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2003

by.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2021-10-15조회 9,145

한국영화사에서 김기덕과 비슷한 영화를 만든 사람은 없다. 김기덕은 산업, 미학, 스타일, 제작 시스템 등 모든 측면에서 완전한 외부인이라고 할 만한 예술가이다. 단순한 질문 이상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영화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침묵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심지어 인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장면들도 심심찮게 나온다. 순환하는 인생과 윤회를 테마로 한 반(半) 추상 불교 우화인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이 이런 작풍의 대표작이다. 소외에 길들여진 난폭한 남자들을 즐겨 다룬 김기덕의 평판작들과 이 영화의 톤은 완연히 다르다.

김기덕의 여느 영화들처럼 한국에서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받았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호화롭고 초월적인 이미지로 서구 비평가들에게 격찬을 받았는데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영국의 비평가 토니 레인즈는 “이 영화에 대한 서양 관객들의 물신화는 서구 사회에 만연한 오리엔탈리즘의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인간성과 범죄, 자백과 구속, 구제 등의 현대의식을 대변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스토리는 탄생, 성장, 죽음의 순환을 요체로 한다. 단순함을 심오한 예술적 감성의 증거로 본다면 이 영화는 절묘하게 단순한 작품이다. 모든 사람들이 체험하고, 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계절의 변화는 인간의 노화가 필연적이듯 시간, 변화, 소멸에 대한 체험을 제공한다. 최소한의 대사에도 불구하고 불교 도상학과 이솝 우화적인 상징을 통한 순환 내러티브는 세 가지 보편적 진리, 즉 무상과 고통, 자아 없음이라는 틀을 통해 존재의 타당성을 찾아간다. 명상적인 어조의 영화는 어린 시절을 봄으로, 청소년기를 여름으로, 성숙기를 가을로, 노년을 겨울로 설정하여 인생의 모든 단계를 계절과 연결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더하여 유년기의 무지와 천진함, 청소년기의 치기와 욕망, 청년기의 집착과 분노, 노쇠함과 함께 오는 지혜 등의 단계적 행동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영화는 대화보다 침묵, 침묵과 병존하는 행동에 의존한다. 승려의 계절이 은유적 서사에 반영된 영화에서 김기덕은 침묵을 비명처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슬픔, 침략, 폭력, 소란, 증오, 탐욕을 배음으로 깐 내러티브와 주제는 말보다 이미지로 전해진다. 이를테면 영화 전체를 대변하는 이미지는 묶이거나 붙잡힌 존재이다. 묶인 동물, 묶인 소년, 묶인 남자, 묶여 있는 뗏목 따위. 극적인 모티프들을 상실한 채 많은 상징과 은유, 암시를 활용하면서 연출의 숨은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거의 모든 장면들에서 다의적인 기호를 볼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동물의 상징성은 분명하다. 물고기, 뱀, 개구리, 고양이, 강아지, 나비, 잉어, 수탉, 오리, 거북이와 같은 동물들이 번갈아 출연하는데 흡사 ‘동물의 왕국’ 류의 다큐멘터리나 동물도감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줄 정도이다. 그들 각각은 무엇인가에 대한 상징이다. 예를 들어 뱀은 피부가 벗겨져 변태하는 모양으로 중생의 변화를 나타낸다. 개구리는 정화, 치유, 탈바꿈, 순환 주기를 상징하고, 강아지는 첫 장면에서 소년의 특성처럼 달콤함, 장난, 젊음의 무지, 천진함을, 수탉은 섹슈얼리티, 정욕, 남성성을, 물고기는 다산, 거북이는 장수, 지혜, 평화를 의미한다. 동자승이 물고기와 개구리, 뱀의 몸에 돌을 매달고 낄낄대며 즐거워하자 노승은 동자승의 허리를 돌로 묶어 동물과 상태와 공감할 수 있도록 한다. 노승은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 중 어느 하나라도 죽었으면 너는 평생동안 그 돌을 마음에 지니고 살 것”이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진행함에 따라 그 말의 무게는 실제로 몇 사람의 삶을 익사시키게 된다. 여름의 소년은 숲에 가서 방황하는 동안 뱀이 짝짓기하는 것을 보면서 성적인 자기 인식의 시간에 진입한다. 반복되는 이미지인 뱀은 전통적으로 불교의 삼독(三毒)과 연결되나 이 영화에선 자주 애착을 내포한다. 와병 치료를 위해 사찰을 방문한 소녀를 흠모하게 된 소년은 규율과 경계를 무시하기로 작정한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잇는 담이 존재하지 않는 문의 프레임을 소년은 넘어간다. 연인을 좇는 것을 자제할 수 없었던 소년은 자신의 유일한 보증인 수탉을 데리고 사찰을 떠난다. 외부 세계의 더러움과 녹을 입은 모습으로 돌아온 가을의 청년에게 노승은 고양이 꼬리로 사찰의 나무 테크 위에 반야심경을 쓰고 살생을 저지른 칼을 사용해 그 위에 새기도록 한다. 집착과 증오를 버렸는가? 삶의 주기가 다한 노승은 등신불이 되어 열반에 든다. 겨울의 남자는 스승의 직무를 대행하는 승려(김기덕 자신이 연기한다)가 되어 귀환하다. 이 챕터는 대사가 없고 명상적인 톤이 절정에 이른다. 보라색 천으로 얼굴을 가린 미스터리한 여자는 아기를 승려에게 맡기고 얼음 아래로 가라앉는다.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찬 승려는 맷돌을 허리춤에 메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고통과 후회에 찌든 그는 자비의 화신인 관음도 지니고 있다. 맷돌과 부처를 하늘 가까운 언덕 꼭대기로 운반하는 그는 시지프스와 같은 투쟁을 통해 죄업을 씻는다. 마지막 봄, 백발의 승려는 이제 어린 제자가 된 아이와 함께 완전한 원으로 돌아온다. 순환적 시간관에 기초하여 모든 순간에는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도도 포함된다. 영화에서 우리는 소년이 남자가 되는 것을 본다. 결국 그는 진정한 헌신의 에너지를 끌어 올려 고통을 만든 에너지를 초월적으로 변형시킨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천천히 이 관행이 연민과 지혜를 통해 스스로의 삶에 경의를 표하는 것임을 깨닫도록 만든다.
 
  

종종 세대가 서로를 바라볼 때, 한 세대는 무례함과 방종, 거친 관능, 범죄 충동을 본다. 다른 세대는 불필요한 형식, 부패한 권력에 대한 충성, 활력의 상실을 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을 통해 사랑, 욕망, 질투, 증오 그리고 분노를 거쳐 인생을 배우는 사람의 우화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혼란과 고통에 빠지지만 어쨌든 여행이 시작된 호수의 사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다. 자연, 색채, 변화의 계절을 통과하는 동안 김기덕은 동물들을 통해 생의 순환을 투사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김기덕이 동물들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존재의 깨달음을 형상화해왔던 감독이라는 점이다. 미물에 가하는 고통조차 경계(警戒)해야 함을 주장하는 이 영화 안에는 동물 학대로 볼 수 있는 많은 장면들이 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폭력적인 어휘들에 반기를 든 이들의 비판을 받았던 김기덕은 한 인터뷰를 통해 이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인간 세계를 비유하기 위해 동물 상징을 동원하는 일은 영화에서 빈번하며 동물에 인간의 감정을 투사하거나 동물을 의인화하는 것 또한 흔한 일이다.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은 인간과 동물의 성질, 형태를 동일하게 본다는 입장으로 특정한 용도에 따라 동물들을 대할 때의 태도와 관점을 말하고 있다. 김기덕의 수인동성동형론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의 삶은 평행하며 그 존엄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인간을 모사한 저들은 돌덩이를 달고 물 아래로 가라앉고 돌에 짓이겨져 죽는다. 개구리와 물고기의 입에 돌을 밀어 넣는 이 영화의 일부 묘사는 타자의 고통에 둔감했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실제로 얼마나 완악할 수 있는지를 잔혹한 폭력을 통해 방증하는 방식을 썼기 때문에 논쟁을 야기했다. 동물의 영성(靈性)을 발견하는 것은 이 영화의 작은 주제 중 하나이다. 그러나 핍박받은 동물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인간은 알 수 없다. 수인동성동형론의 오류는 여기서 시작된다. 동물들 역시 우주 만물의 순환하는 본성에 따라 그들 자신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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