겠다”는 상원의 진술은 스토리 세계 안(단편영화)에 속한다. 이렇듯 영화에서 보이스오버란 작중 인물의 내면의 목소리로 개입하여 상황과 심리, 전개에 대한 기술(記述)로 쓰인다. 하지만 라스트 신에서 동수의 보이스오버는 내러티브 기능에 종사하거나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 허다한 디테일들이 축적된 이후에 그것의 중요성은 뚜렷해진다.

영화의 말미에 영실은 병원 앞에서 바로 전날 밤 차가운 섹스를 나눈 동수를 우연히 만난다. 이 장면에서 영실은 동수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것은 관계를 계속할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탐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망 없는 섹스에 대한 씁쓰레한 기억을 털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인물들을 당혹과 무력, 환멸 속으로 밀어넣음으로써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홍상수는 관객들에 대한 대담한 믿음을 가지고 의미와 구조를 조립하는데 있어서 엄청나게 많은 책임을 그들에게 지운다. 그러나 텍스트의 요구를 만날 수 있는 관객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을 둘러싼 세계, 예술 그 자체를 바라보는 방식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이는 관습적인 영화가 결코 제공할 수 없는 형태의 보상으로 반복의 환영을 조성하는 전략에 의해 뒷받침된다.

위 의제와 관련하여 <극장전>에서 상호 반향하는 거울구조의 기하학적 형상은 음악적 단서에 의해 신호된다. 장엄하게 동수의 이어폰을 울리는 ‘라데츠키 행진곡’, 음주에 곁들인 채 영화의 안과 바깥을 타고 흐르는 노래들은 분리된 두 개의 스토리 주변을 감싼 압력을 형상화한다. 예를 들어보자. 스토리 A에서 영실과 상원이 저녁을 대신하여 호프집에 갔을 때 ‘다시 사랑한다면’이라는 대중가요가 흘러나온다. 공간의 배경을 장악한 반주는 후속하는 노래방 신으로 이어져 영실이 같은 노래를 부르도록 만든다. 스토리 B에서 ‘다시 사랑한다면’은 남산타워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걷는 동수의 핸드폰에서 흘러나와 동수의 흥얼거림으로 연결되고 곧바로 지인들의 회합이 열리는 한식당 ’남문정‘의 노래방 기계 앞에서 영실이 부르는 노래로 이어진다. 일련의 노래의 흐름은 평행구조에 대한 홍상수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예시한다. <극장전>은 인간 지각의 본성, 반향효과 및 기타 영화적 전략을 통해 하나의 시청각적 기표가 동일한 방식으로 교호하는 평행주의(Parallelism)의 전통적인 구성을 문제화한다. 그의 내러티브 전략은 병렬성을 실제로 평행한 것으로 인식하여 관객들이 그 안에서 내포적 의미를 찾도록 하는 관습을 대담하게 파괴한다. 
 
극장전 사진  극장전 사진

전체 구조 안에서 이러한 전개와 종결 방식은 탁월하게 작동한다. 대표적으로 “함께 죽자”는 말의 반복은 서사의 앞부분을 이루는 단편영화의 중심부에서 극중 상원의 대사로 등장한다. 그러나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을 넘어 이 이야기는 영화가 우리들의 정신의 근간이 되는 방식을 보여주려고 한다. 인물들의 불가사의한 열정은 종종 기이하고 기괴한 방식으로 영화와 뒤얽힌다. 이전에 홍상수 영화에서 나타난 적이 없었던 극적 줌인과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라는 단편영화의 형식적 스타일은 그와 평행하게 놓인 실재 부분에서 반복된다. 홍상수는 이러한 형식적 장치들이 영화 속 영화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도록 관객들을 현혹하고, 정적인 침묵의 영역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을 때 이 기교들을 반복함으로써 사실과 허구 사이의 선을 흐린다. 여기에는 개별 영화(들) 사이의 반향도 존재한다. 일례로 롱테이크로 찍힌 떠들썩한 음주 장면들과 음주의 결과로서 이어지는 견실하고 정적인, 그러나 김빠진 섹스에 대한 묘사를 들 수 있다. 음주는 굴욕의 미장센을 이끌면서 개별 신 사이의 대결을 위한 촉매를 제공하고, 영화의 안과 바깥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섹스 신은 미세한 차이를 두고 반복되는 카메라 셋업으로 찍혔다. 죽어가는 감독 이형수(김명수)의 영화와 홍상수의 영화를 구별하기 위해 가상과 실재를 거의 동일한 스타일로 촬영하기로 선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솜씨 좋은 유희는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든다. 함께한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영실은 동수에게 “영화를 정말 잘못 보신 것 같아요”라고 일갈한다. 이 진술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스토리 안에서 실패한 관계의 반복을 완성한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어떻게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런 류의 영화가 지닌 참된 가치가 한 번이 아니라 거듭하여 숙의할 때 드러나는 것처럼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그래서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다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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