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의 방화는 물질에서 비(非) 물질로, 존재에서 비 존재로 상태를 전환시키는 행위이다. 오프닝 신의 담배처럼 벤의 방화는 존재하지만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리는 사물들을 창조한다. 6분여의 기나긴 롱테이크로 구성된 결말부는 오프닝 쇼트와 공명한다. 여기서 종수는 ‘노는 일’을 한다며 자신의 직업에 대한 소개마저도 메타포로 대체하는 벤을 살해하고, 태워버린다. 이 장면에서 성공적으로 재현되는 초현실주의적인 기운은 화염에 그을리는 벤과 포르셰에 대한 단정적인 해석을 유보한다. 사건이 진행되는 공간을 반으로 갈라 벤의 영역과 종수의 영역을 마주 보게 하면서 카메라의 위치를 이동하는 신 안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이음매를 확신시켜줌으로써 이창동은 종수가 벤을 태우는 한계 공간을 만든다. ‘태우기’의 양가적인 의미는 롱테이크를 통해 완성된다. 간단히 요약하면 <버닝>은 담배를 태우던 종수가 벤을 태우면서 끝이 나는 이야기인 셈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시선, 세계관을 초점으로 한 이 이야기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리얼리티와 메타포, 종수와 벤으로 구체화된 이분법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표면과 심층에 항상 놓여 있다. 따라서 트럭 문 뒤에서 종수가 담배를 태우며 나타나는 것은 사회, 경제, 정치적 장막에 의해 가려진 채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중심에 두고자 하는 윤리적인 주제를 암시한다. 플롯의 끝에 종수는 눈에 보이는 허상을 살해하고 태워버림으로써 메타포 뒤에 가려진 현실을 보기로 한다. 과연, 그때부터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버닝>은 스토리텔링의 두 가지 양식, 예술적 형상화 방식의 두 극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종수가 소설을 쓰게 되는 동기와 과정, 결과로 나타난다. 벤을 살해하고 태우는 장면으로 이행하기 전에 이창동은 종수가 해미의 원룸 창가에서 글을 쓰고 있는 신을 배치한다. 카메라는 창문에서 뒤로 물러나 해미의 방과 서울 도심의 풍경을 프레임의 좌우에 나란히 놓는데, 이는 영화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남산 타워에서 바라본 시점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엔딩 시퀀스는 존재의 확실성에 대한 영화의 질문을 완성하고,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망각하도록 만드는 이야기를 상상한다. 따라서 수많은 해석을 낳을 수 있는 영화의 엔딩 시퀀스는 일종의 미장 아빔(액자 속 이야기)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새 여자친구의 얼굴을 치장하는 벤을 보여주는 신은 유일하게 종수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장면이고 벤을 살해하는 마지막 신에서는 오프닝 직후 관객의 눈을 대신해왔던 종수가 벤의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진짜 작가가 되어가는 종수의 글쓰기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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