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청년 전승철(박정범)은 자신이 돌보는 강아지 백구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승철은 웨이터로 일하는 노래방에서 나와 철창에 묶어 둔 백구에게 육포를 주고 편의점에 주문해 둔 맥주를 찾으러 간다. 4분여 동안 중단없이 지속되는 이 쇼트에서 카메라는 흥취에 겨운 노래방에서 후미진 길섶으로, 형광 조명이 밝게 켜진 편의점 안으로, 삐질삐질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는 축축한 도로 위로 이동한다. 승철의 뒤에서 그의 경로를 좇던 카메라는 승철이 백구의 죽음을 인지한 순간 멈춘다. 백구의 시신 앞에서 생각에 잠겼던 승철이 걸음을 옮기자 카메라도 그의 뒤를 따른다. 그리고 암전. <
무산일기>의 마지막 쇼트는 영화의 주제에 가장 근접한 장면이다. 박정범이 쓰고, 연출하고, 연기한 <무산일기>는 자본주의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난한 탈북자의 이야기로 근성으로 만들어진 독립영화이다. 힘겹게 쟁취한 자유에도 불구하고 승철은 남한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생계를 위해 포스터를 붙이고 지저분한 노래방에서 야근을 하는 그는 우연히 보살피게 된 길 잃은 강아지 백구처럼 위태로운 존재이다.
<무산일기>의 마지막 쇼트에서 전달되는 강력한 스타일 효과는 카메라와 대상의 거리에 기인한다. 여기서 카메라는 함께 존재하기를 멈추고 내부로부터 빠져나온다. 장소를 이동하는 동안 우리는 승철과 함께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 카메라는 그로부터 멀어진다. 카메라는 거의 승철의 뒤를 따라가기 때문에 우리가 자주 보게 되는 것은 그의 등 일부이다. 캐릭터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약간 뒤에서 보게 되는 셈이다. 미세한 거리에 불과하지만 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 결과 우리는 승철의 삶에서 확고히 벗어난 위치에 있다. 이는 등장인물과 함께 존재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가까운 곳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직접적인 공감이나 동일시가 아닌 근접의 과정으로 발생한다. 카메라와 캐릭터 사이의 밀접한 거리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는 사건, 미지(未知)의 갭을 만든다. 왜냐하면 아무리 가까이 간다고 한들 다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보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밀의 영역에 속한다. 인간의 비밀과 신비, 타자성을 존중하고 유지하기 위해 카메라는 따라가기를 그친다. 이와 같은 스타일의 효과는 화면에서 구현된 감정을 복제하거나 공유하지 않고 카메라가 근접성을 성취하는 방식과 연관된다. <무산일기>의 마지막 쇼트에서 카메라가 멈추고 승철이 백구의 시신 앞으로 걸어갈 때 관객은 참여자에서 관찰자로 신속히 이동한다. 이러한 접근은 카메라 워크의 특수성과 영화가 제공하는 감각에 참여하도록 한다. 카메라가 등장인물과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어 사건에 대한 관객의 시각과 작중인물에 대한 동정심이 항상 인물의 체험과 동떨어져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무산일기>에서 박정범은 진실하고 공감적인 형식을 선호하여 인물에 밀착하면서도 허구영화 연출의 핵심 관습들, 이를테면 쇼트-리버스 쇼트, 시점을 매개로 한 2인 쇼트, 설정 쇼트 등을 완전히 거부한다. 많은 장면들이 액션이 진행되고 있는 한 가운데에서 시작하여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디에서 액션이 설정되고 있는지 또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든다. 이러한 공감적 관계는 카메라를 등장인물과 가깝게 배치함으로써 조성된다. 주관적 접근, 즉 등장인물의 주관적 상태에 대한 접근은 신중하게 연출되었는데, 2인 또는 3인의 롱 테이크 쇼트는 인물들 사이에서 앞뒤로 움직이는 핸드헬드와 결합한다. 앞뒤로 이동하는 카메라 움직임은 현장에 입회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며 프레임 안에서 전개되는 사건을 캡처한다. 이러한 형식이 보다 전통적인 대화 설정에서 볼 수 있는 쇼트-리버스 쇼트의 대체제로 작동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정면 또는 얼굴의 3/4 정도만 드러나도록 하는 측면에서 카메라는 참여적인 동시에 관찰적이며, 일정한 거리에서 비슷한 속도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승철이 무언가를 실행하는 순간, 렌즈가 화면을 적절하게 흔들어 인물들 뿐 아니라 보는 사람의 감정까지 들뜨게 하는 시각적 불안의 폭발을 제공한다. 롱테이크로 촬영하여 마치 승철의 입장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몇몇 장면들은 설득력이 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은 인물과 관객이 함께 있는 순수한 관계로 카메라 무빙이 인간의 신체와 융합되는 동안 관객들은 사태가 벌어지는 한가운데에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러한 감상의 공감적 형태는 바디 카메라(body camera)로 이름 붙일 수 있는 스타일을 만들었다. 이 용어는 액션 장면에서 카메라가 작중인물의 신체처럼 작동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무산일기>에서 빈발하는 핸드헬드 촬영은 확실히 신체에 부착된 카메라의 특성을 통해 움직이고 흔들리고 회전하는 신체의 인상을 전달한다. 카메라가 몸처럼 작동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영화 속 인물들과의 육체적 동일화에 이끌리게 된다. 이때의 감상 체험은 독립적인 시각 주체가 아니라 작중인물의 몸에 안착하거나 그의 몸을 통해 춤을 추듯 움직이는 감각을 느끼게 된다.
몰입과 반사가 일거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관객이 캐릭터와 직접적으로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마지막 쇼트로 돌아가 보자. 박정범은 관객들이 백구의 죽음을 목격하게 만드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삶에 개입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둘 승철을 무너뜨리는 상황에 동참하게 만든다. 탈북자 동료를 비롯한 주변인들에게 무참히 배신당한 승철은 백구의 죽음 직전 덥수룩한 머리를 맵시 있게 자르고 양복도 사 입는다. 교회에서 만나 승철이 흠모하게 되는 노래방 주인 숙영(강은진)은 “머리를 깎으니 진짜 딴 사람 같다”며 처음으로 그의 외모를 칭찬한다. 그러나 새 삶을 시작하려는 순간 승철은 학대에 노출된 자신의 거울(백구의 시신)을 보게 된다. 승철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다녔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삶의 덧없음과 잔인함에 대한 상념에 빠진다.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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