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 29일, 서초경찰서 강력 4반 고병천 반장은 삼풍백화점 인근 지하 다방에서 후배를 만나기로 했다. 만남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어디선가 ‘쉭’ 하는 소리가 났고, 소리가 난 곳에서는 백화점 건물이 무너져 그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백화점 건물이 무너졌을 때 회칼이 날아들어 행인의 목에 꽂히는 장면을 묘사하는 고병천은 당시를 전쟁이나 공상과학 영화의 비현실적인 장면에 빗대어 증언하였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 고병천은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범죄조직 지존파를 검거하였다. 헬레어로 ‘야망’이라는 뜻의 ‘마스칸’이라는 조직 이름을 쓴 청년 갱단에게 마스칸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지존파’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도 고병천이었다. 그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과 지존파 사건을 모두 목격하여 그 두 사건을 평행하게 엮어낸 인물인 셈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
논픽션 다이어리>(2013)에 인터뷰이로 출연한 고병천은 두 사건의 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피의자들의 목적은 지존파나 삼풍백화점 운영권자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지존파는 각자 10억을 벌겠다, 백화점 경영자는 1조를 벌겠다고 한 것이다. 한쪽은 형법상의 살인을 통해 생명을 박탈했지만, 한쪽은 업무상과실치상이라는 죄명으로 생명을 박탈했다. 목표도 같고 박탈한 내용도 같지만, 직접적 방법으로 살해를 한 것과 미필적 고의에 의한 방법으로 살해를 한 것으로, 내용상 차이가 없다.” 지존파 청년들이 신속한 재판을 거쳐 이듬해 교수형을 당한 것과 달리 백화점 붕괴를 방조한 사람들은 가벼운 처벌만 받고 책임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그는 부조리함을 느꼈다. 고병천이 느꼈던 부조리와 <논픽션 다이어리>의 관점은 부분적으로 상통한다.
고병천의 증언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제기한 질문을 상기시킨다. “은행을 터는 사람과 은행을 만든 사람, 누가 더 큰 범죄자입니까?” <논픽션 다이어리>는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문민정부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김영삼 정부의 통치정책,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뒤안,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하던 시기의 중대한 사회, 정치적 변화를 의제화한 다큐멘터리이다. 이 영화는 ‘악마의 대리인’으로 불린 6명의 청년들이 저지른 범죄를 동정하지 않지만 더 넓은 사회적, 정치적 맥락 안에서 그들의 위치를 찾으려고 한다. 충신의 후손들은 어떻게 잔학한 학살자가 되었나? 지존파의 범죄는 사회적 불평등을 겨냥한 한국 최초의 연쇄 살인사건으로 간주되었고 경제 번영의 시도에 수반되는 자본주의의 영향과 모순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새로운 소비주의(갱단의 일원은 범행 대상으로 압구정, 오렌지족, 야타족을 언급하였다)와 부자에 대한 증오를 보인 지존파의 범죄는 계급적 동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잘못 조준된 과녁(그들이 살해한 희생자들 중 진짜 부자는 없었다)을 향하였으며, 급속한 경제 성장 과정에서 파생한 어두운 영향을 암시한다.
급성장한 민주주의 거버넌스의 계략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기 위해 <논픽션 다이어리>는 사변적인 심문의 접근법을 취한다. 연출자 정윤석은 사회 변화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한 포괄적인 리서치, 아카이빙 자료의 수집, 자료와 인터뷰의 몽타주 등 내용과 스타일 모두에서 대담한 시도를 보여준다. 미디어가 지존파를 어떻게 악마화했는지에 대한 논평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지존파 사건에 대한 재평가에 기여하기보다는 농촌 살인 집단의 트라우마를 광범위한 국가적 내러티브와 연결하기 위한 장치로 동원된다. 법과 제도에 의한 살인, 개인, 범죄 집단에 의한 살인을 병치하여 심층적인 조사를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정윤석은 내레이션이 없는 개방형 서사를 설계한다. 뉴스릴과 시사토론 프로그램 영상, 형사와 교도관, 법률가, 관료, 종교인 등과의 인터뷰가 내레이션의 흐름을 형성한다. 서사의 주요 국면들마다 주요 쟁점들이 차례로 전환되면서 정점과 최저점, 침묵의 구두점들을 시적인 방식으로 연결된다. 견고한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금기의 영역에 서식하는 프로세스, 법과 제도, 종교, 윤리적 기준들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논픽션 다이어리>의 유력한 스타일 전략은 시청각 몽타주이다. 서로 다른 맥락의 사건과 현상, 스토리, 진술, 논평을 잇기 위해 이미지와 사운드는 여러 방향으로 엮인다. 도입부를 장식하는 포토몽타주와 특정되지 않는 인물의 보이스오버, 화면분할 이미지는 이후에 올 충돌 몽타주의 전조를 보여준다. 중반부 한 장면에서 정윤석은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지하 매몰 현장을 무인 카메라로 찍은 뉴스 영상과 백화점 건물의 잔해들이 쓰레기더미처럼 쌓인 난지도의 흑백 사진을 나란히 배열한다. 그 위로는 철골과 시멘트가 어지럽게 널려진 참사 현장을 중계하는 뉴스 진행자의 음성이 깔린다. 음성과 이미지는 시공간적으로 일치하지 않지만 전자는 후자의 논평처럼 조응한다. 참사의 시간을 전후로 나누는 두 이미지는 생생한 현실의 기록이라는 차원 뿐 아니라 학살과 희생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접근방식에 대한 은유로 삽입되었다. 매몰자들을 구조하기 위한 활동이 종료된 뒤 건물의 잔해는 쓰레기 매립지로 옮겨졌지만 유가족들 다수는 시신을 전달받지 못했고 일부 가족들이 뼈와 유해를 찾기 위해 직접 수색에 나서기도 했다. 학살과 희생자들에 대한 조사, 진상규명, 후속조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과거는 반복되었고, 현재도 반복된다. 이것은 한국전쟁과 광주민주화운동, 쿠테타의 기억과 포개지는 후반부 서사에 대한 예비적 조치이다.
가장 강력한 시청각 몽타주 신은 위에 서술한 고병천의 진술 뒤에 이어진다. 카메라는 어두운 시골길을 걷고 있다. 간이 조명이 비추는 몇 미터 전방 너머는 완전한 암흑에 휩싸여 있다. 길은 구불구불하다. 그 위로 여러 갈래의 목소리들이 병치된다. 강력범을 조속히 처단할 것을 종용하는 김영삼 전(前) 대통령의 주문을 보도하는 뉴스 진행자의 목소리, 범죄 현상의 안팎을 진단하는 익명의 목소리, 부자에 대한 증오와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미안함을 이야기하는 지존파 갱단의 목소리, 끔찍한 범죄자들을 저주하는 시민의 목소리 따위가 사운드 몽타주로 제시된다. 기원이 표시되지 않는 목소리들은 혼란스럽다. 하나의 현상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면서 미래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는 현재, 현재를 불투명하게 만든 과거를 함축한 시청각 몽타주이다. 순간 죽음과 살인을 모티프로 한 사회정치적 탐사는 학살의 아카이빙이라는 역사적 의제로 전환하게 된다. 언제나처럼 무고한 희생은 반복되며 학살자들은 그들의 책임에 대해 침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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