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오!수정, 2000

by.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2021-06-04조회 10,173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2000)에는 의미와 맥락을 추정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많다. 소(小) 제목이 부여된 5개의 장으로 구성된 플롯에서 2장 ‘어쩌면 우연’과 4장 ‘어쩌면 의도’의 3일째(번호 ‘3’이 붙어있다)에 해당하는 삽화에 등장하는 바바리 코트를 입은 여인이 대표적이다. 그저 지나가는 여인에 불과하여 관객들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이 여인은 2장과 4장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타난다.
 
오수정, 가게로 들어가려는 여인

2장에서 재훈(정보석)과 수정(이은주)이 호프집에 있는 시간, 영수는 유니콤 서울 프로덕션 사무실에서 박 기사와 출근 문제를 두고 크게 언쟁을 벌인다. 이어서 재훈과 수정의 술자리에 합류하기 위해 영수가 호프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직후, 이 여인은 영수의 뒤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간다. 4장에서는 수정이 호프집을 나와 머플러를 매고 유니콤 서울 프로덕션 사무실로 이동한 직후 바바리 코트 여인이 나타나 호프집 안으로 들어간다. 카메라는 영수가 호프집으로 들어가고(2장), 수정이 호프집에서 나와 시야에서 사라진 뒤(4장)에도 이 여인이 호프집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우직하게 기다려준다. 시간과 기억의 차이를 매개로 하여 유희하는 <오! 수정>의 플롯에서 이 성명불상의 여인은 시간을 나타내는 기호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영수와 수정의 시간이 교차하는 좌표 위에 이 여여인이 서 있다.

바바리 코트를 입은 여인 보다 더욱 강렬하게 눈길을 사로잡은 사람은 요리사이다. 이 인물은 1장 ‘온종일 기다리다’와 5장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에 등장한다. 1장에서 우이동의 호텔방에 있는 재훈이 침대 위에서 잠이 든 쇼트에 이어 누군가의 시점을 암시하는 듯한 부감 쇼트가 뒤따른다. 호텔의 노상 주차장을 찍은 이 기울어진 구도의 쇼트에서 요리사는 프레임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 상단을 향해 사선으로 난 길을 따라 이동한다. 그의 이동 경로와 속도에 맞춰 카메라는 틸트-업하면서 요리사가 어디로 향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식당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야기가 종결되는 5장에서 요리사는 다시 나타난다. 1장에서와 동일한 구도의 쇼트에서 이번에는 프레임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걸어 내려온다. 즉, 요리사가 이동하는 형상은 두 장안에서 정확히 대칭을 이룬다. 어떤 중요성도 부여되지 않은 것 같은 이 남자는 왜 두 번씩이나 등장하는가. 스토리나 인물, 사건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비 서사적인 존재로, 어떤 극적 기능도 담당하지 못하는 잔여로 그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시간과 기억을 조각내고 나란히 그것을 대조하도록 디자인한 <오! 수정>의 내레이션 전략에 의해 기능을 부여받은 에이전트이다. 요리사가 프레임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향하는 이미지와 걸어간 길을 다시 되밟아 오는 이미지는 1장과 5장에 나란히 놓여 두 개의 시간을 종합하도록 한다.
 
오수정, 주차장에서 걸어가는 요리사

여기서 요리사는 1장의 표제를 장식하고 있는 ‘온종일’이라는 시간의 층위를 함축한 정보-기호가 된다. 1장에서는 재훈이 택시를 타고 우이동 호텔방에 들어가 수정에게 전화를 거는 행위가 묘사되는데, 이 시간은 하루 중 이른 아침에 해당한다. 전날 재훈은 수정과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짝을 이루기’ 위한 충동에 사로잡혀 너무 일찍 호텔에 도착했다. 조급한 마음에 잠을 많이 자지 못한 재훈은 호텔방 침대 위에서 잠이 들었고 그 시간 요리사는 노상 주차장을 걷고 있다.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요리사의 쇼트는 따라서 이른 아침 자신의 일터인 호텔 식당을 향해 출근하는 모습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5장에서는 마침내 수정이 호텔에 당도하여 재훈과 ‘짝을 이루고’, 두 사람이 미래를 기약하는 듯한 삽화가 기술된다. 한 번도 섹스를 한 적이 없다는 수정의 고백에 환희에 젖는 재훈의 이전 반응에 비추어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이라는 5장의 메시지는 남자의 아둔한 믿음을 희화화한다. 섹스를 한 후 침대 시트 위에 묻은 수정의 피를 욕실 안에서 씻어내면서 재훈과 수정이 나누는 미신을 주제로 한 대화에 이어 요리사의 쇼트가 삽입되어 있다. 1장에서의 묘사와 차이는, 요리사가 향했던 식당을 보여주는 이미지가 5장에는 없으며 주차장을 가로질러 내려오는 요리사의 쇼트 뒤에 수정이 호텔방 창문 앞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것으로 처리된 쇼트가 이어진다는 점이다. 1장에서는 시선의 주체가 모호하지만 5장에서는 시선의 주체가 암시된다. 요리사가 근무하는 식당은 1장에서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가 어디서 출발하여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것인지를 추론할 수 있다. 요리사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1장과 5장에서의 두 쇼트를 종합하면 재훈은 ‘출근에서 퇴근까지’ 수정을 기다린 셈이 되고, 비로소 ‘온종일’이라는 지속된 시간의 형상이 완결된다. 재훈이 호텔에서 온종일 수정을 기다렸다는 명시적 증거가 이 요리사인 것이다.

서사 정보를 제시하는 홍상수의 방식에는 특별함이 있다. 홍상수는 구조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긴요한 정보-기호들을 은폐한다. 그의 영화에서는 어떤 기능도 부여받지 못한 행인이나 아낙네, 사물들이 인상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 요리사와 바바리 코트를 입은 여인, 오프닝에 프레임의 앞을 가로질러 가는 약수 물통을 끄는 여인, 한식당 ‘큰기와집’의 주방 아주머니, 재훈과 수정이 자주 가는 레스토랑의 주인, 재훈의 벤츠를 모는 김 기사 등이 이런 존재들이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프레임의 앞과 뒤를 서성이면서 미스터리를 자아낸다. 혁신적인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이들은 발견을 기다리는 보물과 같은 존재들이다. <오! 수정>의 흑백 이미지는 이들을 위한 조력의 형식이다. 흑백은 동일한 세팅 위에서 차이를 감지하는데 요긴한 스타일 상의 전략이다. 요리사와 바바리 코트 여인은 그 차이를 선명하게 식별할 수 있는 이미지 특성에 따라 구분된다.

<오! 수정>은 버려지는 디테일을 중심으로 한 혁신적인 내러티브의 꼴을 보여준다. 그것은 스토리텔링의 유습화된 권력 관계로부터 떠밀려 있던 사소한 것들의 위력, 그들의 네트워크에 의해 성립되는 대안 서사의 한 유형이다. 홍상수는 쇼트의 형태를 결정하는 구도와 앵글, 프레이밍, 거리, 크기 등의 조형적 요소들이 어떻게 서사 정보에 대한 관객의 인지작용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시험하기 위해 구조를 활용한다. 여기서 홍상수는 조각난 쇼트를 조립하여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관객들에게 엄청나게 큰 책임을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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