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온 20대의 이방인
1948년 4월 3일 일어난 ‘제주 4·3사건’은 제주 사람들에겐 오욕의 역사였다. 7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건을 영화 <지슬>(오멸, 2013)에 묘사된 것처럼 군인과 경찰 등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 인식하게 되었다.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의 반란’이라는 원인은 실종되고, 진압 과정에서 생긴 ‘과도한 폭력’의 결과만 부각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가해자는 군인과 경찰이고, 피해자는 한때 ‘폭도’였던 무장대와 민간인이 되어버렸다.
이와 같은 ‘무자비한 공권력’ 가운데 서북청년단이 있었다. 광복 후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남하한 북한 출신 청년들의 조직이었다. 그들은 과격했다. 나의 집안도 아버지와 관련된 일로 고초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서북청년단원들이 당신 남편은 어디 숨었느냐며 어머니를 닦달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이번에는 눈에 띄는 도자기를 챙겨 가버렸다. ‘4·3사건’의 도화선이 된 1947년 3·1 운동 기념식 후 일어난 시위와 발포 사건이 있은 지 두 달 되는 무렵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뒤에 알게 됐지만 김묵(金默)도 이들과 함께 서북청년단의 일원으로 제주도에 내려와 있었다.
당시 제주도의 유일한 언론매체인 「제주신문」도 보도 내용에 불만을 가진 서북청년단원들에 의해 접수되었다. 그 단장(김재능)이 발행인이 되고 김묵 청년이 편집국장직을 맡았다. 재임기간이 1948년 3월부터 12월까지 9개월(「제주신문」 50년사, 295~296쪽) 남짓이었으나 사회 경험이 없는 약관이 맡기엔 감당하기 어려운 직책이었다. 나는 이 신문과 인연이 깊었다. 그로부터 4년이 안 된 1952년 중학교 3학년 신학기에 「비탈길」이라는 나의 시가 처음 이 지면에 실리는 등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연극에서 영화로 전환한 노력파
그러나 내가 정작 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연극 연출가로서였다. 그는 6·25전쟁의 참화가 닿지 않는 이 섬에 남아 <황혼의 비극>(1951)을 비롯한 <탈옥수의 고백>(임선우 원작), <장막의 여인>(이상 1952, 제주극장)과 같은 작품을 제주극장과 가설극장 무대에 올렸다. 이런 그가 몇 년 후 자작 시나리오 <흐르는 별>(1958)로 홀연히 서울 영화계에 나타났다. 이민과 문정숙을 캐스팅해 메가폰을 잡은 이 작품은 북에서 월남하다가 헤어진 남편을 다시 만나게 됐을 때는 이미 장님이 돼 있었다는 비극적인 여인애사의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였다.
그는 잇따라 <나는 고발한다>(1959)를 비롯한 <피묻은 대결>(1960), <현상붙은 사나이>(1961), <싸우는 사자들>(1962), <성난 능금>(1963), <용서받기 싫다>, <대륙의 밀사>(1964), <북에 고한다>(1965), <생사의 탈출>(1973) 등 40여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 가운데 베트남전쟁을 다룬 기록영화 <월남전선 이상 없다>(1965)와 <뚝고 전선>(1968)이 포함돼 있다. <성난 능금>, <용서받기 싫다> 등 10여 편을 제외한 대부분이 분단과 이산의 비애를 담은 반공 활극이거나 중국 대륙을 무대로 한 항일 액션영화였다. 대표작으로 <나는 고발한다>와 <성난 능금>이 꼽힌다. 북한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탈출한 대학교수의 희생과 사생아의 내면적 비애를 담은 작품으로 공교롭게도 두 편 모두 필름이 없다. 김 감독은 임하(본명 조효송)의 <성난 능금>과 김지헌(본명 김최연)의 <용서 받기 싫다>의 예에서 엿볼 수 있듯이,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중시하고 원작이 있는 문예영화와는 거리를 두었다. 연극 연출 경험과 일본의 전문 서적을 통해 익힌 영화 지식을 바탕으로 ‘자기 영화’를 만들려 했다.
그는 휴전 직전 철원지구에 잠입한 아군 유격대의 활약상을 그린 열두 번째 영화 <싸우는 사자들>(1962)의 촬영 때는 재미(在美) 영화배우 필립 안의 방문을 받기도 했다. 필립 안은 영화 <모정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헨리 킴, 1955)과 <전송가 Battle Hymn>(더그라스 서크, 1957) 등에 출연한 할리우드 최초의 아시아계 배우로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남이기도 하다.
처음 만난 영지다방의 기억
내가 김묵 감독을 직접 보게 된 것은 그의 네 번째 영화 <피 묻은 대결>이 촬영에 들어갈 즈음인 1959년 가을이었다. 내로라하는 영화인들이 드나드는 나일구다방 맞은편 2층에 있는 명동의 영지다방에서였다. 이 다방에는 단골인 김묵 감독 외에 그와 호흡을 맞춰 <피 묻은 대결>의 각본을 쓴 이영일 영화평론가와 <영광의 침실>(1959)로 ‘입봉’한 그의 조감독 김응천이 드나들었다. 나는 이 평론가의 소개로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제주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키가 큰 미남이었다. 예의 거칠었던 초등학교 시절의 서북청년들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1928년 평안남도 평양 태생인 김묵 감독은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사하린의 하늘과 땅>(1974)을 끝으로 영화제작 현장에서 떠난 후 바둑으로 소일하며 어렵게 살았다. 말년에는 대종상 집행위원회 사무국장을 지내는 한편 영화인과 영화학도를 위한 지침서 「영화사전」(1990, 한국영화인협회 기획위원회 발행)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나 62세 때인 1990년 3월 16일 오후 3시 40분 중앙대학 부속병원에서 지병인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19일 오전 11시 영화진흥공사에서 영화인장으로 치러졌다. 대종상 영화제 때 심사 관련 서류를 챙겨주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