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세계와 맞닥뜨린다. 소녀가 껍데기를 깨고 나오려 안간힘을 쓴다. 그러다 주저앉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하고, 속아 넘어가기도 하고, 남들은 생각지도 못한 기상천외한 탈출구를 찾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영화는 소녀의 이야기를 하는 데 영 인색하다. 한국영화의 수많은 소년 혹은 젊은 남성이 주먹으로 치고받고, 나아가 깡패나 킬러로 거듭나 점점 더 세고 폼 나는 폭력의 전령이 돼가는 모습을 ‘멋들어지게’ 그리는 작품은 지겹도록 많은데 말이다. 거기서 소녀 혹은 젊은 여성은, 폭력의 괴물이 돼가는 남성의 가슴에 남은 마지막 낭만이거나, 폭력의 세기를 자랑하기 위해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희생되거나, 탐나는 전리품이 된다. 아, 하품이 난다.
<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2001)의 소녀들은 그렇지 않다. 고등학교 단짝이던 인천의 다섯 소녀, 태희(
배두나) 혜주(
이요원) 지영(
옥고운) 쌍둥이 자매 비류(
이은주)와 온조(
이은실)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실질적 주인공은 태희, 혜주, 지영 셋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이들은 더는 전처럼 매일같이 붙어 다니지 못한다. 삶의 궤도가 훌쩍 달라졌기 때문이다. 혜주는 작정하고 인천을 벗어난다. 서울에 있는 증권사에 업무 보조원으로 취직하더니, 아예 서울로 이사를 간다. 그건, 자기 삶을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럴듯하게 개조하려는 계획의 첫발에 불과하다. 혜주와 제일 친했던 지영은 직물 디자인 공부를 하러 유학을 떠나고 싶지만 웬걸, 그의 현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직장을 잃은 데다, 내일 주저앉는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집에서 지지리 궁상맞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사는 현실이 더 무너질 게 있나 싶지만. 태희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찜질방 일을 돕는 틈틈이 인천의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자꾸 멀어지는 것 같은 친구들에게 수시로 연락하면서, 인천을 떠나고 또 그곳에 도착하는 여러 사람의 모습을 살피면서.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다시 고등학교로. 정해진 선로를 따라온 시기를 지나, 진짜 자신만의 삶의 길을 찾아야 하는 시간. 그 순간에 놓인 소녀들의 방황을 이토록 현실적이며 살뜰하게 다룬 한국영화는 별로 보지 못했다.
이 영화를 첫 장편으로, 지금까지 극영화와 건축·생태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정재은 감독의 카메라는 인물과 그를 둘러싼 공간을 함께 비춘다. 어느 곳으로 들어가는 인물을 따라 카메라가 자연스레 공간의 밖에서 안으로 움직이고, 그곳의 구조와 특징을 구석구석 살핀다. 그래서 <고양이를 부탁해>는 알을 깨고 나오려는 소녀들의 고군분투이자, 그들이 놓인 세계의 기록이다. 그것도 아주 현실적 기록. 영화는 인천이라는 공간이 어떤 세계인지 꼼꼼히 들여다본다. 세찬 바람이 부는 월미도의 풍경,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지하철, 특히 화려한 서울의 밤에서 빠져나와 막차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후줄근한 기분에 대하여. 비류와 온조 같은 화교들이 모여 사는 차이나타운, 인천항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또 나가는 외국인 노동자들, 낡은 어선들이 듬성듬성 묶여 있는 작고 허름한 항구, 비좁고 후미진 골목골목, 이제 막 문을 연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널찍한 도로…. 그 지형도가 세세한 만큼, 그곳의 소녀들이 무엇에 숨 막히고, 무엇을 갈망하며, 무엇에 발목 잡히는지가 더 생생히 다가온다. 짧게는 수십 년 전, 지나간 시대의 정리된 역사가 아니라, 영화가 세상에 나온 바로 그 시대를 이렇게 거대하고도 세밀하게 포착한 덕분에 <고양이를 부탁해>는 언제 봐도 보는 영화 속 세계에 바로 빠져들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렇게 이 영화 속 2001년의 인천과 한국 사회는 여전히 우리가 사는 오늘날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걸, 아직도 세상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걸 볼 때마다 느낀다.
이 소녀들이 남긴 고양이를 맡아줄 한국영화,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소녀들이 이 복잡한 현실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지 살뜰히 살피는 작품이 이 영화가 나온 뒤로 과연 몇이나 있었던가. 이제야 희망이 보인다. 여전히 적지만, 최근 한국영화에 소녀 혹은 젊은 여성의 이야기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2014년 <
한공주>(
이수진), 2018년 <
소공녀>(
전고운), <
어른도감>(
김인선), <
죄 많은 소녀>(
김의석)에 이어, 올해 개봉한 <
히치하이크>(
정희재)까지. 더 많은 소녀의 현실을 보고 싶다. 그들이 이 사회에서 진정으로 고민하고 좌절하고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싶다. 그것이 지금 한국영화가 품어야 할 가장 세찬 희망이라는 것, 더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